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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금창고1004 원문보기 글쓴이: 눈덮인산의장미
이끄심 (5)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
[요한15.7]
1996년 6월 24일 나는 80년 5월 결혼 후 16년을 함께 살며 고생시킨 아내와 이혼하였다.
그야말로 6.25사변이었다. 두 아이와 부채가 내게 넘겨 진 이혼의 선물이었다.
드라마 속에서의 남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던 이혼, 그 현실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던 셈이었다.
울타리가 망가지고 가난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현실의 애달픔을 잊고자 밤낮 없이 술을 벗 삼아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목적 없는 삶에 시간을 흘려보낸 지 2 년째 되던 해 어느 날,
보다 못한 고등학생 큰딸이 자기가 다니던 교회 고등부교사인 모 권사님에게 아빠의 일자리를 부탁해
그 권사님이 의정부에 짓고 있는 큰 건축현장에 잡부로 일하게 되었다.
안 해 보던 일에 힘도 들었지만, 서울을 벗어나 혼자라는 사실에 고독감과 함께 서러움이 밀물처럼 내 영혼에
스며들어왔다. 폐인이 된 나를 반겨주는 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외톨이가 된 심정이었다.
유일한 즐거움은 일하다 오후 세 시경에 먹는 새참과 막걸리 한 사발.
사방이 고립되니 열린 곳은 하늘 뿐 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모두 천주교신자인데 ---.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이끄심에 내 발길은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너무 외롭고 힘드니까 그냥 성당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목요일 저녁 교리반 등록, 공사현장 일이 늦게 끝나면 허겁지겁 작업복 차림으로 성당도착 문밖에서
잠바에 묻은 세멘먼지를 탁탁 털어 입고 교리실에 들어가 앉았다.
6 개월 지난 뒤인 1998년 8월 7일 나는 사도요한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혼과 실직과 좌절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그분은 나를 이방인에서 천주교인으로 이끄셨다.(1)
양 팔을 펼쳐 날 오라 부르시는 예수님[마재성지 한옥성당의 부활하신 예수님]
그 사이 건물은 기초공사가 끝나고 본 건물이 4~5층으로 올라가는 상황이었고,
현장에 자재도 많이 쌓이고 하다 보니 난 그곳에서 숙식하며 야방 일을 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건축주가 현장소장으로 책임을 내게 맡겼다.
그때는 세례 받았다고 하느님이 내게 복 주신 거라고 찰떡같이 생각했었다.
지하2층 지상 8층의 호텔급 모텔이 완공되었다. 그런데 건물주인 그 권사님이 나에게 관리사장을 해달란다.
주님의 축복인지 딸의 기도응답인지는 몰라도 무조건 좋기만 했었다.
금전관리까지 도맡아 하게 되니 세입자건 직원들이건, 주변 상인들이건 심지어는 파출소에서까지도 나를
지역 유지를 대하듯 했다. 잡부로 들어 와 막걸리로 버티던 내가 매일 밤 양주에 취해 살다시피 하였다.
고기도 삼일 밤낮을 먹으면 질리듯이 주지육림에 빠져 사는 무릉도원 같은 삶에도 깊은 영혼의 허전함은
채워질 수 없었고, 모텔관리도 자연히 소홀해지게 되었다. 몸과 맘이 지쳐 쉬고 싶다고 여길 그 때에,
난 성남 수정구에서 봉사하는 여동생 아녜스에게 오빠 삼사일 머리 식히고 올 곳 좀 알아보라했다.
이 부탁이 내 인생 변화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리라고 그땐 몰랐었다.
동생의 소개로 내려간 곳은 충북 옥천에 있는 무의탁 노인과 장애우 들이 기거하는 무료요양원이었다.
미인가 시설이라 모든 것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입소되어 있는 환자와 식구들은 사 십 여명 되었는데
남자 봉사자가 없어 나는 있는 동안 주어지는 대로 일하게 되었었다.
