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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대로
말씀/마태복음 26:31-75
요절/마태복음 26:39, 찬송가/431장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많은 화가들이 그렸습니다. 그런데 빈센트 반 고흐는 이 예수님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자신은 도저히 그릴 수 없다고 여러 번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화가는 아니지만 저에게도 이 예수님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만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단순한 이야기지만 심오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기도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까요?
1장, 베드로의 세 번 부인에 대한 경고(31-35)
이제 최후의 만찬도 끝났습니다. 그들은 만찬 후에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유월절을 통해 구원의 은혜도 되새기고, 만찬을 통해 배까지 부르니 찬미가 안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잡히면 제자들이 다 흩어질 상황이 올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렘23장과 슥13장의 인용입니다. 렘23:5-6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메시야 됨을 강조하며 인용하셨던 말씀입니다. 또 슥13:8,9절은 목자가 해를 받음으로 대부분 양들이 사라지지만 1/3이 남아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앞으로 올 일들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32절에서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예레미야서나 스가랴서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고, 메시아로서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반과 불신을 회개와 충성으로 새롭게 바꾸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알아들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앞으로 썩 나서며 말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갑자기 베드로는 예수님께 충성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내가 살아난 후에’라는 말씀까지 하셨지만 그는 끝까지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다 나를 버린다’는 것만 에 꽂혀 충성맹세를 한 것입니다. 이런 제자가 있느니 예수님은 든든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오히려 이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 밖에 없다’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오늘밤 닭 울기 전이라고 하십니다. 그의 충성맹세는 하루도 못 가서 물거품처럼 사라질뿐 아니라 배반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닭’이 등장합니다. 닭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손흥민이 뛰고 있는 토트넘 유니폼에는 닭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 프랑스의 상징이 닭입니다. 또 프랑스의 성당마다 십자가 밑에 닭이 그려져 있습니다. 왜 하필 닭일까요?
유대에서 닭 울음소리는 어둠을 밝히고 새 날을 알리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닭울음소리를 듣고 아침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닭 울음소리는 어둠의 시대가 가고 구원의 시대, 빛의 시대가 올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구원의 시대, 빛의 시대가 오기 전에 예수님을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은 선포를 확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혼할 때, “이혼한다. 이혼한다. 이혼한다.” 라고 3번 외치면 이혼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그 만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완전한 부정이고, 철저한 부정을 말합니다. 이 정도까지 예수님이 그에게 강력하게 경고하셨으면 정신을 번쩍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말합니까? 35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했고, 또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요?
2장,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36-46)
3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셨습니다. ‘겟세마네’는 ‘발로 밟아 짠다’는 말로, ‘기름을 짜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기름집’의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감람산이 아니라 여러 동네에 기름집이 있으면, 그곳이 겟세마네입니다. 본문의 겟세마네는 감람산에서 난 올리브로 기름을 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의 겟세마네는 단순히 기름을 짜는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힘과 열정을 짜내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장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신 예수님은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심정은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새번역은 예수님께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힘드셨던지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이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곧 닥쳐올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계십니다. 또 자신의 죽음이 가져올 구원도, 심지어 자신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할 것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어 하시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죽음의 자리에 내 주신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전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던진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의인’이라고 말하며 높여줍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합니다. 그럼 의인 중의 의인이요, 최고의 의인입니다. 또 죽지만 않으시고 또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다 알면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이렇게 힘들게 할까요?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려면 십자가에서 절규하신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시며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호소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이를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은 모두에게 두렵고 슬픈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힘든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겪으시는 슬픔과 고통은 단순히 죽음이 주는 슬픔이나 고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다 감당하는 대속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속의 죽음’이 주는 고통이 어떤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아끼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내 것을 내어 준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가족을 위해서 직장에서의 괴로움을 감당합니다. 또 착한 자녀는 부모의 약값을 대기 위해서 힘든 직장생활을 참고 감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아닙니다. 내가 아끼는 내 형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심지어 나를 괴롭히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은 다시 안 보면 됩니다. 손절해 버리면 됩니다. 카톡에서도 지워버리고 전화번호도 단절합니다. 그러면 끝납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심지어 바로 그 미운 사람을 위해 내가 손해를 보고 내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그 희생이 가장 아끼는 내 목숨이라면 ? 더 나아가서 그것 때문에 오히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도 내가 버림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속이 뒤집어 질 것입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나를 인정하지도 않고, 나를 박해하고, 나를 조롱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하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을 받아야 합니다.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그러한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십자가의 길은 사랑하는 몇 사람만을 위한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자들만을 위한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들, 예수님을 조롱하고 무시한 자들, 온갖 죄인들을 다 감당해야 하는 그런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심지어 그 때문에 하나님에게조차 버림을 당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얼마나 힘드셨는지 전혀 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까지 힘든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9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내 아버지여’라고 부르시며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께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구하셨습니다. 이 ‘잔’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일입니다. 그 ‘잔’은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 죽음은 사랑하는 몇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못 박은 자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온갖 잡스런 모든 죄인들의 죄까지 다 떠안고 감당하는 가운데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이요, 슬픔이상의 슬픔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있다면 마시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즉 내가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 심지어 나에게 원수 짓거리를 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희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이 오게 되면 내가 희생할 수 없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먼저 끝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가 아니야?” 그를 위해 나를 희생하고 나를 내어준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왜 이런 사람을 위해 나를 희생하게 하심으로 시험에 들게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을까요? 아니면 이런 잔이 어찌하든지 내게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할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마시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내게 이런 것까지 요구하실 수 있습니까? 하며 원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하시며 자신의 소원,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꺾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여 달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기도는 나의 뜻을 하나님께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한 유명한 표현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서라도 나의 뜻, 나의 의지를 이뤄가는 것을 기도라고 여깁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 주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을 기도라고 많이 생각합니다. 