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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다 아시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6·25동란 중 대산종사님께서는 <대종경> 초안 원고작업을 하시던 원평에 가보시지 못했습니다. 북한군이 물러가고 돌아갔을 때, 모든 것은 불타고 없어졌지만, <대종경> 초안 원고만이 아무런 탈이 없이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대산종사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의 크신 은혜 한량없습니다. 동란의 와중에서도 <대종경> 초안이 그대로 보존된 것은 진리의 뜻이요, 전 인류를 구제하려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한량없는 자비심 때문이라 믿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신 큰일을 완수하기 위해 심신을 바치겠습니다.”(김일상 엮음, 『설교 예화』, p.98)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난 것은 다름 아닌 <대종경>이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경전은 어떠한 위력이 있기에 우리 모든 인류의 삶의 중심이 되고 있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바로 우리의 부처님인 경전에 대한 것입니다.
경전은 문자 그대로 지구에 사는 곳의 위치를 경도, 위도로 나누듯이 우리 삶의 좌표를 보여주는 성현의 말씀입니다. 성서나 꾸란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영감(靈感)의 언어입니다. 불경이나 우리 <정전>, <대종경>, <정산종사법어>, <대산종사법어>는 만인이 우러러 받드는 성현이 깨달으신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는 언어입니다.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바다를 보고, 바닷물의 맛을 본 사람이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목마른 사람이 직접 물을 찾아 목을 축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긴긴 밤 어두운 길을 밝히는 등불처럼, 항해하는 배가 바른 길로 가도록 도와주는 북극성처럼, 무명으로 뒤덮인 우리 인생의 앞길에 삼독오욕을 무장 해제시키고, 불토낙원으로 이끌어 주는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줍니다. 그러니 경전의 말씀은 불속에 넣어도 타지 않고, 물속에 넣어도 젖지 않으며, 전쟁이 일어나도 파괴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유학할 때의 일입니다. 유학 초기 일본어를 배울 때, 일본어 선생님이 시어머니가 위중하셔서 매년 여름 사경 모임에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저보고 대신 가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외국인에게 일본의 사경문화를 체험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교토의 북쪽에 있는 구라마절(鞍馬寺)이라는 곳에 가서 사경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유서 깊은 절에서 신도들이 모여서 함께 <법화경> 28품을 한 품씩 나누어 무릎을 꿇고 붓으로 정성을 다해 한 자씩 한문을 써내려 갔습니다. 무릎을 꿇고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매우 힘들었습니다. 3일 밤 동안 무릎이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새길 때, 한 자를 판각할 때마다 삼배를 올렸다는 일자삼배의 정신을 실천한 우리 선조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사경 식구들이 함께 절의 숙소인 다다미방에서 자는데 뭔가 다리가 따끔하고 아팠습니다. 아파서 끙끙거리니 일본인 신도 한 분이 불을 켰습니다. 제 이불을 걷어내니 한 30센치 정도 되는 커다란 지네가 요 위에 있었습니다. 다른 신도 한 분이 “죽이지 말고,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한참 뒤에 다다미 사이로 지네가 사라졌습니다. 신도들은 제게 그 지네는 “카미사마의 심부름꾼이니 물려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신의 사자라는 말에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이거 죽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냥 자라고 하니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과연 나는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잠을 청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사경을 해서 그런지 이내 잠이 왔습니다. 저는 다음 날 아침 마침내 살아서 눈을 떴습니다. 누군가 고래 기름을 가져왔는데 아직 일본어를 다 알아들을 수 없는 때여서 그것을 마시라고 하는 줄 알고 입에 부어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기겁을 했습니다. 아침에 진짜 죽을 뻔 했습니다. 그것은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사경이 끝나고 4일째 되는 날, 사경한 경전을 부처님으로 화현시키는 성대한 의식이 치러졌습니다. 일본 고대의 악기란 악기는 다 나오고, 엄청나게 화려한 의식이 몇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일종의 경전 봉고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의식은 저를 포함한 신도들이 사경한 <법화경> 28품을 본전(本殿) 뒤에 있는 탑과 같은 창고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수백 년 동안 이렇게 사경된 경전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에 그 절에 들어올 때, 본존(本尊)이 보이지 않아서 의아하게 생각했는 실제 본존은 그 사경이 들어 있는 둥근 탑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 십 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고, 일본 문부성 장학금을 받아 학비 걱정 하지 않으며, 일본어로 석사,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후로 제 삶은 법신불 사은님과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께 보은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제가 존재하는 것은 다 진리의 은혜라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받은 모든 것을 세상에 다 내놓고 가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습니다. 무한한 부처님의 은혜로 둘러싸여있다는 이 소중한 경험이 제 교역생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제 자신 우주 전체의 무한불인 법신불의 가호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절실히 느낍니다. 존재 자체만으로 은혜임을 더욱 깊이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법신불 사은님, 저희와 늘 함께 하시는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 오늘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게 하여주시니 감사하옵니다”라는 감사의 기도를 제일 먼저 올리고 있습니다.