이곳에서는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시로 기도를 바친다
새벽에 밥도 하고, 병원이나 먹거리 구하는 일로 운전도하고 때론 중증환자 기저귀도 갈아주고, 빨래도하고,
내 손이 필요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환자가 야심한 밤에 운명했을 때는 원장님을 도와 시신도 거두고
다음날 염습도 하였는데 알콜이 없어서 댓병 막소주 사다가 탈지면에 적셔서 시신을 닦아내기도 하였다.
연고자가 없어 다음날은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르기도 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후일 상장례지도사와 호스피스봉사의 밑거름이 될 줄 이 당시는 예측조차도 못했었다.)
반찬거리를 줏으러? 다 낡은 봉고차를 끌고 대전 오정동시장을 돌며 우거지도 주워 싣고
생선가게 들려 버려진 머리. 꽁지, 내장을 비닐봉지, 때론 들통에 담아 오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 처하다 보니 삼일 쉬러 왔던 나의 계획은 망가지고 그곳에 약 4년간을 눌러 살게 되었다.
의정부 모텔 사장직은 전화로 사직 통보하고 내 사물은 잘 아는 납품처 사장을 시켜 옮겨 달라 부탁하였다.
그런 채로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다.
사용하는 건물은 폐교(구:동이중학교)된 학교를 옥천 교육청에서 임대하여 사용 중 이었는데 사용료가 체납되자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게 되어 난감한 처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관계자를 찾아가 호소도 해 보았지만 대책이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어 그 당시(2001년도) 대통령이셨던 김 대중 대통령에게 정부합동 민원실을 통하여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요지는 간단했다.
‘우리를 쫓아내면 이곳의 버려진 가족들은 어찌하면 좋을까요? 허가 있는 복지 기관에서는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받아 주지 않고, 꽃동네에서 조차도 자격이 미흡하다하여 거절당해 갈 데가 없이 방치 된 이들, 자식이 없는 병자는 국가에서 혜택도 받고, 사회복지 시설에 입소도 되지만 자식들이 병들었다고 팽개쳐 버리고 나타나지도 않는데 이들을 누가 돌봅니까? 엄밀히 구분하자면 이들은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진 꺼져가는 목숨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이곳은 미인가 시설이기에 조건 없이 받아 주었는데 교육청에 낼 돈이 없어 비워 달라면 저희는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군청 마당에 텐트를 치고 이곳의 장애우들과 환자들을 옮겨가서 살 작정입니다.’
하고 대통령에게 호소 겸 눈물겨운 엄포를 놓았던 셈이었다. 그 파장은 엄청 컷다.
첫 번째로 대통령 비서실장 명의로 회신이 와서 저의 탄원이 참작되어 이 문제를 보건복지부로 넘겼다는 내용이었고.
며칠 뒤는 보건복지부 장관 명의의 회신이 도착 뜯어보니 우리의 건의를 충청북도 사회복지 공동모금회로
이관 하였다는 내용 이었다. 상부에서 우편물이 내게로 오니 옥천군에서도 적극 관심을 가지게 되어
군수님도 다녀가시는 등 여타 부분에서 많은 협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잘 해결되어 비인가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협조와 혜택을 받게 되어 고비를 넘겼고
그 뒤 합법적인 사회복지인가시설로 옷을 바꾸어 입게 되었다.
십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그 공동체는 그곳에 더 많은 봉사인력들이 동참한 가운데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을 쏟아 붓는 사랑의 행복한 공동체로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 위치한 '행복한 집' 공동체 전경 [구: 동이 중학교]
하느님은 세상 죄의 온상인 모텔사장직을 수행하며, 왕처럼 밤 문화의 꽃을 피우던 나를
가장 낮은 이들 곁으로 쫓아 내셨다.
지나고 보니 내 영혼을 위한 그분의 섬세한 이끄심이셨다. 숙박업소 관리자를 공동체 하인으로,
죄의 밭에서 봉사자의 길로 옮겨 심으신 사랑의 이끄심(2)이었다.