물론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같다면 이것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일명 Good이요, 금상첨화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것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방향은 같은데, 때가 다를 수 있습니다. 또 방향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아예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동쪽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향은 서쪽입니다. 나는 지금이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방향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나의 기도는 불평과 원망과 몸부림의 장소가 됩니다. 그 정도면 다행입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불만이 잔득 쌓이고 마음은 꼬일 대로 꼬이게 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예 하나님께 대한 반발심으로 가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뜻, 내 의지, 내 방향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방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알 수 있다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 알 수 있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알고자 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모릅니다.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의 뜻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러나’ 할 수 있는 마음의 결단과 전환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받아드리기 힘듭니다. 그러나 나는 잘 모르지만, 다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주의 뜻을 따라 가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을 하며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기도하며, 십자가를 지는 슬픔과 하나님께 외면 당하는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자 예수님은 몸부림을 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후에 오셨을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기도의 동역자로 세 제자를 데리고 가셨는데, 셋도 모두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베드로가 당할 일을 아십니다.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그런데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은 그가 예수님은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42절을 읽겠습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는 처음과 조금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바꿔지기를 구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이 잔을 마시고자 하는 방향이 서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자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피곤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자고 있을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째’라는 것은 완전히 확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확정되기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자세가 되기까지 기도하시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기도합니다. 자신의 의지가 완전히 하나님께 맞춰지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할 준비가 되기까지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기도하셨을까요? 이렇게 기도하심으로 죄인들을 감당할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걸핏하면 모든 원망과 불평을 하나님께 쏟아 놓는 우리의 이 망령된 죄를 다 감당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시며 준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겟세마네 기도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몸부림치는 헌신의 모습입니다. 이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섬기기 위해서, 감당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이제 예수님은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 자신의 운명을 놓고 땀과 눈물을 쏟으신 고뇌의 동산이었습니다. 기름을 짜듯이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을 따르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며 애쓰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뇌가운데 그린 기도의 내용은 단순하였습니다. 기도의 중심이 자신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가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나의 뜻만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의 뜻에 맞춰가는 그러한 겟세마네 기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내가 감당하기 힘든 사람,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이 상황을 감당하기 위해서 부르짖는 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어 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장, 예수님의 승리와 베드로의 실패(47-75)
47-68절은 체포당하신 예수님께서 심문당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데리고 온 사람들에 의해서 체포를 당하셨습니다. 이때 칼을 들고 대항한 제자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이를 말리며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밤에 급히 재판을 진행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았습니다.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으나 증거가 없었습니다. 죄를 만들고자 하는데 만들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성모독 죄로 잡아 죽이고자 유도심문을 한 것입니다. 이를 안다면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실제로 피고인이나 피의자가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인 묵비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 며 분명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셨습니다. 심지어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잡아 죽이라고 멍석까지 깔아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을 선포하고 사형을 선언하였습니다. 로마도 종교재판에서의 사형선고는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사형선고가 내리자마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불법재판에 불법증인들을 내세워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사형을 선고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갖 수치와 조롱을 당합니다. 이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수치와 고통을 말없이 다 당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마셔야 할 잔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잡은 방향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잔을 마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떠했을까요? 69절을 보면,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아 있을 때, 한 여종이 말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러자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며 앞문까지 나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또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하며 갈리리 사투리를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이제 빼박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곧 닭이 울었습니다. 새벽이 온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했을까요? 75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히라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잃을지라도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를 경고하셨지만 그는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무너졌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완전하게 예수님을 부정했습니다. 실패해도 그는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의 통곡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려움 때문에 실패한 것에 대한 자학과 탄식의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또 자신만을 의지하고 큰 소리친 것에 대한 후회와 회한의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나의 약점, 뻔히 내가 실패한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감당해주셨던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과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승리하셨지만 베드로는 실패했습니다. 이 차이를 단순하게 예수님은 기도했지만 베드로는 큰 소리만 치고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보다 큰 그림에서 보면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않은 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도 하나의 준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준비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생각할 때, 그럼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순간에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그 순간의 기도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평소에 자신의 삶속에서 자신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의 연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정말 중요할 때, 내 고집, 내 방향,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할려고 한다면, 그때 가서 기도하면 되지 뭐? 그럼 될까요? 심지어 그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잠자려 갈 것입니다. 잊어버리고자 몸부림 칠 것입니다. 이것은 평소에 내 뜻보다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이 연습되고 훈련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찌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을 쳐다도 안 봐! 이런 삶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라도 품고 감당하고자 했던 주님의 마음을 조금 헤아려서 감당하는 연습도 하나의 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겟세마네의 기도가 필요하고, 우리의 삶에 도전이 됩니다. 때마다 내 삶이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의 연습이 되어 갈 때,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내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에 맞추는 삶이 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쌓여서 어느 순간에 나의 겟세마네 기도가 승리의 기도가 되고, 주의 뜻을 이루어 가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