이 경전, 특히 불경에는 수많은 구법승들의 목숨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록(經錄)을 보면, 죽음의 길인 실크로드를 한 발 건너 해골을 밟고 건너가고 건너왔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사경한 경전을 낙타와 구법승 자신들의 등에 짊어지고 왔습니다. 실크로드의 출발지인 돈황은 삼세 모든 부처님들의 가호로 무사함을 빌거나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기도의 도시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전 한 권 한 권이 중국에 들어왔으며, 번역이 되어 대중들에게 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불법을 알아본, 믿음 깊은 중국 사람들이 알아서 중국에 불법을 전파했습니다.
저는 중국의 교무님들께 말씀드립니다. 교화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중국에서는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는 포교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중국에 계신 교무님들께 “외교관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법이 중국의 과거 전통 불교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을 알게 되면, 중국 분들이 알아서 교화하고 포교할 것입니다. 그것이 중국불교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불교학자들은 원불교를 중국 초기의 선종처럼 불전이 없고, 오직 불조의 혜명을 잇는 법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원형을 보존, 계승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선종을 교단화한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의 청규(淸規)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그 선종의 명맥을 원불교가 잇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선종만이 아니라 불법의 모든 측면에서 원불교는 불교의 적자(嫡子)임을 세계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머지 많아 중국에서 원불교의 붐이 일어날 것이라고 저는 과감하게 예언합니다. 그 중심에는 원불교 경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타고 피안에 건널 갈 수 있는 대승 정신을 원불교가 계승하고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불법이 무상대도임을 아시고, 연원을 대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산상사님께서는 제게 직접 “불교의 사상, 철학, 문화를 통해 무한히 발전해야 한다”라고 법문을 내려 주셨습니다. 현대불교, 대중불교, 생활불교로서 원불교의 위상은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현 종법사님도 법문마다 “원불교는 불법을 생활화, 생활을 불법화하는 종교”라고 언명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경전을 살아계신 부처님처럼 모시는 이유는 정산 종사님께서 “성인이 나시기 전에는 도가 천지에 있고, 성인이 나신 후에는 도가 성인에게 있고, 성인이 가신 후에는 도가 경전에 있다”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연 자연한 천지의 도가 가장 큰 경전이니라”(『정산종사법어』 제9무본편 52장)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 자연에 펼쳐진 그 도를 읽어내지 못하므로 성현들께서 친절하게 대자대비심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또한 정산종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성에 구족한 무형의 경전”을 발견하신 분이 바로 제불제성입니다. 성현이 계실 때는 말로 전해주고 마음으로 가르쳐 주는 구전심수(口傳心授)를 통해 범부가 성장하여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대산종사님께서 “우리가 스승의 심전(心傳), 구전(口傳), 행전(行傳)을 전신전수(全信全受)로써 받들어야 한다”고 설하신 것은 이를 말합니다. 성현이 열반하신 후에는 경전에 이 세 가지 가르침이 다 담겨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로부터 “믿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가 경전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대답해줍니다. 우리가 그 성현들만큼 수행하고, 신앙하고, 일생을 도(道)에 들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당연히 진리를 깨달으신 분들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경전이 바로 성현이고 부처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반드시 해줍니다. 잘 알고 계시는 <장자>에 나오는 환공(桓公)과 윤편(輪扁)의 이야기입니다.
