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창조적 인간, 예술가인 인간은
소진을 통해서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영역이라는 들뢰즈의 통찰
https://youtu.be/RfoqELZWcp8?si=PChGB-9NX3PH5eWp
소진된 인간 -질 들뢰즈
소진된 인간
(-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
-질 들뢰즈 지음/이정하 옮김/문학과 지성사
다시 한 번 시도하기. 다시 한 번 망쳐버리기. 다시 한 번 더 잘 망쳐버리기.
-사뮈엘 베케트, <최악의 방향으로>에서
극화는 개념 이편, 그리고 개념이 포섭하는 재현 이편에서 작용한다. 사물의 현실적 구성이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시간과 공간이 드러날 때, 개념 속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물은 하나도 없으며, 재현 상태 그대로의 유사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물 또한 하나도 없다. …… 카오스모스라 할 이 세계의 탄생, 그리고 주체 없는 운동들과 배우 없는 배역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는 필연적으로 뭔가 잔혹한 것이 있다.
-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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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이 책 옮긴이 서문에 인용되어 있는 베케트와 들뢰즈의 문장들입니다.
‘주체 없는 운동들과 배우 없는 배역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의 필연적인 잔혹성.’
저는 이 부분에서 뭔가 가슴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고도를 기다리며>로 살짝 접해 보았던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 4편에 대한 들뢰즈의 짧은 해제입니다.
총 187페이지의 이 얇은 책 안에는 오리무중의 베케트 작품들과, 더 복잡한 들뢰즈의 해제에 이어 이 글을 번역한 옮긴이 이정하 교수의 더욱 심도깊은 난이도의 작품 해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정하 교수의 해제는 들뢰즈의 이 글에 대한 해제라기보단 이교수 자체의 들뢰즈 분석, 전공인 영화학, 나름의 철학들을 펼쳐보인 또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느껴졌습니다.
읽은지 며칠 지났다고 책을 다시 들춰 보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부분들이 없이 생소합니다. 이러다간 완전히 백지화되는 건 시간 문제인 것 같아, 줄 쳐놓은 부분들을 위주로 글을 써보려 키보드를 잡았습니다.
이 책의 뒷쪽에는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 4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단편극들을 읽으며 느낀 점은.. 제가 읽었던 <고도를 기다리며>는 굉장히 친절한 책이었구나 ~ 하는 점이었습니다.
단편극들의 글은 매우 짧지만,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동선, 공중에 띄운 이미지들과 음악, 목소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리둥절해 하는 시간이 극을 읽는 시간보다 더 길어졌습니다.
들뢰즈가 쓴 해제를 읽으면 무언가 보일 것인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기대하게 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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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가 읽은 들뢰즈의 글에서의 인상적인 부분들을 가져와 봅니다.
*— 들뢰즈는 자세를 예로 들며 ‘피로’와 ‘소진’을 구분합니다.
누워있는 인간의 자세는 소진보다는 ‘피로’에 어울리는 자세라고 말합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세인데다, 몸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돌아눕거나 기어갈 수 있는 여지, 가능성이 다분한 자세입니다.
앉은 상태에서 오그라든 손 위로 머리를 푹 숙인 자세는 ‘소진‘과 관계가 있습니다. 앉아 있으므로 회복될 수 없고, 추억을 뒤적일 수도 없으며 그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끔찍한 자세입니다.
*— 언어는 가능한 것을 명명합니다.
이름 없는 것, 이 대상들의 조합, 이 “조합하기가 말로써 가능한 것을 소진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일종의 메타언어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 들뢰즈는 말합니다.
원자 같이 단절되고 잘게 쪼개진 랑그, 이 랑그를 베케트의 랑그 I 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이는 ‘이름’들의 랑그입니다.
말로써 가능한 것을 소진하기를 희망한다면 말 자체를 소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의해 또 다른 메타언어의 필요성이 도출됩니다. 이를 랑그 II 라 부르기로 하고, 이는 더이상 이름들의 랑그가 아닌 ‘목소리’들의 랑그입니다. 이는 조합 가능한 원자들이 아니라 서로 뒤섞일 수 있는 흐름들로 이루어진 랑그입니다.
언어가 더 이상 열거와 조합이 가능한 대상들과 결부되지 않고, 말을 내보내는 목소리와도 결부되지 않는 랑그 III 도 있습니다.
랑그 III 에서 언어는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내재적 한계들과 결부됩니다. 즉 어느 순간 외부 혹은 다른 곳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 단번에 확장되지 않으면 단순히 피로로 치부되어 이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어떤 중단, 구멍, 찢겨진 틈들과 관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입니다.
무언가 보인 것(시각적 이미지)
혹은 들린 것(음향적 이미지).
다른 두 랑그가 꽉 붙들어 매고 있는 사슬에서 해방되어야만 가능한 것.
이는 랑그 I 처럼 계열 전체를 상상하는 조합의(이성으로 더럽혀진) 상상력이 아니며, 랑그 II 처럼 이야기를 꾸며내거나 추억의 목록을 만드는 (기억으로 더럽혀진) 상상력도 아닙니다.
