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 ❮3.13❯만세시위를 일으킨 조선인디아스포라와 순국열사들2부
연변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 장례식이 아래와 같이 보도되었다.
허청리(합성리)에 공동묘지를 정하고 제창병원으로 발인하야 나아갈 제 혹은 담군(擔軍)이 되고 혹은 집불하야 14의사의 소여는 천흡귀곡 중에 차제로 행진한다. 묘지에 지하야 야소교례식9)을 집행할 새 상장(喪章)을 전한 우리 남녀는 4,000여 명이오. 또 차석에 래참한 영국인 남녀는 더욱 충혼의백을 조위하야 한감의 정을 크게 표한다. 14의사의 부형은 일국(一掬)의 루(泪)도 하(下)치 아니하고 회중에게 향하여 크게 말한다. 그네들의 말이 ‘나의 자제가 한국을 위해 낫다가 한국을 위해 죽었으니 가한(可恨)이 있으리오’ 한다. 회중은 큰 감동을 수(受)했다.10)
3.13만세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독립만세 시위의 불길이 전 만주에 들불처럼 퍼져나갔고 3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만주의 조선인들은 15개현에서 73 차례의 항일집회와 시위를 벌였으며 참가자 수는 무려 10만 5,850명이나 된다. 3월 13일부터 5월 중순까지 북간도에서만 54차의 집회와 시위가 있었으며 참가인원은 7만 6천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당시 연변 거주 디아스포라 조선인구 25만4천여 명의 36.6%에 해당된다.
그 후 북간도에는 ❮대한국민회❯,❮대한독립군❯,❮북로군정서❯,❮의민단❯등의 30개에 이르는 무장독립단체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국내침공작전을 벌이며 무장독립운동의 시대를 꽃피웠다.
3.13만세 시위에 순국하신 열사들의 이름을 찾으며 “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던 선구자”가 정식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일송정 푸른 솔이 있는 비암산 서쪽의 평강벌을 일구고 해란강변의 서전벌과 북쪽의 구수하벌을 목숨 걸고 일군 농부들이었으며 그 농부들의 자식들이었다. 실제로 당시 희생하신 19분 중에 농부로 기록된 분이 10분이 나온다. 실로 선구자는 농부였으며 순국열사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다.
또한 간도국민회 회장이었던 구춘선이 지방회장에게 보낸 문건에 의하면 순국자 17분 중에 15분이 크리스천으로 간도국민회 지방회에 속한 회원들로 나온다. 말 달리던 선구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크리스천이었으며 그들은 간도국민회의 회원이 되어 농민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몸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자녀들을 독립군으로 바쳤다.
3월 14일 발행된 연변❮조선독립신문❯2호, 김정규의 일기, 계봉우의 기록, ❮간도국민회❯구춘선의 공문서신, 룡정❮3.13❯기념사업회 회장이신 최근갑의 기록을 살펴 19분의 이름과 면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연변❮조선독립신문❯ 2호는 순국열사들에 대하여 공적으로 가장 먼저 기록을 남겼다. 1919년 3월 14일에 발행된 신문은 순국열사들을 15분으로 밝히고 있는데 두 분은 신원이 불명하다고 하였다.
순국열사는 현봉률(모아산), 김승록(봉림동), 박상진(걸만동), 정시익(라자구), 리균필(로투구), 현상로(대불동), 공덕흡(명월구), 최익선(와룡동학교 교원), 박문호(남구학교 교원), 김태균(불명), 김흥식(서울), 리유주(토성보), 장학관(의란구) 그리고 이름과 주소불명의 두 분이다.
이어서 제창병원에 입원한 중상자는 18분으로 한부삼(모아산), 리도한(봉산동), 김원칠(불동), 김성무(로투구), 한원오(대모록구), 김종묵(구천하), 리용진(모아산 앞), 차정원(대허문), 림봉섭(투도구), 김진서(국자가), 송병식(남양동), 채민섭(모아산 수남), 리경찬(호천포), 김병영(명동학생), 채창헌(대오도구), 원용서(룡정), 공자인(명월구), 허준언(불명) 등이다.
연변❮조선독립신문❯이 중상자로 밝힌 분들 중에 제창병원에서 또는 퇴원 후에 순국하신 분들로 언급되는 분들이 김종묵, 차정원, 김진서, 김병영, 채창헌, 원용서, 허준언11) 등 7분이다. 연변❮조선독립신문❯2호의 기록대로라고 하면 순국열사가 22분이 되는데 이는 룡정❮3.13❯기념사업회가 최종적으로 확정한 19분보다 3분이 더 많은 숫자이다. 그러나 신원 불명의 두 분을 제외하면 20분이됨으로 오버되는 한 분에 대한 검토를 다른 기록과 대조해보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12)
김정규의 일기는 현장에서 순국하신 열사는 9분으로 김상진13), 김흥식, 정시익, 박문호, 공덕흡, 리효섭, 김태균, 장학관, 김승록 등이다. 중상자는 최익선, 현남로, 차정룡, 리유주이며, 경상자는 김병영, 림봉섭, 허준언, 한윤삼, 리도한, 원룡서, 채창헌, 리정찬, 채민섭, 송장석, 한원오, 김성모, 김원칠, 김진세, 김종묵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상자 가운데 최익선, 현남로, 차정룡, 리유주 등이 병원에서 숨져 순국열사가 총 13분이라고 하였다.14)
계봉우는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에서 순국열사를 19분이라고 하였으나 17분의 이름만 적었다.
