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흐르는 강
- 김포 전류리포구
*월간 신문예 124호(2024. 7)/차용국
전류리포구(顚流里, 김포시 하성면)의 한강은 서해 바닷물이 강물을 밀어 거꾸로 흐르는 강이다. 서해 밀물은 힘이 엄청 쎄서 썰물에 홀쭉해진 조강을 채우고 헐거워진 임진강과 한강을 깊숙이 치밀고 올라온다. 그 세력은 전류리를 거슬러 올라 행주나루를 거쳐 서울 마포ㆍ서강에 이르고, 보름사리 때면 여의도를 넘어 잠수교에 이르기도 한다.
서해의 밀물이 한강을 치고 올라올 때 하류의 강이 어항漁港을 열면, 어부들은 배를 띄워 물고기를 잡았다. 바닷물과 강물이 뒤섞인 이 천혜天惠의 어장漁場에서, 봄이면 웅어ㆍ황복어 등이 놀고, 여름이면 농어ㆍ장어 등이 놀고, 가을이면 참게ㆍ새우 등이 놀고, 숭어는 사시사철 놀아서 겨울에도 어부들은 어선을 세워둘 여유가 없이 바빴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이 하류의 강변에는 조강포ㆍ신리포ㆍ마근포 등의 포구 마을이 성업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분단이 고착되면서 그 포구들은 다 사라지고 전류리포구만 남았다. 지금 전류리포구에서는 조업 허가를 받은 20여 척의 작은 어선만 조업할 수 있다. 전류리포구는 하류의 강 최북단에 자리 잡은 위태로운 어항으로 존재한다.
전류리포구의 배는 이중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강변 안쪽에 정박해 있다. 어부들은 출항 신고를 하고 초병이 열어준 철조망 문으로 나가서 배에 시동을 걸고 출항한다. 그 배는 북방어로 한계선 안에서만 조업할 수 있다. 북방어로 한계선 너머로 물고기 떼가 넘어가도 사람은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그곳은 우리와 다른 색깔의 이념이 흐르는 강이다. 강은 스스로 이념과 경계의 실선을 칠 수 없어도, 인간 군상人間群像이 관념을 버무려 친 허상의 경계선은 실선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강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정해진 시간에 조업을 마친 어두들은 포구의 강물에 배를 묶어두고, 입항 신고를 하고, 초병이 열어준 철조망 문을 빠져나와 마을로 돌아온다.
전류리포구는 평화롭기보다 적막하다. 수산물을 파는 상설 어판장도 없고, 횟집이나 수산물식당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거리에서 오고 가는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고, 차로를 씽씽 달리는 자동차와 한강 자전거길을 쏜살같이 스쳐 가는 무리만 흔히 볼 수 있다.
전류리포구 마을 뒤편에는 해발 129미터의 봉성산이 있다. 봉성산은 전류산 또는 진류산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어떻게 불렸건 한강 변 전류리나 산 너머 봉성리 두 마을의 배산背山이다. 전류리포구 쉼터에서 차로를 건너면 봉성산 초입의 전류정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 들어가면 아담한 마당이 있고, 가옥 한 채가 있다. 여흥 민씨 충절 유적으로 김포시가 향토유적으로 지정(제173: 2017. 3. 15)한 건물이다. 전류정 옆으로 봉성산에 오르는 좁은 샛길이 소나무와 참나무 사이로 나 있다. 산길은 황토가 다져진 흙이다. 아마 산 전체가 황토인 듯하다. 황토가 깔린 순한 숲길. 그 숲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은 무겁고 슬프다.
전류정은 고려 공민왕 때 민유가 봉성산 기슭에 지은 정자다. 그는 고려 충혜왕 원년(1331)에 급제하여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등을 지냈는데, 신돈의 폭정을 피해 이곳으로 내려와 머물렀다고 한다. 민유 이후 전류리에 자리 잡은 여흥 민씨 일가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들어가 의병이 되었다가 강화성이 무너지자 인조 15년(1637) 정월 24일 아들·딸·며느리 등 12가족이 모두 자결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민씨 일가의 비극은 병자호란 당시 백성이 겪어야 했던 참혹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병자호란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남한산성과 삼전도의 치욕을 떠올리지만, 백성이 겪어내야 했던 처절함은 그보다 몇 배, 아니 수십 배, 수백 배……는 더했다. 인조와 신료들이 남한산성 문을 걸어 잠그고 대책 없이 ‘존버’ 온라인 게임 ‘스타크래프트’ 유저들이 사용하는 ‘존나 버로우’ 스킬에서 유래하여 ‘존나게 버티기’로 변천된 비속어의 줄임말로, 엄청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참고 버티는 상황에 사용한다.
