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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주 옛날에 원시인들은 숫자를 몰랐습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들어오기 전에 적어도 1-10까지는 모두 적을 수 있고, 읽을 수도 읽고 계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시인들은 하나라는 것, 두 개라는 그리고 많다는 것 밖에는 몰랐습니다.
그 원시인들은 지금의 아라비아 숫자 1, 2는 몰랐지만 그래도 하나와 둘에 대한 인식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사과가 한 개 있다면 원시인들은 '음.. 하나가 있군'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과가 두 개 있다면 ' 음.. 두 개가 있군'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과가 세 개가 있거나 네 개가 있거나 또는 그 이상이면 그것을 모두 '음... 사과가 많이 있군' 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과가 하나 있음>< 사과가 두 개 있음>< 사과가 많이 있음>사과가 다섯 개가 있다면 원시인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 우와~! 사과가 내 머리카락 수 만큼 많이 있구나~!"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살펴보아도 그들은 풍뎅이 하나를 <>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그리고 <> 이렇게 표현한 것은 풍뎅이 세 마리가 아니라 풍뎅이가 여러 마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집트 지역에 사는 원시인들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중국지역에 사는 원시인들도 그랬다고 합니다. 그들은 나무 한그루를 <
>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럼 이들이 <> 이렇게 표현한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요? 나무 세 그루를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나무가 많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셀 수 있게 된 것일까요?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몇 천 년, 몇 만 년의 세월이 흘러 원시인들은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서 지금의 우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시인들은 '1, 2, 많다'는 것 밖에는 몰랐는데 어떻게 해서 지금의 우리는 아주 복잡한 수학의 계산까지 가능하고, 일, 십, 백, 천 , 만, 십만, ... 등 아주 큰 수도 알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어떤 물건이나 개수를 어떻게 셀 수 있게 되었을까요? 다음의 글을 살펴봅시다.
동굴에 고인돌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족이 모두 16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인돌 가족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이 16명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즉,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다섯 명, ... 이렇게 헤아릴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진 후에 가족이 모두 들어왔는지는 알았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고인돌 가족의 아버지는 숫자를 셀 줄 몰랐습니다. 그 시대에 누구나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고인돌 가족의 아버지는 가장으로써 가족들이 모두 하루 동안 무사히 밖에 다녀와서 집으로 들어왔는지 확인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방법을 사용했답니다. 우선 집 주변에서 동물 뼈조각을 하나 주웠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한 명 한 명 보면서, 뼈 조각에 눈금을 표시해 두었답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16명의 가족을 모두 보면서 뼈조각에 16개의 눈금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 되면 자신의 가족이 모두 들어왔는지를 확인하는 데 이 뼈조각을 이용했답니다. 눈금 하나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면서 가족 한 명 한 명과 짝지어 본 것입니다. 눈금 하나에 엄마를, 눈금 두 번째에 할아버지를, 눈금 세 번째에 할머니를, 네 번째 눈금에는 큰 딸을 , 다섯 번째 눈금에는 자신의 남동생을 ........ 이렇게 열 여섯명의 가족을 모두 눈금과 짝 지어 본 후에 눈금과 가족의 수가 일치하면 16명은 모두 저녁이 된 후에 동굴로 무사히 들어왔다고 생각했답니다.
여러분 못 믿겠다구요? 실제로 1937년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에서 눈금이 새겨진 늑대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원시인들이 살던 구석기 시대의 것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이것 만이 아니라 1962년 콩고에서도 80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눈금이 새겨진 뼈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즉, 우리의 조상들은 돌멩이나 나무 도막을 모은다거나, 흙이나 돌 위에 자국을 내거나, 또는 막대나 뼈조각에 금을 그어 수를 나타낸 것입니다. 원시시대에 1∼100이라는 숫자는 커녕, 하나, 둘, 많다 라는 것밖에 모르던 원시인들이 그 나마 짝찟기(일대일 대응)라는 방법을 통해서 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것( 눈금, 돌멩이, 자국 등)과 셀려고 하는 것들을 짝지으면서 셀 수 있게 된 사람들은 그 이후에 아마도 소리로 세기 위해서 일종의 웅얼거림을 하고, 그것이 점점 발달되다가 수를 뜻하는 말이 생겨났고, 휠씬 더 지나서 표시하기 위해서 기호, 즉 숫자들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사람들의 추측이었지만, 지금의 이런 추측과 일치하는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문명이 생기기 이전 사람들은 유목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축을 키우기 시작하게 되었고,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대산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 양한마리와 대응 되는 숫자의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고 손가락으로 수를 세기시작했습니다.
10진법이 생긴 이유가 손가락으로 수를 세기 시작했기 때문이겠지요.
