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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 푸르게 푸르게,
'식목일'은 왜 하필이면 4월 5일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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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은 1948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가 주 5일제 실시로 인해 2006년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왜 하필이면 4월 1일도 아니고 4월 10일도 아니고 4월 5일이었을까요?
우리의 나무 위키 에서는 아래의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1) 조선 성종 때 이 날 즈음해서 왕이 직접 나가 밭을 간 것과,
2)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음력 2월 25일이 양력으로 계산하면 4월 5일이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두 가지 이유로 제정이 되었다.
3)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천도교의 최제우가 동학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
글쎄요... 너무 생뚱맞고 작위적인 것 같지 않나요?
이런 걸 억지로 같다 붙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하지 않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하자는 데
왜 성종이 등장하고, 김춘추가 나오고, 최제우까지.... 초절정울트라 황당개그같습니다.
차라리 당시 담당자 마음대로 정했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을 듯.
그렇다면 외국의 예를 볼까요?
식목일의 유래는 멀리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데...
1872년 4월 10일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제1회 식목 행사가 열렸으며,
그 뒤 식목 운동을 주장한 J. S. 모텅의 생일인 3월 22일을 아버데이(Arbor Day)로 정하여
각종 축제를 벌인 것이 시초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음 미국에서는 1872년까지 올라가는군요. 그리고 날짜는 4월 10일과 3월 22일이라는 것.
우리랑 관계가 없네요.
그렇다면 식목일을 전달해 주었을 일본은 어떠할까요?
위키백과 (일본위키를 번역한 것)에서는 일본의 식목일을 녹색의 날(みどりの日)이라 한다면서,
'1989년부터 2006년까지는 4월 29일이었으나, 2007년부터 5월 4일로 날짜가 바뀌었다.'라고 합니다.
이건 뭐니... 1989년 이전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겨?
이제 이야기는 좀 급진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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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위키에 '植木日'로 검색했더니...
4월 5일에 관한 나무위키의 윗글 1)과 2)가 그대로 있고, 여기다 한문장이 덧보태어져 있습니다.
한국의 식목일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일본 위키의 디테일 승리입니다.
1910年4月5日に純宗が自ら植樹を行ったことが、植木日の直接の由来とされている
(1910년 4월 5일에 순종이 스스로 식수를 한 것이 식목일의 직접적인 유래가 되시겠다.)
덧붙여 이 글에서는 4월 5일이 한식으로 산소를 찾는 중요한 날이라는 것도 덧보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생각일 뿐이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에서도 순종을 운운하지 않는 걸 보면,
이 해석은 후대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림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 현신규 박사의 1947년 기고글에도 순종 이야기는 없습니다. 한번 '산에 미래를 심다'에서 관련글이 있는지 찾아 보아야겠습니다.
순종실록을 볼 수 있다면, 1910년 4월 5일 순종의 행보도 확인해보고 싶네요.
그러나 여기서 꼬리를 무는 질문.
해석상 윗대 조선왕들은 하지 않은(?) 걸로 보이는데, 왜 순종은 나무를 심을 생각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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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772페이지에 달하는 대작, '코레아'의 저자인 독일의 저명한 지리학자 헤르만 라우텐자흐는 1933년 조선에 와서 8개월동안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자그마치 55권의 잡지와 24권의 저서, 23개의 지도, 936편의 논문을 참고하여 1945년 출간했습니다.
P536에는...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이후 데라우치 초대 총독은.....
오늘날까지도 시행되는 '식목일'의 제정자이기도 하다.
초대 일본 천황(신무천황)의 기일인 매년 4월 3일에
위로는 총독 자신과 모든 관리들로부터 아래로는 각 학교에 나무를 심을 땅을 할당하고
교사와 어린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헐벗은 사면에 나무를 심는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수목 및 관목의 육림과 식목사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국민총동원령에 학교림까지...6,70년대 학교생활을 한 이라면 '내 이야기'라고 할 내용입니다.
1921년 동아일보 기사 에도 더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순종 임금이 식수를 한 것은 그건 일본의 예를 따라서, 또는 일본의 압력에 의해 한 건 아닐까요?
해방 후 일제 때의 기억을 갖고 있던 정부 담당자들은 식목일을 제정하려 했고,
그 컨텐츠는 그래서 식민지 시절의 것과 거의 같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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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며칠을 식목일로 정해야 했을까요?
