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등장(삼상 14장 1-51절)
1-2.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무기를 든 소년은 요나단의 오른 팔 비서격인 그런 존재를 나타낸다. 요나단과 그의 오른 팔인 소년은 사울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행동하므로 지휘체계가 사실상 와해된 상황을 보여준다. 사울은 왕이 되는 시점에서 무려 삼십만명이 넘는 그런 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많은 이스라엘 군대가 도망가므로 숫자가 얼마되지 않은 것이다.
3.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엘리의 집안이 몰락한 것처럼 사울의 집안도 몰락으로 가는 것을 암시한다. 아가봇은 영광이 떠나가다 라는 말이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입는 제의적인 옷이었다. 아히야가 대제사장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울이 아히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한 것이다. 원래 사무엘이 대제사장인데, 사울이 자기가 원하는 자를 세워서 왕권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4-5.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보세스는 빛나다 라는 의미고, 세네는 가시라는 뜻이다. 지형으로 볼때, 아주 험난하고 뾰족한 산악지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블레셋 군대는 보세스 쪽이고, 요나단은 세네라는 지역에 있는 것이다. 보세스는 믹마스로부터 뻗어 있는 곳(북쪽)이고, 세네는 게바로부터 뻗어있는 곳(남쪽)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지형을 뚫고 가는 것이므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6-7.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요나단이 고백하는 말은 다윗이 한 표현과 비슷하다. 삼상 17장 47절에서『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장면에서 한 말이다. 나중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상황에서도 요나단은 다윗과 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이 장면에서 전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여주신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시고,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신다. 오늘날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이 옛사람과 싸우는 것이다. 이때 성도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싸우시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사울은 대제사장 사무엘을 의지하지 않고, 아히야 라는 레위 사람을 옆에 두고 대제사장인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상을 세워두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전쟁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린다는 말이다. 오늘날 신도들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강요하는 수준이다. 자기의 기도를 무조건 들어달라는 태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시험한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다.
8-10.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블레셋이 요나단에게 올라오라고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신호로 여기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방법을 결정해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신도들이 행하는 기도와 유사한 것이다.
11-12.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블레셋 사람이 올라오라고 말을 하므로 요나단이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할 것이라는 징표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이 7절, 10절에 이어서 12절에서 세번째로 등장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굳게 믿은 것이다.
13-14.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반나절 갈이 땅은 소 두마리(겨리)가 반나절 동안 갈 수 있는 땅(반에이크)이다. 고지대이므로 이 면적은 고지대치고는 꽤나 넓은 지역이다. 그런 면적 안에서 이십명을 죽인 것이다. 전과가 상당한 모양이다.
15-16.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요나단의 전과를 본 블레셋 본진에 있던 군사들이 두려워 떨었다고 한다. 요나단과 그의 비서격인 자, 두명이 20명을 죽이니 전체가 두려워 떨었다고 표현되는데, 그 많던 블레셋 군대가 두려워 떨었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두려움인가?『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하라다 엘로힘)』”하라다 엘로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이다. 이를 통해서 전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여주신다.
17-18.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하기솨)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사울이 자기 아들이 홀로 싸우는 것을 보고도 지원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했다. 언약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기고 난 후, 블레셋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므로 돌려주기로 하여 기랏여아림에 머물고, 나중에 다윗시대에 돌아오게 된다. 칠십인 역과 공동번역은 사울이 가져오라고 한 것은 언약궤가 아니라 에봇으로 번역하고 있다. 『사울이 아히야에게 에봇을 내오라고 일렀다. 그때 에봇은 이스라엘 앞에서 아히야가 모시고 있었다.』(공동번역) 특히 하기솨는 언약궤를 가져오라 라고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사울이 에봇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사무엘이 떠나고, 아히야를 그가 대제사장으로 세웠으므로, 아히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해보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아히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가문으로부터 이어진 자였다.
19-20.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갑자기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전쟁의 상황이 돌변하므로, 이제는 사울이 에봇이 필요없어졌다. 그래서 거두라고 했다. 사울에게는 상황에 따라서 에봇을 이용하다가 필요없으면 버리는 종교적인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갑자기 군자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의 기습공격과 블레셋 군인들간의 싸움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사사기 7장 22절 기드온 용사의 모습을 떠올린다.『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역대하 20장 23절에서『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서로 같은 군사들끼리 자멸하는 모습이다.
사울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대표한다. 신약시대 바울 이전에 사울이 그러했다. 율법주의는 절대 구원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전의 사울이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으로 나아갔다.
