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의 여섯 번째 열매인 양선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난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자비나 양선은 두 단어끼리도 좀 비교가 어렵기도 하고 또 평상시에 우리가 잘 쓰지 않는 용어들이고, 또한 성경이 본래적으로 의미하는 용어와 번역된 우리 말과도 괴리감이 되게 커서 좀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오늘의 양선은 영어로는 굿니스예요. 그래서 착함, 선함, 진실됨 이렇게 번역되는 단어이고, 헬라어는 아가도 시내라는 단어인데 이게 이거는 호이라는 아가도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양선이 어떤 의미냐는 것을 그냥 제가 이해하는 선에서 한 두 가지로 구분을 하면 첫 번째로는 양선은 착한 행동 플러스 거룩한 삶이 가미되는 것이 양선이다. 그러니까 좋은 마음과 거룩한 삶이 함께 융합된 것이 양선이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양선은 그냥 착한 마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이 착한 마음에 거룩한 삶이 덧입혀져 있는 것을 양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양선은 성령의 성품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계속 공부하고 있는데 이 성령의 열매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온전히 맺을 수 있는 열매예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과일 나무에 꽃이 피고 그래서 열매가 맵고 무루 익어서 먹을 때까지 실제로 우리 손에 들어오는 그 과일은 되게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리 손에 들어온 과일인 거예요.
우리 꽃도 이렇게 우리가 서로 이렇게 납가를 하듯이 꽃도 이렇게 서로 많이 뜯어지 뽑아내죠. 제가 정확한 용어를 잘 모르겠는데 잊어버렸어요. 옷도 많이 이렇게 솟고 열매도 많이 솟고 그리고 자랐을 때도 온전하지 못한 열매들은 다 이렇게 솎아내고 마지막에 우리 손에 들어오는 열매는 아주 극소수인 거죠.
저는 포도나무의 모든 포도를 다 따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많이 속아내는 줄 최근에 알았어요. 저는 포도 농사는 안 지어서 다른 농사는 지었지만 그래서 정말 많이 속아내는구나. 그리고 우리가 먹는 것은 정말 많은 경쟁을 이기고 올라온 과일을 먹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양선이라는 열매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오랫동안 성령 충만해야 맺을 수 있는 열매라는 의미예요. 과일에 꽃이 피고 열매 먹고 물이 익어서 우리가 먹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이 양선이란 열매도 우리가 오랫동안 성령 충만해야 성령으로 충만한 시간이 무르익고 길어야 여러분과 제가 맺을 수 있는 열매라는 겁니다. 착한 마음은 아름답고 되게 멋있어 보여요. 착한 사람 좋은 사람 할 때 착하고 좋으면 되게 멋있어 보여요.
그런데 착함에는 그냥 제 생각이에요. 힘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의 양수는 되게 힘이 있는 건데 이 착함에다가 거룩함이 동반되어서 이 양선이 아주 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착한 사람이기도 해야 되지만 동일하게 거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착함과 거룩함이 함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품적으로 착함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착함과 거룩함이 병행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바탕이 되지 않는 착함은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보면 성격은 착하지는 않는데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있어요.
이렇게 이렇게 조율해 봤을 때 봤을 때 그 사람은 성격적인 면에서는 착함이 좀 다른 사람은 못하지만 거룩한 영역에서 하나님께 학적등을 받아서 쓰임 받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양선은 착함과 거룩함이 함께 내재된 단어이다.
두 번째로 양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맡기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맡기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받아서 삶의 선을 행하는 것이 양선인 겁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은혜와 공유를 베푸는 것은 의미하는 건데, 이것도 동일하게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성품인 거예요. 내가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를 염려하고 누군가에게 공급을 해요. 그런데 그 공급에 성령이 함께하지 않으면 힘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힘 있게 돕지를 못해요. 그래서 양선이라는 이 단어는 반드시 성령 충만을 전제로 한 용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완성되는 성품이 양선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할 때 100% 그 가치를 발휘한 성품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선하게 살려고 하는 것보다 착하게 살려고 하는 것보다 성령 충만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 더 필요한 거예요. 착함과 선함은 사람이 우리는 선악서를 믿잖아요. 기본적으로 죄인으로 우리가 태어난 거죠. 마귀의 자녀 예수 믿기 이전에 심지어 마귀의 자녀였고 마귀에게 속한 자였잖아요.