제 추측은 이렇습니다.
처음부터 4월 5일로 잡았을 겁니다.
많은 기념일을 보면, 우리는 홀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4월 1일은 만우절(일제 때도 만우절이 있었음)이라 안되고,
반일 분위기 하에 차마 일본처럼 4월 3일은 날짜로 잡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4월 5일로 정한다음 역사책을 뒤적였겠죠....~
그래서 호출한 인물들이 겨우^^, 꿩대신 닭이라고,
성종, 김춘추 그리고 최제우 가 아닐까 라는 게 제 추측입니다.
세월이 흘러, 순종도 조연으로 등장하고요.
제가 보기엔 애초에 산소관리하기 위해 산을 찾던 한식일이 식목일이 되기 안성마춤이 될텐데,
그 당시 담당자는 어이없게도 이걸 생각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 추가: 당시 한식에는 모두 뿔뿔이 자기 조상 산소를 관리해야 했기에,
공무원과 학생 유사단체원 등등을 강제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제된 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이상 왜 하필 식목일이 4월 5일이었을까에 관한 근거없는 추측과,
인연의 실마리가 되어 앞으로 더 찾아보겠다는 다짐^^의 글이었습니다....
추가)*민족문제 연구소의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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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위키 -녹색의 날- 에서는
'2007년 이후부터 매년 녹색의 날에는 무료로 국립공원에 입장할 수 있으며'
어랏..일본은 국립공원에 입장할 때 돈을 내네.....
그리고
일본에서는 식목일을 식재일 또는 애림일 이라고 하는데,
1898年(明治31年)、林学博士・本多静六の提唱により神武天皇祭の4月3日が「植栽日」となった
(1898년 신무천황의 기일인 4월 3일이 식재일로 정해졌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 현신규박사의 일대기와 업적에 관해서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보는 식목행사...
시민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3만여 점에 이르는 근현대사 실물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식민지시기 문헌과 유물 보유에 있어 국내외를 통틀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연구소가 가지고 있는 희귀자료를 중심으로 해설을 실어 근현대사의 구체적 실상을 생생하게 접하도록 하고 더불어 시민역사관 건립과 자료기증의 필요성을 알려나가고자 합니다.
깜짝 놀랄 식목일의 기원-‘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리고자’ 제정
『애뉴얼 리포트』에 수록된 ‘기념식수일’ 홍보사진
우리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면서도 한편 자랑스럽게 다가오는 이미지도 함께 지닌다. 해마다 4월이라고 하면 소소하게는 만우절(萬愚節)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4월혁명, 제주 4.3항쟁, 상해임시정부수립은 물론 이제는 세월호 참사까지 포함하여 이를 기억하고 크게 기념해야 하는 날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공휴일로 지정된 날이 전혀 없는 달이 4월이다. 한때는 식목일(植木日)이 그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마저도 2006년 이래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버렸다. 그런데 ‘4월의 공휴일’ 식목일의 기원이 뜻밖이다.
일제강점기에 4월은 각급 학교의 신학기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지금처럼 3월에 학기가 시작되는 식으로 제도가 바뀐 것은 1962년이다. 그에 앞서 미군정기에 9월 신학기제도가 잠깐 채택된 때를 제외하고는 대한제국 시절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까지 줄곧 4월 1일이 1학기의 출발점이었다.
일제시기에는 개학과 더불어 이틀이 지나면 이른바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 4월 3일)’라는 이름의 휴일이 이어졌다. 이날은 이를테면 일본 초대 천황의 제삿날로, 그의 즉위일은 기원절(紀元節, 2월 11일)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지금도 경축일로 기리고 있다. 일제패망기 얘기이지만, 1938년 2월 22일에 조선총독부가 육군특별지원병령(陸軍特別志願兵令)을 공포할 때 부칙규정을 두어 구태여 시행일을 그해 4월 3일로 못 박은 일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원병제 실시조차도 그들의 건국시조라고 일컫는 신무천황과 관련된 날로 억지스럽게 연관지으려는 속내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신무천황의 제일(祭日)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행사 중 하나가 바로 기념식수(紀念植樹)이다. 이는 식민통치의 개시와 더불어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행사로, 지금의 식목일의 기원이나 다름없다. 언뜻 보면 ‘기념식수일’을 새로 설정하여 이를 공휴일로 삼은 듯하지만, 실상은 원래 휴일이던 날에 나무 심는 행사를 겹쳐 실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날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산으로 들로 나무심기 행사에 대거 동원되는 대상은 주로 학생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날은 왜 그냥 식목일도 아니고 그 앞에 ‘기념’이란 수식어를 꼭 덧붙여 부르는 것이며, 또한 도대체 무엇을 기념한다는 것일까?
