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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祭文)
도원수 권율에게 제사지낸 글[都元帥權慄致祭祭文] /신흠(申欽)
오직 영께서는, 유명한 집안으로 덕을 전수하고 경사를 길러 복이 흘렀도다. 정승의 가문에서 장수가 나와 그 아름다움을 이었도다. 조년에 침체하여 그 빛을 감추었으나 늦게야 가다듬어 그 그릇 탁월했도다. 오직 내가 간택하여 낭서(郞署)에서부터 발탁하였도다. 어디에 써 봐도 업적이 있었기에 내 가슴과 등처럼 의지했도다. 때마침 왜적의 난리가 일어나 내 서울을 떠나게 되었도다. 여러 고을이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하고 팔방(八方)이 기와가 깨지듯이 분열되었도다. 누가 군사를 모아 무너짐을 막겠는가? 경(卿)이 의리에 분발하여 남쪽에서 군사와 맹세하였도다.
격문(檄文)을 돌려 임금을 구하자고 부르짖고 깃발을 세워 장사들을 모았도다. 팔을 들어 한 번 부르자 병들고 상처입은 이도 모두 일어났도다. 이치(梨峙)에서 승첩하고 패배를 격려하여 정예병으로 만들었도다. 적의 목구멍을 막고 우리 기세를 키웠도다. 관찰사를 제수하자 갈수록 더욱 전열을 가다듬었도다. 군사를 이끌고 곧장 올라와 서울 근교에서 주둔하였도다. 꺾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 일마다 사기(事機)에 들어맞았도다. 마치 뚝이 물을 막듯이 하니 그 계책 장했도다. 날뛰고 날뛰어 괴변을 부리며 감히 하늘의 벼리를 무시하자 적을 헤아려 승리로 이끄는 데 마치 손발을 움직이듯 했도다.
사수(死守)할 뜻 전일하니 구공(九攻)의 기술도 어쩔 수 없었도다. 백치(百雉)가 일제히 튼튼해지고 장사들이 힘을 같이했도다. 보장(保障)이 다시 완전하고 흉한 도적도 넋을 잃었도다. 서울 사람들이 향응하여 광복(匡復)을 기대했도다. 그 공적 아름답게 여겨 군사의 중한 책임을 주었도다. 기미에 앞서 계산하고 육도 삼략을 통달하였도다. 8년 동안 행진(行陣)하면서 험악함을 평지처럼 여겼도다. 몸을 던져 애쓰고 고생하여서 죽기로 각오하고 몰고 달렸도다.
임금의 군사와 기각의 형세를 이루어서 마침내 큰 공을 성취하였도다. 시작도 있고 마침도 있어 빛나는 공렬 뛰어났으니, 훈업은 기상(旂常)에 합당하고 충성은 사직(社稷)에 있도다. 조정으로 돌아오면 등용하려고 했었는데, 어찌 하늘이 남겨주지 않았는가. 나의 비통만 더하도다. 바람 서리와 안개 이슬에 기혈(氣血)이 병들었던가? 중도에 갑자기 돌아가니 나 때문이었도다. 나라만을 생각하고 집을 잊은 채 임금의 일에 죽었도다. 경은 편안하겠지만 나의 비통은 어찌 끝이 있겠는가. 돌아간 뒤 포상은 비록 갖추어 내렸지만 어찌 보답이 되겠는가. 장사할 날 가까우니 눈물이 흐르도다. 하늘이 그대를 빨리 빼앗아가 거듭 나를 어렵게 하도다. 이에 예법을 자문하여 이 전(奠)을 드리니, 변변찮은 맑은 술이지만 나의 슬픔을 펴보고 싶어서로다.
