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밀로 데 렐리스는 1550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던 나폴리 왕국의 부키아니코(오늘날 아브루초에 속한 곳)에서 50세에 가까운 나이인 어머니 ‘카밀라 콤펠리 데 라우레토’와 나폴리와 프랑스 왕실 근위대의 장교로 복무하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는데, 그가 12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한데다 놀음과 도박에 빠져 놀기를 좋아하던 그는 군인이 되기 위해 입대 신청을 했으나 오른쪽 발에 궤양이 생겨 입대를 연기하게 됩니다.
이후 1569년에 이탈리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그도 병사로 출정을 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도 동료와 도박을 하다가 옷까지 뺐기는 등 과거의 악습을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전투를 하다가 중상을 입게 된 그는 1571년 로마의 산 지아코모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병원에서 조수로 일하다가 또다시 도박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직장도 없이 무일푼으로 이곳 저곳을 떠돌던 그는 어쩌다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만프레도니아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공사가 있었으므로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일을 맡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평소 그를 유심히 관찰하던 수도원장이 어느 날 일하던 그를 조용히 불러 다정히 대화를 나누며 그의 생활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제2의 삶은 수사의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수도자가 되기 위하여 수도회에 지원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친 수도복에 발이 쓸려 예전의 상처가 도지자 수련소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치료를 위해 다시 로마 병원으로 가서 병을 치료하고 1579년 다시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또다시 상처가 덧나면서 결국 수도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병으로 평생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상처도 치료하는 한편 다른 환자들까지 정성으로 간호해주었는데, 그의 과거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돌변한 모습과 경건한 태도에 경탄하며 그를 새로운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환자들을 돌보며 재미를 붙인 그는 앞으로의 삶을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투신하기로 결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부 간호사들은 금전에만 매달려 사리사욕을 채우며 일을 게을리했는데, 그는 이런 모습을 보며 오직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그는 병원의 회계를 담당하는 최고 관리자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병원의 실태는 물론 여러 부정적인 문제에도 눈을 뜨게 되었는데, 결국 자신이 직접 간호 수도회를 창설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자 이를 간호사들에게 취지를 알리며 동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간호사들은 그의 의견에 반대했는데, 그럼에도 간호사 4~5명이 어렵게 그의 취지에 공감하며 함께 동행할 것을 약속하게 됩니다. 그렇게 모인 뜻있는 간호사들과 함께 테베레 강변의 한 빈민촌에 작은 수도회를 설립한 후 가난한 병자들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며 정성껏 그들을 돌보는 일에 착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육신의 구원 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고해신부이던 ‘성 필립보 네리’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제가 되기 위해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1584년 34살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미 함께 봉사를 해오던 이들과 다른 협력자들을 모아 ‘병자 간호 성직 수도회(가밀로 수도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초대 총장으로 선출된 그는 ‘청빈’ ‘순명’ ‘정결’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누구나 가리지 않고 정성으로 간호해 준다는 회칙을 만들어 병든 이들의 상처뿐만 아니라 영적인 돌봄에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이 회칙은 추후 1586년에 교황 ‘식스토 5세’로부터 승인을 받게 됩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페스트(흑사병)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와 동료들 역시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며 병원의 청결을 중요하게 여겨 수시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환자들이 적당한 음식을 먹도록 조치하였으며, 환자들을 적절히 격리하여 치료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와 동료들은 항상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지켰고, 장례식까지 챙겨주었기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높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간호와 환자들과의 인격적 만남에 감동한 시민들이 ‘가밀로의 품에서 죽으면 지옥은 안 간다’라고 그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하며 ‘로마의 성인’이라 불렀는데, 정부에서조차 그에게 감사장을 보내줄 정도였습니다.
그는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더는 총장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수도회 제5차 총회 때 총장직을 사임하게 되는데, 그 무렵 수도회는 이탈리아 전역뿐만 아니라 헝가리까지 확장되어 나갔기에 사임 후에도 신임 총장과 함께 이탈리아 여러 곳의 병원에서 활동하는 수도회원들을 둘러보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지방 수도회를 순회하던 도중 그는 중병으로 쓰러지게 되는데, “나는 로마에서 죽고 싶다”라는 소망에 따라 급히 로마로 귀환하여 의사의 진단을 받았으나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이에 그는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시편 122, 1)”라고 말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었습니다. 서기 1614년 7월 14일이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 제대에 안치되었습니다.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그를 복자품에 올렸으며, 4년 뒤 다시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1886년 교황 ‘레오 13세’는 그를 천주의 ‘성 요한’과 함께 모든 병자와 병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었고, 1930년 교황 ‘비오 11세’는 모든 간호사와 간호단체의 수호성인으로 확대 선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