파편화’는 재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필수적인 것이며, 예술은 미리 주어진 것이나 재현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지/파편들의 이러한 만남과 관계로 이루어지는 ‘파편화 과정’을 통해 발견되고 조우하게 되는 것
*— ‘파편화’는 재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필수적입니다. ‘파편’이란 말을 사용한 대표적인 영화감독은 에이젠슈테인과 브레송이라 하는데요.
브레송의 의미에서 ‘파편’이란, 말 그대로 ‘절대적 가치가 없는’ 이미지, 자기 완결적이지도, 자기 충족적이지도 않은 이미지를 가리킵니다. 그 자체로는 비의미적(비기표적)이고 비표현적인 이미지인 파편만이 다른 이미지(파편)와 만나 변화하고 변형되어 함께 새로운 형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영화적 진실(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적 진실)이란 미리 주어진 것이나 재현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지/파편들의 이러한 만남과 관계로 이루어지는 ‘파편화 과정’을 통해 발견되고 조우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네요.
이러한 부분(파편)들을 서로 고립시킬 것, 이 부분들이 새로운 의존관계로 결합할 수 있도록 각기 독립적이게 할 것, 새로운 접속을 위해 이들을 탈접속할 것.
파편화는 국지적 방법을 통해 공간을 탈잠재화하는 첫걸음입니다.
*— 단편 <밤과 꿈>에서 ‘이미지 만들어내기’에 있어 카프카와 베케트를 비교하는 글이 인상적입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꿈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다.
1) 백일몽, 즉 깬 상태로 꾸는 꿈,
2) 그리고 잠자면서 꾸는 꿈,
3)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상태는 밤하고만 어울리는 불면, 소진의 문제인 ‘불면의 꿈’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진된 인간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자라고 하네요.
카프카와 베케트는 닮은 점이 거의 없지만 불면증 환자의 꿈을 꾼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불면증의 꿈이란, 카프카처럼 가능한 것을 최대한도로 확장시켜 이를 깨어 있는 대낮의 실재처럼 다루거나, 아니면 베케트처럼 가능한 것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잠들지 못하는 밤의 허무에 내맡기며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것입니다.
*— 베케트는 텔레비전 작품들에서 공간을 두 번 , 그리고 이미지를 두 번 소진합니다. 베케트는 점점 더 말을 참기 힘들어했는데, 그 이유는 언어의 표면에 구멍을 내어 그 뒷쪽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나타나도록 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공허(즉자적 가시성)와 침묵(즉자적 가청성)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 램브란트나 세잔 혹은 판 펠더처럼 그려진 화폭에 구멍을 내거나,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처럼 소리의 표면에 구멍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계산과 의미, 의도와 사적인 추억, 오랜 습관들 등에 저당 잡혀 지탱되고 있기에, 예술만의 고유한 심층의 거대한 파도로부터 연유하는 ‘파열의 휴지부’, ‘틈새’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베케트는 텔레비전에서 어느 정도 ‘말의 열등함’을 극복할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말이 아닌 다른 것, 즉 음악이나 영상들이, 서로 꽉 끌어안고 있는 말들의 결을 느슨하게 하고 그 사이를 벌리거나 완전히 갈라놓기도 했던 것입니다.
과거의 언어(낡은 문체) 뒷쪽에 숨어 지각되지 않던 영상과 음향들을 실제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말들이 그 자신으로부터 비껴나가, 언어가 새로운 문체인 ‘시’가 되는.. 이런 상황은 언어의 어떤 구원일 거라 말합니다.
베케트는 말의 조직에 구멍을 내고 조직을 증식시키며 나아가는 어떤 문체를 찾았고 이는 말년의 눈부신 작품들에서 폭발합니다.
시 <어떻게 말해야 할까>에서처럼 말들의 표면을 완전히 깨뜨려버리는 간단한 분절어들로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최악의 방향으로>에서처럼 말의 표면을 끊임없이 축소시키기 위해 문장을 구멍 투성이로 만드는 표현들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바로 ‘말들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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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이정하 교수의 옮긴이 해제 중 119 페이지를 발췌한 부분입니다.
“이미지란 무엇보다 대상이 아닌 ‘과정’, 곧 잠재적이고 유동적인 차이생성의 운동을 통해 시간 속에서 생성되고 시간으로 형상화하는 순수한 강도적 에너지다.
그러므로 존재가 가능한 것의 한계에서 순수한 잠재성의 역량과 만나 성취해야 할 또 하나의 생성, ‘되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생성의 강도적 흐름 속에서 신체는 강렬한 개체화의 사건을 체험하는 강도적 주체가 된다. 신체가 가능한 것을 소진하고 잠재적 역량을 선취하는 순간, 곧 가능한 것이 잠재성의 역량으로 교환되는 순간은 죽음과 혼돈의 순간이자 생성과 창조의 순간, ‘카오스모스’의 시간이다.
창조적 죽음의 순간인 바로 그때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존재하는 이미지에 대해 말하기를 넘어, 그리고 클리셰를 실현하기를 넘어, 비로소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베케트의 ’소진된 인간‘은 바로 가능한 것의 소진을 통해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인간, 예술가인 인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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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소진은 창조로 이어지며, 죽음과 혼돈에서 생성으로 승화되는 양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술로 지칭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