都元帥。權慄致祭祭文
惟靈。名家傳德。毓慶流祉。相門出將。繄趾其美。早猶踸踔。厥耀斯閟。晩乃蹈厲。有卓其器。惟簡在予。擢自郞署。何試不績。予倚心膂。屬茲寇警。予罹播越。列郡風靡。八方瓦裂。孰鳩武旅。以遏橫潰。卿能奮義。誓師南裔。飛檄勤王。建牙集士。振臂一呼。瘡痍盡起。捷于梨峙。鼓敗爲銳。截彼咽嗌。張我氣勢。曁授閫寄。愈往愈礪。提兵直上。嬰壘郊圻。不挫不撓。動中其機。若坊制水。其猷克壯。跳踉衒怪。敢干天網。揣敵決勝。如運股掌。
三板志專。九攻技拙。百雉齊固。群校同力。保障再完。兇渠褫魄。都人嚮風。指期匡復。嘉乃之休。畀以戎重。先幾沈算。韜略硏洞。八載行陣。視險若夷。委身劬悴。伏節驅馳。掎角王師。竟就大伐。有始有卒。逸偉炳烈。勳合旂常。忠存社稷。謂言還朝。庶謀進用。胡寧不整。增余之慟。風霜霧露。榮衛內痼。中途奄淪。由余之故。國耳忘家。死以王事。於卿則安。予痛何已。崇終雖備。貤澤那逮。卽遠有期。爲之一涕。天奪之速。重予顚隮。茲諏典式。爰致奠儀。泂酌非羞。冀紵予悲。
상촌(象村) 신흠(申欽)에 대한 제문 /박동량(朴東亮)
숭정 원년 무진 9월 무오삭 7일 갑자에 죄를 받아 유배된 나주(羅州)박동량(朴東亮)은 삼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아들 미(瀰)를 시켜 죽은 벗 영의정 현헌 선생의 영전에 제사를 드리며 말씀올립니다.
아, 처음 내가 상투를 틀 때부터 공은 영광스럽게도 우리 형제와 매우 즐겁게 어울려 놀아 주었습니다. 나는 또 엷은 교분으로 고상(故相) 백사공(白沙公)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고 있었는데 당시 백사는 이미 저작(著作 홍문관 예문관 등을 의미함)의 뜰에서 명성을 날리면서 임금의 참모로 일컬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공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진사(進士)가 된 뒤 조정에 진출했었는데, 두 분 공께서는 재주가 없는 나를 비루하게 여겨 버리지 않으시고 동류(同類)의 말단에 끼워 주시면서 막역한 친구관계로까지 이끌어 올려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병란을 겪은 이후로는 두 분 공과 내가 모두 도성 남쪽에 거처를 정했는데 이곳은 서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서 세 집안이 은연중 정족(鼎足)의 형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엔 백사에게 문안드리고 저녁엔 공을 찾아뵙곤 하였는데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속 마음이 서로 통해 천 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얼굴을 늘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역(周易)》에서 ‘마음이 하나가 되면 그 말이 난초와 같고 견고한 쇠도 끊어버릴 수 있다.’고 한 것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천리마 꼬리에 파리가 붙듯 삼 밭에 쑥이 자라나듯 그 분위기에 푹 젖어들며 스스로 기쁘기만 했는데, 세상에서 교의(交誼)를 이야기할 때면 역시 우리 세 사람의 관계로 모두 귀결시키곤 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두 분 공의 중함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재주가 없는데도 선묘(宣廟)로부터 발탁되는 은혜를 입어 많지도 않은 나이에 벌써 우뚝 상경(上卿)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부승(負乘)하다 보면 복이 지나쳐 재앙이 되는 것으로서 그 동안 노리고 있던 방아쇠가 한 번 당겨지자 일망타진되는 참혹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나는 공의 뒤를 따라 맨 먼저 죄망(罪網)에 걸렸는데, 공은 산골로 나는 바닷가로 뿔뿔이 흩어져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사 역시 군소배(小軰)에게 잇따라 미움을 산 나머지 강상(綱常)을 세워야 한다는 그의 말이 거꾸로 화를 자초하는 자료로 둔갑하여 병든 몸을 싣고 북방으로 쫓겨나 궁벽한 곳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하늘이 인정을 베푼 것은 그래도 공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박(剝)의 상태가 극한에 이르면 다시 복(復)이 되는 법, 밝은 태양이 또 다시 떠오르면서 흉악한 무리들이 모두 섬멸되고 만물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혁명 과업을 수행할 때에 공이 받침돌 역할을 하면서 조정의 의논을 이끌어 가고 큰 계책을 꾸며 영원히 아름답게 천명(天命)을 이어 갈 수 있게 하였으니, 우리 나라의 백성을 안정되게 살아 갈 수 있게 한 것이 아, 누구의 힘이었습니까.
