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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시집 제2권 2-3 2 회구懷舊 옛을 생각한다
3 기지명념석유야紀地名念昔遊也땅 이름을 기록함은 예전 놀던 것을 생각함이다
대동증북도大同曾北渡 대동강을 일찍이 북으로 건너
살수망귀주薩水望歸舟 청천강[薩水]에서 돌아가는 배를 바라보았네.
압도료천원鴨渡遼天遠 압록강 나루터는 요동 하늘 가에 먼데
어천향령부魚川香嶺浮 어천魚川 내에는 묘향산이 떠 보이는구나.
수평두만야樹平豆滿野 두만강 들에는 나무들이 질펀하고
파활로강추波闊老江陬 독로강[老江]가에는 파도가 굽이지네.
연하청천구沿下晴川口 물길 따라 맑은 내의 어구로 갈 때
관서일엽추關西一葉秋 관서의 한 지경에 가을 짙었네.
(위의 것은 관서關西를 읊은 것이다)
►대동강大同江
한반도에서 5번째로 큰 강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대흥군의 랑림산맥의
한태령(1,356m)에서 발원하여 평양직할시·남포특별시·황해북도·황해남도를 지나 황해로 흐른다.
강의 길이는 439km이며 수심이 깊은 편이다.
하류에는 평양직할시가 위치해 있으며 강 유역에는 고구려 유적지가 많다.
유역 형상은 평행형 유역이다.
고구려 왕국은 그 기슭에 세워졌다.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걸쳐 유적지와 고구려 유적뿐만 아니라
강가에 있는 많은 고고학적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또한 패강으로 알려졌다.
평양에 위치한 대동강에는 청류교, 옥류교, 릉라교, 대동교, 양각교,
충성의 다리를 포함하여 6개의 다리가 있다.
서해갑문 등의 갑문이 있다.
한때 동조선만과 연결하는 운하가 구상되었다.
대동강은 과거 패수浿水 또는 패강浿江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패수'는 원래 특정한 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국경의 강'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다.
예를 들어 고구려 장수왕이 위례성을 점령한 475년 전까지 백제에게 패수는
북쪽의 낙랑, 고구려와 국경이었던 예성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동강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와 당나라가 합의한 국경으로
통일신라의 국경 하천인 패수浿水가 되었는데
이후에 패수는 대동강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살수薩水
대부분이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라 한다.
그러나 문헌적으로 고증해야할 부분이 많다.
<살수대첩>
612년(영양왕 23)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전개된 주요 전투의 하나이다.
고구려 측의 지휘관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고
수나라 측의 지휘관은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 등이었다.
612년 7월 살수薩水에서 전투하였는데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다.
612년 수나라의 양제煬帝는 113만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육군은 40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는데 각 부대를 軍이라고 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40개의 군 중에서 9군을 지휘하였다.
9군의 병력 수는 30만 5천 명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의 9군은 노하진潞河鎭과 회원진懷遠鎭에서 출진하였다.
노하진과 회원진은 랴오허강[遼河江] 서쪽에 설치된 수나라의 군사 거점이었다.
처음 그들의 집결지는 압록강 서쪽이었다.
출발할 때 人馬 모두 100일치의 식량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별도의 군수 보급 없이 압록강 서쪽까지 빠른 속도로 행군하도록 한 것이다.
압록강 서쪽에 먼저 집결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이후 양제가 이끄는
수나라 주력부대가 도착하면 합류해 남쪽으로 나아갈 계획이었다고 보인다.
612년 전쟁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것은 3월부터였다.
랴오허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의 도하를 저지하며 방어에 나섰던 것이다.
수나라 군대가 도하에 성공한 것은 4월 중순이었다.
이때부터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 고구려의 여러 성은 守城戰을 전개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도 4월 중순 이후 랴오허강을 건넜다고 파악된다.
우중문이 이끈 부대의 경우 오골성烏骨城
즉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鳳凰山城을 경유하였다고 한다.
9군의 이동경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는데 대체로 랴오허강을 건너
압록강 하구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서안에 집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6월 중순까지 랴오닝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성은 건재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식량 부족에 직면하였다.
9군은 처음 노하진과 회원진에서 출발할 때 100일치의 식량뿐만 아니라
무기와 각종 군수물자를 보급 받았는데 병사마다 3섬 이상의 무게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동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식량을 버리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장수와 병졸 모두 장막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이미 식량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이때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을 상대한 것이 고구려의 을지문덕이었다.
을지문덕은 압록강을 건너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군영으로 갔다.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살펴본 것이다.
