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눅15장 11-32절
11절: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절: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네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절: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절: 그가 돼지 먹는 쥐 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않고 입을 맞추니
21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절: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데
27절: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매
29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절: 어버지가 이르되 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추석 명절 잘 보내셨지요?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 너무 행복하고 좋습니다.
이 시간 에도 빛이 있으라 선포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오른 손을 한 번 들을 수 있을까요?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여러분은
빛이 있으라! 고 선포하시면 됩니다. 내 영혼에, 내 가정에, 내 직장에, 우리 자녀에,, 우리 교회에, 우리 예배에... 우리 모두에게...
눅15장은 3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잃은 양의 비유, 두 번째는 잃은 드라크마 비유, 세 번 째는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찾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 비유는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잃어버린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찾고, 다시 얻고, 다시 회복하는 영광과 승리를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 주 예수 안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잃어버린 생명, 잃어버린 축복, 잃어버린 에덴의 영광과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참으로 비참한 신세로 전략한 거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방탕하여 다 잃어버리고 돼지가 먹는 쥐 엄 열매로 배고픔과 허기를 달래야 했으니 그의 신세가 우선은 참으로 딱하고 비참하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둘째 아들이 잃어버린 것은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주신 분깃 즉 돈만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전히 둘째 아들에게는 젊음이 남아있고, 돌아갈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가 있고, 건강도 있고, 가족도 있고,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믿음도 남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제일 중시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이건희 회장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젊음과 건강과 가족을 되찾아 준다면 그는 아마도 수백억, 수천억을 주고도 다시 바꾼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물질을 잃어버렸지만, 아직 건강이 남아 있고, 청춘이 남아 있고, 가족이 남아 있고,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일부분만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렵겠지만 하나님이 여러분 곁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다시 도전하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꿈 꿀 수 있는 은혜를 이 시간 말씀과 믿음을 통하여 더 크게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아들은 배가 고파 죽게 되었을 때에 그 때서야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둘째 아들은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두 번 정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죽고 싶을 정도의 큰 고민과 내적 갈등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게 되었을 그 상황에서 -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무런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나는 사람은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무거울 때, 혹은 사업이나 어떤 일이나, 관계나 삶의 문제가 너무 풀리지 않아 -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수치스럽고 몰아치는 환경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혹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뼈 아픈과 갈등과 고민가운데 있을 때에도, 또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정과 형편에 놓여 있어 - 자신의 마음이 마치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것처럼 온통 공허, 흑암, 혼돈으로 가득할 때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은 사람에게 -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시고, 빛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혹은 사람이 생각나게 해 주셔서 그 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는 버틸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나 문제가 아니라 -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생각나고, 하나님이 찾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 하나님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 둘째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에 아버지가 생각나더니 이렇게 고백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함께 받습니다.
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둘째 아들이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생각나더니.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살 사람은 - 아버지를 한탄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탓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 아들은 그 상황에서 철없는 아들이 분깃을 달라하실 때 - 왜 그때 주셔서 제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게 하셨습니까? 그 때 안 된다고 조금 더 기다리라고 때가 안 되었다고 단호하게 저를 말렸더라만 제가 이렇게 까지 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아버지! 아버지가 그냥! 나를 그 때에 내버려 두셨기에 제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탓하는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이 하늘의 하나님과 아버지를 탓하지 않고 19절에서 계속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9절에는: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죄로 인하여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탐심이나, 욕심이나, 정욕으로 인하여 숨이 막혀 죽을 지경에 이르른 분들이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가 얼마나 큰 잘 못이었든지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 컬게 하지 마시고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간청하며 메달리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그레이트 블레싱(위대한 축복)은? 자신이 죄인을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우리의 본질자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아무리 운동을 하고, 건강을 관리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수면을 일정하게 해도 본질상 죄악과 마귀의 종노릇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 복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는 복음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의 사건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동시에 십자가 사건을 부인하고 자신의 의를 드러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은혜와 축복이란? 둘째 아들처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라고 회개하고 고백하며 돌이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10절입니다.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느니라.
예레미야 2장 35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게 되는 이유를 말해 주는데요.
35절: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이사야 59장2절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는 요한일서 1장 9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사야 1장 18-19절 말씀인데요
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고 넘어지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재산과 물질과 건강을 잃어버리고 후회하고 흘리는 눈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 못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깨져버린 관계로 인하여 흘리는 눈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이별과 사별을 하고 흘리는 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귀한 눈물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흘리는 참회의 눈물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흘리는 은혜의 눈물이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로마 군사가 아니라, 내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회개하고 절규하는 가슴을 찢는 탄식의 눈물이 나를 언제나 은혜의 강가, 생명의 강가, 축복의 강가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이 눈물은 돈이 없어 흘리는 눈물보다 10배, 더 귀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실패하고 넘어지고 깨져서 흘리는 눈물보다 100배 더 귀한 영생의 삶을 열어주는 참회의 눈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눈물은 이별과 사별을 통해 흘리는 눈물보다 -1000배 더 삶을 아름답게 하는 부활이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더 깊이 깨닫게 하는 통회의 눈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먼 발자취에서 알아보고 먼저 달려가 껴 앉고 입을 맞추고 포응을 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않고 입을 맞추니
서성거리고 있는 아들, 거지 신세로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머뭇거리고 있는 아들, 돼지 냄세로 진동을 하는 그 아들에게 먼저 달려가 포옹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반복적인 잘못과 죄의 수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향집에 가지 못하고, 부모님께 당당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때로는 교회 앞에서 머뭇머뭇 거릴 수 있습니다. -> 아무것도 없는 빈손, 세상의 죄악의 냄새로 가득한 나 자신, 실패와 얼룩과 오물 투 성이로 범벅이 되어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가득한 나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아버지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용서하시고 받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아들,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아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들을 보게 된 것 만으로도 - 아버지는 기뻐서 달려가 앉고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모습과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물과 얼룩 투 성이 일지라도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십자가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올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수치심과 부끄러운 죄의 모습을 가지고 나온 그 아들에게 아버지가 이렇게 대합니다. 22절-23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받겠습니다.
