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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세계사
제12편 아랍민족주의의 절정 -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통합
"많은 아랍인들이 '전 아랍 세계의 연대'라는 나세르의 메세지에 공감하지만 유독 시리아 지역은 더 큰 공감을 가진다. 시리아는 계속된 정치적 혼란 탓에 국민들이 지쳐있다. 나라를 안정시켜줄 강력하고 유능한 지도자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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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에 빠진 아랍국가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의외의 패배를 맛본 아랍국가들은 사실 전쟁을 수행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이었다. 유럽의 지배에서 갓 독립한 국가이기 때문에 국력도 부족했고 정치 상황도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신생국가 이스라엘을 얕보다가 호되게 당한 꼴이다.
1930년대 중동의 아랍국가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에 거세게 저항한다.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방식이 서로 다르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은 아랍국가들의 왕정체제를 인정한다. 영국의 위임통치에 협조하는 이라크의 하심 왕가와 이집트의 파루크 왕정이 대표적이다. 물론 영국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반왕정 움직임은 계속 있어 내정은 불안한 상태이긴 하다.
이에 비해 혁명을 통해 공화정을 채택한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의 기존 왕정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직접 통치한다.
문제는 시리아다.
여기서 말하는 시리아는 오늘날 국경선의 시리아 국가가 아니다. 아랍어로 '빌라드 앗샴(북쪽 땅),대시리아,옛시리아'이라 불리던, 현재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요르단, 그리고 레바논까지 포함하는, 오스만 시절 한 명의 술탄이 다스리던 하나의 거대한 지역이다. 현지인들은 이 지역을 여러 개의 국경선으로 분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구나 외세의 지배는 더욱더 반대한다. 2차세계대전 기간 내내 거센 저항을 펼친 결과 1946년 프랑스군은 완전 철수한다.
프랑스와의 독립투쟁에서 승리한 시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다음 목표를 팔레스타인으로 정한다.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한 요르단이나 레바논은 둘째치고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운 것이다.
1948년 시리아는 이집트와 함께 팔레스타인 수복전쟁(1차중동전쟁)을 개시했지만 이스라엘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본다. 전쟁의 패배는 시리아에게 큰 혼란을 준다. 한 해 동안에만 쿠데타가 세차례나 일어나고 수년동안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계속된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시리아 국민들은 나라를 안정시켜줄 강력한 지도자를 고대한다.
그러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쉽은 시리아가 아니라 홍해 건너 이집트에서 출현한다.
'나세르의 등장'
1940년대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아랍 민족주의이다. 공산주의나 이슬람 근본주의도 활동하였지만,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고난의 독립운동을 펼치는 동안 아랍인들의 연대의식이 크게 일어난 것이다. 특히 젊은 군장교들은 자주적이고 세속적이며 근대적인 아랍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움직임에 큰 영향을 받는다.
30대의 젊은 장교 가말 압델 나세르도 그 중 한 명이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1차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이 참패하는 전쟁터에서 그는 고민한다. '이집트는 무기도 우세하고 병력도 더 많았다. 그런데 왜 졌는가. 원인은 '무능한 정치'때문이다. 국가의 왕은 영국에 의존하고 의회는 개인 이익에 연연하는 동안, 국가 관료는 무능해지고 군사력도 무뎌지고 국민들은 도탄에 빠지고 있다'
그때까지 이집트의 민족주의 운동은 주로 영국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운동이었으나, 나세르는 그보다 먼저 이집트의 낡고 무능한 정치체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세르와 뜻을 같이 하는 이집트 장교들의 '자유장교단'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이 만들어진다.
1952년 무함마드 나기브 장군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집트 국민들이 환호하고 전 중동지역에 커다란 영감을 준다. 혁명평의회를 구성한 쿠데타 세력은 일체의 정당활동을 금지시키고 과감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낸다.
다음 해 이집트 공화국이 선포되고 무함마드 나가브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선출된 대통령 나가브와 국민 지지도가 높은 혁명평의회의 나세르 간의 정치 주도권 대립도 만만찮다. 이때 상황을 바꾸는 사건이 벌어진다. 나세르를 이슬람을 탄압하는 세속주의자이자 독재자로 지목하는 이집트의 이슬람 근본주의 행동파인 무슬림형제단이 나세르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것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나세르는 무슬림형제단과 공모한 혐의로 나가브 대통령을 축출하고,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는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나세르의 등장에 이스라엘 정부는 긴장한다.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팔레스타인의 서안 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이집트군과 이스라엘군 사이에는 크고작은 무력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세르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이집트를 집권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결코 이로울 게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총리는 또다른 전쟁을 대비하는 한편 미국을 통하여 이집트와의 평화협정을 추진한다.