『애뉴얼 리포트』(1911~12년도판)에 수록된 제1회 기념식수일 광경(총독부 주관, 총독관저 후정(後庭))
조선산림회가 펴낸 『조선임업일지(朝鮮林業逸誌)』(1933)에수록된 ‘기념식수의창설유래’에 관한 내용을 통해 그 내막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을 쓴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 1866~1936)는 조선총독부 출범 당시부터 1915년 영림창장(營林廠長)으로 영전할 때까지 식산국 산림과장(山林課長)을 지내면서 식림정책을 주관하고 기념식수일을 제정한 당사자였다.
한국 민중이 식수(植樹)를 천하게 여기고 꺼려 치산(治山)의 실행을 진척시키는 데에 큰 장애를 경험했으나, 한국 황제의 친수식(親樹式) 거행은 이러한 나쁜 풍습을 타파하기위해 유력한 제일석(第一石)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일석으로써 전국 민중의 미몽(迷夢)을 깨고 곧장 식수식림에 힘을 쓰도록 만드는 것은 바라기 어려운 일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나는 제1석의 투하가 뜻밖의 성공을 거두고 이와 더불어 영구히 지속될 국민적 투석(投石)의 미풍을 일으키도록 고심하던 차였는데, 명치 43년(1910년) 8월 29일로써 일한병합의 대업이 이뤄짐을 호기회로 여겨 키우치(木內)농상공부장관, 야마가타(山縣)정무총감 및 테라우치(寺內) 총독, 기타에게 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념할 방법으로서 매년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의 날에 전도(全道)의 관민이 모두 기념식수를 행할 것을 진언하였고, 이것 또한 다행스럽게 채택 실행하게 된다면 곧장 미국의 수재일(樹栽日), 기타 각국의 실례 등을 조사함과 더불어 다수 민중의 습속, 심리상태 등을 고찰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실행계획을 정하도록 했다. …… (하략)
위에 나오는 ‘친수식 운운’ 하는 구절은 1910년 5월 5일 동대문 밖 동적전(東籍田, 선농단 옆)에서 친경식(親耕式)을 거행할 때 농상공부 기사(技師)였던 사이토의 주청으로 순종황제가 나무를 심었던 일을 말한다. 이때 선택된 나무는 지금도 종종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 고유 수종인 금송(金松, 코우야마키)이었다고 한다. 사이토의 글에는 기념식수일의 본뜻이 ‘한국강제병합’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제1회 기념식수일 행사는 총독부 주관으로 1911년 4월 3일 남산 왜성대에 있는 총독관저(總督官邸) 뒤뜰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자기 딸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자리를 비운 데라우치 총독을 대신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이 전나무 묘목 한 그루를 심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 329그루의 나무가 참석자들의 손에 의해 식재되었다.
1911년 4월 3일에 벌어진 제1회 기념식수일 광경(경기도 주관, 인왕산)을 담은 사진엽서
이 목록에는 단풍나무, 은행나무, 밤나무가 포함되었고, 여기에 벚나무 곧 ‘사쿠라’ 또한 빠질 수 없다. 이와는 별도로 경기도청에서 주관하는 식목행사는 인왕산(仁王山) 자락에서 이뤄졌다.
이런 방식으로 일제 지배가 지속되는 동안 해마다 4월 3일이면 서울시내 또는 근교 어느 곳을 정하여 총독 또는 조선군사령관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왁자지껄하게 식목행사가 벌어지고, 그 다음날 신문에는 어김없이 이들이 나무를 심는 장면이 보도사진으로 등장하곤 했다. 이러한 식목행사장으로는 남산자락(장충단, 노인정, 약초관음당(若草觀音堂), 조선신궁, 경성호국신사 구역)이 선호되었고, 이밖에도 효창원(청파동), 의령원(북아현동), 원빈묘(元嬪墓, 안암동), 임업시험장(청량리), 사방공사지(우이동, 정릉리, 도봉리) 등지가 두루 포함되었다. 1928년에는 총독부신청사가 준공되면서 경복궁 경회루 옆에서 식목행사가 거행되기도 했다.