21-23.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블레셋 군대에 투항했던 히브리인들과 블레셋 군인들, 산지로 도망간 이스라엘 병사들이 돌이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블레셋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방인들이 볼 때 히브리인들은 정예의 군대가 아닌 오합지졸들이었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표현된 것은 그만큼 정예화된 군인들을 의미한다. 야곱은 히브리인이었지만,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다. 이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백성이라는 의미다.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블레셋이 진을 친곳이 벧아웬인데, 이들은 퇴각하여 서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벧(집)아웬(고통)은 고통의 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고통의 집을 건너가게 된 것이다.
24.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나가스)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나가스는 압제당하다, 괴로움을 받다 라는 의미다. 압제당한 이유는 사울이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군인들이 배가 고픈데, 먹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사울이 한 맹세는 저주 맹세에 해당된다.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사울이 해가 질때까지 적을 무찌르겠다는 것이다. 블레셋은 사울에게 있어서 사무엘이 떠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블레셋이 침공하므로, 서둘러서 제사를 재내므로 사무엘이 떠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블레셋을 자기의 원수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이런 저주 맹세는 사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울은 서둘러서 전쟁을 끝내려고 했지만, 군사들 입장에서는 너무 피곤한 것이다. 사울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저주와 백성을 다 이용한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단을 통해서 블레셋과의 전쟁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사울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치 맹세를 한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가 아니라, 사울의 맹세인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다.
25-27.백성(에레츠)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었으나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에레츠는 땅이다. 개역개정은 백성이라고 번역되었다. 땅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땅의 백성은 하늘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의 저주 맹세로 인하여 꿀 같은 말씀을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요나단은 사울의 저주 맹세를 듣지 못하였으므로 꿀을 먹고 눈이 밝아진 것이다. 눈이 밝아진 것은 표면적으로는 힘을 얻은 결과이지만, 이면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영적으로 눈이 밝아진 것이다.
28.그 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야아프) 하니.
백성들이 금식한 것은 사울이 강제로 억지로 하게 하였음으로 피곤한 것이다. 야아프(우프)는 기절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29.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아카르)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아카르는 힘들게하다, 곤란하게 하다 라는 의미다. 여호수아 7장 25절에서『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아카르)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사사기 11장 35절에서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아카르)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이 땅은 백성을 의미한다. 꿀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백성들이 말씀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게 된다. 사울이 명령한 거짓 맹세는 말씀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어둡게 한다.
30-31.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야아프)
사울의 어리섞은 행동으로 인하여 전쟁을 망치게 했다. 믹마스에서 아얄론까지는 잘 대처했는데, 사울의 이러한 어리섞은 지시로 인하여 전쟁은 완전한 승리로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야아프(우프)는 기절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요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쟁임을 드러내었는데, 사울이 그것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오늘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영적 전쟁을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데, 거짓목사들이 잘못된 교리로 전쟁을 흐리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32-33.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와야트)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째 먹었더니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바가드)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맹세의 효력이 종료되는 저녁이 되자 허기진 군사들이 고기를 피째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율법에 따르면 고기는 피째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와야트는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그런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군사들이 급하게 먹으려, 동물을 땅에서 잡은 것이다. 고기를 잡을 때는 돌 위에 고기를 두고 피가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결국 사울이 자기 신념으로 금식을 하게 만들고, 이것이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바가드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성실한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사울이 판단할 때, 군사들이 율법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울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34-35.또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여기서 잡아 먹되 피째로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할랄) 쌓은 제단이었더라.
사울은 피째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명령하였고,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고 한다. 겉으로는 상당히 신앙이 높은 것 같이 보인다. 사울이 쌓은 제단은 사무엘이나 다윗이 쌓은 제단과 같은 성격의 제단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울은 사무엘이 드려야 할 번제를 자기가 직접 한 경력이 있었다. 제단은 아무 곳에서나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울은 제단을 어디에서 쌓은 것인지 불분명한 것이다. 신명기 12장 13절에서『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할랄은 상처를 입히다, 더럽히다, 모욕을 주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출애굽기 20장 25절『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할랄) 함이니라.』레위기 18장 21절『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할랄)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사울이 하나님께 드린 제단은 처음 제단이 아니라, 여러 번 제단을 드린 것 중의 하나인데, 번역상 오류로서, 하나님께 부정하게 만든 제단이었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그 이유는 사울의 잘못된 맹세(금식)로 인하여 백성들을 부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잘못된 거짓 교사들에 의해 하나님께 부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회개할 때마다 예수의 피를 요구하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고, 죄를 물을 수 있는 법이 없다고까지 선언하시는데, 이를 무시한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거짓선지자들과 이들의 말에 따르는 신도들은 사울과 같은 거짓맹세에 따른 자기 종교심에 근거한 부정한 예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3절『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37.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이르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사울은 자신의 어리섞은 명령으로 인해 블레셋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자, 이제 제사장(아히야)를 통해서, 다시 공격을 하려고 하나님께 묻는다. 그러나 대답이 없는 것이다. 대답이 없는 것은 결국 누구엔가 죄가 있기 때문이었다.