명실공히 최고 책인자가 된 나세르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는 경제개발과 군비 증강이다. 이집트의 인구는 늘었으나 일자리는 제자리이다. 일자리를 만들려면 산업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전기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일강의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를 위한 건설비용도 마련해야 하고 군사비용도 늘려야 한다. 이집트 정부는 미국과 영국에게 손을 내민다. 아지만 이들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먼저 요구한다. 나세르는 고민에 빠진다. 이들의 요구대로 평화협정에 서명하면 필요한 자본은 구할 수 있지만 주변 아랍국가들의 비난을 받게 됨이 분명하다. 반대로 이를 거부하면 아스완 댐의 건설과 군비 증강은 물 건너가게 된다.
나세르는 공산권으로 눈을 돌린다. 이즈음 세계는 미소 냉전이 확대되는 시절이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은 나세르에게 또 하나의 기회가 된다. 그는 소련과 손을 잡고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탱크와 전투기를 대량으로 들여온다.
깜짝 놀란 미국과 영국은 조건부 재정지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세계가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는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제3세력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 이집트와 아랍인들에게 이로운 노선이라고 믿는 나세르는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다. 미국은 재정지원을 철회한다.
'수에즈 위기, 제2차 중동전쟁'
1956년 나세르는 미국의 압박에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선박들의 운하 통행 세입을 아스완댐 건설비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수에즈 운하 법인의 주식을 대량 사들여 최대 주주가 된 영국과 19세기 자기들이 주도하여 건설하고 아직도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는 펄쩍 뛴다. 물론 주주들에게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국유화하는 방법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힘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끌여들여 이집트 공격계획을 세운다. 그 해 10월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공격한다. 뒤이어 영국과 프랑스 공수부대도 이집트 공격에 투입된다.
'수에즈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제2차중동전쟁, 삼국동맹공격, 카데시작전, 시나이전쟁 등으로 부른다.)
이스라엘은 작전개시 100시간만에 시나이 반도를 장악한다. 수에즈 운하 지역을 공격한 영국과 프랑스도 성공한다. 이집트군은 전투도 제대로 못치르고 궤멸당한다.
나세르는 굴하지 않는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강력한 항전을 선포한다. 이집트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영국군과 프랑스군에 맞서 싸운다.
어린 아이까지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면서 1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국제 여론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비난 일색이 된다.
전쟁 계획을 미리 알지 못했던 미국은 화가 난다. 소련의 팽창을 막아야 하고 중동의 민심도 잡아야 하는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나토에서 제명시키겠다고까지 할 정도로 항의한다. 더 큰 위협은 이집트와 협력 관계인 소련이다. 소련은 이집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영국을 미사일로 공격하겠다고 위협한다. 유엔까지 나선다.
압력에 못이긴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운하를 점령한 지 한달만에 물러나고 이스라엘도 다음 해에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서 패한 모양이 된다. 수에즈 운하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아랍인 전체의 민심도 한 번에 잃어버렸다. 영국 총리는 중도 사임하고 이스라엘은 전세계에 제국주의와 같은 패거리라는 나쁜 인식을 주었다.
이 사태의 최대 수혜자는 나세르이다. 이집트는 단 한차례의 전투에서도 이기지 못했지만, 수에즈 운하와 영토를 지키고 정치적인 명분까지 모두 가진다. 이집트 국민뿐만 아니라 전 아랍인들이 열광한다. '그 누가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에 이렇게 당당하게 맞서 싸우고 승리를 쟁취했던가' 나세르는 전 아랍 민족주의의 지도자로 급부상한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통합 - 아랍연합공화국'
기세가 오른 나세르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 아랍세계의 연대를 호소한다. 사실 나세르의 등장 이전까지 이집트인들은 스스로를 아랍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슬람과 아랍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역사나 문화적 배경이 워낙 달라 아랍인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 아랍세계의 지도자를 꿈꾸는 나세르가 등장하자 이집트인들의 새각이 바뀌어 간다. 나세르는 헌법을 개정하여, '이집트는 아랍국가이며 아랍민족의 일부'라는 문구를 넣는다.
많은 아랍인들이 나세르의 메세지에 공감하지만 유독 시리아인들의 공감은 더 크다. 앞서 말했지만 계속된 정치적 혼란에 지쳐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던 시리아 국민들은 나세르에게 환호한다. 심지어 시리아 정치인들까지 나세르의 '전 아랍세계의 연대' 호소에 매료된다.
시리아는 뚜렷한 지배 정당이 없이 여러 군소정당이 난립하고 있는데 그중 바트당과 공산당이 서로 혼란스럽게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랍민족주의와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바트당은 공산주의 정당의 위협이 점차 커지자 나세르를 선택한다.