나는 만년에 죄를 짓고 장식없는 짚신에 흰 개가죽 장식의 수레를 탄 몸이 되어[鞮屨素篾] 다 죽은 목숨으로 황량한 땅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공이 정승으로 묘당(廟堂)에 있으면서 봄철 따스한 햇빛처럼 교화를 펼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만, 삼가 살피건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손을 이마에 얹고 공을 기리며 칭송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좌우가 자연의 조화에 따라 군신(君臣) 모두 순수한 덕을 갖추게 되었으므로 비록 재차 병란을 겪었어도 백성이 오히려 생업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이 심력을 다하여 우리 나라가 오래 지탱되도록 하고 세상에 드문 성상의 지우(知遇)에 보답하려는 노력이 지극했던 결과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늘이 큰 복을 내려 우리 공을 오래 살게 하면서 중흥을 도모하는 성상을 보필하게끔 하는 것이야말로 인사(人事)에 천도(天道)가 응하는 도리로 볼 때 의당 어긋나면 안 될 것일 텐데, 어찌하여 하늘이 지극히 후하게 자질을 부여해 주고는 왜 또 갑자기 이 세상에서 데려간단 말입니까. 어쩌면 하늘이란 멍청하기만 할 뿐 그 사이에 주재(主宰)하는 것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백성에게 복이 없는 나머지 공의 은택을 끝까지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까. 아, 모를 일입니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말하기를 ‘공은 수염이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긴 했으나 거동을 보면 건장하고 음식도 젊을 때와 같으며 정신은 오히려 더 왕성해져 눈빛이 형형하고 얼굴 빛이 맑아 마치 얼음과 옥이 서로 비추는 듯하였다.’고 하기에, 내가 이 때문에 하늘과 사람의 일이 서로 응한다는 것을 더욱 믿었었는데, 그만 크게 잘못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하늘이 그만 실덕(失德)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 공의 부음을 들었을 때 마치 상을 당한 것처럼 가슴이 뛰었는데 자리를 배설하고 한번 곡한 것 정도로 어찌 나의 비통함을 풀 수 있었겠습니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데 밥상을 대해도 먹는 일을 잊고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신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아, 공의 수명이 63세로 그친 것은 실로 백사와 같습니다만, 처음과 끝 모두를 영예롭게 장식하고 복록을 지닌 채 고종명(考終命)했음은 물론 아들과 사위가 모두 번성하고 자손들이 많은 것은 또 백사가 얻지 못한 바이니, 그러고 보면 하늘이 공에게 보답해 준 것이 또한 넉넉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씨(仲氏)와 나는 각각 아들의 신부감으로 공의 따님을 데려 왔는데, 지금 우리 형제에게는 친손(親孫)이 되고 공에게는 외손(外孫)이 되는 아이가 다섯이나 됩니다. 그리고 공은 평소 나에게 말하기를 ‘옛 사람이 「원래 한 몸인데 두 사람이 되었다.」고 한 말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를 두고 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 얼마나 서로 허여(許與)한 것인데, 백 년의 교의(交誼)가 이 정도로 끝난단 말입니까.
공은 바야흐로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새를 타고 백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묘(宣廟)께서 올라가 계신 곳에서 읍양(揖讓)하고 있을 텐데, 아직도 혈기를 지닌 채 찌는 듯한 변두리 여기(厲氣) 서린 해변가에 초라하게 머물고 있는 나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천 리 밖에서 글을 봉해 애통한 심정을 부치며 전(奠) 드리오니 영령께서 혹 50 년 친구를 잊지 않으셨다면 흠향하소서.
상촌(象村) 신흠(申欽)에 대한 제문 /금양위 박미(朴瀰)
숭정 원년 무진 9월 무오삭 7일 갑자에 문인(門人)나주(羅州)박미(朴瀰)는 삼가 술과 음식을 갖추어 선사(先師) 현헌 선생의 영전에 경건히 제사드립니다.
