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 클 리
1) 존재는 지각됨이다
버클리의 경험론적 입장은 로크가 구분한 물체의 제1성질을 제2성질로 환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로크는 물체의 제1성질을 인정함으로써 그 물체가 우리의 경험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진정한 경험론의 토대 위에서는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어떤 물질적 세계도 나에게 경험되지 않는 한, 어떤 독립적 존재성격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크의 입장은 이런 의미에서 보면 데카르트의 전통 속에 머무르고 있다. 로크에 있어서 색, 맛, 냄새 같은 제2성질은 지각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모양, 크기와 같은 제1성질은 지각됨이 없이, 그와 무관하게 물체자체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는 물체의 모든 성질은 모두 나에게 지각됨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말하자면 물체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지각된 물체의 모양이나 지각된 물체의 색이 같은 성질의 것이며 서로 분리되어 설명될 수도 없다. 따라서 버클리에 있어서 물체는 한갓 허구(fiction)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나에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말하자면 물체는 지각하는 주체인 정신에 의해 지각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버클리는 ‘존재는 지각됨이다’(esse est percipii)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버클리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버클리가 물질세계의 존재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물체가 나에게 지각 혹은 경험되지 않고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경험되지 않은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독단론이나 로크의 소박한 경험론이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물체도 그것이 나에게 지각되어 나의 관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며, 이것을 우리는 ‘주관적 관념론’(subjective idealism)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지각의 다발로서의 관념
개체와 보편관계에 대한 영국 경험론의 공통적 입장은 유명론이다. 이것은 중세의 오캄에서부터 로크에 이르기까지 지탱된 입장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입장이 버클리에 와서는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추상적인 관념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 속의 모든 것의 본질은지각의 주체인 인간이나 신을 제외하고는그것이 지각되는 것 속에서 구성된다. 예를 들어 하나의 ‘꽃’이란 관념은 그 꽃에 대해 지각된 내용의 다발에 한갓 ‘꽃’이란 이름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꽃’이란 관념은 꽃에 대한 지각내용인 여러 감각자료들의 총체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버클리는 감각내용과 관념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개별적 감각내용에 주의력을 기울이는가 아니면 관념에로 주의력을 기울이는가 하는데에 따라 구별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처럼 어떤 추상적인 관념도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감각내용들에로 환원될 수 있다는 유명론적 입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모든 인식은 결국 감각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경험 이외의 다른 인식작용을 매개로 인식이 구성된다고 생각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로크가 내적 경험으로 부른 반성이란 인식작용은 버클리에 있어서는 한갓 필요없는 과정이다.
3) 버클리의 딜레마
버클리는 물체의 제1성질을 모두 제2성질로 환원시키고, 물체가 나의 정신에 의해 지각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물질 세계의 존재가 나의 정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이런 입장은 유아론(solipsism)의 입장에 빠지게 된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체(육체)를 서로 무관한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정신과 육체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버클리 역시 로크의 소박한 입장을 극복하려 했던 입장이 결국 스스로 유아론에 빠지게 되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는 스스로 유아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 그리고 신을 끌어들이고 있다. 말하자면 나에게 지각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지각됨으로써 존재하고, 나와 다른 사람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것은 무한존재인 신에 의해 지속적으로 지각됨으로써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험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버클리의 철학은 결국 물질적 존재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정신적 존재의 실재성만 인정하는 형이상학적 유심론(spiritualism)으로 귀착한다. 그리고 물질적 존재의 실재성을 주관적 관념의 실재성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는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을 띤다. 또한 버클리는 소위 유아론(solipsism)적 입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성직자로서 신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버클리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끌어들인 신이란 개념은 결코 중세적인 의미의, 즉 창조주 혹은 구세주로서의 신이란 개념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버클리의 신은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청된 철학적 전제라는 성격이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