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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을 끼고 있어 오랜 옛날부터 삶의 터전이자 유서 깊은 땅이 선산 고을이었습니다.
하지만 금오산 아래 선산의 남쪽 귀퉁이에 보잘것없던 구미가 대통령의 고향이란 이유로, 내륙의 공업단지가 되면서 급성장하더니 선산을 흡수하여 거느리게 되었으니, 사람 팔자뿐만 아니라 동네 팔자도 또한 앞날은 잘 알 수가 없는가 봅니다.
1995년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하면서 선산은 구미시 선산읍이 되었지요. 5.16쿠테타 이전까지는 선산군 구미면이었으니 부모와 자식 간이 바뀌었다고나 할까요.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던 선산의 자부심은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습니다?
신라 불교의 씨앗이 뿌려진 선산답게 불교유적들도 많고 사람들 삶의 흔적이 많아서, 당일 답사로는 그 흔적을 대락만 짐작만할 뿐입니다.
폭염속에서도 1주년 기념답사라는 타이틀처럼 성황을 이루었던 선산의 하루를 뒤돌아봅니다.
주차장에서 약간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웅장한 탑. 10m가 넘는 높이와 당당한 자태에 매료된다.
죽장리오층석탑
옛 죽장사의 터에 2단의 큰 기단 위에 5층의 탑을 세워 높이가 거대하다.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감실이 있고 머리 장식이 있었을 맨 위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상, 하 2단의 기단을 갖추고 탑신과 옥개석의 모양 등 전체적인 모습은 일반 석탑과 비슷하지만, 옥개석 낙수면에 층단을 두고 탑신에 감실이 있으며, 작은 부재를 많이 쌓아서 결구한 점 등은 전탑의 형태를 닮아 모전석탑계열로 분류한다.
석탑 뒤쪽에 놓여있는 석재의 안상(眼像)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이 눈길을 끊다.
정남 쪽 끝에 금오산을 바라보고 자리 잡은 죽장사.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이 있으며, 그 주위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비어있던 감실 내부에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다.
뭐라고 쓴 걸까? 1층 몸돌에는 글씨의 흔적이 보인다. 돌에 새긴 건 아닌 것 같고 글씨를 쓴 것 같은데....
여름답사의 즐거움 중의 하나는 예쁜 꽃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봄에는 벚꽃, 개나리, 진달래 목련 등 나무에 피는 꽃이 많지만 여름에는 집 마당의 작은 꽃밭, 골목 어귀나 담 모퉁이, 길가 등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꽃이 피어난다. 요즘은 접시꽃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족두리꽃
족두리꽃 피면
시집 간 누이 생각이 난다
분홍 나비떼 내려앉은 듯
곱게 빗은 누이의 머리 위에서
찰랑거리던 칠보 족두리
백승훈 시인의 <족두리꽃> 중 일부
금오서원(金烏書院)
여말선초의 학자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570년(선조 3) 금오산 밑에 건립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 좀 더 교통이 편리한 지금의 남산 기슭에 복원하였다.
언덕 위에 자리하여 마을 앞을 흐르는 감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물길이 내다보인다.
길재 성리학의 대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금오서원에서 생각하는 조선 성리학의 단상들
남송의 주희가 논어, 맹자의 집주(集注)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반영해 집대성한 주자학(성리학)은, 고려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도입되어 새로운 학문으로 활기를 띠었으며, 이제현, 이색, 정몽주 등은 고려말의 혼란과 불교의 폐단을 대체할 정치적, 사상적 토대로 발전시켰다.
정도전, 권근, 하륜 등의 급격개혁론자들에 의한 역성혁명으로 고려가 멸망하는 시기,
그의 학통은 선산 출신의
의리(義理)와 대의(大義)를 중시하는 이들의 학문에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절의를 내세워 조선조에 참여하지 않았던 길재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영남의 향리에서 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무장한 신진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한 사림(士林)은, 사회의 개혁을 주창하였고, 개국공신들의 뒤를 이은 기득권세력인 훈구파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사화(史禍)로 나타났다.
무오사화에서 을묘사화까지 4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사림은 극심한 탄압과 희생을 겪었지만, 이를 통해 그들의 의리관과 도학적인 면은 더 강해졌고 성리학을 체계화하여, 마침내 퇴계와 율곡 등에 의해 조선 성리학의 완성을 이루어내었다.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유일 이론이 된 성리학이 이기심성(理氣心性)에 대한 탐구 등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왜란, 호란을 겼고 난 후 주기론에 우위를 차지한 주리론이 득세하면서 명분론적 사고가 두드러졌고, 지나친 예학적 변용은 왕실과 집안의 정통성을 중시하면서 이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는 예외 없이 지탄받았다.