근데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소속이 바뀌고 신분이 바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따지면 우리는 선함으로 일하는 건 한계가 있는 사람이죠. 애초부터 그래서 선함보다는 어디에 집중해야 되냐 성령 충만에 더 집중해야 되는 거예요.
우린 가끔 사람의 선함에 집중할 때가 있어요. 근데 선한 사람들을 착한 사람을 이렇게 써보면 실은 착한 사람은 없더라고요. 그렇게 착한 사람도 언젠간 성질 내고, 그렇게 착한 사람도 언젠간 집중하는 행동을 하고, 그렇게 착한 사람도 언젠가 이상한 짓을 해요. 짓이라는 용어를 써서 죄송한데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선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착함보다는 오히려 성령 충만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집중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양선이라는 단어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단어예요. 갈라디아서 6장 10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에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10절에 착한이라는 이 단어가 아가도스이고 이 아가도스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양선의 어원인 거예요. 그러니까 기회에 있는 대로 착한 일을 시간이 허락되는 일로 때로는 대로 착한 일을 하라는 거예요.
근데 이 착한 일은 인간적인 착함이 아니라 성령이 동반된 착한 일을 하라는 거죠. 우리는 성도들에게 성령과 함께하는 성령이 동반하는 착한 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사람이에요. 이 양선을 세상 밖에서도 우리가 해야 되는 성품이긴 하지만 교회 안에서 특별히 성도들에 대해서 양선을 행하라고 성경은 아주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 이렇게 기록했어요.
양선은 기회가 되는 대로 성도와 교회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성령과 동행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양선은 한 착함 이상의 영향력을 그 것과 내면에서 발휘하는 것이 양선이에요. 그러려면 반드시 성령과 동행해야 된다. 그러니까 성령과 동행할 때 성품을 뛰어넘는 사역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위로를 하는데 내가 사람이 본질적으로 착해요. 그래서 말을 세게 할 줄도 모르고 정말 겸손하게 말을 해요.
근데 여러분 그 말이 그 착한 말이 진짜 힘 있어지려면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이 성도들에게 닿을 때 동력자들에게 닿을 때 위로가 되고 평안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양선은 행하는 이에게 양서는 받는 이에게 착함 이상의 영향력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양선은 특별히 성도들에게 믿음의 가정들에게 부지런히 열심히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착함 이상의 영향력이 있는 뭔가가 우리에게서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그냥 우리가 슬프니까 슬프니까 슬퍼하고 위로해 주는 것에 이상이 뭐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마음이 착해서 그냥 배려해주고 염려해 주는 뭔가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 힘이 발휘하게 하려면 반드시 성령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선은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지만 교회와 성도가 꼭 가져야 하는 단어이에요. 그리고 이 양산을 가지기 위해서는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된다. 그래서 마치 과일이 여러 가지 소가나 이런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먹는 맛있는 과일이 되는 것처럼 이 양손도 내 착한 마음도 성령 아래 오랫동안 이렇게 물들어 있어야 이 착함이 선한 영향력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이 성품들이 성령의 오래 안에 이렇게 담겨져 있어서 서로에게 영향력이 되는 성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도 그게 가장 부러운 교회이고 또 목회자의 모습이에요. 이제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좀 영향력이 전해지는 참 그러려면 정말 목회자나 성도들이 성령이 오랫동안 이렇게 잠겨 있어야 되더라고요. 푹 잠겨 있어야 그래야 사역하고 결정하는 것들이 그러니까 이런 거죠. 저에게 왔다 하면 막 교인들이 다 힘을 얻는 거예요. 누구든 애들도 왔다 가며 막 힘을 얻고 성도들도 저에게만 왔다 가면 막 힘을 얻는 거예요.
특별히 말을 하지 않는데 이제 이 선함이 성령이라는 성령에 오랫동안 잠겨 있어서 선함이 이렇게 영향력이 된 거예요. 그런 성품의 주인공이 비록 우리 지금은 아니지만 지금은 한참이나 좀 멀어져 있지만 우리가 좀 더 연배가 들었을 때 우리에게 그런 게 있다면 여러분 교회가 크고 화려한 것보다도 훨씬 멋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