시리아 정부는 신속하게 대표단을 파견하여 나세르에게 두 국가의 통합을 제안한다. 나세르는 당황한다. 자기는 국가 통합이 아니라 아랍 연대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나세르는 역제안한다. 국가통합을 하되, 국가 통치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하고, 이집트군이 양측 통합군대를 지휘하고, 이집트의 국민연합이 시리아의 정치정당을 흡수한다는 조건을 단다. 이건 누가 봐도 대등한 통합이 아니라 일방적인 복속이다. 시리아 내각에서도 격론이 일어난다.
1958년 그렇게 아랍연합공화국(UAR, United Arab Republic)이 탄생한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하여 탄생한 새로운 세속적 아랍 민족주의 국가이다. 많은 아랍 지식인들은 두 나라의 통합에 큰 환호를 하고, 아랍 민족주의는 절정에 달한다.
나세르주의가 전 중동지역으로 번져나간다.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에서 연일 혼란이 생긴다. 이라크에서는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나세르를 외치고 요르단에서도 폭동이 일어난다. 영국은 부랴부랴 요르단의 하심왕가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급파한다. 레바논에서도 아랍민족주의자들이 친나세르 소요사태를 일으킨다. 미국은 대규모 지상군과 항공모함까지 투입하여 사태를 진정시킨다.
상황을 우려하는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서방세계는 사태를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 반왕정 반서구를 외치는 나세르주의가 달갑지 않다. 쿠데타로 들어선 이라크공화국이 관건이다. 이마저 나세르의 아랍연합공화국에 합류하면 전 중동지역이 나세르에게 장악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라크 쿠데타를 이끈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아랍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나세르와 경쟁을 원했다. 나세르주의는 더이상 확산되지 않고 멈춘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실망하고 서구세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랍연합공화국의 붕괴'
아랍연합공화국은 상황이 좋지 않다. 이집트 정부의 지시를 받는 시리아의 정치인들은 내심 불만이 쌓이고, 시리아에 파견된 이집트 관리들은 점령군처럼 행동한다. 정당이 없어진 시리아 국민들은 이집트의 독재정치에 반발한다. 통합을 추진했던 바트당도 자기들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산당이 득세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한다. 이집트식 토지개혁 추진도 시리아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리아인들 입장에서는 그들이 바라던 국가통합이 아니라 일방적인 지배를 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이집트 정서가 높아진다. 나세르의 국가통합 방식이 실패한 것이다.
불과 2년 후 1961년 시리아 군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다마스쿠스에 시리아 임시정부를 세운 쿠데타 세력에게 무력진압을 하려던 나세르는 곧 마음을 바꾼다. 전 아랍의 연대를 부르짖던 그가 같은 아랍인인 쿠데타 새력에게 총칼을 겨누고 내전을 벌인다면 다른 아랍인들이 등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한 나세르는 시리아의 독립을 인정한다.
1950년대 내내 승승장구하던 나세르는 아랍연합공화국이 무너지면서 첫 실패를 맛본다. 통일된 아랍국가라는 비전도 흔들리고 아랍세계의 대표자라는 지도력도 의심받기 시작한다. 이후 나세르는 새로운 비전으로 아랍사회주의를 내세우나 역시 그의 앞에 놓인 가장 큰 과제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을 제압해야만 아랍세계의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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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수에즈 운하는 홍해와 지중해를 이어주는 이집트의 인공 수로입니다. 193킬로미터 길이의 거대한 운하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박들이 이용하는 운하 가운데 하나입니다. 1869년 개통되기 전에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려면 무려 7,000킬로미터나 더 돌아서 가야 했으니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해양무역이 급증하면서 유럽 열강들은 수에즈 운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프랑스 외교관인 페르디낭 레셉스와 프랑스 정부가 앞장서서 이집트 정부와 함께 건설을 시작한지 10년여만에 완공합니다. 유럽 각국의 황실과 종교지도자, 기업인, 예술인들이 참석한 개통식은 화려합니다. 개통식 기념 오페라로 베르디의 '아이다'가 초연될 예정이었으나 파리에서 제작될 예정이던 의상과 무대장치들이 마침 벌어진 보불전쟁 영향으로 완성 되지 않아 부랴부랴 '리골레토'로 변경됩니다. '아이다'는 2년 후 카이로에서 초연됩니다.
당시 프랑스와 식민지 경쟁을 벌이던 영국은 수에즈 운하 공사를 은근히 방해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식민지 인도로 가는 직항로가 프랑스의 통제로 들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875년 재정난에 시달리던 이집트 정부가 경매에 내놓은 수에즈 운하 법인의 지분 44%를 영국이 전량 사면서 대지주가 됩니다. 영국의 수에즈 운하 지배권은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국유화를 선언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날 수에즈 운하는 세계 해운교역량의 약 8%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고 2017년 기준 약 6조원에 달하는 선박 통행료는 이집트 GDP 의 1.5%를 넘습니다.
다음은 3차중동전쟁, 6일전쟁입니다
참고: '중동은 왜 싸우는가(박정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