아, 부친께서 고상(故相) 백사 선생(白沙先生)과 우리 선생에 대해 교분은 갖고 계셨던 인연으로 소자(小子)가 유년시절부터 두 선생의 문하에서 매우 가깝게 노닐었습니다. 그런데 백사 선생께서 일찍 세상을 버리신 뒤로 소자가 귀의했던 것은 오직 선생 한 분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30년 동안 한결같이 부사지의(父師之義)를 행해 왔는데, 선생께서 화란(禍亂)이 몰아닥치는 상황에서 바로잡아 보전해 주시고 이끌어 주셨으니 오늘날 이렇게라도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선생의 덕택이라 할 것입니다.
아, 선생께서는 소자를 그야말로 자손 이상으로 대해 주셨는데 소자는 외부와의 관계를 일체 차단하고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해야 하는 처지라서 아침 저녁으로 스승 앞에 나아가 무한한 그 경지를 제대로 배우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국가에 복이 없고 하늘도 무정하여 두 들보의 꿈을 꾸시고 이토록 갑자기 기미(箕尾)에 올라 타셨습니다. 부음을 받들고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였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하늘에 울부짖고 땅에 호소해 본들 어떻게 우리 선생을 다시 살려낼 수 있겠습니까.
아, 선생의 덕은 전고(前古)에 비추어 봐도 휘황하기 그지없고 선생의 은택은 이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하였습니다. 소자가 비록 오활하다고 해도 원래 아부하는 일은 감히 하지 못합니다. 자연의 변화에 따라 돌아가신 것이니 공의 입장에서야 유감이 없겠지만 나 소자로 보면 태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꺾인 격이며 비바람을 피할 장막이 거두어진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창연(悵然)하기만 하고 자리에 앉아도 힘이 쭉 빠지기만 한데 앞으로 살아갈 의욕이 여기에서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혹 죽은 뒤에라도 혼령이 있어 선생님을 모시고 주선할 수만 있다면 저 황천이야말로 제가 있을 곳이라 할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지극한 슬픔은 표현할 길이 없고 지극한 정은 쏟아내기가 어려운데 유명(幽明)에 관계없이 이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영령께서는 알아 주소서.
윤장경(尹張卿) 홍국(弘國) 에 대한 제문 /조익(趙翼)
아, 장경(張卿)이 죽었으니 이제는 다시 볼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향리에 있으면서 경성(京城)의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장경이 죽었다는 어떤 사람의 말을 홀연히 듣고는 내가 너무나 놀라면서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잘못 전해진 소문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을 시켜서 경성에 물어보게 한 뒤에야 장경이 죽었다고 전한 사람의 말이 과연 맞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장경은 나이도 아직 쇠하지 않은 데다 질병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내가 어떻게 잘못 전해진 소문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 장경이여. 어찌 이렇게까지 될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아, 형이 교제한 사람도 많고 내가 아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지만, 형이 나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오늘날 교제하는 것을 보면 오직 이익을 추구한 나머지 권세의 많고 적음만을 따지고 있는데, 이는 온 세상의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나는 세상과 타협을 하지 못한 채 명리(名利) 따위는 내던져 버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보면 모두가 배꼽을 쥐고 웃을 일인데, 유독 형만은 나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또한 내가 구구하나마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형이 나를 오인(誤認)했다고 하더라도, 형이 사람에게서 취하는 것은 또한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아, 형의 사람됨을 보건대 형이 선인(善人)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형이 항상 선을 행하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자신도 