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부리나케 찾아왔다. 12월이 시작되고, 예년과 사뭇 다른 날씨에 옷차림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던 찰나 마법처럼 온도가 급속히 떨어져 이제는 자연스레 첫눈을 기다리고 있는 와중이다. 길거리를 꾸며주던 그 많은 계절의 절정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다가올 2023년에 대한 예, 복습을 시작해 본다. 오늘의 장소로 날 바래다주던 버스. 그 버스 안에서 마주한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오가던 차량들과 사람들로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평소에도 조용한 분위기로 가득 찬 곳이었으나, 겨울의 조선왕릉은 적막감으로 자연의 소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왕릉 주변을 거닐 수 있게 만들어 둔 산책길도 폐쇄해뒀으며, 나처럼 카메라를 들고 이곳을 찾은 사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스산한 분위기가 되려 공간을 장점을 십분 살려주며 대화의 장으로 만들어줬다. 오히려 좋았다. 주변에 다른 관람객들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드넓은 부지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빌린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음과 동시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었던 그 환경이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1. 인조
양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선조가 붕어하고, 그 뒤를 세자의 신분이었던 광해가 있게 된다. 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은 길지 않았으며, 왕위에 있었을 때 벌어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일은 그의 발목을 결과론적으로 붙잡게 된다. '폐모살제' 신하들에 의해 일어난 이 반정으로 결국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 뒤를 이은자가 바로 능양군 '인조'였다. 인목대비는 왕실의 어른으로 교지를 내리며 경운궁에서 즉위식을 지켜봤으며, 다시금 복권될 수 있었다.
재위 초기부터 그의 치세는 순탄치 못했다. 신하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그의 권한이 탄탄하지 못했다는 문제도 있었으나, 아직 양란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시간을 두고 내실을 다져가야 될 시기였음에 불구하고 북방의 병권을 책임진 이가 왕실에 반기를 들며 반란을 일으키니 그것이 바로 '이괄의 난'이다. 설상가상으로 인조는 한성을 버린 채,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성을 떠난 그가 머물렀던 곳은 오늘날 공주의 공산성이다. 위용을 떨치던 이괄의 군대는 결국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하며 결국 심복들에게 살해당했고, 그들로부터 추대된 흥안군 또한 창덕궁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양은 다시 한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으며, 창덕궁이 제대로 정비된 때는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다음 차례는 외부 세력으로부터 큰 화마의 기운이 한반도로 향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일어난 양란은 결국 조-명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이로 인한 후유증은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그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해버린 명나라는 결국 여진족에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대륙의 패권은 그들에게 넘어가버리고 만다.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에서도 갑론을박이 심하게 일었는데, 반정을 성공시킨 세력이 결국 조정을 장악하고 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하니 조선의 선택은 '친명배금'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조선 정부의 선택은 결국 변하지 않았으며, 이괄의 난으로 북방의 수비가 허술해지자 1차 침입이 발생하게 되는데 '정묘호란'이다.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후금군은 압록강을 건넌다. 앞서 항복한 강홍립을 길잡이로 앞세우고 의주를 비롯해 용천, 안주, 평양 등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남하에 성공한다. 왕실은 강화도로 옮겨갔으며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이후, 인조는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자 직접 단 앞에 나서게 되는 '정묘화약'을 맺은 다음 후금군이 철수하고 정묘호란은 일단락된다.
하지만 8년 뒤, 후금은 형제 국가의 지위에서 황제국으로의 격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들을 봉합하지 못한 채, 이듬해 다시 그들은 압록강을 넘게 되니 바로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그들이 진격은 병자호란 때 보다 적극적이었으며, 백마산성을 뒤로한 채 수도 한성으로 치고 내려왔다. 결국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택했으나, 끝내 버티지 못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른 다음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병자호란의 결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조선을 떠나 약 7년 동안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견뎌낼 수 밖에 없었다. 귀국 후, 청나라에서의 생활은 소현세자에게 있어 신세계와 다름이 없었으나, 그 견해 차이가 결국 인조와의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든다. 결국 소현세자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등졌으며, 대신 인조는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지목하니 그가 '북벌론'으로 유명한 효종이다.
소현세자가 떠나고 4년 뒤,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된 인조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던 그 시기에 결국 말라리아 증세로 붕어하게 되었으며, 파주 장릉에 인열왕후와 함께 영면에 들어 있었다. 그에 대한 평가 대신 고요함에서부터 비롯된 그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그분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을 가져본다.
2. 인열왕후
조선의 16대 군주인 인조의 조강지처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인조가 반정에 의해 등용된 만큼, 능양군 시절부터 그와 함께 했다. 17세의 나이로 가례를 올린 뒤, 차례대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낳게 된다. 이후, 반정으로 지아비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그녀 또한 자연스레 중궁전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잦은 환란으로 공주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날 수 밖에 없었으며, 이괄의 난 당시에도 용성대군을 잉태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또한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특정 사안과 관련하여 인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엄동설한이나 무더운 여름철에 '위사'들이 고생하는 것을 염려해 음식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1635년에 창덕궁에서 아이를 낳다가 사산한 충격에 결국 산욕열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향년 42세의 나이였으니,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짧게 살았다곤 할 수 없으나 안타깝다고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파주 장릉의 재실은 다른 왕릉들에 비해 적당히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담장 너머로 자리한 벤치들에는 인기척 하나 없이 공허함만 감돌고 있을 뿐이었고, 예상치 못한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수백 년 전, 이곳에 거주하며 왕릉 관리를 전담했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능침 주변을 감싼 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그 당시의 시간에서 멈춘 듯 보인 나무가 능침과 정자각을 안온하게 감싸주고 있었는데, 당시 그들이 누렸던 권위를 얼핏 엿볼 수 있어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만큼 얼마 남지 않은 연말 동안 서울 주변에 산재되어 있는 조선왕릉과 폐위된 그들의 흔적들을 담아보고자 한다. 감히 예상컨대 물론 그곳들의 분위기도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 마 그로 인해 내게 다가온 몰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 깊이는 결국 사진과 여행기에 고스란히 반영되지 않을까 싶다. 그곳으로의 여정을 계속할수록 머리에 내재된 지식들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로 자리매김했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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