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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충렬제를 창건한 주호 양무웅 前문화원장
고희를 넘어서까지 고향 사랑에 빠진 주호(柱浩)
1960년대와 1970년대,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까지 무려 40여 년 간 옥천 지역사회를 풍미했던 주호(柱浩) 양무웅(梁茂雄) 옥천문화원장-. 주호는 그의 호(號)이며 약사(藥師)는 그의 천직이다.
약관(弱冠)을 갓 넘긴 23세 때(1965년) 약국을 개업한 그는 50세 지천명(知天命)과 60세 이순(耳順)을 거쳐 70세 고희(古稀)를 넘어서까지 고향 옥천 사랑에 푹 빠진 그야말로 옥천인(沃川人)이다. 그의 고향 사랑은 1970년대 옥천군 걸인자활단(1972년) 및 교통대상우회(1975년) 조직 등 어려운 이웃돕기 및 마을 갈등 해결 등을 위해 앞장서게 했던 동력이 됐다.
특히 고향 사랑이라는 강력한 그의 추진력이 지역사회에 돋보이기 시작하면서 옥천군약사회장(1969-1992년), 옥천청년회의소회장(1970), 3대에 걸친 옥천문화원장(5-7대, 1976-1982년), 6회에 걸친 중봉충렬제 대회장(1976-1981년)이라는 중임을 맡도록 이끌었다. 당시 지역정가는 물론 행정기관 경찰 검찰 교육청 각급 기관 단체 등에서의 그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고 충북도는 물론, 특히 보은 옥천 영동 등 충북 남부지역에서의 그의 위상은 대단했다.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조정위원(1977-2001년), 옥천군청 자문위원(1977-1990년), 영동검찰청 청소년선도위원(1984년), 직장새마을 옥천군협의회장(1984-1992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옥천군지회장(1992-2000년), 옥천군 의·약사회장(1994-2006년), 옥천군교육발전협의회장(1994-1998년), 충북개발회 장학심의위원장(1994-1998년) 등의 직함이 이를 웅변해 주고 있다.
“한평생 고향에 힘이 되고 싶다”고 한 그의 활동 영역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새마을가꾸기사업과 산림녹화사업이 한창이던 70년대 약사회와 자매결연한 군북면 보오리 등지에 우물소독약품과 회충약 지원은 물론 시멘트를 지원, 마을안길 포장 등에 힘을 보탰으며, 특히 척박한 안내면 용촌리의 헐벗은 산 166ha(50만 평)에 속성수인 현사시를 심는 등 정부의 산림녹화시책에도 앞장선 독림가이기도 했다. 당시 주변의 많은 친구들은 “당장 돈도 안 되고 오랜 세월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그것도 척박한 민둥산에 투자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며 극구 만류했지만 산림 녹화도 애국이라는 단심을 꺾지 않았다.
2002년 부인 김희성 여사와 함께 사비로 마성산(충북인력개발원~복골칼국수까지 8.2킬로미터) 오솔길 등산로 개척에 나서 3년여 만인 2005년 마무리하며 ‘드림 마운트 마성산 등산로’라 이름했다. 2016년 5월 24일 지병으로 소천하기까지 부인과 자주 찾은 곳이 바로 이 마성산이며, 이 등산로는 옥천군민은 물론 대전시민에게도 잘 알려진 등산코스다.
그가 타개한지 7년여-. 그러나 많은 옥천인의 가슴과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움은 여전하다. 그의 인물 됨됨이가 과연 어떠했는지를 웅변해 주는 대목이다. 그는 분명 옥천이 낳은 별이요 향도요 선구자요 지도자요 큰 바위였으며 고향 옥천을 가장 사랑한 이었다. 옥천을 아낌없이 사랑한 그에게 지역사회와 국가와 단체 등은 제1회 약연상(1971년), 국무총리표창장(1997년), 향토문화 공로상(1974년), 조림왕(산림청 1976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 표창장(1987년), 새마을훈장 협동장(1995년), 충북약사 대상(1996년) 등으로 응답했다.
