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人生) -
작년 연말 헨리 키신저 박사의 별세(別世) 소식이 국내 언론에도 중요하게 보도되었고, 한 유명 신문은 뉴욕타임스가 그의 사망 기사를 수일간 여러 면에 걸쳐 실었다며 미국 사람들이 부고 기사(obituary)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언론은 이를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는지를 소개하는 기사도 실었다.
그렇다.
부고(訃告) 기사에는 종종 우리 마음을 깊이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에겐 작년 5월 조선일보가 보도한 한 변호사의 별세 소식이 그랬다.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판사(判事)가 된 그는 네 딸을 두고 있었는데 첫째가 눈에 이상이 왔고 결국 양쪽 시력을 모두 잃었다.
그는 딸 치료 등 뒷바라지를 위해 천직으로 여기던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辯護士) 개업을 했다.
그 딸은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공부를 잘해 미국으로 유학 가서 학위를 받았고, 돌아와 서울맹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취직한지 9개월 되는 때쯤 두 동생들과 함께 집 부근 삼풍백화점에 들렀었고, 그때 붕괴 사고로 세 자매(姉妹)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변호사는 딸들의 보상금으로 받은 6억 5천만에 본인 재산 7억 원을 보태어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첫째가 근무했던 서울맹학교에 기증하였다.
그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정광진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이 슬프고도 감동적인 기사에 첨부된 고인의 사진에서 나는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광진이라는 이름도 귀에 설지 않았다.
37년 전 사법연수생 시절 우리 반 변호사
실무 강의(講義)를 했던 분인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공직 임관을 목표로 하던 때라 변호사실무 강의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 생각나는 강의 내용은 없지만, 그 교수의 엄숙한 표정, 앞머리로 이마를 가리던 헤어스타일, 그리고 앞니 위부분이 약간 깨져 있었던 것은 또렷이 기억났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니 그의 앞니가 깨져 있었다.
그 교수님이 삼풍사고 때 딸 셋을 잃은 피해자였단 말인가! 여태 누구도 그런 얘기를 내게 해준 사람이 없었는데.
삼풍백화점 사고는 나에게 오래된 사진의 한 장 정도로만 기억되어 있었고 마음 깊이 그 고통(苦痛)을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고가 나던 날, 당시 부산지검에 근무하던 나는 프랑스 연수를 앞두고, 오전에 업무를 종료하고 오후에 출국신고를 한 후 퇴근해 청사 부근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다가 TV속보에서 사고 장면을 보았다.
참사현장이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는데도 한참이나 걸렸었다.
사흘 뒤 TV에서 보도되는 아비규환의 현장 비명과 신음소리,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 엠브란스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파리로 떠났다.
1년이 지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바로 IMF사태가 터져 삼풍사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었다.
그래서 이 참사는 나에게 몇 장면만 기억되고 있고 마치 남의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멀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정광진 변호사 부고 기사로 인해 삼풍백화점 사고는 3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사고 당시보다 더 실감 나게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때 가장 큰 고통을 겪었던 분이 바로 내 선생님이었다니!
세 딸을 한꺼번에 잃은 아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미쳐버리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가늠도 잘 안 된다. 아마도 짐승처럼 울부짖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하고 하느님께 격렬하게 대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격렬한 항의 중에 그는 희망의 빛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절망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이제 내 딸들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그는 놀랍게도 절대적 절망을 절대적 희망으로 전환시켰다.
그가 만든 맹인들을 위한 장학재단은 세 딸의 이름 한자씩을 가져와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맹인학생들에게 희망(希望)의 등불이 되고 있다.
나는 신문을 접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끝낸 후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오월임에도 더위는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빈소(殯所)에는 교회 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빈소 앞 대기공간 의자에는 기자로 보이는 젊은이가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언론의 대서특필과는 달리 문상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빈소로 들어갔다.
상주는 건장하고 용모가 준수한 20대 청년이었다.
자신은 고인(故人)의 외손자이고 할아버지는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내가 사법연수원 다닐 때 할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변호사라고 소개하며 조문(弔問)을 마치고 나오려 하자 그는 할머니를 꼭 뵙고 가라며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는 접객실로 달려가 고인의 부인을 모시고 나왔다.
매우 선하고 고운 인상의 할머니셨다.
'제가 20대 때인 86년에 사법연수원에서 정 변호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제 제 나이가 환갑이 되니 선생님은 떠나신다!'며 인사를 드리자
사모님은 나의 손을 꼭 잡으시며 '당시 사법연수원에 출강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는데 다른 일로 그렇게 오래 하지는 못해 아쉬워하셨다'라고 회고했다.
나는 선생님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세상에 빛을 보태신 영웅(英雄)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하였고 노부인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시며 엷은 미소(微笑) 띤 얼굴로 끄덕이셨다.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온화한 모습이 삶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지혜를 흡수한 현인처럼 느껴지게 했다.
딸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아픔이 고인의 것보다 더 깊고 힘들었을 수 있었을 것인데도.
그 주 사무실 변호사들과 점심식사를 하며 내가 정광진 변호사 별세 뉴스와 문상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상주가 외손자 한명이었다고 말을 꺼냈다.
삼풍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 선배 변호사님이, 사고 당시 정 변호사님 관련 뉴스가 많이 보도되었다며 그의 스토리는 많은 주민들이 알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당시 프랑스에 가 있던 나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선배 변호사님은 그러면서 고인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더 보태 주었다.
사고 때 세상을 떠난 둘째 따님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한 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정 변호사님이 그 외손자를 데려와 키우며 사위를 설득해 재혼(再婚)하여 새 출발하게 하였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선택 아닌가!
그 아이는 절망속의 조부모에게는 살아야 될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홀아버지보다 더 극진한 사랑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아이 생부에게는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새 출발하는데 부담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빈소에서 보았던 그 건장하고 용모 준수하며 정중했던 청년이 그때 한 살배기 아이였던 것이다.
고인의 선택이 더 없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현장을 내가 목격했던 것이다.
무엇이 그런 탁월한 선택을 가능하게 했을까?
유대인으로서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갇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정광진 변호사님이 이런 태도(態度)를 취했던 것 같다.
그 상황에서 삶에게 기대하는 것을 중단하고, "삶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앞에 놓인 과제가 무엇인가?
나는 그 과제를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고 질문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책임을 온 어깨에 짊어졌던 것 같다.
그것은 먼저 떠난 딸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 영원히 잊히지 않게 하는 것,
그 남겨진 혈육이 온전히 성장하도록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