자신의 재산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더하기와 빼기의 개념이 발달하게 되었고
문명이 생기면서 이것을 기호로 표현하여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집단생활을 하면서 분배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곱하기와 나누기가 태어납니다.
그러다가 자연수가 나뉘어지지 않자 분수를 생각해내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수학의 발전은 고대 그리스와 17/18세기 두번에 걸쳐 급격히 발달하고 있는대요.
우선 고대그리스 사람들은 생각하고 말장난 하는것을 좋아하여 수학을 상당히 발전시켰습니다.
우선 증명의 기초가 되는 논리학(명제)을 탄생시켰구요
유클리드는 기하학을 증명하기 위해 공리/공준/정의/정리등으로 체계화 시켰습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17/18세기까지 거의 최고의 학문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피타고라스가 무리수를 발견하였으나
유리수가 모든 수의 끝이라고 주장했던 자신의 모습과 상충되어 비밀로 했다는 군요.
.. 어쨌든 피타고라스학파의 무리수 발견으로 상당히 진보했군요.
또한 이 당시부터 원주율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는데요
어리석게도 다들 이수의 끝을 구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3대 작도 불가능 문제가 나온것도 이때쯤입니다.
1. 각의 3등분
2. 원의 넓이와 같은 사각형
3. 정육면체의 부피를 두배로 만드는 정육면체의 작도
이런것을 연구하면서 기하학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비유클리드의 기하학이 나오기 전까지는요.
.. 신대륙이 발견되고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수를 본격적으로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계산하기 편리한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장사하다 생긴 손해를 수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생각해낸것이 음수입니다.
본전도 생각해다가 0을 발견했습니다.
0 이 15세기에 발견되었으니 참 아이러니 하네요.
0을 쓰면 편리하다는 것을 15세기나 되서 알았으니
그리스에서 15세기까지의 수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요?
0 을 발견하고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여 계산하기 시작하면서 수학은 급격히 발달
합니다.
이것을 기록하면서 +,-,*,/ (뒤에 두게는 곱하기 나누기입니다.) 등의 기호가
생겨났습니다.
이때부터 수학자들은 무리수(제곱근)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복소수입니다.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좌표평면의 발견)은 굉장한 발견입니다.
상당히 편리한데다가 각의 삼등분선 작도가 불가능하다는것이 증명되는군요.
가감승제를 하면서 방정식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르마,가우스,오일러등 유명한 수학자의 90%가 이때 활동합니다.
삼각함수와, 지수, 로그등이 발견되면서 한시대에 엄청난 업적을 이룹니다.
결국 15세기까지의 수학은 중3때 끝이나고 고1때부터는 16세기 이후의 수학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미적분이 발명되고, 무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급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됩니다.
드디어 원주율이 무리수라고 증명되면서 삼대작도불가능문제가 해결됩니다.
수학과 과학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아시죠?
수학과 과학은 시소를 타면서 발전한다는 것은 아시는지요?
일단 수학이 수학적 정리를 완성해 놓으면 과학이 그것을 사용하게됩니다.
그렇게 해서 과학이 발전하다가 한계를 맞이하면
그 과학의 한계를 힌트로 새로운 수학의 한분야가 탄생됩니다.
그리고 그 분야를 발전시키면 다시 과학이 그것을 사용하고...
이런식으로 공생관계를 유지합니다.
특히, 물리학과... 미적분, 급수, 해석기하학, 위상수학(공간의 위치관계를 밝히는 수학)등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 이집트에는 고도로 발달한 수학체계가 있었다. 하지만,일반적인 세평과는 달리 ,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학보다 수준이 못했다.
이집트 수학의 기원은 ,이집트문자의 기원과 시기가 비슷한기원전31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이것또한 정확히 알수 없다.
● 기원전3100년 이전이라는 근거는 , 이집트에서 , 호화스런 이집트 철퇴가 발견되었는데, 이 철퇴에는 전투의 승리를 기록한 이집트 상형문자로 쓰여진 수많은 글자가 있는데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수가 나온다. 이 철퇴를 연대측정한 결과 기원전3100년 이전으로나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철퇴가 옥스퍼드 에 있는 한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 이집트인은 산수와 기하학의 기초, 덧셈, 뺄셈, 나눗셈의 계산법을 고안했다. 그러나, 덧셈을 계속하는 방법 말고는 곱셈법은 없었다. 또, 삼진법을 발명했으며, 분수도 쓸 수 있었다.
이집트인은 삼각형, 직사각형, 육각형을 정확히 계산하는 측량 수학과, 피라미드, 원통, 반구의 용적을 계산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 이집트 수학의 대표적인 자료로는, 린드 파리루스와, 모스크바 파피루스가 있다.
