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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용서는없다] 촬영 현장
"밥 먹고 합시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스탭들이 밥 차로 향했다. 같이 식판을 받아 데이블에 앉았는데 유독 류승범만 수저를 들지 않는다. "아까 빵을 먹어서요." 물 컵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모습이 왠지 조심스럽다. 몇 개의 작은 역할들을 제외하면 2007년 [라듸오 데이즈] 이후 2년만의 영화. 그는 이번 영화에서 토막살인 용의자 이성호를 맡았다. 과거의 상처를 힘겹게 끌고 사는 무거운 인물이다. 다소 긴 시간을 털고 일어난 그에게 어떤 결심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픔과 복수와 동정과 비극이 뒤엉킨 시나리오. 확실히 밥이 잘 넘어가는 영화는 아니다.
[용서는 없다]는 인간을 마치 수술대 위에 올려놓은 듯한 영화다. 영화 속에 부검의가 주요인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시나리오를 보면 [용서는 없다]는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면들을 최대한도로 벌려놓고 있다. 하나의 살인사건이 과거의 치유되지 못한 상처로 이어지고 그 사이의 과정이 질퍽하게 드러난다. 인간이란 텍스트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의 기복, 사건의 지독함, 증오의 엉킴 등이 영화를 밀도 있게 끌고간다. 영화의 주인공인 살인사건의 용의자 이성호(류승범)와 그 사건을 담당하는 부검의 강민호(설경구)는 이야기의 두 축이기도 하지만 영화는 일면 이 둘을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는 표본으로 사용한다.
7월13일. 세트장은 제천영상위원회 건물에 마련됐다. 매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열리는 이곳의 7월은 여전히 푸르고 싱그러웠지만 세트장 안은 시커먼 그림자가 무겁게 깔려있었다. 설정은 군산 경찰서 유치장 면담실. 딸 혜원이가 이성호에게 유괴됐단 사실을 안 강민호가 면담을 청해 협상을 시도하는 장면이니 그 어둠의 무게가 실로 짐작이 된다. 면담실이 좁은 탓에 모니터를 비롯 장비들이 모두 세트 외부에 설치됐고 김형준 감독은 그 안팎을 오가며 배우와 스탭들 사이를 조율한다. [키다리아저씨]의 각본을 썼고, [공필두]를 제작하기도 했던 김형준 감독은 "시나리오만 쓰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아쉬움"을 이번 첫 연출작을 통해 털어내고 있는 듯하다.
촬영은 두 남자의 대결로 시작됐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이성호와 강민호는 서로 다른 이해로 거래를 한다. 강민호의 딸을 유괴한 채 자신을 석방하라는 용의자 이성호와 과거의 오점을 숨긴 채 딸의 목숨을 돌려달라는 부검의 강민호. 열을 밖으로 터뜨리는 설경구와 세상을 냉소하듯 안으로 읖조리는 류승범의 대조되는 부딪힘도 보기 좋게 그려진다. 설경구는 "아주 확실한 친구예요. 준비도 굉장히 철저하고. 제가 쏙쏙 뺏어 먹어야죠"라고 농담하더니 촬영이 시작되자 셔츠가 젖을 정도로 열중이다. 설경구 특유의 터질 듯한 대사톤도 여전하다.
류승범은 여전히 불안 속에 있다. 테이크와 테이크 사이 외진 복도 의자에 앉아 이성호의 내면을 훑듯 침잠된 모습을 보니 그가 [용서는 없다]에서 발견한 과제를 알 것도 같다.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아요." 하나의 대사를 몇 가지 톤으로 뱉어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카메라 앞에 선다. 그리고 다시 붙는 두 남자. 팽배한 긴장감, 페이지를 넘기는 긴 대사, 격하게 변하는 동선 탓에 테이크는 늘어나고 배우들은 인물에 점점 지쳐간다. 배우의 호흡이 맞아 떨어졌다 치면 이번엔 핸드폰이 말썽이다. 딸에게 전화를 하는 설정,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울리는 설정 등이 있는 탓에 감독은 수차례 컷을 외친다. 곧이어 김형준 감독은 연출부 스탭, 김우형 촬영감독과 핸드폰을 줍는 강민호의 동선, 그리고 카메라의 시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촬영을 재개한다. 이성호를 때리느라, 강민호에게 맞느라 부산해진 면담실 내부는 핸드폰 벨 소리로 잠깐의 정적을 갖는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닐 수 있어요." 김형준 감독의 말처럼 인생이란 어차피 용서나 화해 따위로 쉽게 풀어낼 수 없는 드라마가 아닌가. 저녁때가 됐을 무렵 촬영장을 뜨며 문득 생각했다. "밥 먹고 할 수 있을까." [용서는 없다]는 지독한 영화다.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애초 확연하게 갈렸던 강민호와 이성호의 대립은 촬영을 거듭하면서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오묘한 구도로 변해갔다.
좁고 폐쇄된 면담실과 달리 [용서는 없다]가 주요한 공간으로 사용하는 건 금강 부근이다. 극중 '미의 여신 비너스'라 묘사되는 금강은 새만금 건설을 비롯 각종 공사로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성호의 범행인 토막살인의 원형이 된다.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이성호는 환경단체 '아이 러브 비너스'의 단체장이다. 그는 금강에 대한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책무를 갖고 운동을 벌인다. 이성호의 행동을 보면 그는 부검의 강민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치밀한 사람 같지만 사실 이성호의 내면은 세상을 틈 없는 계산으로 주무르고 있지 않다. 류승범도 이 대목에서 시간을 들여 말문을 열었다.
"이성호가 모든 걸 미리 재고 치밀하게 계획을 꾸려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이 사람의 행동이나 몸짓은 재빠르기보다 더디거든요. 그런데 해야 할 건 또 확실히 하고있고." 이성호는 척추성 소아마비로 하지기능 4급 장애인이기도 하다. "계획이나 계산이라기보다는 이성호를 이렇게밖에 할 수 없게 만든 거, 그 감정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확실히 이성호는 강민호와의 대면신에서도 냉소와 진심, 조롱과 한탄을 오갔다. 류승범이 사소한 대사의 톤, 어미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써 감독과 의논했던 건 이 복잡하게 꼬인 이성호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두 남자의 뜨거운 대결을 보다 다시 점심 때의 류승범을 떠올렸다. 미의 여신 비너스에서 시작해 인간의 추함을 땅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영화 [용서는 없다]는 12월31일 개봉할 예정이다.
콘텐츠 제공ㅣ씨네21, 사진ㅣ손홍주, 글ㅣ정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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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는 갠적으로도 설경구가 매우 좋슴다. 연기도 걸직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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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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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것 하나라도 놓치기가 아까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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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연기 잘하는 배우지요. 사적인 가정사 문제만 잘 처리했더라면 안티에 시
림 없이 잘 지냈을 텐데... 그만큼 사랑의 힘이 대단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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