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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린. ‘사로승구도’ 중 ‘눈 덮인 후지산’. 1748년. 종이에 연한 색. 35.2×70.3㎝. 국립중앙박물관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갔다. 요즘처럼 영상문화가 발달한 시대에 줌으로도 대화가 충분히 가능한데 굳이 방한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이 우호를 다지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보여주기도 중요하다. 중요한 두 정상의 만남이지만 모든 진행과정이 매끄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미리 입국한 미국인이 만취해 내국인을 폭행한 사건이었다.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도대체 기강이 얼마나 해이해졌으면 그런 일탈이 가능했을까.
조선화가 일본의 후지산을 그리다
지금은 각국 정상들이 타국에 직접 가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한·중·일 삼국의 왕들이 직접 만난 사례는 아예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외교사절들이 국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왕의 입장을 대변했다. 조선시대의 외교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다. 사대교린은 큰 나라(중국)는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일본, 여진)와는 화평하게 사귄다는 뜻이다. 조선에서는 사대교린을 위해 중국에는 ‘연행사(燕行使)’를, 일본에는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했다. 연행사와 통신사는 조선의 대표적 외교사절이다. 연행사행이 육로로 말을 타고 가는 반면 통신사행은 해로로 배를 타고 가야 했다. 상당히 위험한 길이다. 연행사행에 발탁된 관리들은 큰 영광으로 알았지만 위험한 통신사행은 모두가 가기를 꺼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통신사행 책임자로 임무를 부여받은 관리가 명을 거절하여 유배 간 사례도 등장한다. 그만큼 통신사행은 힘들고 고단한 길이었다.
일본에 보낸 통신사는 조선시대에 총 12차례 파견되었다. 통신사는 글자 그대로 ‘믿음을 소통하는 사절’이다. 통신사를 보낸 간격은 짧으면 8년, 길면 47년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은 인접한 나라인 만큼 여러 가지 마찰과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는 양국 사이에 긴장이 한껏 고조되었다. 통신사는 양국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평화적인 교류를 형성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재개되었다. 에도(江戶·도쿄의 옛 이름)의 막부(幕府·쇼군의 정부)에서는 관백(關白·천황을 대신해 일본을 지배한 실질적인 국가 최고통치자)의 사망이나 즉위, 태자 탄생 등의 국가적 대사가 생길 때마다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에도막부에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조선통신사를 요청한 이유는 자명했다. 지리적으로 고립된 섬나라에서 조선통신사의 존재는 지도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 수행화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해 화원에게 일본의 지형지물을 사실적으로 그려오도록 명했다. 그 이전까지 화원은 일본에서 건너가 그곳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산수화나 도석화를 그려주었던 것과 비교되는 현상이다.
이성린(李聖麟·1718~1777)의 ‘눈 덮인 후지산’은 1748년 무진년(영조 24년)에 10차 통신사행의 수행화원으로 참가했을 때 그린 작품이다. 무진년 통신사행은 관백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의 계승을 축하하고 양국 우호를 다지는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통신사의 인원은 정사 홍계희(洪啓禧), 부사 남태기(南泰耆), 종사관 조명채(曺命采) 이외 총 475명으로 구성되었다. 1747년 11월에 한양을 출발하여 다음 해 2월에 부산에서 출항, 대마도를 거쳐 5월 17일에 에도에 도착한 후 국서를 전달하고 7일 동안 머문 다음 윤7월 30일에 한양으로 돌아오는 약 270여일간의 일정이었다. 이성린은 부산에서 에도에 이르는 과정을 명승지와 특별한 지형을 중심으로 그렸다.
‘눈 덮인 후지산’은 화면을 대각선으로 배치해 좌측에 무게를 실었다. 우측은 빈 공간으로 남겨 우뚝 솟은 후지산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산 정상에는 흰 눈이 덮여 있는데 구름이 허리 부분을 감싸고 있다. 후지산의 양옆으로는 작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마치 신령스러운 주산을 모시고 있는 모습이다. 후지산 아래에는 올망졸망한 민가와 누각이 나무들 사이에 들어서 있다. 그 앞에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수목에 휩싸인 민가를 그렸다. 거리감과 공간감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다. 산과 강변은 푸르스름한 색을 연하게 칠해 산뜻함을 더했다. 그림 오른쪽에는 ‘요시와라 관소에서 6월 17일에 눈 덮인 후지산을 바라보다(吉原館六月十七日望見富士山雪)’라고 적혀 있다.