2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힙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살질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며 즐거워하며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4절입니다.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 우리 모두 즐거워하자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려 놓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고 맏아들이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25절-30절 말씀입니다.
25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절: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데
27절: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매
29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그 집에 돌아오기 전에 큰 아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밭에 있었습니다.
25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큰 아들은 여전히 밭에서 일하다가 동생이 들어와 잔치를 하는 지도 모르고 늦게 들어온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수고하고 애쓴 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른 분들보다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성과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으며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분들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은 여전히 자신의 밭에서 충실히 일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용주의자라는 말입니다. 이익과 성과를 매우 중시하는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렸던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살찐 송아지를 잡고, 발에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지고, 새 옷을 입혀주고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심히 노하여 아버지가 잔치에 들어가자고 권하였지만, 그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실용주의자인 큰 아들이 보기에는 - 이 잔치가 얼토당토 않는 어처구니없는 낭비처럼 보여줬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와 함께 다 삼켜버리고 돌아온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는 것은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때 -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해 놓고 그 사랑이 나 자신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나의 기도가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라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큰 아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스스로 체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교회에 오랫동안 머물고, 온갖 예배에 참석을 다 하고, 남들보다 오랫동안 기도 생활을 큰 아들처럼 지속하고 있지만, 내 안에서 사랑의 모양이 달라지지 않고, 사랑의 영역이 넓혀지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여전히 큰 아들로 남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인 아버지의 사랑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가져서는 안 될 - 복음의 형식인 율법과 종교행위에 머물러 타인을 향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9절에서 큰 아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제가 요사이 마음이 아프고 불편한 것이 있었습니다. 믿음생활을 큰 아들처럼 아주 성실하게 여러 해 동안 오랫동안 교회와 하나님을 섬겨온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일하는 영성과 인격이 몸에 베이지 않는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온 중직자인데,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온 사람인데,...일시적으로 교회 나와 예배할 때, 기도할 때, 찬송할 때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분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상에 돌아가서는 그의 입에서, 그의 삶에서, 그의 인격과 가정에서 전혀 하나님 편에 서서 일하고 있는 모습이 베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큰 아들처럼 자신의 이익과 실익을 따라 움직이는 세상 사람처럼 보였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피해가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 편에 서기 않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옳지 않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 편에 서는 모습을 볼 때 - 가슴이 아프고 답답해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기도하면서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멋있게 나이 들어가자!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 편에 서서 일하자! 이익과 성과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소명과 사명을 따라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이 되자! 라고 다짐하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이나, 가정생활이나, 교회생활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성실하게 생활했으니까? 남편이 내편이겠지? 자식은 내 편이겠지? 목사님은 그래도 최소한 내편에 서 주지겠지? 내 입장을 이해해 주시겠지? 나를 대변해 주겠지? 라고 스스로 착각하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라고 다 여러분 편에 항상 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남북전쟁을 할 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 - 북이 치열하게 싸울 때 남, 북의 모든 군사들이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편이 되어 주셔서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때
아브라함 링컨이 북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라고 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이 전쟁을 치루고 있는지 먼저 섰는지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큰 아들이 있는지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큰 아들이 모습이 있다면 말씀의 검으로 도려내야 합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내편, 네 편, 이쪽 편, 저쪽 편, 아버지 편, 아들 편, 힘 있는 사람 편, 능력 있는 사람 편, 돈 있는 사람 편, 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의 편,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사람을 갈라놓고 찢어놓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 편에 서서 말하는 그 아버지에게 불순종하며 반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깊어가 깊어갈수록, 큰 아들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여러 해 동안 섬겨 왔다면, 나의 말이, 나의 행동이, 나의 이 결정이 하나님 편에 서서 한 결정이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눈치가 아니라, 나에게 이익이 되는 편에 줄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확실하게 서서 일하므로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살아나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손해가 되고, 때로는 피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해도 그 자리에서 아버지처럼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편에서 결정하고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믿음과 말씀이 인격과 삶과 말에 베어 나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있으면서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내편 되어주세요? 꼭 내편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 곁에 있고요? 아니면 자기 스스로를 속이면서 자신은 분명 하나님 편인 척 하지만 사실은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고요?
아니면 자신은 죄의 자리, 정욕의 자리, 탐심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말씀의 능력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죄의 자리를 즐기면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필요해서 하나님 편에 붙어 있는 분들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신앙생활은 결국 누구 편에 서느냐? 에 따라 승패가 갈립니다.
예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과 축복과 부활의 은혜를 입지만, 공중권세 잡은 마귀 편에 서면 결국은 사망과 저주와 질고와 죽음으로 끝나는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아버지처럼 둘째 아들처럼 회개하고 다시 돌아서서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다윗, 욥, 다니엘이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된 것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매일 하나님 편에 서서 일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큰 아들처럼 성실하게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해 오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대한 믿음과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이 인격이 삶으로 베어 나오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 편에 선 사람으로서 입술의 말, 인격과 가정에 베어 나오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편에 선 척만 하고 살았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아닌지? 스스로 체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 자녀로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버지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부모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아들입니까? 이 시간 나를 돌아보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시고 말씀이 삶에 베어 나오는 삶을 찾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