인정하였습니다만, 나 역시 형이 그렇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형은 안으로 집안에서 경영하는 일이 없었고 세상에서 구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몸과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하나도 없고, 형이 찾은 것은 오직 술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학문에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담박하게 생활하면서 구하는 것이 없었고 보면, 실로 도를 아는 자와 은연중에 합치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성현이 말씀한 대로 ‘욕심을 적게 가지는 사람〔其爲人也寡欲〕’의 경우에 어찌 해당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형의 경지가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높게 된 까닭이라고 할 것인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집안이 극심하게 빈한하고 처자가 항상 생활고에 시달리는데도 형은 봉록(俸祿)을 얻기만 하면 매번 술집에서 탕진하곤 하였습니다. 내가 항상 형의 높은 경지를 아끼면서도 형이 과음(過飮)하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이는 형의 수명이 길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이 때문에 수명을 줄이고 말았던 것입니까. 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지난해 초봄에 형이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떠날 적에, 내가 시골집에 있으면서 작별 인사를 할 수 없기에, 단지 두 수의 시를 부쳐 전송하면서 사행(使行)에서 돌아오면 가서 만나 보겠다고 약속하였는데, 막상 형이 돌아왔을 때에는 또 농사일에 골몰한 나머지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항상 생각날 때마다 만나 볼 수 있는 시기가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여기면서 흰머리가 되도록 함께 지낼 기약을 하고 있었는데, 형이 느닷없이 이렇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가령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내가 어찌 모든 일을 놔두고 가서 형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지난해에 시를 써서 부칠 때만 해도 헤어진 것이 이미 오래되었는데, 그 뒤로 한 해가 지나도록 끝내 보지 못한 채 그만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기년(期年)을 맞았기에 이제야 찾아와서 곡을 하게 되었으니, 이 마음에 맺힌 한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정말로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스스로 이런 슬픈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으니 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 옛날에 내가 형의 집에 찾아가면 형이 꼭 술을 권하였고, 형이 내 집에 찾아와서도 꼭 술을 찾곤 하였으므로, 만날 때마다 번번이 크게 취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한 잔의 술을 올리는데도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지금의 일을 슬퍼하며 옛날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져 흘러내릴 뿐입니다. 형이여, 이런 사실을 아십니까. 아, 슬플 따름입니다.
祭尹張卿 弘國 文
嗚呼。張卿死矣。其不可復見矣。余在鄕曲。不與京城人接久。忽有人言張卿死者。余驚慟雖深。然猶疑其誤傳也。及使人問於京城。而後張卿死矣。傳之者果信也。張卿年未衰。未聞有疾病也。一朝卒然聞其死。余安得以不疑其誤也。嗚呼。張卿。豈意而至此哉。痛哉痛哉。嗚呼。兄之所交亦廣矣。余之所識非一二。而兄之愛我特深。凡今之交。惟利是視。觀勢厚薄。擧世皆然。以僕之齟齬抹摋。世之人擧捧腹焉。而獨兄見愛。何耶。其亦以僕區區自守。能不爲世俗之態耶。若爾則其知我雖誤。兄之所取於人者。亦異於人人矣。嗚呼。兄之爲人。其爲善人也必矣。兄常自許爲善。而余亦信其然也。內無所營於家。外無所求於世。其於身世。都無所着意。唯酒而已。雖其未嘗從事於學問。而其泊然無所求。則實暗與知道者合。豈非聖賢所謂其爲人也寡欲者耶。此兄之所以甚高於人而人莫知之者也。
以是家極貧。妻子常苦乏。而俸祿所得。盡入酒家。余常愛兄之高。而憂兄之過飮也。懼其壽命之不長也。其竟以是而夭其年耶。嗚呼痛哉。去歲春初。兄以下价使上國。余在村舍。不得就別。而只寄兩詩以送之。且約使還當就見。及兄之還。又汨沒農務。不能踐約。然常謂源源之有時。以白首而爲期也。豈謂兄之遽至此耶。使知其如此。吾豈不棄百事而來視也。去年寄書詩時。爲別已久矣。其後至經年竟不得見。而乃作幽明之隔。今適期年而來哭之。此之爲恨。何可勝道。余實不信。自貽伊戚。夫復何言。嗚呼。伊昔我造兄家。兄必勸酒。兄來我家。亦必索酒。每相見輒大醉。今來奠一觴而亦不見傾。悼今思昔。有隕如瀉。兄其知也耶。嗚呼哀哉。
