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밥을 했다.
찹쌀을 담궜두고
팥은 한줌 압력솥에 미리 삶아 두었다.
아침에 일어나 미리 준비해 둔 솥에 물 붓고
보자기 깔고 찹쌀얹어 불에 올리고
쌀 위에 팥 얹어 김 올렸다.
김 오르는 사이 팥 삶은 물에 소금과 설탕 한스픈(많이 들어가면 안 된다. 조미료 넣듯 조금만 넣어야 맛있다.)
호박고지도 씻어 준비해 둔다.
오늘은 배를 하나 가져다가 썰어서 지국을 담았다.
찹쌀이 잘 익었으면 쌀을 양푼에 담고 팥물로 버무려서 다시 한번 김을 올려 마무리를 해 준다.
아주 맛있게 되었다.
"그래 찰밥이야."
혼자 중얼거리며 난 옛 생각을 한다.
우리집엔 논이 없었다.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찹쌀을 심어 먹을만한 논이 없었다.
조금 있는 논에는 밥쌀을 심어야 했다.
그래도 쌀은 늘 부족했다.
1970년대 후반 통일벼가 나오기 전까지는
처음 통일벼가 나왔을 때는 아버지는 안 심었다.
밥이 맛이 없었다.
통일벼가 나와서 이태째 되던 해던가
내 기억으로는 1977년도였다.
그 해는 통일벼 신품종이라고 해서 수확량이 많고 밥맛이 좋다고 하였다.
진짜 그 해는 다른해에 비해 수확량이 3/1정도가 더 나왔다.
같은 땅에서 나락이 많이 나오니 그때부터 우린 쌀걱정을 안했던 듯
거기에 논이 부족한 것을 어떻게 든지 벗어나보려고 밭을 파서 논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가끔 난 꿈속에서 논 만들 때의 흙구렁에서 일하던 꿈을 꾸곤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찹쌀 나락을 심지 않았다.
우선 우리들 밥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으리라.
그래도 어머니는 보름이면 찰밥을 하였다.
찹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밥쌀에 물을 한번 더 주어서 부드럽게 먹을 수 있게 하여 보름차례를 모시곤 하였다.
우리는 당연히 어머니가 해 주시는 팥밥맛이 찰밥 맛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건너편에 논 많은 집에서 보름 찰밥을 해서 한그릇 나눠준 것이다.
"이거 우리 엄마가 찹쌀만 가지고 지은 밥이다."
그집 딸(딸부자집이었다)이 층층히 우리 형제들과 비슷한 나이들이었다.
물론 지금도 어쩌다 꿈에 그 집을 보곤 한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사는데.
그때야 알았다.
진짜 찰밥과 팥밥의 맛이 다르다는 것을
지금이야 누가 없다고 하면 나눠먹을 만큼은 되니
이 또한 다행이지 않을까?
간단하게나마 찰밥해서 차례모시고
보름이라 절에 다녀왔다.
서류해서 스님게 보여 드리고 왔다.
보름을 잘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