다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온 을지문덕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우중문은 기병을 선발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는데
을지문덕은 싸울 때마다 거짓으로 패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고 한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계책은 지리를 통달해 알았네.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할 줄 알면 멈추길 바라노라
우중문은 편지를 보내 회유하였지만 을지문덕은 거절하였다.
을지문덕은 압록강 동쪽에 설치한 울타리를 불태우고 도망쳤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을 유인하고자 한 것이다.
우문술은 양식이 부족하므로 회군하고자 하였지만
우중문은 추격해 전공을 세우고자 하였다고 한다.
둘 중에 양제에게 보다 큰 권한을 위임받은 우중문의 견해가 채택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지점까지 왔다.
산에 의지해서 군영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우중문 등은 내호아來護兒의 水軍과 합류할 계획이었다고 보인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내호아는 대규모의 선단을 이끌고 東萊
즉 지금의 山東省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대동강 입구까지 왔다.
그리고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포구에서 주둔하였다.
내호아 수군의 주된 역할은 식량 운송이었다.
우중문 등은 내호아의 부대로부터 식량을 보급 받으면
평양성 공격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내호아의 부대는 포구에서 고립된 처지였다.
고구려군의 거짓 패배에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부대만으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가 대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내호아의 水軍에 합류할 수 없었다.
식량 부족에 따른 압박은 가중되었다.
이러한 때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파견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회군한다면 영양왕을 모시고 가서 수 양제에게 조회하고 알연하겠다고 한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 측에 회군할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결국 회군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곧 그들을 추격하였다.
9군의 지휘관 중의 하나였던 설세웅薛世雄은 평양성에서 퇴각하면서 白石山까지 왔는데
고구려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었고 사면에서 화살 공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간신히 탈출하였지만 잃은 병력이 많았다고 한다.
고구려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전투는 살수에서 전개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7월 24일 살수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고구려군은 그들이 살수를 반 정도 건넜을 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뒤에서부터 後軍을 공격하였다.
수나라 장군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시켰다.
수나라의 여러 부대를 모두 무너뜨리고 마비시켰다.
수나라 여러 부대의 장수와 사졸은 달아나 도망치기 급급하였다.
만 하루 만에 압록강까지 도망쳤다고 하였다.
살아서 랴오닝성에 귀환한 자가 불과 2천7백 명이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이 퇴각하자
포구에 고립되어 있던 내호아의 부대 역시 퇴각하였다.
수 양제 역시 9군의 패배를 보고받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수전투의 큰 승리로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종결된 것이다.
살수대첩은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의 결정적 전투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을지문덕乙支文徳
三國史 記卷 第四十四 列傳 第四
을지문덕乙支文徳
미상기세계未詳其世系 그 세대와 가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자침지유지수資沈鷙有智數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꾀가 있으며
겸해속문兼解屬文 겸하여 글 짓는 것도 해박하다.
수개황중양제隋開皇中煬帝 하조정고구려下詔征髙句麗
수나라 개황 연중(598)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어시좌익위대장군우문술扵是左翊衛大將軍宇文述 출부여도出扶餘道
그래서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이 부여도로 출진하고
우익위대장군우중문右翊衛大將軍于仲文 출낙랑도出樂浪道
우익위 대장군 우중문이 낙랑도로 출진하였다.
여구군지압록수與九軍至鴨渌水 9군과 함께 압록수에 이르렀다.
문덕수왕명예기영文徳受王命詣其營 문덕이 왕명을 받아 그 군영에 알리기를
사강실욕관기허실詐降實欲觀其虗實
“거짓으로 항복할 것이니 실은 그 허실을 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술여중문선봉밀지약우述與仲文先奉密㫖 술과 중문이 먼저 밀지를 받들었으니
약우왕급문덕래즉집지若遇王及文徳来則執之
"만약 왕 및 문덕을 만나면 즉시 잡아오라." 고 하였다.
중문등장류지仲文等将留之 중문 등이 장차 머무르게 하였다.
상서우승류사룡尚書右丞劉士龍 위위무사고지지爲慰撫使固止之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가 되어 완고히 말렸다.
수청문덕귀심회지遂聽文徳歸深悔之
마침내 문덕이 듣고서는 돌아가자 깊이 후회하였다.
견인급문덕왈遣人給文徳曰 사람을 보내 문덕에게 말하여 주길
경욕유의가부래更欲有議可復来
“더 의논하려고 하니 다시 오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문덕불고文徳不顧 수제압록이귀遂濟鴨渌而歸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마침내 압록을 건너 돌아가버렸다.