햇수로 사 년간 세상과 자식을 등지고 옥천 땅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과 함께 지낸 그 시간이 내게는
이기적 삶에서 이타적 삶을 배우며 몸으로 실천한 내 영혼의 사관학교였다.
그곳에 있을 때 어느 해인가 7월 22일 그곳서 상주 봉사하시던 젬마수녀님과 함께 차를 몰고 봉사현장을 가던 길에
나는 내 지나온 삶을 자연스럽게 옛날 이야기처럼 고백하게 되었다.
내 초등학교 동창 중에 막달레나라는 친구가 있는데 어려울 때마다 돈도 빌려다 쓰고, 보증도 세우고,
하여튼 내가 무수히 애를 먹였었다고---.
그래서 소식을 끊고 피해서 다닌지도 오래 되었다는 얘기까지 털어 놓게 되었는데, 듣고 계시던 수녀님이 느닷없이
지금 무조건 전화 걸라고 하셨다. 오늘이 바로 막달레나 축일 이라는 것이다.
미안함을 묻어두고 옛날 전화번호를 뒤져 용기 내어 전화를 하였다.
“경순아! 나 주희야. 오늘 축일 축하한다.” 하였더니 친구가 깜짝 놀라며 즉시 되묻는다.
“아니 네가 내 축일을 어떻게 아니? 너 영세 받았니?” 하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도망 다닌 나에게 욕을 퍼부어도 시원찮을 판에 거꾸로 고맙단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나를 모르겠다.
어디서 뭐하냐? 묻길래 지금 실정을 그대로 얘기하니 도리어 나보고 대단하단다.
영세 받자마자 시골에 내려가 노인 요양원에 봉사자로 투신해 상주하고 있는 내가 기특하게 보였는지 며칠 뒤
바로 옥천에 내려왔다. 와서 내게 하는 말이 당시에는 더욱 알 수 없는 얘기였는데 결과는 놀랍기만 하였다.
경순이가 말했다.
지난 이천년 대 희년에 자기는 자신과 관계 된 모든 채무자에게 자기가 받을 돈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연락이 되어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나한테는 도무지 연락할 길이 없기에 하느님에게 통보했단다.
그런데 몇 년 뒤 내가 직접 전화 했으니, 그것도 자기 축일에, 그러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니가 연락이 안 되어 기도했더니 하느님을 통해 스리 쿠션으로 응답해 주셨구나.” 그리고 내 보는 앞에서
준비해 온 그 오래 된 차용증서를 모두 찢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고통의 신비가 영광의 신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던 상황에서 도피한 생활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 시련기를 통하여 내 인생 행로의 잘못 된 흔적은 지워주고,
끊어졌던 우정의 다리는 연결시켜서 관계 회복의 길로 이끄셨다.(3)
하느님의 이끄심은 2002년 초 나를 서울로 불러 올리셨다. 몇 년 만에 올라온 서울 땅이 도리어 낯설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나는 청담동에서 웨딩드레스 샾을 하는 친구 막달레나를 찾아갔다.
그가 이곳에서 할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몸으로 하는 봉사를 익혔으니 이제는 소프트웨어를 바꿔야한다며, 제일 먼저 교구 성령세미나를 받게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강남 성모병원 호스피스봉사자과정 교육에 등록시키고,
청담성당 성령기도회에서 봉사하도록 이끌었으며, 금요일에는 철야기도회로 나를 끌고? 다녔다. 그 뿐인가?
당시 강남시립병원(현:서울의료원) 원목봉사자로 활동하도록 이끌었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견진을 받아야한다기에 나는 그해 10월 13일 청담성당에서 후안디에고라는 세례명으로
견진을 받게 되었다. 내 친구 막달레나는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 이었다.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막달레나]와 함께 2010년 5월 13일
소금창고 1주년 기념행사를 마친 후 [압구정동 장천아트홀에서]
그 후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계속 성경공부 하도록 나를 이끌어, 까리따스 수녀원에서는 ‘여정’을,
본당에서는 ‘성서 백 주간’을 마쳤으며, 서강대학교에서는 ‘송 봉모신부님의 성경대학’에 등록해 주었다.