불변적 원리(理)를 주창하면서 이념적 가치를 강하게 추구하여, 자신들과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처단하는 모습은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을 연상케 한다.
나와 다름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여러 연줄로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어 가는 현재의 우리 모습에도 그런 구습이 남아있어서는 아닐까?
금오서원 누문인 읍청루에서 내다보면 앞을 흐르는 감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곳에 넓은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마을 앞으로 새로운 도로가 나면서 교랑 공사가 한창이다. 좀 지나면 금오서원에서 바라보는 들판의 여유로움도 바뀔 것 같다.
독동리 반송
금오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에 기품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반송은 외줄기가 올라가는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밑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모양으로 펼쳐진다.
수령 400년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나무가 있는 동네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안강(경주)노씨(盧氏)가 마을에 들어온 것과 역사를 같이 한다고 한다.
뜻밖이다. 반송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알고 있었는데, 반송의 씨앗을 심으면 극히 일부만 어미의 형태를 닮고 대부분은 보통 소나무처럼 자란다고 한다.
생김새나 자라는 모습이 자식에게 유전이 되지 않고 당대(當代)에 반송의 특징이 끝나고 일부만 유전이 되어서, 별도의 품종으로 봐야 하는지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를 포함 전국에 여섯 그루의 반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도리사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또는 묵호자)가 처음 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 선산이고 최초로 세워진 절이 도리사(桃李寺)이다.
신라의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문헌에 전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아도스님이 신라의 변방인 이 지역에서부터 포교를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불교 정착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씨족 중심의 귀족들과 토착신앙 숭배자들의 방해로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승려들의 오랜 노력과 불교의 힘으로(불법과 왕법을 동일시하는) 귀족들을 견제하고 새로운 지배체제를 만들려는 왕실의 뜻이 상응하여.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신라 불교 최초의 전래지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도리사는 냉산(또는 태조산)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 아래로 낙동강과 주변의 들판이 내려다보이며 절 주변의 노송들과 어울려 토함산 석굴함과 같은 느낌이 든다.
아도스님이 이곳에 절을 지으려 할 때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자두)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도리사(桃李寺)라 하였다고 한다.
1977년 세존사리탑에서 사리가 발견되며 큰 화제가 되었고 그로부터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 참배하려는 많은 사람이 찾는 절이 되었다.
이 인근에서는 꽤 높은 산인 냉산(693m)의 500m 가까운 높은 곳에 자리한 도리사에서는 남쪽으로 뻗어 나간 낙동강과 강 양안의 너른 들이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1977년 석가모니를 높여 부르는 세존(世尊)의 이름이 들어있는 이 사리탑에서 사리가 발견됨으로써 도리사는 일약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의 반열에 올랐다.
사리탑의 상단 고깔모자 같은 연봉형 보주에는 5개의 원을 만들고 그 안에 世, 尊, 舍, 利, 塔 다섯 글자를 한 글자씩 새겨 넣었다.
(아래 사진 상단 원안에 '世'가 보인다)
세존사리탑에서 뱔견된 금동육각사리함
1977년 4월 도굴꾼에 의해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진 사리탑을 제자리로 수습하는 과정에서, 금동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되었다.
이중으로 된 사리공 속에 밀봉되어있어 도굴꾼의 눈을 피할 수 있었는데, 사리탑 보주 표면에 새겨져 있는 '세존사리탑'이란 명문으로 해서 석가모니 진신사리로 알려지면서 큰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얼마 뒤 사리가 공개되면서 진신사리를 보려는 열기가 대단해서 전국에서 수십만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산 높은 곳에 호젓하던 도리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는 자부심에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보유하게 되어, 지금은 대형버스가 산꼭대기의 절까지 올라가는 유명 절집이 되었으니 이것도 도굴꾼님들 덕분이려나? ^^
발견된 사리는 도리사에 새로 세운 사리탑에 다시 안치되었으며, 국보 제208호로 지정된 사리함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 오른쪽은 사리를 친견하려는 인파가 도리사에 몰려든다는 당시의 신문기사.....
위창 오세창이 쓴 현판 '태조선원' 전서와 예서에 모두 뛰어났던 위창의 멋스러움이 느껴지는 글씨이다.
극락전
정면, 측면 각 3칸의 크지 않은 건물에 비해 지붕의 높이가 높아 위로 날렵한 느낌이 든다.
다포양식의 화려한 공포가 받치고 있는 팔작지붕은 용마루가 유독 짧고 귀마루가 긴데다, 용마루 끝에 치미까지 올려서 마치 귀 달린 모자를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치미는 근래에 수리하면서 올린 것인데 조선 후기(19세기 초 추정)의 건물에 옛날(삼국시대~고려 중기)에 유행했던 치미를 올린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뒷 얘기 하나 추가....