외숙부 윤공(尹公)에 대한 제문 /조익(趙翼)
아, 외숙의 선비(先妣)는 실로 우리 조씨(趙氏)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옛일을 추억해 보건대, 우리 증조비(曾祖妣)께서 살아 계실 적에 외숙의 선부인(先夫人)도 건강하셨으므로, 외숙이 어린 시절에 항상 선부인을 따라서 우리 집에 왕래하였고, 나 역시 때때로 가서 조고(祖姑)를 뵙곤 하였습니다. 외숙은 나보다 두 살 적어서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하였기 때문에 그 때 벌써 서로 사랑할 줄을 알았으니 다른 족성(族姓)의 여느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병란(兵亂)을 당해 일가(一家)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양주(楊州)와 연천(漣川)과 마전(麻田)과 삭녕(朔寧) 사이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는데, 그때 증조비께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외숙은 선부인을 따라서 서북(西北) 지방으로 들어갔고, 우리 집은 강남(江南) 지역에서 생계를 도모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부인께서 서북 지방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는 각각 남쪽과 북쪽에 헤어져 살면서 소식이 아득히 끊어졌다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야 경사(京師)에서 비로소 만나 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외숙도 이미 훌쩍 커서 장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뒤로 내가 과거에 응시하거나 학업을 닦기 위해서 한 해에 두세 차례씩 경사에 오곤 하였는데, 오기만 하면 반드시 외숙과 만났고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집에 돌아가는 일도 잊고서 노는 일에 열중하여 술을 마시고 웃고 즐기며 정회(情懷)를 토로하고 속마음을 서로 털어놓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낮은 관직 하나를 얻어 경사에서 벼슬하게 되어서는 더욱 자주 만나게 되어 친척 중에서는 가장 친하게 지냈는데, 어찌하여 불행하게도 느닷없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외숙은 마음가짐이 솔직하고 담백하여 조금도 정직하지 못하거나 음험한 면이 있지 않았고, 그릇이 커서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으며, 의기(意氣)가 호매(豪邁)하여 남자의 면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병이 많아서 학업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수는 없었지만, 글을 엮어서 내놓는 구절을 보면 왕왕 그 표현이 더할 수 없이 맑기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외숙의 덕성과 재질 모두가 다른 사람보다도 우수하였으니, 가령 질병에 걸리지 않아 학업을 열심히 닦음으로써 그 덕업(德業)을 확충할 수 있었더라면, 충분히 한 시대의 명인(名人)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외숙은 스스로 병이 많은 몸이라서 이 세상일에 힘을 기울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항상 속진(俗塵)을 벗어나 맑고 깨끗하게 살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말하기를 “나는 강과 산이 수려한 곳에 띳집을 엮고 일 년 내내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고 싶은데, 이와 같이 나의 생애를 보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학문은 재질과 덕성을 채우지도 못하고 문장은 하나의 이름을 이루지도 못하고 나이는 삼십에도 이르지 못한 채, 그 우수한 재능과 고원한 뜻을 저버리고서 한 번 병에 걸려 일찍 죽고 말아 황천에서 한을 품게 되었단 말입니까. 