주호의 가계(家系)
주호는 1942년 8월 16일 옥천 삼양리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는 부친 양갑수(梁甲洙) 옹과 모친 임불숙(任佛淑) 여사와의 사이에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55년 옥천 삼양초교와 1958년 옥천중을 거쳐 서울로 유학, 1961년 성남고에 이어 1965년 중앙대 약대를 졸업하고, 1965년 7월 13일 중앙약국을 개업했다. 1969년 동갑인 김희성(金喜聖) 여사와 결혼해 장녀 윤정(允禎)·차녀 희정(喜禎), 장남 영준(榮準)·차남 정환(正煥) 등 모두 4남매를 두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범가정을 이룸은 물론 농사 중에 가장 어려운 농사가 자식 농사라는데 장·차녀 모두 잘 출가시켰고 장·차남 또한 훌륭한 의사와 약사로 키웠으니 자식 농사 또한 잘 지었다는 평가다.
특히 약국 개설 후 입지의 뜻을 펼쳐가던 60-70년대, 주호 주변에는 연로한 어머님을 비롯해 어렵게 목욕탕을 운영하는 형님, 누님 매형 조카 등 그의 도움을 필요한 가까운 피붙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이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알아서 물심양면 돕는 데 앞장섬은 물론 정신적인 큰 지주가 돼 주었다. 1982년 둘째 형님이 세상을 떠나자 조카(창환)와 질녀(진숙 진영 진경) 등 1남 3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양육은 물론 대학공부에, 결혼까지 시켜 주는 등 친인척 혈육에 대한 그의 배려와 사랑이 남달라 주위로부터 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외유내강형의 그는 자라나는 4남매에 대한 가르침과 약국 직원에 대한 교육 또한 남달았고 철저하였다. 누구를 대하고 만나든 공손한 인사와 함께 친절한 미소로 맞도록 했다. 그래서 그의 약국은 ‘친절 약국’이라는 소문답게 언제나 고객들로 만원을 이뤘고 그의 주변 친구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등 다양한 인맥 형성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부인 김희성 여사와 함께 독실한 불자(佛子)인 그는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가슴에, 멋까지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나라 사랑과 고향 사랑, 자녀 지역학교 보내기 등을 몸소 실천한 이른바 국가관과 교육관이 투철했고 인생관과 소신 또한 확고했으며 무엇보다 지역공동체의 화합과 대화와 소통,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가장 중요시 했다. 이 같은 그의 인성(人性)은 후일 문화원장직 수행 및 중봉충렬제 등 크고 작은 행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중봉충렬제 추진에 전력투구
1969년 대전청년회의소를 스폰서로 해 옥천청년회의소 창립을 주도한 주호는 1970년 제2대 회장에 올라 활발한 청년활동을 선도했다. 한편으로는 1975년까지 옥천문화원 이사 및 감사직등을 수행하며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젊음을 불태웠다.
1976년 1월 주호는 문화원 이사 만장일치로 제5대 옥천문화원장에 추대됐다. 당시 전국적인 현상은 각 지역에서 문화원 주도의 향토문화예술행사가 막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경제력이 막강한 지자체 외에는 예산 확보가 어려워 행사 추진에 엄두를 못 낸 터였다. 마침 옥천에서도 금강을 테마로 한 축제, 이른바 ‘금강축제’와 48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성 싸움에서 장렬히 순국한 의병장 중봉 조헌 선생(1544년 6월 28일~1592년 8월 18일)을 기리자는 ‘중봉충렬제’ 등이 회자되던 때였다. 이에 발맞춰 주호는 그해 5월 금강축제와 중봉충렬제 등 두 행사 테마를 놓고 지역 원로 및 재경인사, 前문화원 원로 및 이사 등과 한 달여 씨름 끝에 그동안 연례행사로 추진해 온 향토민속경연대회 대신 ‘국민총화’와 ‘국력배양‘이라는 당시 시대 상황에 맞춰 중봉충렬제 행사를 추진키로 결정했다.