『애뉴얼 리포트』(1910~11년도판)에 수록된 서울 백운동 시범조림지(창의문 구역) 홍보사진
이처럼 역대 총독을 거치는 동안 기념식수일은 중요한 연례행사로 간주되었다. 이는 산림녹화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식민통치의 치적을 가시적으로 자랑하기 좋은 구실을 마련해주고 있었던 탓이다. 가령, 『반도이면사(半島裏面史)』(1940)에는총독관저의 원정(園丁, 정원사)으로 근무했던 카와치 슌이치(河內春一)가 남긴 목격담 한 토막이 들어 있는데, 조선의 산야를 대하는 식민통치자들의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데라우치 총독은 무변(武辨) 일변도인 것 같이 얘기되고 있지만, 변변히 나무도 없는 산을 보고는 “조선을 잘 살게 하는 것은 내 머리와 같이 민둥민둥한 곳에다 식림(植林)을 하는 것이야. 민둥민둥한 것은 정말 싫다네.” 라고 하여 나무 심는 것을 권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왜성대가 녹림울창(綠林鬱蒼)하게 된 것도 데라우치 총독의 치적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조선은 전 국토의 70퍼센트 이상이 산악지역이지만, 식민통치 이전부터 이미 온돌에 사용할 땔감을 베어내기만 하고 잘못된 미신으로 나무심기를 게을리한 탓에 사방이 온통 민둥산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사실을 유달리 강조한 것이 그들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황무지 같은 조선을 푸른 숲으로 가꾼 것은 오로지 총독정치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영문판 홍보책자(연속간행물)인 『애뉴얼리포트』에도사방조림지(砂防造林地)의 나무 성장 과정을 비교하는 사진이 곧잘 등장한다. 속성수(速成樹) 위주로 심어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뚜렷한 곳을 골라 조선총독이 선정(善政)을 편 결과라고 생색을 내는 전형적인 홍보수단의 하나였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기념식수일은 일제가 패망을 눈앞에 둔 1945년 4월 3일에도 진행되었는데, 그 장소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점격인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경내였다. 『매일신보』 1945년 4월 4일자에는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최후의 기념식수일이었던 이날의 풍경을 전하는 아래 기사와 더불어 당시 아베 총독의 식수 모습을 담은 보도사진이 실렸다.
삼림자원의 확보가 절실히 요망되는 결전하(決戰下)에 또 다시 4월 3일 신무천황제를 맞이하여 제35회 뜻 깊은 조림행사가 전선적(全鮮的)으로 거행되었는데 이날 경성에서는 관민 3천여 명이 경성호국신사 경내에 모여 기념식수와 민간조림 공로자의 표창식을 거행하였다. ……곧 기념식수에 들어가 아베 총독은 손수 삽과 괭이를 들고 다섯 주의 나무를 심었으며 일동도 각각 나무를 심어 이 나무가 하루바삐 자라서 서기(瑞氣)어린 신역(神域)을 더욱 성스럽게 하는 한편 미영격멸(米英擊滅)의 조선자재(造船資材)가 될 것을 마음으로부터 기원하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정오 지나 해산하였다.
『반도의 취록』(1926)에 수록된 제16회 기념식수일 광경(효창원 묘역이 조림지로 변하고 있는 장면)
해방 이후 첫 봄을 맞이한 1946년 4월 1일, ‘해방기념’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식수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그 이듬해인 1947년부터는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한 데에 이어 1948년에는 미군정 법령을 통해 식목일이 공휴일로 부활되었다. 이로써 일제가 이 땅에 남겨놓은 기념식수일이라는 전통 아닌 전통은 우리들의 손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헐벗은 조선의 산야를 푸르게 한다는 것을 으뜸가는 식민통치의 치적으로 자랑하지만 정작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서는 마구잡이 벌채로 삼림자원을 초토화했던 사실, 그것이 바로 조선총독부가 지향했던 식림정책의 실체였다는 점도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 글쓴이: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5년 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출처: http://ibuild.tistory.com/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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