게다가 대를 이을 자식도 두지 못해서 떠도는 영혼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운명이 기박한 것이 어쩌면 한결같이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그 누가 죽지 않겠습니까마는, 우리 외숙의 경우에는 더더욱 비통하고 억울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외숙은 십육칠 세 때부터 매년 병들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그동안 병들지 않은 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걱정을 하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아, 하늘이여, 어쩌면 이렇게까지 불인(不仁)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 옛날에 외숙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발을 포개고는 밤에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때 외숙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척에 대해서 극진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인후(仁厚)한 그 한마디 말은 그야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서 지금도 귀에 낭랑하게 들리는 듯한데, 이제는 그때 그 사람이 이미 아니게 되었으니,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더구나 나는 천성적으로 혼자 조용히 있기를 좋아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지음(知音)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외숙으로 말하면 어려서부터 서로 아꼈고 성장한 뒤에는 더욱 서로 좋아하면서 지기(志氣)가 부합하고 언론(言論)이 일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기대한 그 의리가 실로 마음을 알아주는 벗과 같았으니, 다른 친척들이 서로 아끼는 정과 같은 정도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내 곁을 떠나고 말아서 이제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더욱 적어지게 되었으니, 여기에 생각이 미치노라면 마치 가슴이 칼로 에이는 듯합니다. 그리고 외숙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 나도 큰 병을 앓으면서 거의 죽을 뻔했기 때문에 병문안을 하지 못한 것이 반달이나 되었는데 외숙이 그 사이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내가 병석에서 부음(訃音)을 듣고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외숙이 병들었을 때에는 내가 직접 의약(醫藥)을 올려서 만에 하나 다행스럽게 되기를 기원하지도 못하였고, 외숙이 임종할 때에는 내가 손을 잡고서 이별을 하지도 못하였고, 외숙이 죽었을 때에는 내가 시신 옆에서 곡을 하지도 못하였고, 영구(靈柩)가 동쪽으로 향할 때에는 내가 또 상엿줄을 잡고서 슬퍼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평생토록 서로 좋아한 정을 스스로 드러내지도 못하였고, 이승과 저승으로 갈린 비통한 심정을 호곡(號哭)하며 토로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나의 병이 나았는데, 장지가 이미 정해지고 하관할 날짜도 잡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필마(匹馬)를 타고 동쪽으로 와서 이렇게 약소하나마 제물을 올리고는 한 번 통곡하며 영결(永訣)을 하려 하니 그저 하염없이 망연해질 따름입니다. 신령이시여 지각의 능력이 있다면 나의 진정을 굽어살펴 주소서. 아, 슬프기만 합니다.
祭表叔尹公文
嗚呼。叔之先妣。實惟吾氏。思昔吾曾祖妣在時。先夫人亦無恙。叔爲兒時。常隨先夫人往來吾家。吾亦時往謁祖姑。叔少吾二歲。自幼相長。已知相愛異於他族姓。及遭兵變。一家流離。展轉避兵於楊漣麻朔之間。是時曾祖妣以天年下世。旣而叔隨先夫人入西北。吾家就食江南。未幾。先夫人歿於西北。自此一南一北。音問邈絶。其後數年。始得相見京師。叔已仡然爲丈夫矣。自是吾或戰藝或游學。來京師歲率再三。來則必與叔合。合必流連。飮酒歡笑。談吐情懷。肝膽相照。及吾得一命。來宦于京。則相見尤數。於親戚中相好最深。云何不淑。遽至於斯。叔秉心白直。無少回曲險陂。器宇恢恢。有長者風。意氣豪邁。有男子形貌。雖平生多疾。不能刻意苦學。而其摛詞吐句。往往淸絶。其德其才。竝高於人。使其無疾病。
勤學以充其德業。其足爲一代名人矣。而自度多病。無以致力當世。每有沖澹出塵之意。常謂吾結茅江山。優游卒歲。以度吾生足矣。奈何學未充才德。文不遂一名。年未至三十。而負其奇才高志。一病夭閼。抱恨重泉。又無嗣息。游魂誰托。命途之窮。一何至此。凡人有生。孰不有死。至於吾叔。尤可痛冤。叔自十六七以後。無歲不病。其間不病者蓋無幾。吾每憂之。然豈謂遽至此哉。蒼天蒼天。曷其不仁。嗚呼。疇昔高堂。銜杯相醉。交足夜話。叔嘗有言。凡人親戚。須極相愛。仁厚一言。出自中情。琅然在耳。其人已非。痛哉痛哉。況吾賦性孤介。與人寡合。海內雖廣。知音有幾。若吾叔則幼而相愛。長益相好。志氣相符。言論莫逆。
其相期待之義實契知心。不但如他人親戚相愛之情而已也。一朝去矣。知我者益寡。言念及此。心如刃觸。叔之疾革。吾亦患大病。幾至死域。不得候者且半月。而云叔亡矣。病裏聞訃。淚不能禁。嗚呼。其病也不得親醫藥以冀幸其萬一。其終也不得執手而訣。其亡也不得憑尸而哭。靈輀之東也。又不得執紼而哀。平生相好之情。無以自效。而幽明號呼之慟。無由得瀉。今吾病已愈。聞眞宅旣卜。入地有日。匹馬東來。奠此菲薄。一痛長辭。萬古茫然。神若有知。尙鑑鄙衷。嗚呼哀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