후기를 쓰고 있는데 지나던 분청이 들여다보더니 "이 사진 이번에 찍은거야?" 묻는다.
"왜 뭐가 이상해?" 하니,
"단청이 다른 것 같은데. 단청이 많이 바랜 것 같았는데...."
헐, 사실 이사진은 6년 전 답사 때 찍은 사진인데 어떻게.....
흠.... 그동안 답사 다니며 보고 들으면서 어느새 보는 눈이 트인걸까?
아니면 소 뒷걸음치다 개구리 잡은? ㅋㅋ
도리사 석탑
이번 답사에서는 수리 중이어서 실물을 볼 수 없었지만 도리사의 가장 큰 볼거리는 극락전 앞에 있는 이 석탑인데, 다른 곳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석탑이다.
기단부는 기둥형 석재를 세우고 그 위에 갑석이 올려져 있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과 지붕돌이 있고, 상륜부는 노반 위에 석주·연화·보주로 이루어졌다.
사각형의 석재를 쌓아서 탑신을 만들고 지붕돌도 여러 단의 석재 쌓아 층단을 둔 점은 모전석탑과 닮았다. 3층은 각각 하나의 돌로 탑신과 지붕돌이 이루어져 있다.
경북지방 몇 곳에서 볼 수 있는 방단형석탑과 모전석탑의 결합형으로 보아야 하려나?
※ 사진은 2010년 답사 때 찍은.
모례장자샘(毛禮家井)
도리사에서 멀지 않은 낙동강 인근의 마을인 모례의 집에 머물며 신라에 불교 전래하고,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스님과 모례장자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는 우물이다. 우물을 뜻하는 '井'의 유래가 느껴지는 모습이다.
※ 이 사진도 6년 전에 찍은....
선산 낙산리 삼층석탑
주변에서 발견되는 기왓조각, 토기 조각 등으로 절터였음을 알 수 있는 곳에 큰 탑이 서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지붕돌은 아래 받침과 지붕 추녀, 윗면 층단 모두 전탑의 양식을 모방한 모전석탑 계열로 분류된다.
기단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오전에 본 죽장리 오층석탑과 닮은 모습이다.
초기 신라 석탑의 전형으로 꼽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기단의 형태가 똑 같고, 당당함이 느껴지는 모습 또한 비슷하여 탑의 건립 시기를 추측케 한다.
통일신라 전기 석탑에서 느껴지는 당당함과 견실한 중후함. 그러면서도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명품 탑,
탑 뒤로 도리사가 있는 냉산이 보인다. 다음엔 꼭 저 능선에 올라 내려다보리라.
답사배움이 1주년을 맞았다.
작년 7월, 여름의 폭염보다도 뜨거웠던 열기 속에 탄생했던 답사배움.
첫 생일을 축하하는 답사답게 불볕더위 속에서도 각지에서 많이 모였던 선산답사.
오늘은 시원한 빗줄기에 바람까지 시원한 주말,
불과 한 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그리워지는....
그래서 답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답사 - 사람을 배우다
영원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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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죽장리탑은 여느 탑들에 못지않게 멋지네요. 주위 풍광이 잘 어울러져서 한 몫을 한 것도 같고...^^;
도리사탑은 탑이라기보담은 무덤같기도 하고 집짓기 놀이할때의 모양새 같기도 하고 돈 없어서 석탑 모양내기가 어려워 걍 네모난 돌들 쌓아놓은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얹어놓은 탑 같기도 하고 ㅎㅎ 특이하고 신기하네요...^^;
이번 답사지에서 난 당신이 떠올랐네.
예전 비오던 날 함께 했던... ㅎㅎㅎ
@도깨비 그르게~~ 그때 기억이 떠올라야 하는데 가물가물하더이다...ㅎ
도리사탑에 대한 해석이 좋으네~~ ^^
추임새님 글만 봐도 따뜻함이 느껴져요. 더워~ !! ㅋㅋㅋ
모두 그리운 분들이네요...
그 정겨움으로 1년이 지났어도 10년 지난 것 같은 마음들이 남은 거겠지요..
아기 때문에 쉽지 않겠지만 답사에 얼굴 한번 보여줘요. 그 새 얼마나 삭았나 확인 좀~~ ㅋㅋ
주말에 삼시세끼 고창편 보다가 생각나서 원경이랑 톡했었다는~~ ^^
참 대단하다. 좋은 사람들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복인것을..^^
맞습니다. 대단한 인연이고 복된 모임이라는 생각이 저도~~ ^^
다시 함 되새김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