중봉충렬제 추진은 주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좋은 기회가 됐다. 옥천청년회의소 회장 및 문화원 이·감사 등을 통해 그동안 갈고 닦은 노하우와 리더십, 여기에다 그만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전력투구라는 파워까지 더해져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 됐기 때문이다. 그와 문화원이사들은 그해(1976년) 11월 6-7일 이틀간 이 행사를 열기로 하고 5월부터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충렬제 임원 선정 등에 나서 임원을 꾸렸다. 임원 명단은 명예대회장에 육인수 국회위원, 고문에 김정만 충청일보 MBC사장·연규횡 충북대학장·육진성 충북도교육감·이용희 국회의원·정종택 충북도지사 등 8명, 참여에 강석균·박문복·김동진·박유재·김복동·박태순·정찬용·송재만·정복규·신양호·염종훈·김재형·오정상·한현구·오충식·김은수 등 옥천 및 충북도내 각급 기관 단체장과 기업체 대표 외 재경 인사 등 모두 33명, 대회장에 양무웅, 본부임원 및 집행위원 등에 옥천군 민간단체협의회 임원·옥천문화원 임원 및 옥천청년회의소 회원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 임원과 고문 및 참여자 명단만 봐도 이 대회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하며, 주호만이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이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는 게 당시 문화원 이사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제1회 중봉충렬제 팡파르 울리다
그해 10월 중순 모든 행사 준비가 완료된 가운데 제1회 중봉충렬제 개최를 알리는 팸플릿이 발행돼 옥천은 물론 도내 각급 기관 단체 및 전국 문화원 등에 배포됐다. 브로슈어 형태의 4접지 8면으로 나온 이 팸플릿 첫 면은 중봉 조헌선생 묘소(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사진을 중간 바탕으로 행사 일시(1976년 11월 6-7일)와 장소(옥천중 운동장·안남면 도농리 중봉선생 묘소 등), 주최(옥천문화원), 주관(중봉충령제집행위원회), 협찬, 후원사 등의 이름이 올라 있다. 특히 협찬 및 후원 기관이 눈에 띈다. 충청북도와 충북교육위원회·옥천군·후율당관리위원회가 협찬 기관이고 충청일보·KBS·MBC 등 언론사와 원풍산업·은성산업·중화실업·동염·상원실업 등 지역기업이 후원사로 돼 있다.
팸플릿 2면에는 ‘제1회 중봉충렬제 개최에 즈음하여’라는 제하의 제1회 중봉충렬제 집행위원회 명예대회장 육인수 국회의원과 대회장 양무웅 문화원장의 행사개최 취지문이, 3면에는 충렬제 임원 명단이, 4면에는 11월 6일과 7일의 행사내용이 각각 실려 있다. 행사 첫날 중봉추모제를 비롯해 불꽃놀이·위안의 밤 등의 이벤트가, 행사 둘째 날 1부에서는 중봉 윤리상 시상 등의 개막식이, 2부에서는 차전놀이 등의 이벤트가 각각 안내돼 있다.
팸플릿 5면에는 44세에 관직을 버리고 옥천 안내면 용촌리에 내려와 후율당을 짓고 후학에 힘쓰다 임진년 1592년 6월 왜적의 침입을 맞아 옥천을 거점으로 충청도 일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해 8월 1일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뒤 8월 18일 금산싸움에서 칠백의병과 장렬한 최후를 마친 의병장 조헌 중봉 선생(1544-1592년)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팸플릿 6면에는 중봉 선생이 천기를 보았다는 유상지석(옥천군 안내면 용촌리)과 신도비(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후학을 가르친 후율당(옥천군 안내면 도이리) 등의 사진이, 7면과 8면에는 이 행사 협찬사인 한림식품, 속리산관광호텔, 한국도자기주식회사, 백학소주 등 충북도내 유수 기업의 광고가 지면을 장식했다.
47년간 보존된 제1회 중봉충렬제 대회사 및 대회 팸플릿…역사적 사료로 주목
그해(1976년) 11월 6-7일 이틀간 펼쳐진 제1회 중봉충렬제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개막식 날(11월 7일) 오전 10시 옥천중학교 운동장에는 이 고장 출신 육인수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재경, 재청, 충북도단위 기관단체장, 옥천군내 각계 인사, 중·고등학교 학생 및 군민 등 수 천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개막을 알리는 육군 3관구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1부 개막식은 각 읍면 대표단 입장, 축포 발사, 개식 선언, 국민의례, 국민헌장 낭독, 경과보고, 중봉조헌 선생 업적보고, 대회사, 격려사, 축사, 후손대표 인사, 중봉 윤리상 시상, 입장상 시상, 행사 안내 등의 순으로, 2부에서는 군악연주·마라톤대회·차전놀이·경로잔치·씨름대회·줄다리기·무장경기·위안의 밤 등 8개 이벤트가 각각 진행됐다.
제1회 중봉충렬제를 이처럼 자세히 묘사할 수 있게 된 것은 주호의 미망인이 이 대회 개최 이후 47년 동안 당시 대회 팸플릿과 대회사를 간직해 온 덕분이다. 이는 중봉충렬제의 역사적 사료는 물론 당시 시대상황을 엿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날 주호가 한 대회사 내용이다.