후지산과 가옥의 모습에서 이국적인 분위기는 느껴지지만 조선의 화가가 그려서인지 마치 조선의 지형을 보는 것 같다.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1760~1849)가 그린 ‘붉은 후지산’과 비교해 보면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공통점은 후지산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차이점이 더 크다. 붓으로 그린 모필화(毛筆畵)와 판화라는 장르상의 차이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성린의 작품이 조화로움을 강조한 반면 호쿠사이의 작품은 선명함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성린의 후지산에서는 안정감이, 호쿠사이의 후지산에서는 강렬함과 과장성이 느껴진다. 이성린의 후지산은 처음 볼 때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다. 반면 호쿠사이의 후지산은 보자마자 시선을 확 사로잡지만 장식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두 민족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두 작가의 개성 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이성린의 ‘눈 덮인 후지산’은 조선의 화가가 그린 본격적인 후지산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성린보다 더 이른 시기인 1719년에 함세휘(咸世輝)가 일본에 갔을 때 부채에 그린 ‘후지산도’도 현존한다. 그러나 함세휘의 ‘후지산도’는 부채그림이어서인지 후지산의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린의 ‘눈 덮인 후지산’은 조선적인 필법으로 일본의 산을 해석해서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눈 덮인 후지산’은 총 30폭으로 구성된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에 포함되어 있다. ‘사로(槎路)’는 뱃길을, ‘승구(勝區)’는 절경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로승구도’는 배 타고 일본 가는 길에 본 명승지를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로승구도’는 그림 가운데 접힌 부분이 보이는 것처럼 원래는 화첩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두 권의 두루마리로 장첩되어 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붉은 후지산’. 1832년
국격을 손상시키는 수행원들의 추태
통신사행의 종사관 조명채가 쓴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을 확인해 보면 이성린의 ‘눈 덮인 후지산’은 귀국하던 길에 보고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조명채는 에도로 향하던 5월 17일에는 날이 흐려 후지산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귀국하던 6월 17일에는 “부사산이 전면에 마주 보이는데, 구름이 모두 걷혀 전체가 다 드러나 보인다”고 적었다. 이어서 그는 마테오 리치가 후지산을 ‘천하의 명산’이라고 했던 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후지산의 위치가 바다 모퉁이 가장 낮은 곳에 있는데 곁봉우리를 멀리 물리치고 외롭게 일어나 하늘을 찌를 듯이 홀로 서서 기세가 당할 수 없고, 머리와 몸뚱이도 험괴하지 않으며, 지는 노을, 엉긴 구름이 끝내 그 꼭대기를 올라 덮지 못하고 늘 그 반허리를 돌 뿐이다. 때로 짙은 안개가 전부 가려 산의 형태를 볼 수 없다가도, 한바탕 바람이 불어와서 가린 것을 헤쳐 살짝 걷어 간다. … 왜인이 이 산을 올라가 구경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여러 날 목욕재계하고서야 길을 떠나고, 올라간 뒤에는 역시 제사를 지내고서 내려온다고 한다.”
조명채의 글만 보면 무진년 통신사행이 해외 여행하듯 재미있고 순조롭게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통신사행은 조선에서 출발할 때부터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24년에 사관이 적은 기록에는 그 문제점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사관은 무진년 통신사 일행이 지나간 고을마다 ‘민폐가 극심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통신사 일행에는 무관과 기술자, 악공들이 따라갔는데 무관들의 횡포가 도를 넘었다고 했다. 그들이 부산에서 4개월 동안 머물 때 70개 고을에서 돌아가며 그들을 대접하느라 도내와 주변 읍이 말할 수 없이 피폐되었고 거의 몇 해 동안 회복되지 못하였다고도 전한다. 뿐만 아니라 대마도에 이르러 선물과 여비를 실은 배가 실화로 불에 타고 사상자도 세 명이나 발생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 다시 예물과 여비를 준비하느라 ‘국가의 저축이 탕진’되었다고 한탄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관리들의 은폐 조작도 있었음이 지적되었다. 사관은 “관백이 새로 서면 반드시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줄 것을 청하는데, 사신이 그 나라에 도착하게 되면 여러 섬에 호령하는 통지문에 ‘조선에서 조공을 바치러 들어온다’고 하기에까지 이르러 국가의 수치스러움과 욕됨이 막심하였다”고 하면서 “그러나 사명을 받들고 간 사람은 매양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그대로 두고 못 들은 체하기 일쑤였다”고 개탄했다. 사관은 통신사 수행원들의 자질 문제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관은 홍계희 등이 강호에서 7일 동안 머물고 돌아왔는데, “이들의 기강이 해이한 탓으로 데리고 간 통역관들이 재화를 탐하여 사명을 잊고 설치느라고 저들의 사정은 전혀 탐지하지 못한 채 우리나라에 대한 말은 이미 여지없이 죄다 누설하였다”고 개탄했다. 그리하여 통신사가 가서 “오랑캐들에게 위엄을 보이지 못한 것은 물론, 사적으로 뇌물을 받으면서도 사양할 줄을 몰랐으니, 수모를 받는 것이 그칠 기한이 없게 되었다”고 꾸짖었다.
바이든 대통령의 경호원이 만취폭행으로 본국으로 소환되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조선시대의 우리 외교관들은 어떠했을까를 살펴보았다. 동서를 불문하고 어느 시대나 외교관과 수행원들의 문제는 항상 많은 사람들의 주시를 받는다. 부디 윤석열 정부에서는 조선시대 사관이 개탄했던 일들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