서강 대학교에서 송 봉모 신부님과 함께.
그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주문했다.
교회안의 봉사자는 말씀을 먹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체험신앙에 바탕을 두고 살아야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내가 이 길을 흔들림 없이 가도록 언젠가는 두 딸을 불러 앉혀 놓고 공지? 했다.
‘너의 아빠가 세상에서 돈을 벌거나, 성공 할 것을 기대하지마라.
허나 너의 아빠는 너희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게 될 것이다.’
내 자녀에게 당당하게 말해 주는 친구 막달레나도 대단했지만
그 말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나의 두 딸도 기특하고 대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오늘에 이르기 까지 주변의 질책도 많이 받았다. 친구들이나, 두 자녀들까지도 아빠가 경제활동을 해야
희망이 보일텐데, 가정 경제도 어렵고, 머지않아 두 딸 시집보낼 밑천도 장만해야 할 아빠가 봉사만 하고 다니니
불평과 걱정이 대단 했었다. 허지만 이미 밭고랑에 쟁기질은 시작되었고, 나는 뒤돌아 볼 수 없었다.
오직 만사를 주님께 의탁한 채로 묵묵히 친구 막달레나가 제시해 이끄는 방향대로 신본주의의 삶에 전력투구하였다.
그 분께서 나를 서울로 불러올리심은 성경공부를 비롯한 다양한 봉사자교육을 받게 하신 후,
견진을 통한 영적 어른으로 성장시켜서 세상에서는 장자로서 육의 아들이 없는 나에게
많은 영적 자녀인 대자를 두게 된 확장의 이끄심이었다.(4)
지금은 많은 대자들이 내 곁에서 큰 몫을 감당해 주고 있다.
2005년 6월 우린 강남시립병원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진 수일원장님의 권유로 두 분의 의사선생님과
간호사선생님 한 분, 그리고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함께 장시간의 준비 운영위원회를 통해 그곳에
호스피스 봉사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시립병원의 특성상 그곳에는 버림받은 예수님 천지였다.
호스피스 창립 기념사진 1회 봉사자들과. [앞줄 가운데가 병원장님과 필자]
행려병자. 외국인 노동자. 알콜중독자. 노숙자 등, 우린 가족에게서 소외되고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이곳에 입원하게 된 그들과 친구가 되어 지냈다. 그들이 원 할 때 그들의 방식대로 함께해 주다보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우리의 인도방식에 그들이 따라주어 세례도 받고
더러는 노숙생활을 접고 공동체에 입소하게도 되었다.
몇몇은 거처를 마련해 준 뒤 행정절차를 밟아 생활보호대상자로 선정되도록 알선해서 독립된 재활의 삶을 살도록
이끌기도 하였다.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의 고충을 해결해 주고자 할 때에는 봉사자 의 자녀를 불러내어
통역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특히 말기 암 환자들이다 보니 임종과 장례는 수시로 있는 일 이었고,
지방 풍습과 종교방식에 따라 장례문화도 다양했다.
우린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고자 대전 가톨릭대학에서 상 장례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제 1회 장례지도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그 때의 교육은 호스피스 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여 지고 있다.
유흥식주교님과 창고지기들.수료식을 마친 후 미사 후 교구별 기념촬영. 서울대교구에서는 창고지기 두사람뿐.
그 후 강남 시립병원은 서울의료원으로 개명되어 거듭 태어났다.
우린 서울의료원 호스피스 봉사자로 있으며 독특한 이벤트를 소문 없이 치른 적이 많다.
이른바 소원 성취 프로그램이다.
생의 끝자락에서 통증을 완화시키며 고통을 견디어가는 환자에게 타이밍을 잘 선택해서 살며시 물어 본다.