“존경하옵는 도지사님, 그리고 이 지방 출신 여러 국회의원님을 비롯한 내외 귀빈 여러분을 모시고 오늘 제1회 중봉충렬제를 개최하게 된 것을 본인은 무엇보다도 뜻깊게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건대, 현금 온 국민에게 주어진 가장 큰 지상과제는 국민총화와 국력배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인 지상 대명제를 놓고 현재 정부에서는 무엇보다도 국민총화에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옥천문화원에서는 이와 같은 정부의 역점과업에 조금이라도 뒷받침해 보자는 오롯한 생각에서 군민들과 군내 유지 및 재경인사들의 중지를 모아 그동안 연례행사로 실시해 오던 향토민속경연대회를 중봉제로 바꾸어 올해 처음으로 제1회 중봉충렬제란 이름으로 거군적인 행사를 펼치는 한편 군민총화의 디딤돌로 삼기로 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중봉선생은 임진란 때 옥천을 거점으로 의병을 일으켜 청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것을 비롯하여 많은 공적을 쌓으시고 금산싸움에서 칠백의병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 생애의 가장 보람된 4년간을 옥천에서 보내셨습니다. 선생의 나라에 대한 충렬과 위대한 업적을 금산 칠백의총의 기념비가 웅변으로 말해 주거니와 칠백의총의 주역인 의병장이 바로 중봉 조헌 선생이라는 점에서 이번 중봉충렬제 개최의 뜻이 또한 깊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군민은 이 제전을 계기로 이토록 자랑스럽고 훌륭한 분의 넋을 본고장에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긍지와 자부로 삼는 한편 군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됨은 물론 이를 길이 계승 발전시켜 온 겨레의 심장 속에 생동해 나갈 것을 굳게굳게 다짐해야겠습니다. 끝으로 오늘의 이 대회가 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지도 편달해 주신 육인수 의원님의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리오며 아울러 재경인사, 군내 각급 기관장님과 유지, 민간단체회원, 특히 옥천JC회원, 그리고 10만여 군민의 아낌없는 성원에도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오며, 이만 대회사에 갈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76년 11월 7일 대회장 양무웅.”
중봉충렬제 자리매김 위한 ‘의병장 중봉 조헌’ 책자 발간
제3회 중봉충렬제 행사를 6개월여 앞둔 1978년 5월 주호와 문화원이사들은 중봉충렬제의 굳건한 자리매김을 위해서는 중봉 관련 책자 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 책 발간을 위한 편집위원을 구성했다. 편집위원은 주호를 포함, 강계식 강태철 금영필 민병순 박효근 송병철 신상호 이기종 이인종 이정식 이정세 이정행 안후영 전대식 정진철 정두현 황순욱 등 모두 18명이며 당시 충청일보 옥천주재 이용웅 기자를 필자로 선정했다. 이 기자의 선정은 바로 1년 전인 1977년 10월부터 12월 14일까지 충청일보에 연재한 중봉전(重峰傳)이 인연이 됐다.
책 발간에는 무엇보다 중봉 관련 자료 확보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집필에 필요한 자료 확보를 위해 3개월여 간 중봉 문중과 중봉 탄생지(김포), 파주 홍주(홍성) 통진 보은 등 중봉 벼슬 임지, 임진란 때 왜적과 싸운 차령(보은) 청주 금산 등지를 대상으로 자료 수집 및 현장 답사에 나섰다.
당시 확보한 주요 문헌과 자료는 ①조헌전서(崔永禧 編) ②칠백의총자료1,2(칠백의총 관리사무소) ③충청일보 연재 중봉전(1977년 10월 30-12월 14일) ④김포군지(김포군) ⑤보은군지(보은군) ⑥청주지(청주시) ⑦금산군지(금산군) ⑧충북도지(충청북도) ⑨충북연감(충청일보) ⑩옥천군지(옥천군) ⑪중봉 조헌의 군제개혁에 대한 연구(李錫麟) ⑫구(舊)옥천읍지 ⑬칠백의사(금산교육청) ⑬김포군의 오늘과 내일(김포교육청) ⑭기타 대한 동아 한국 서울 경향 일요신문 자료 등이다.
3개월여 집필 끝에 그해(1978년) 10월 초 ‘의병장 중봉 조헌’ 제하의 초벌구이 책자(13x19cm)가 나왔다. 이어 조헌 중봉전서 편찬에 직접 참여한 충북대 金鎭鳳 李錫麟 교수, 중봉 선생 후손(趙鍾洛) 등의 감수와 조언을 거쳐 10월 26일 초판이, 12월 1일 증보판이 각각 발행됐다.
