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찾았다. 평생 동안 피사체를 렌즈 속에 가두어 셔터를 누른 사진을 전시한 갤러리가 자리한 고즈넉한 삼달마을을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메인다. 생전,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지키기 위해 작은 단층 짜리 시골 폐교를 개조해서 갤러리를 만들었다. 도시의 웅장한 건물 속에 설치된 전시장과는 달리 정원 곳곳에 작고 앙증맞은 조형물들을 설치하여 아담한 정원과 어울리게 했다. 떠난 혼의 휴식처럼 갤러리는 잠든 듯 고요히 자리했다.
작가 사진도 전시장 입구에서 내방 객을 맞는다. 헐렁한 카키색 군용 파카를 입은 그는 헝클어진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었다. 거친 바람에 휘날리는 빠져나온 머리카락들이 야생마의 갈기 갔다. 머리 모양만으로도 거침없이 대자연 속을, 자유롭게 헤매고 다녔음이 짐작된다.
그는 제주도의 자연만을 카메라에 담았다. 바람과 나무, 비와 돌, 햇살과 안개 등이 지금까지 사진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계절의 진행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각양각색의 움직임을 두 번 다시 찍을 수 없는 자연의 진풍경이다. 순간이 영원 속에 묻힌 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무엇보다 드센 바람과 내리쬐는 땡볕도 견뎌낸 작가의 혼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갤러리에 가기 전에는 예술 사진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즐거웠던 모습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으로 즐겼다. 그게 사진이고 사진 찍기라 여겼다. 한 장의 사진이 자연의 영감을 전해주는 줄 몰랐다.
‘용눈이오름’의 사진들이 계절별로 걸려 있다. 오름의 변화였다. 갈대를 흔들어대는 샛바람의 짓궂은 장난이, 벼랑을 치받는 태풍에 화난 파도의 울부짖음이 모두 보이고 들린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곳에서 피어났던 들꽃과 풀들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잡고 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감동이 전해진다.
갤러리에 설치된 영상 속에서 작가의 지난했던 생을 다시 보았다. 좋은 사진은 운이 좋아야 찍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준비해서 맞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는 가슴 뛰는 풍경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들판과 오름 위에서 몇 날 며칠을 견뎌냈다. 유배의 땅에서 누구도 볼 수 없는 신비한 ‘이어도’만을 보려 하였다.
허접한 생활에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두 번 다시 찍을 수 없는 귀한 순간을 렌즈에 담는 것이 세상 누구도 누릴 수 없는 특별한 행복이라 여겼다. 고단한 삶을 다른 누구에게 미룰 수 없다 하여 결혼도 하지 않았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상의 행복마저 포기했다. 그는 오직 사진으로 촉망받았다는 생각을 하니 영상 속 모습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는 사진작가로 인정받을 여지조차 포기했다. 돈으로 상을 사거나 이름을 구하지 않았다. 추천 작가가 되려고 중앙을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대가의 그늘에 들기 위해 여기저기 몰려다니지도 않았다. 오직 뒷 그늘에서 사진에 밝은 빛만을 찾았다. 그를 통해 어떤 것이 신성한 예술인지, 작가 정신이 무엇인가를 느끼려 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그의 삶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시인은 단어 하나를 찾아 몇 달을 아파하고, 화가는 선 하나를 얻기 위해 몇 년을 아파한다. 사진가는 셔터 한 번을 누르기 위해 오직 기다린다.’고 말한 것처럼 그에게는 사진만이 전부였다. 자연의 움직임을 순간 포착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예술가의 의지와 인내이다. 그저 찍고 싶은 순간을 포착하면 그만이었던 그의 삶이 처절하다 못해 경이롭다. 카메라에 담아 낸 제주의 모습은 아름답다. 사진 찍는 작업이,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바친 그의 생이 새삼스럽다.
그림 그리기가 삶의 전부였던 또 한 사람의 예술가가 오버랩된다. 그 역시 예술혼을 위해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생활인으로서는 조금의 융통성도 없었던 그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냈다. 어려웠던 상황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열정을 태우며 생을 다하고 떠났다. 짧았던 생이 슬프고 안타깝다.
김영갑 작가가 생애 동안 지녔던 카메라를 보았다. 잠겨 있는 유리창 안에는 만지고 닦아주며 세상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분신이었던 주인 잃은 카메라가 오도카니 전시되어 있다. 찡하다. 손에 들고 읽었던 책들도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애지중지 여겼던 것들은 그대로인데 작가만 없다. 잠깐 외출 중인 것처럼,
김영갑 작가는 어는 날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이후, 더이상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자 아픈 몸으로 손수 실어나른 돌과 나무들로 아담한 정원을 조경했다. 그가 심었다는 감나무 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안내원의 세 번째 나무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감나무 아래에 김영갑의 유해가 뿌려져 있다고 한다. 바람으로 살아온 작가답게 흔적으로 남겨져 생각하게 한다.
돌아올 수 없는 소멸해간 아픔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김영갑, 그러나 빛으로 염원하는 사진작가, 감과 잎을 떨어뜨린 나뭇가지에는 시린 바람 소리만 들린다. 이별이 서러워 억새 숲을 헤집고 그리움으로 달려온 제주 오름의 바람이 감나무 가지를, 울린다.
마치 병마로 근육이 말랐던 앙상한 작가가 세찬 겨울바람을 견뎌내며 서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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