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이후 가족 상봉
추석 다음 날인 2003년 9월 12일(금) 저녁 태풍 ‘매미’가 경상남도를 강타하고 지나간 후 내가 살고 있는 마산 해안가 저지대 사람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그날 저녁 8시 경부터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밤 11시까지 약 3 시간 동안 마침 만조였던 바닷물이 육지로 밀려 올라오면서, 주민의 생활은 졸지에 전기, 수도, 통신이 전무한 원시 시대로 되돌아갔다. 특히 피해가 컸던 우리 동네 해운동은 주로 아파트 단지인데 밤만 되면 불빛 하나 없는 암흑 천지로 변했다. 집안에서는 촛불로 불을 밝혔으며, 집밖에는 급수대 앞에 물통 행렬이 장사진을 쳤다.
추석 연휴가 끝난 월요일(9.15.)부터는 각지에서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도착해 도로 쓰레기를 치운다, 빨래를 돕는다, 무료식사를 제공한다....... 온 동네가 법석대기 시작했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경남대학교도 정시현, 문봉진 두 학우가 해운프라자에서 목숨을 잃어 교문 옆에 분향소를 마련하는 등 분위기가 침통한 가운데, 많은 학생들이 학교 앞 수재지역에 자원봉사를 나가고 있다. 우리 학과의 한 원로교수님께서도 수재를 당해 의식주 해결조차 불편하던 차에,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무료급식소를 발견하시고 사모님까지 핸드폰으로 불러 공원 벤취에서 식사를 하셨다는데, 그때 비로소 자신의 처지가 절감되면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나는 다행히 태풍과 해일이 몰려오는 시각에 서울에 있었고, 그 이후로는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나 혼자 마산에 내려와 주로 학교 연구실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으므로 별 고생이 없었으나, 이곳에서 온가족이 함께 태풍을 맞은 집들은 암흑 천지에 식수난까지 겹쳐 아직까지 먹고, 싸고, 입고, 자는 모든 일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마산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주로 태풍과 함께 온 해일에 의한 피해였기 때문에 그 양상이 더욱 심각한 듯하다. 침수된 자동차는 조금만 젖어도 소금기 때문에 부식이 심해 다시 고쳐 탈 수가 없고, 가로수나 아파트의 조경수들도 물에 잠겼던 시간과 상관없이 벌써 말라가고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마산시 해운동 현대아파트)의 경우는 바닷가에 가장 근접해 있다보니 해일 당시 도로 위의 수위가 사람 한 길을 넘었다는데, 지하주차장은 물론 지상에 주차한 차들도 모두 침수되었으며 조경수도 전부 소금기에 절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자 사람들은 재산 피해와 생활의 불편함 속에서도 그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는지 만나기만 하면 갖가지 무용담과 에피소드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누구는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집이 고지대여서 그냥 있으면 아무 탈이 없었을 것을 태풍 구경한다고 바닷가로 나왔다가 애꿎은 차만 잃었다고 한다. 앞으로 며칠 간은 내가 듣고 본 그런 이야기들을 ‘태풍 이후’라는 제목 하에 연재하도록 하겠다. 기대해 주시기 바란다.
참, 나는 오늘(18일, 목) 새벽 3시 25분 헤어졌던 가족을 상봉하여 며칠 간의 이산 가족 생활을 끝냈다. 아내와 아이들이 어제 밤 10시에 서울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마산역에 그 시각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 아파트의 경우는 월요일(15일) 저녁에 전기가 들어오고, 수요일(17일) 오전에 전화가 연결되었으며, 수요일 오후에는 엘리베이터까지 작동이 되는 등 주변 아파트보다 복구가 빨라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고 해서 수요일 밤차로 가족이 내려온 것이다. 남은 문제는 수돗물이 아직 안 나온다는 거다. 나는 새벽에 역으로 가족을 맞으러 나가기 전에 바람으로 유리가 다 깨친 경비실 옆 급수대에서 물을 받아 목욕탕 욕조에 가득 채우느라고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물통을 들고 수도 없이 아파트를 오르내렸다. 그나마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여 고생을 덜 했다. 그래도 걱정이 돼 아이들을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이 말부터 했다.
“이제부터 물이 다시 나올 때까지는 똥은 꼭 학교에 가서 누어야 돼!”
(2003. 9.18.)
(경남대 김원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