수레바퀴 만드는 편이라는 사람이 환공에게 “지금 무엇을 읽고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환공은 “성현의 말씀을 읽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윤편이 그것은 “성현이 남긴 찌꺼기”라고 합니다. 환공이 화가 나서 “그 이유를 대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윤편은 “내가 지금 수레바퀴(요새말로 하면 자동차의 휠얼라인먼트)를 만드는데 너무 헐겁게 하면 바퀴가 무너지고, 너무 뻑뻑하게 하면 바퀴가 굴러가지 않는다. 이 미묘한 기술을 자식에게 전하고자 평생의 노하우를 가르쳐 주었지만, 그것을 터득하지 못해 늙은 내가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니 성현들의 말씀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현의 말씀을 대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살아계실 때 뵙고도 그 뜻을 다 몰라 방황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젊은 시절 자식이 잘 되라고 그렇게 훈계해 주신 부모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겼습니까. 오히려 반항하고 무시하지 않았습니까. 석가모니불의 옛 영산회상에서도, 대종사님의 새 영산회상에서도 살아계신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잠시 스쳐간 인연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성현이 살아 계실 때도 그러한데, 그분들이 안 계신 후, 언어로 쓰인 말씀만을 읽고 깨닫는다면, 최상의 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가리키는 그 말씀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성현의 세계에 바로 그대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그대들이 나의 법을 붓으로 쓰고 입으로 말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도 중한 일이나,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만고 후세에 이 법통이 길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은 더욱 중한 일”(『대종경』 제15부촉품 18장)이라고 하신 법문의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친히 저술하신 『정전』을 비롯해 우리 교단 만대의 경전을 죽은 언어인 사구(死句)가 아닌 살아 있는 언어인 활구(活句)로 만들어 이 땅에 불국낙원을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제2의 소태산, 제2의 정산·대산이 되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될 것입니다.
옛날 화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욕망으로 가득찬, 곧 소멸할 물 한 방울의 존재인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무엇이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불법의 대해(大海)에 풍덩 빠지면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확인하면 됩니다. 경전은 자신이 무한 생명의 일부임을 깨우쳐 줍니다. 그럴 때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사무여한(死無餘恨)의 정신이 살아납니다. 현재 우리는 커다란 폭포수에서 잠시 떨어지는 물방울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더 큰 생명, 우주 전체에 흐르는 거대한 강이 폭포가 되어 흩어졌다가 다시 대해에서 만나듯 잠시 동안 개별화 된 존재입니다. 이제 우리 앞길에는 무한한 생명, 영원한 생명, 불생불멸의, 생명의 대해장강(大海長江)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고, 어떻게 외로울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도 소태산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과 대산종사님과 우리의 위대한 선진님들이 이 경전 안에서 숨쉬고 계시는데 그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비로소 우리는 부처님이 불교학이며, 예수가 신학이며, 소태산 대종사님이 원불교학 그 자체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곧 경전의 주석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몸으로 쓰고, 말로 설하고, 행동으로 드러내는 주석이 되어야 합니다. 문자화되어 닫혀 있는 경전을 우리가 소태산 대종사님의, 제불제성의 분신이자 사자(使者)로서 온 몸과 마음으로 열어젖혀야 합니다. 우리 모든 삶이 경전의 주석이며, 해석이며,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등에 업고, 무소의 뿔처럼, 걸림없는 바람처럼 이 세상으로 이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저는 최근 서울의 은덕문화원에서 불교사상사에서 보는 원불교 강좌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만, 강좌를 준비하면서 저 또한 많은 깨침을 얻고 있습니다. 그 중에 근대 중국불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문회(楊文會) 거사는, 삶의 실의에서 벗어나 불법에 눈을 뜨고 40여 년 동안 금릉(金陵), 즉 남경(南京)의 각경처(刻經處)에서 “백여만 권의 경전을 유통시켰고, 십여만 장의 불상을 인쇄하였다”라고 합니다. 그 불경의 유통으로 오늘날 중국불교 또한 부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태허법사(太虛法師)의 인간불교 정신은 중국과 대만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되어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모든 경전의 정수를 <불교정전>으로 모아 원경(元經)으로 삼아 주신 이유도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강좌를 통해 석가모니 부처님, 예수님, 마호메트님, 대승경전을 만든 이름 없는 깨달은 부처님들, 용수와 세친, 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제불조사들, 근대의 간디, 암베드카르, 양문회, 태허법사, 담사동, 한용운, 백용성, 백학명, 기요자와 만시, 세노오 기로 등등 수많은 종교인들과 불교인, 불교개혁가, 불교혁명가와 소태산 대종사님이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불교 재가·출가가 합심하여 매주 행하는 탈핵순례가 450차까지 이어진 저력도, 전쟁무기 사드를 불법과 폭력으로 들여놓은 무도한 행위에 대항해 불굴의 의지로 소성리에서 6년간 저항해온 재가·출가들의 사무여한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약육강식의 자본과 군사패권의 불의에 저항해 싸우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그 힘은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입니다.