금산혈전순절도(錦山血戰殉節圖·칠백의총 소장)를 표지로 한 이 책자는 242쪽 분량으로 송사와 발간사 발간축사, ‘조헌의 가보’를 시작으로 ‘신도비 칠백의총 증수기념비문’에 이르기까지 76개 목차로 이뤄져 있다. 또한 초중고 학생 및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목차 내용에 따라 중봉 묘소(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1675년 왕 명에 의해 세워진 우저서원(牛渚書院·김포군 감정리), 31세 때(1574년 선조 7년) 칠정관으로 명나라에 가고 오며 쓴 기록 ‘조천일기(趙天日記)’, 제자를 양성하며 의병을 일으킨 후율당(後栗堂·옥천군 안내면 도이리), 1589년(선조 22년) 옥천에서 도끼를 안고 상경해 대궐 앞에 엎드려 국방을 강화할 것을 상소한 ‘극방강화상소도(國防强化上疏圖·칠백의총 소장)’, 1592년(선조 25년) 임진란 당시 제자들과 함께 국왕을 보위하고 강토를 수복할 의병을 모으자고 궐기하고 나선 ‘근왕창의도(勤王倡義圖·칠백의총 소장)’, 1592년 7월 4일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의병들과 함께 웅진(공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의자(義字)의 기치 아래 오직 군령과 진격만을 생각하자고 맹세하는 ‘토적맹약도(討賊盟約)圖·칠백의총 소장)’, 1592년 8월 1일 ‘청주성탈환도(칠백의총 소장)’, 죽음을 각오한 중봉 휘하의 700여 의병과 영규대사 휘하의 300여 승병이 최후의 결전지인 금산을 향해 출전하는 ‘금산혈전출진도(錦山血戰出陳圖·칠백의총 소장)’, 1592년 8월 18일 중봉의 700여 의병과 영규의 300여 의병이 최후의 일각까지 용전분투, 순절한 ‘금산혈전순절도(錦山血戰殉節圖·칠백의총 소장)’ 등 사진과 그림 21점을 실었다. 발간된 ‘의병장 중봉 조헌’ 책자는 곧바로 옥천 및 충북도내 일선 학교와 시군, 전국 문화원 등에 배포됐다.
특히 옥천문화원 이름으로 발행된 이 책자에는 당시 동국대학교 리선근 총장의 ‘중봉 조헌 선생의 순국충혼에 바치는 송사(頌辭)와 주호의 발간사, 육인수 국회의원과 김성균 박사(前국사편찬위원장)의 발간축사가 각각 실려 중봉충렬제는 물론 옥천문화원의 인지도와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옥천의 큰 별 지다
주호 양무웅 문화원장은 2016년 5월 24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74세-. 100세를 구가하는 시대에 그의 비명(非命)은 지역사회에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충남북 일간지와 지역지 등에 부고와 함께 생전의 업적을 기리는 기사가 실렸고, 장례기간 동안 1,300여 문상객이 조문했다.
장례식은 옥천문화원장(沃川文化院葬)으로 치러졌다. 주호는 가족묘원(옥천군 군북면 환평로 853 갈마당 숭모공원)에 안장됐다.
옥천문화원에서 치러진 주호 양무웅 원장 장례식에서는 많은 인사들이 추모사를 했다. 이 가운데 주호의 죽마고우 안후영 前옥천예총회장(국가보물 이지당 대표)의 추모사가 추모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그는 추모사를 통해 “양무웅 원장님! 우리 친구들과 당신을 좋아하는 그 많은 사람들은 어찌하라고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까? 옥천에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하늘로 가기엔 너무도 아쉬운 일흔다섯의 나이지만, 성취한 많은 봉사활동과 문화사업들이 100세 이상의 삶과 같은 업적입니다. (중략) 약국 개업 50년 동안,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원로로, 옥천을 지키다가 고희를 넘어 병마와 9년간 의지의 투병 생활을 잘 이겨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유고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중략) 옥천의 문화와 지역발전을 위해서 38세의 젊은 나이에 옥천문화원장 취임 후 12년 동안 재직하면서 충북에서 세 번째 문화축제인 중봉충렬제를 처음으로 만들어 지역의 문화발전과 화합에 크게 이바지하셨습니다. 옥천JC회장, 새마을협의회회장, 대학유치추진위원장으로···, 그렇게 당신은 살기 좋은 고장이 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라며 주호를 떠나보내는 안타까움을 애도하며 그의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한편 주호 장례식이 치러진 후 미망인 김희성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생전에 그가 몸담아 애정과 정열을 쏟았던 옥천문화원과 옥천군새마을지회, 옥천군장애인협회, 그리고 지역 언론 창달에 앞장선 옥천신문 등에 각 500만 원씩 모두 2,000만 원을 후원했다.