술여중문기실문덕述與仲文既失文徳 내부자안内不自安
술과 중문이 이미 문덕을 잃어 내심 스스로 불안하였다.
술이량진욕환述以粮盡欲還 술이 군량이 다하자 귀환하려 하였다.
중문위仲文謂 중문이 이르기를
이정예추문덕以精銳追文徳 가이유공可以有功
“정예병으로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세울 수 있다.” 하였다.
술지지述止之 술이 말렸다.
중문노왈仲文怒曰 중문이 노하여 가로되
장군복십만병將軍伏十萬兵 불능파소적不能破小賊
“장군이 10만병을 끼고도 능히 소적을 격파하지 못하니
하안이견제何顔以見帝 무슨 낯짝으로 황제를 알현하겠소?”
술등불득이이종지述等不得已而従之 술 등이 부득이하여 따랐다.
도압록수추지문덕度鴨渌水追之文德 압록수를 건너 문덕을 추격하였다.
견수군사유기색욕피지見隋軍士有饑色欲疲之
수나라 군사를 보니 피곤하고 굶주린 기색이 있었다.
매전첩북每戰輙北 매번 싸우면 번번이 달아났다.
술등일일지중칠전개첩述等一日之中七戰皆捷
술 등이 하루에 7번 싸워 모두 이기니
기시취승既恃驟勝 우핍군의又逼群議
이미 여러 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무리들을 몰아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다.
수진동제살수遂進東濟薩水 거평양성삼십리去平壤城三十里
마침내 동쪽으로 진격하여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앞으로 갔다.
인산위영因山爲營 때문에 산에 군영을 지었다.
문덕유중문시왈文德遺仲文詩曰 문덕이 중문에게 시를 보내 가로되
신책구천문神䇿究天文 신비한 책략은 천문을 연구했고
묘산궁지리妙筭窮地理 묘한 수는 지리에 통달 했구나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髙 전승의 공이 이미 높은데
지족원거지知足願去止 족한 줄 알면 그만두고 가시길 원하오.
중문답서유지仲文荅書諭之 중문이 답서로 회유하였다.
문덕우환사文徳又還使 사강청어술왈詐降請於述曰
문덕이 또 사신을 돌려보내며 거짓으로 항복하며 술에게 청하여 가로되
약선사자若旋師者 당봉왕조행재소當奉王朝行在所
“만약 승전하여 회군하시면 마땅히 왕을 받들고 조정에 갈 것이오.” 하였다.
술견사졸피폐述見士卒疲弊 불가부전不可復戰
술이 사졸들을 보니 피폐한지라 다시 싸울 수 없었다.
우평양성험고又平壤城險固 난이졸발難以捽拔
또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뺏기가 어려웠다.
수인기사遂因其詐 이환위방진이행而還爲方陣而行
마침내 그 거짓 때문에 돌이켜 방진을 짜서 갔다.
문덕출군文徳出軍 사면초격지四面鈔擊之 문덕이 군을 4면으로 출진시켜 습격하였다.
술등차전차행述等且戰且行 술 등이 또 싸우고 또 행진했다.
지살수군반제至薩水軍半濟 살수에 이르러 군의 절반이 건너갔다.
문덕진군文德進軍 격기후군擊其後軍 살우둔위장군신丗웅殺右屯衛將軍辛丗雄
문덕이 진군하여 그 후군을 공격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어시제군구궤於是諸軍俱潰 불가금지不可禁止
그래서 모든 군이 전부 무너져 금지하기 어려웠다.
구군장사분환九軍將士奔還 일일일야一日一夜 9군 장사들이 달아나 하루 밤낮으로
지압록수至鴨渌水 행사백오십리行四百五十里 압록수에 이르니 450리를 돌아갔다.
초도료구군初度遼九軍 삼십만오천인三十萬五千人
처음에 요수를 건널 적에 9군이 305,000인이었으나
급환지료동성及還至遼東城 유이천칠백인唯二千七百人
돌아갈 적에 요동성에 이르니 오직 2,700인이었다.
론왈論曰 논하여 가로되
양제료동지역煬帝遼東之役 출사지성出師之盛 전고미지유야前古未之有也
양제 요동의 역에 출진한 군대의 왕성함은 전래 고금에 아직 없었던 것이었다.
고구려일편방소국髙句麗一偏方小國 이능거지而能拒之
고구려는 한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였으나 능히 막았다.