1. 모스크바 파피루스는,기원전185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근사적인 연대로서 모스크바 파피루스는 그것이 편찬된 것보다 시기적으로 더 오래된25개의 문제가 실린 수학책이다.
2. 린드 파피루스는 기원전1650년경에 제작된 것이로 추측하지만 이 연대또한 정확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편람 형태로 된 수학책으로서 필경사 "아메스"가 그 이전의 작품을 신성문자로 베껴 쓴 85개의 문제가 수록되어있다.
(린드 파피루스의 일부분)
● 모스크바 파피루스와 린드 파피루스에 있는 110 개의 문제는 모두가 수치계산인데 대부분 매우 간단한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문제가 실용적인 기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론적 성질을 띠고 있는 경우도 몇 가지 있다.
이집트 수체계의 한 결과는 종속적 산술의 가법적 성질이다. 즉 곱셈과 나눗셈은 항상 임의의 수가 2 의 멱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 계속적인 배가연산에 의해서 행해졌다.
한 예로는 26 과 33 을 곱해보자. 26 = 16 + 8 + 2 이므로 33 의 배수를 더하면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별표를 달아서 표시한 33 의 배수를 더하면 858 이라는 답을 구할 수 있다. 다음은, 753을 26으로 나누어보자. 우선 배가를 계속해서 피제수 753을 초과하게 되는 앞까지 제수 26을 계속적으로 배가해 간다. 그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므로 위의 열에서 별표시가 붙은 항을 주시하면 몫이 16 + 8 + 4 = 28 이고 나머지가 25 임을 알 수 있다. 곱셈과 나눗셈의 이 이집트 방식은 , 곱셈을 배워야 할 필요를 없애줄 뿐만 아니라 수판에서도 매우 편리했으므로, 수판이 이용되는 기간에는 물론이고 그 외의 기간에서도 계속해서 이 방법이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집트인들은 2/3을 제외한 모든 분수를 분자가 1 인 단위분수의 합으로 표현함으로써 분수를 다룰 때 생기는 어려움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환산은 이집트 곱셈의 배가 성질 때문에 2/n 형태의 분수표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린드 파피루스의 문제들은 5부터 101 까지의 모든 홀수 n 에 대한 그러한 표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이를테면, 2/7 는 1/4 + 1/28 로 표현되었고, 2/97 는 1/56 + 1/679 + 1/776 로 표현되었고 2/99 는 1/66 + 1/198 로 표현되었다. 그 표가 파피루스에 있는 문제의 여러 곳에서 이용되고 있다. 단위분수는 분모 위에 타원기호를 씀으로써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표시되었다. 예외적인 분수 2/3 은 한 특별한 기호가 이용되었고 1/2 에 대해서도 종종 또 다른 기호가 이용되기도 했다.
● 린드 파피루스와 모스크바 파필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는 실용적인 기원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빵과 맥주의 농도라든가, 가축들의 먹이 혼합, 곡식의 저장과 같은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 중 많은 것이 간단한 1차방정식에 관한 문제인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나중에 유럽에서 임시위치법 으로 알려진 방법에 의하여 풀렸다.
x + x/7 = 24
를 풀기 위해서 x에 임의의 편리한 값 하나를 가정한다. 예를 들어 x = 7 이라고 하면 x + x/7 = 8 이되는데 8 의 세 배가 24 이므로 정확한 x 의 값은 3(7), 즉 21이 된다.
● 한편 카훈(kahun)에서 발견된 기원전 1950 년경의 파피루스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100 이라는 면적을 갖는 한 표면은 변의 비가 1 : 3/4 인 두 정사각형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x² + y² = 100, x = 3y/4 로 나타내어진다. 여기서 x를 소거해서 y 에 관한 순수한 2차 방정식을 만들자. 그러면 임시위치법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이제 y = 4를 취해보자. 그러면 x = 3, x² + y² = 25 가 되므로 우리는 초기값을 두 배 함으로써 x,y 에 대한 정확한 답을 얻게 된다. 즉 x = 6, y = 8 이다.
● 이집트 대수는 몇 가지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린드 파피루스에서 더하기와 빼기에 대한 기호를 볼 수 있는데 더하기 기호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다리 한 쌍으로 표현하고 , 빼기기호는 오른쪽에서 횐쪽으로 걸어가는 다리 한 쌍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같다" 와 "미지" 라는 뜻의 기호와 표의문자도 이용된다.
1.수학의 기원
1)경험론과 관념론
*수학의 기원은 구체적인 경험인가?