현봉률, 김승록, 공덕흡, 김태균, 장학관,김종묵, 허준언, 김병영, 박상진, 채창헌, 박문호, 최익선, 정시익, 현상로, 김흥식, 리유주, 차정룡 제씨로 순국한 장사 19인 중에 14분만 먼저 허청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고 하였다.15)
간도국민회 회장 구춘선은 1920년 7월 14일 지방회장에게 보낸 <포충장을 전달할 데 관한 문건>에서 순국열사 17분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작년 3월 13일 룡정에서 진행된 독립축하식때 순국한 의사들에 대하여 우리 림시정부에서 포충장을 하달하였다. 이 의사들의 유족에게는 지방회에 전달하여 의사유족들에게 시달하여 의
사유족과 지방유지인사들이 모여 전달식을 거행하기 바란다. 의사유족의 과계지방과 의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1중지방 : 김종묵, 최익선, 공덕흡, 정시익, 김승록, 리균필, 현봉률(7인)
제2중지방 : 장학관, 김태균 (2인)
제1남지방 : 이유주, 차정룡, 현상로(3인)
서지방 : 박문호, 채창헌(2인)
동지방 : 박상진(1인)
로 령 : 김병영(1인)
서 울 : 김흥식(1인)
그러나 리군필의 이름은 틀렸으므로 정부를 향하여 정정을 요구하였다.16)
3부에서 계속됨
❮간도국민회❯의 명단에는 원용서와 김진세 두 분이 누락되어 있는데 이는 그분들이 ❮간도국민회❯가 임시정부에 순국열사 명단을 제출할 때 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국민회의 실수로 파악이 된다. 국민회 문건에 부상자 명단이 없으므로 두 분에 대하여 알려면 다른 기록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2021.5.28.아침
우담초라하니
미 주
1) 용정과 룡정 : 한국 측의 기록은 “용정”이지만 중국 조선족 측의 기록은 “룡정”이다. 본 글에서는 중국 자료를 그대로 인용할 때는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대로 “룡정” 으로 쓴다.
2) <3.13>반일의사릉 : 중국 역사가들은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운동은 반일운동으로, 공산주의 자들의 저항운동은 항일운동으로 기록한다.
3) 300명의 숫자는 명동학교와 정동중학교 학생들을 합한 숫자이며 두 학교는 함께 “충렬대” 를 조직하였다. ⎾륙도하⏌,123쪽,
4) 맹부덕 : 당시 맹부덕은 길림 육군 2려 10퇀 퇀장으로 ❮3.13❯만세 시위를 저지하라는 지 시를 받았다.
5) 1919년 ❮3.13❯만세시위 당시 부녀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었 다. 그러나 20세기 처음 20여 년 동안 교회가 북간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연변의 학계는 교회의 활동과 영향력에 대하여 일체 침묵하며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하여 그 공로와 업적을 소수의 사립학교 설립자들과 조기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리 고자 그들의 공로를 지나치게 과장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 년도를 일체 무시하는 방 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6) ❮3.13❯만세시위에 참여한 창동학교가 2개다. 여기서 말하는 창동학교는 장동(長洞)의 창 동(彰東)학교 이고 다른 창동학교는 와룡동에 있는 창동(昌東)학교이다.
7) 대회장소는 영신학교 앞마당이었다.
8) 김영학목사 : 연변지역 크리스천들 1919년 독립운동을 모색하기 위해 2월 18일과 20일에 걸쳐 모인 회합에서 연변지역을 5개구로 나누었으며 김영학목사는 리홍준, 박동원, 리성금 과 함께 연길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3월 13일 조선독립축하식의 대회장을 맡아 행사의 사회를 진행하였다. 철혈광복단의 회원이기도 하였다
9) 당시 캐나다장로회 선교병원인 제창병원에 순국자들과 부상자들을 모셨다.
대부분의 순국자들이 크리스천이었으며 장례예배는 캐나다장로회 교회가 주관하였다.
10) 최근갑, ⎾시련의 열매⏌, 145, 146쪽
11) 허준언 열사에 대한 기록이 연변 ❮조선독립신문❯2호에서는 중상으로 나오나 사방자, 계봉우는 순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구춘선의 공문서신에는 어급되지 않고 있으며 김정규 의 일기에는 경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12)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연구⏌, 162,163,164쪽
13) 김상진은 박상진의 오기나 오해로 본다. 다른 기록들은 다 박상진으로 나온다.
14)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연구⏌, 164,165쪽
15)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연구⏌, 162쪽
16)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연구⏌, 161,162쪽
17)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개척⏌, 장문호 저 ❮룡정촌의 3.13 반일시위운동❯, 472쪽
18) 최근갑, ⎾시련의 열매⏌,141, 142쪽
19) 리광평 외 ⎾륙도하⏌,125, 126쪽
참고서적
1.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연구⏌,연변인민출판사, 2001년
2.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개척⏌, 민족출판사, 1989년
3. 최근갑, ⎾시련의 열매⏌,료녕민족출판사, 2011년
4. 리광평 외, ⎾륙도하⏌, 연변인민출판사, 2013년
5.양소전 외,⎾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5년
6. 김택 주필 외, ⎾길림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1995년
7.연변조선족사집필소조 편,⎾연변조선족사 상⏌,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8. 룡정3.13기년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연변인민출판사, 1999년
9.양전백, 함태영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년
10. 차재명 원저,⎾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년
11. 류연산, ⎾혈연의 강들 상⏌, 연변인민출판사, 2001년
12. 룡정시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총서 편집부 김재권외 4인, ⎾일송정 제 7기⏌,
연변인민출판사, 2003년
13. 허청선, 강영덕 주편,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 연변교육출판사,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