만약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돌아가시기 전에 무엇이든지 한 가지 소원을 이루어 준다면 무슨 부탁을 하시겠냐고?
대답은 다양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어딘가에 있을 부모님 산소에 찾아가 술 한 잔 부어 놓고 절하고 싶다는 젊은이,
화려하게 치장하고 백화점을 구경해 보고 싶다던 할머니,
봉사자인 나랑 사우나같이 갔다 나와서 보신탕 한 그릇 먹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던 총각,
옛날 애인이었던 쌀집 서씨 아저씨를 만나보고 싶어 하던 팔십대 할머니,
비오는 날 발가벗고 아스팔트 도로를 그냥 걷고 싶다던 할아버지,
어린자녀들 데리고 부인과 함께 고성 바닷가를 가고 싶다는 사십대의 가장,
오래 전에 이혼한 부인이 사는 집을 찾아가 보는 것이 소원이라던 주정뱅이 할아버지,
죽기 전에 동해바다 일출을 꼭 한번 봤으면 한다는 오십대의 홀아비 등 들어보니 사연도 가지가지였고
바램도 각양각색이었다.
터무니없는 바람은 이루지 못했지만 가능한 것은 모두 성취시켜 드렸다.
지금 1202호에 입원중인 47세 가장은 사랑하는 가족(아내와 두 딸, 아들하나)과
남산 서울타워 꼭대기에서 오붓하고 멋지게 식사하고 싶다하셔서 지금 사전 작업 중이다.
어제는 사후에 가족에게 남겨 들려 줄 영상편지를 촬영했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남길 영상 편지를 촬영중인 호스피스 봉사자
영국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다.
1950년 95세의 나이에 임종을 앞둔 그는 본인이 직접 남긴 말을 묘비에 새겨 달라고 했고,
그의 유언을 받아들여 그의 묘지에 적어 놓은 글이다.
때문에 소원을 말하면 우리는 즉시 실행에 옮겨드리는 스타일이다.
물론 주변 가족의 반응이라든지 병세의 경중, 그 당시의 여타 상황을 고려함은 물론이다.
서두르면 낭패보고, 망설이면 기회를 놓치기에 지혜롭게 대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친구를 통해 나를 호스피스 봉사자로 세우셨지만
이렇게 때로는 천사의 대리자로 삼아 꿈을 이루어주는 자로 변모시켜 주셨다.
하느님은 나를 가르치고(성경 및 봉사교육) 키워서(견진)
죽음 앞에 직면한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심어주는 영혼의 산파로 이끄셨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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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성취 프로그램 사례중에서 한 가지[돌아가시기 전 외아들 결혼식올려주기]소개합니다.
2007년 9월 4일 80세 된 위암 및 말기신부전으로 호스피스 돌봄을 받던 환자의 마지막 소망인 외아들(39세) 결혼식이 호스피스실[임종실]에서 열렸다. 결혼식의 코디네이터는 창고지기 김 경순막달레나가 전 날밤부터 드레스와 신랑 턱시도를 손질해 준비해 갔고 부케까지 마련해 주는 헌신적인 봉사를 하였다. 하늘도 협조했던 눈물과 환희가 뒤엉킨 병실결혼식이었다. 혼수상태를 며칠 째 지속하던 80대 아버지가 결혼식이 진행될 때 눈을 뜨고 지켜봤으며 힘겹게 아들내외와 몇마디를 나눈 후 다음날 새벽 아주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다. 우린 장례 모든 절차에 끝가지 함께 동행하였으며 어느정도 슬픔이 진정되었을 무렵 웨딩앨범을 제작해 신혼부부인 아들내외가 사는 강남구 일원동 아파트로 찾아가 건네주었다.
소원을 이루시고 새벽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입관예절
웨딩앨범을 제작 삼우제가 지난 뒤 전달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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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이끄심을 요약하니 아래와 같다.