경험론자들에 의하면 수학은 관찰의 과학이다. 밀(J. Stuart Mill)은 "각자가 정신 속에 가지고 있는 점, 선, 원들은 각자가 경험 속에서 알고 있는 점, 선, 원들의 단순한 복사이다"
수 개념의 발생은 전체적으로 파악된 구체적인 다수에 대한 지각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목동의 양의 수, 시골 여인숙의 여주인의 계산, 미개사회에서 셈 단위, 등등에서 다르다.
*수학과 플라톤(Platon)의 이데아
관념론적 관점은 경험론적 관점에 대립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뼈로 만든 알맹이 5개로 된 장난감에 대하여 명상한다. 여기서 "다섯"은 사물이 아니라 이데아(관념)이다. 수학자는 이데아들의 세계, 정신에 속한 반투명의 순수관계들의 세계에 살고 있다. 수학자는 자연을 관찰하지 않고, 이데아들의 순수한 관계들을 명상한다. 심지어, 기하학자의 공간은 "가지적인 연장(l'étendue, intelligible)이지 구체적인 연장(l'étendue concrète)이 아니다."
*플라톤에서 훗설까지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를 구별한다: 하나는 감각적인 경험의 세계 다른 하나는 영원한 본질들의 세계이다.
포물선은 경험적인 그림을 초월한 이데아적인 본질이며, 우리는 경험적인 그림에 의해서 포물선이라는 이데아적인 본질을 상징(기호)로 표시한다.
훗설은 "기하학에 경험이 개입될 때, 경험이 경험으로서 개입되는 것은 아니다. .... 도형을 그리는 물리적 동작이나 그려진 그림을 경험으로서 경험하는 것은 기하학적인 본질을 대상으로 하는 직관과 사유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기하학자에게는... 본질직관(Wesenschau)이 ... 궁극적 기초를 제공한다."
경험론과 관념론사이의 공통점이 있다. 수학자의 활동은 (경험적으로 보는 것이거나 지성적으로 보는 것이거나 간에)[형태를] 보는 것(vision), 즉 수동적 관조(une contemplation passive)이다. 오늘날에는, 경험론과 관념론의 대립은 수학의 연산론(조작이론, théorie opératoire)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2)수학의 기원의 연산 이론(Théorie opératoire)
* 수학적 존재들은 도구(les outils)이다.
수학적 존재들은 단지 처음에는 구체적이다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는 연산 기술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예로 '수'개념을 보자.
*수 개념
수라는 개념 자체의 기원은 분명히 기술적이고 연산적인 것이다. 수가 순수한 이데아라는 플라톤의 말은 틀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물질적인 사물들의 수를 세기 시작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플라톤이 말하는 수의 단위(l'unité)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자, 산술의 수와 기하의 수가 다르다. 아마도 플라톤은 산술의 수를 한번 더 추상하여 기하의 수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양뼈 "다섯"의 명상에서 다섯은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사물도 아니고 명상할 수 있는 본질도 아니다. "다섯"은 연산의 산물이다. (최초의 상인들은 운반하기 편리한 조약돌을 가지고 가축들과 대응시켜서 거래하였다; '계산(calculs)'이란 말의 어원은 조약돌(cailloux)이다).
역사가 흐르면서, 이러한 연산들은 점점 더 추상화되고 일반화 되었다. 영(zéro)이라는 숫자는 인도의 수학자들이 발명하였고,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보급하였다. 영이라는 숫자를 정의하면,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는 것, 어떤 실재도 지시하지 않는 것이다. 영이란 말은 힌두어로는 'sunya'이며, sunya는 공(vide)를 의미한다. 수 제로는 연산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영은 이러한 자리를 채우고 그 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수 개념의 일반화
삐아제(Piaget)의 말과 같이 "음수(le nombre négatif)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과 대응이 되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음수는 경제적 연산(부채)이나 기하학적 연산(반대 방향)과 관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무리수(le mombre fractionnaire)는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이 크기를 측정할 때 나타난 난점들로부터 유래한 기호들이다. 허수(le nombre imaginaire, i=√-1)는, 상상의 수이며, 그 명칭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제곱근을 구하는 연산을 음수에까지 확대하여 대응시킨 것이다. 허수는 교류 전류를 수학적으로 탐구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삐아제의 말과 같이 허수는 처음에는 "대상이 없는 연산의 도식"을 구성하였다.(Piaget, Epistémologie génétique, t.I, p.55.)
(호그벤(Hogben, Les mathématiques pour tous, Payot, p.28.)의 말과 같이, 숫자언어의 발전은 "가축의 무리와 계절을 셈하는 데에서 신전을 건립하는 것으로, 신전 건립에서 미지의 바다에서 배의 방향을 찾는 것으로, 항해술에서 물질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동력기)의 발명으로 진행한 인간재능의 발자취"를 따라서 발전하였다.
결론적으로 수학적 추상이 어떤 단계에 있든지 중요한 것은 연산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