불유자보이이不唯自保而已 오직 자신을 보전만 한 것이 아닐 뿐더러
멸기군기진자滅其軍幾盡者 문덕일인지력야文德一人之力也
그 군을 멸하여 거의 다 죽인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다.
전왈傳曰 좌전에 가로되
불유군자不有君子 기능국호其能國乎 신재信哉
“군자가 없으면 그 나라가 버티겠는가?” 하였으니 정말이구나!
좌전佐傳 좌전에서
양중왈襄仲曰 양중이 말했다.
불유군자不有君子 기능국호其能國乎 군자가 없으면 그 나라가 버티겠는가?
국무루의國無陋矣 나라는 작음이 없다(작은 나라도 군자가 있으면 버틸 수 있다)
대교청만첩臺嶠靑萬疊 오대산은 푸르름이 만첩萬疊이었고
풍악백천층楓岳白千層 풍악산은 흰 것이 천층千層이었네.
국도파뢰장國島波雷壯 국도國島에는 파도가 천둥 같았고
총정석주릉叢亭石柱稜 총석정엔 돌기둥이 모나 있었네.
사명삼일포沙明三日浦 모래는 삼일포에 밝아 있었고
태식륙서릉苔蝕六書陵 이끼는 육서릉에 끼어 있었네.
발해련천활渤海連天闊 발해는 하늘에 연하여 넓고
삼산악가잉三山樂可仍 삼신산의 불사약은 그대로 있나?
(위의 것은 관동關東의 名山을 읊은 것이다)
►풍악楓岳 금강산
<금강산 이름> /<동국여지승람>
1 금강산金剛山-봄ㅋ
2 개골산皆骨山
3 열반산涅槃山
4 풍악산楓嶽山
5 기달산怾怛山
봄 -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이므로 금강
여름 - 봉우리와 계곡에 녹음이 무성하므로 봉래蓬萊
가을 - 1만 2000봉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기 때문에 풍악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지고 나면 암석만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
►국도國島 강원도 통천군 자산리에 있는 섬.
국도國島의 넓이는 약 0.1㎢, 둘레는 약 1.3㎞.
소동정小洞庭이 보이는 곳에 있으며 참대가 잘 자란다고 하여 죽도竹島라 불렀다.
그러나 일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 섬에서 자란 대나무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사용한 뒤부터 이 섬은 국토방위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아
‘나라의 섬’이라는 의미로 '국도'라고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섬의 생성 시기는 신생대 제3기 말∼제4기 초로 추정되며 화산에서 분출한
현무암 주상절리가 육각 돌기둥을 묶어세운 것처럼 서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섬 위에는 오래된 소나무와 참대가 자라며
절벽에는 갈매기와 오리를 비롯한 많은 바닷새가 서식한다.
섬 주변에는 수산자원이 풍부하며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삼일포三日浦 강원도 고성군 삼일포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률호추수만律湖秋水滿 율호律湖엔 가을 물이 가득하고요
벽골만운평碧骨晚雲平 벽골제碧骨堤엔 저녁 구름 질펀하구나.
망원산무등望遠山無等 바라보니 무등산無等山이 멀리 있고
정요곡유앵程遙谷有鸎 길 가자니 유앵곡有鸎谷은 저쪽에 보이네.
향갱풍옥구香秔豐沃溝 향긋한 벼는 옥구 들에 풍성하고요
상귤영장성霜橘映長城 서리 맞은 귤이 장성읍에 영롱하구나.
준해남유처遵海南遊處 바다 따라 남으로 놀이 가는 곳
진산옥과영珍山玉果榮 진산珍山과 옥과玉果읍도 번영하였네.
(위의 것은 호남湖南을 읊은 것이다)
경주이경폐慶州已經廢 경주 이미 서울은 폐지되었고
안동증피융安東曾避戎 안동에서 일찍이 난리 피했네.
청하봉성서清河逢聖瑞 청하淸河는 성스러운 상서 만났고
제해우인동際海遇仁同 바닷가에 인동仁同 고을 만나게 되었네.
진보산하고真寶山河固 진보眞寶읍은 산과 내가 견고하였고
현풍덕화륭玄豐德化隆 현풍玄豐 지방 덕화가 융성도 하다.
례천류담담醴泉流湛湛 예천醴泉에서 단술이 넘쳐흘렀고
진패도룡궁珍貝到龍宮 귀한 보배 용궁龍宮에 도달하였네.
(위의 것은 영남嶺南을 읊은 것이다)
►난리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安東으로 갔었다.
산천에 험한 골짜기 많았지만
지경이 비옥하고 호구가 번창하여 人材가 퍽 많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