첫 번째의 이끄심
이혼과 실직과 좌절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그분은 나를 이방인에서 천주교인으로 이끄셨다.(1)
두 번째의 이끄심
세상에서 즐기며 누리던 숙박업소 관리자를 공동체 하인으로,
죄의 밭에서 봉사자의 길로 옮겨 심으신 사랑의 이끄심(2)
세 번째의 이끄심
시련기를 통하여 내 인생 행로의 잘못 된 흔적은 지워주고,
끊어졌던 우정의 다리는 연결시켜 관계회복의 길로 이끄셨다.(3)
네 번째의 이끄심
서울로 불러올리심은 성경공부를 비롯한 다양한 봉사자교육을 받게 하신 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시켜서 많은 대자를 두게 하신 확장의 이끄심이었다.(4)
다섯 번째의 이끄심
시련을 감당치 못해 자살을 시도했던 죄인을 세례로 거듭나게 하시어
죽음 앞에 직면한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심어주는 영혼의 산파(호스피스 봉사자)로 이끄셨다.(5)
-이끄심에 침묵하며 순명했기에 현재 누리는 감사의 결과-
내가 세상을 등지고 하느님 안에서 친구 막달레나의 권유에 의해 그분의 일을 하는 동안
하느님은 나의 일을 대신해 주셨다. 고로 내 것은 하느님 것이요. 하느님 것은 모두 내 것이다.
이 얼마나 부유한 삶의 공식인가!
세례받기 이전 세상의 삶 속에서 짊어지게 된 금융채무와 적지 않았던 개인 빚은 설명할 수 없는,
때로는 나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는 그 분의 방식으로 모두 탕감 받게 되었다.
세례 받은 1998년 이후 나는 경제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주에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으며, 두 딸들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 하였고,
두 아이 모두 졸업과 동시에 전공을 살려 취업이 되었으며, 큰 아이는 현재 사립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고,
대학에서 섬유디자인을 전공한 작은 딸도 늘 즐겁고 기쁘게 직장에 다니는 모습을 본다.
나는 위에 설명한 친구 막달레나와 함께 나눔 공동체 ‘소금창고’ 창고지기로서 소임에 충실하고 있다.
이제 창고의 나눔은 점차 글로벌화 되어가는 과정에 있어 이 또한 그분의 섬세하신 이끄심을 늘 체험하고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구로디지탈 단지에 있는 모 기업의 영적 고문으로 위촉되어
주 2~3회 회사에 나가는 파견 받은 자로서의 기도하는 고문직을 수행하고 있다.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라. 그러면 세상 것은 덤으로 받게 될 것이다.
소금창고 2주년 기념 야외콘서트 현장에서의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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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루카12. 29-34]
소금창고에서 서울의료원 병원장님과 팔당 유리성에서
이끄심의 견인차가 되어 준 고마운 내 친구 창고지기 김 경순[M.막달레나]
그분의 이끄심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첫댓글 Thank You.=== kk한인성당 교우여러분께 고개숙여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하며, 감사의 댓글 첨부합니다.===
예고도 없이 불쑥 방문한 무례함을 책망치 않으시고 도리어 분에 넘치는 환대를 베풀어 주신 모든분께 감사드립니다.
상기글은 부족한 소인의 작은 체험기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말레이시아 몇몇교우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음에 사실 제 자신도 놀랐습니다. 보답의 정성으로 舊 [이끄심5]는 삭제하고 사진첨부 된 新[이끄심5]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뵙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오셔서 옷 모델이 되어 분주하신 모습도 참 좋았습니다.
한국가시기 전 까지 이곳에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이끄심5"단계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마음의 싱금을 울립니다.
주님께 향한 모습과 마음이 부족함을 저는 깨닫고 반성해 봅니다.
다시한번 읽어보아도 여전히 진한 감동과 넘치는 사랑을 느낍니다. 항상 좋은 글을 접하게 해주어서 감사드립니다. 코타에세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고 오세요. 제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서울에세 뵈요. 하늘길 조심해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