여산의 혜원(慧遠) 스님이 무소불위의 왕권 앞에서 목숨을 걸고 굴하지 않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해 왕에게 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으로 불교인의 기개를 드러낸 것처럼,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 대희사(大喜捨)께서 “지금 조선민중이 도탄에 빠졌으니 정신을 차려 새로운 정책을 세우라”는 진정서를 일본 천황에게 써서 보내고 옥고를 치르신 불굴의 정의로움처럼, “동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는 거리로 간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민중의 고통을 내것으로 삼았던 주산 송도성(主山 宋道性) 종사님과 선진님들의 무상행(無相行)의 대봉공처럼, 우리 등에는 법신불사은님과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들, 대종사님과 우리 역대 선진님들이 계십니다. 제불제성의 대각의 무한한 힘, 무한한 자비의 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입니다. 이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는 인류를 하나로 보는, 지구와 우주의 모든 존재를 하나로 보는 그것입니다. 지금부터 인류의 대성자가 되실 분은 인류를 하나로 보고, 실제 한 가족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석학인 백낙청 선생님도 저번 원불교 여성회 학술회에서 원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삼동윤리(三同倫理)이며, 이를 깊이 알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원불교가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도,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도,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도 한 자리에 모아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이 세계를 갈등과 분열과 전쟁에서 벗어나 평화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못하면, 소태산 대종사님이, 정산종사님이, 대산종사님이, 우리 자랑스러운 선진님들이 당신들이 하신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경전은 또한 영원히 살아서 깨달은 무수한 불보살 제자들을 길러내고, 그 위대한 제자들이 소태산 대종사님의 일원세계의 가르침에 눈물 흘리며, 반드시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낼 것입니다.
말법시대를 위해 옛날 사람들은 경전을 돌에 새겨 석경(石經)으로 남기기도 하고, 땅에 경전을 묻는 매경(埋經)을 하기도 했습니다. 불법을 전하는 교단들이 다 사라진다고 해도 이 경전만 있다면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전만은 남아서 이 야만의 세계를 구제해주기를 서원했던 것입니다. 경전의 힘으로 활불(活佛), 활법(活法), 활승(活僧)의 불국토, 정토낙원, 용화회상을 만들어주길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종교 교단은 이 경전의 뜻을 받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성현들의 금구성언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로 바꿀 수는 있어도, 한 말씀도 땅에 떨어뜨려서는 안 됩니다. 정산종사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경전은 우리의 전도를 바로 인도하는 광명의 등불”(『정산종사법어』 제9무본편 25장)이기 때문입니다. 경전은 교단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인류 정신사의 최고 보고(寶庫)입니다. 경전은 인류 최대의 지혜이며, 문명 전체의 지도이자, 예술 창조의 어머니입니다. 천만다행, 이 말법시대에 주세불 회상의 정법 경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며 축복입니까.
매해 돌아오는 6월 6일 현충일, 하늘도 울고 땅도 우는 오늘, 이 땅과 이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르신 선구자, 선열, 열사, 지사, 의사 영령 모든 분들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오늘 이 법회의 공덕으로 모든 영령들의 완전한 해탈천도와 왕생극락을 기원올리며, 이 사바세계를 구제하러 우리들 곁에 성자로 다시오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또한 저희 재가 출가 모든 분들께도 법신불 사은님과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들의 가호가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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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전은
우리의 지정 교서와 참고 경전 등을 이름이니,
이는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하는 방향로를 알게 하기 위함이요,
무릇,
경전이라 하는 것은
일과 이치의 두 가지를 밝혀 놓은 것이니,
일에는 시비 이해를 분석하고
이치에는 대소 유무를 밝히어,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방향을 정하고
인도를 밟도록 인도하는 것이라,
유교· 불교의 모든 경전과
다른 교회의 모든 글들을 통하여 본다 하여도
다 여기에 벗어남이 없으리라.
그러나, 일과 이치가
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곧 일과 이치 그것이니
우리 인생은
일과 이치 가운데에 나서
일과 이치 가운데에 살다가
일과 이치 가운데에 죽고
다시 일과 이치 가운데에 나는 것이므로
일과 이치는 인생이 여의지 못할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며
세상은
일과 이치를 그대로 펴 놓은 경전이라,
우리는 이 경전 가운데
시비 선악의 많은
일들을 잘 보아서
옳고 이로운 일을 취하여 행하고
그르고 해 될 일은 놓으며,
또는 대소 유무의 모든 이치를 잘 보아서
그 근본에 깨침이 있어야 할 것이니,
그런다면 이것이 산 경전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많고 번거한 모든 경전을 읽기 전에
먼저 이 현실로 나타나있는
큰 경전을 잘 읽도록 부탁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