38-40.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사울은 또 하나님께 맹세를 하고 있다. 맹세를 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도 없는 것이다. 사울이 자기 아들 요나단이 자신의 금식명령을 어긴 사실을 모르지만, 백성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요나단은 금식 명령이 있었는지 모르고 꿀을 먹은 것이다. 백성들은 사울의 이상한 행동에 지쳐서 알아서 하라는 태도이다.
41-43.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제비뽑기 방법으로 범인을 색출한다. 사울이 왕이 될 때도 제비뽑기를 통해서 왕이 된 적이 있다. 결국 제비뽑기를 통해서 요나단이 뽑힌다. 요나단은 사울의 맹세(금식 명령)를 어긴 적이 없었다. 사울의 맹세를 듣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울의 잘못된 행동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로 내 몰린 것이다.
44.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사울은 자기의 종교심으로 죄가 없는 그의 아들 요나단을 죽이겠다고 했다. 요나단을 죽이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는 모습이다. 맹세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에는 부지중에 죄를 범한 자는 속죄제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데, 기어이 요나단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사울이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는 모양이다.
요나단은 블레셋과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 중에 소년 한명을 데리고 블레셋을 기습공격하여, 하나님의 전쟁으로 이끌게 한 자였는데, 사울이 이렇게 망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의 거짓된 종교심으로 인하여 요나단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당시 사울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 닮아있다. 바리새인들은 복음의 진리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율법주의에 얽매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진리를 볼 수 없는 것이다.
45-46.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파다) 죽지 않게 하니라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백성들이 이번에는 요나단을 죽지 않도록 왕인 사울에게 항거하는 모양이다. 백성들도 맹세를 한다. 결국 왕인 사울이 백성들의 요구에 항복하는 모양이다. 이미 왕의 권위가 떨어진 것이다. 사울이 처음 맹세를 한 것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는데, 결국 자기 아들 요나단을 죽이는데, 맹세가 적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쟁으로 이끄시는데, 사울은 자기의 종교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전쟁을 포기해 버리는 어리섞은 짓을 저지르고, 백성들에게도 등을 돌리며, 또 헛맹세를 남발하는 그런 자로 묘사되었다.
파다는 구원하다 라고 번역되었지만, 몸값을 받고 석방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백성들이 자신들이 몸값을 치르는 것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사울에게 항거하여, 요나단을 살려내는 장면이다. 사울은 하나님께 거짓 맹세를 했지만, 백성들은 요나단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맹세를 한 것이다.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을 한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전쟁을 이끄는 자로 묘사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사울은 예수를 죽이려는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자와 종교심으로 그를 말로 죽이려는 거짓된 자들이 혼재하고 있는 모양이다.
47-48.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사울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군사들이 고통을 받았지만, 이후에 사울은 이스라엘 주변 국가와 전쟁을 할 때 마다 전승을 기록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떠난 상태에서 사울이 왕으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이다.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소바 아말렉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전쟁은 일시적으로는 강대한 군사력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으나,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심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인 왕이기 때문에, 결국 완전하게 나라를 이끌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49-51.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사울의 세 아들과 두 딸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중요한 인물은 요나단과 미갈이다. 이는 다윗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울에 이어 다윗이 왕이 되므로 주변 국가와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윗 왕은 주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다. 사무엘하 8장 14절에서『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사울은 인간의 힘으로 싸우고, 다윗은 하나님의 능역으로 승리하게 하신 것이다.
52.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블레셋과의 전쟁은 계속되었음을 보여주고, 그의 군사력은 갈수록 강대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상비군 제도가 이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전에는 전쟁이 발발하면, 군사를 모아서 적과 전쟁을 치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군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사울은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국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백성들이 원했던 그런 왕인 것이다. 하나님이 왕이었을 때는 허약하게 보이는 군대와는 달리 겉으로는 강성한 군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영적으로 블레셋은 세상의 왕을 상징한다. 인간은 세상의 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왕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님부터 옮을 말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