이제 고향 옥천이 주호를 기억할 때다
주호 양무웅 원장이 타계한 지 올 해( 2023년 11월 )로 만 7년째다. 중봉충렬제가 탄생한 지 48년이란 세월이 흘러 앞으로 2년 후(2025년) 50주년을 맞는다. 이제는 옥천이 주호의 업적을 기억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2021년 5월 29일(토) 오전 11시 30분부터 주호 가족묘원(군북면 환평로 853 갈마당 숭모공원)에서는 유가족과 주호 생존 당시의 절친 등 30여 명이 모여 ‘주호 양무웅 원장 5주기 추모 헌다례(獻茶禮)’를 거행했다. 이 행사는 안후영 前옥천예총회장 내외가 주선한 것으로 참석자는 주호의 절친인 안철호 블루마운틴 주식회사 회장(충북도의회 부회장) 내외, 박효근 前옥천문화원장(1987-2001년) 내외, 이용웅 前연합뉴스충청취재본부장 내외, 이명석 前동부건설주식회사이사 내외 등 12명이다.
이날 행사에서 안철호 회장은 “옥천청년회의소를 창립하고 중봉충렬제를 창건한 장본인, 양무웅 동지의 큰 업적은 길이 남을 것”이라 추모했다. 박효근 前옥천문화원장은 “옥천의 큰 별, 옥천 문화의 꽃을 피운 문화일꾼, 당신 양무웅은 선각자였다”고 추도했다. 안후영 前옥천예총회장은 “백년을 철마처럼 달리다가 불꽃처럼 살다간 임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고 추도했다.
필자의 고향은 대전이다. 그러나 충청일보 주재기자와 연합뉴스(당시 연합통신) 충북 남부지역(보은 옥천 영동) 특파원으로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옥천에 대한 정이 듬뿍 들었고 옥천 벗과 이웃이 좋아 어쩌다 옥천이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 됐다.
이날 행사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필자는 주호에 대한 추모행사가 몇몇 절친 및 지기(知己)만의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웃사이더인 필자 입장에서 보아도 주호가 고향을 지키며 베푼 사랑이 참으로 큰 데 그의 타계 후 그를 기리거나 추모하는 그 어떤 모임이나 행사, 이벤트 등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주호가 몸담아 자신의 젊음과 정열을 불살랐던 옥천JC나 옥천문화원에서 중봉충렬제 행사 때 그의 업적을 기리는 ‘향토 봉사상’이나 ‘향토 문화상’을 제정해 자라나는 세대에 알리는 데 앞장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그의 업적이나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우는 문제도 검토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좋은 역사든 좋지 않은 역사든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혹자의 말처럼 옥천 향토문화역사의 한 획을 그은 주호를 기억하는 지역사회를 기대해 본다.
참고 문헌 및 자료
▲옥천문화원 및 옥천JC 자료(1976-1982) ▲양무웅 前문화원장 문중 자료 ▲안후영 前옥천예총회장 소장 자료(2016-2023) ▲제1회 중봉충렬제 팸플릿(옥천문화원.1976, 10) ▲중봉전(충청일보 연재 1977, 10-12,14) ▲조헌전서(최영희 編)▲의병장 조헌 중봉(옥천문화원.이용웅 엮음.1978, 10) ▲칠백의총자료 1.2(칠백의총 관리사무소.1978) ▲임란 의병장 조헌(이석린 著.옥천군.1993, 8.30) ▲옥천신문(2016, 5.13, 5.27) ▲충청타임즈(2013, 8.2) ▲동양일보(2016, 5.25) ▲옥천향수신문(2016, 5.26) ▲충청매일(2016, 5.26) ▲충북일보(2016, 5.27)
이용웅(前연합뉴스충청취재본부장·컬럼니스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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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옥천향토문화 ( 옥천향토사연구회 2023년도 발행)
옥천문화 ( 옥천문화원 2023년도 발행)
책자에 원고를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