하며 말쌈질할 때, 청군은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인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청군은 경기 일대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마을을 유린하고 사람을 살육하고 50만여 명을 쌍끌이 저인망 그물로 물고기 낚듯이 잡아서 청국으로 끌고 갔다.
특히 강화도의 피해는 극심했다. 강화도를 함락시킨 청군은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능욕했다. 청군의 만행을 피해 막다른 바닷가로 내몰린 수많은 여성과 어린이가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주검이 워낙 많아서 ‘바다에 떠 있는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에 떠다니는 무수한 낙엽과 같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여흥 민씨 일가의 비극은 던적스러운 말과 말을 교묘히 세탁해서 행세깨나 하는 정치 집단의 구린 민낯 이면에 숨어있는 민중의 처절한 고통의 소리를 대변하듯 울린다. 국가의 으뜸 존재가치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을 등한시하거나 할 수 없는 정치 집단은 어떠한 이유로든 존재가치가 없다.
인조반정의 주역이며 공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인 김류는 강화도 방어 책임자인 검찰사에 아들 김경진을 추천했다. 그것이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었다. 김경진은 군사를 지휘한 경험도 능력도 군인과 공직자로서 책임감도 없었다. 김경진은 강화로 들어갈 때 김포에 몰려온 피난민을 내치고 자신의 가족과 50여 개나 되는 재물 궤짝을 운반하기 위해 경기 마부를 동원했다. 강화에 들어가서도 군사적 준비를 내팽개치고 날마다 잔치를 벌였다. 고려 때 몽골군이 강화의 바다를 넘지 못했듯이 청군도 강화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청군은 달랐다. 청군은 1637년 1월 22일 새벽에 1백여 척의 배로 바다를 건넜다. 김경진은 강화 군진을 버리고 가족을 챙기지 못한 채 도주했다. 그의 모친(김류의 처), 부인(김류의 며느리), 며느리(김류의 손자며느리) 등 일가족 모두 죽었다(자결했다). 인조신록은 김경진을 ‘광동(狂童, 미친 어린 아이)’으로 기록했다. 그는 인조가 송파 수항단 밑에서 머리를 찍고 항복한 후 사사賜死되었다.
봉성산 정상의 전망대는 육군 방공포대였던 부대 시설을 개조해서 '재두루미전망대'라 이름 붙였다. 재두루미는 지구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고고하고 영리한 새다. 재두루미는 가족애가 강하고 태어난 월동지를 버리지 않고 공동체의 유대와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는 새다. 외다리로 자면서도 수평을 잃지 않는 뛰어난 감각을 가진 새다. 옛사람들은 재두루미가 깨달음을 얻으면 청학(파란 두루미)이 된다는 설화說話를 믿었고, 불로장생의 천년 학이라고 생각했다. 현실과 상상의 세상을 아름답게 비행하는 재두루미는 이제 지구라는 땅에 6천여 마리 정도 남아 있는 멸종 위기의 귀한 새다.
봉성산은 김포평야의 한강 변에 자리 잡은 야트막한 작은 산이지만, 정상에 올라 바라보면 시야가 넓고 멀어서, 사방의 경계는 날씨와 보는 이의 시력이 미치는 만큼 닿는다. 동쪽은 고양과 서울에 이르고, 남쪽은 인천에 이르고, 서쪽은 강화도에 이르고, 북쪽은 애기봉 너머 북한 개성의 산야에 이른다. 물론 북쪽의 경계는 사람이 갈 수 없는 이념의 경계다. 아마 재두루미만 우아하게 오갈 수 있을 것이다. 재두루미는 던적스러운 이념이 없다.
전류리포구와 마찬가지로 봉성산 숲길은 오를 때나 내려올 때나 사람 볼 일이 드물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면도 있겠지만, 대중교통 이용 문제나, 기본적으로 빈약한 여러 시설과 여건 등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류리포구는 자전거를 저어서 하류의 강으로 내려온 사람이 잠시 머물다가, 하류의 강을 거꾸로 저어서 돌아가는 기착지寄着地 같다.
서해는 날씨가 흐려서 노을을 볼 수 없다고 내 구형 자전거도 그만 돌아가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