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우리 테레비 잠 고쳐 주쇼 / 박선애
“목사님, 우리 테레비 잠 고쳐 주쇼.”라는 전화는 박 목사에게 접수되는 민원 중 횟수로 그 으뜸을 차지한다. 연세가 많으신 성도님들은 리모컨을 잘 못 눌러서 텔레비전이 안 나오면 목사님부터 찾는다. 또 자녀들이 와서 보일러 스위치를 온수 전용으로 누르고 씻은 후에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을 깜빡 잊고 간 날이면 아무리 틀어도 방이 안 따뜻해지니 고장이 틀림없다고 신고한다. 그 외에도 오일장이면 장에, 아프면 병원에, 가끔은 서울 가는 인근 도시의 기차역에 태워다 줘야 하는 것도 박 목사의 일이다. 거기에 박 목사의 손길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교회 성도만이 아니다.
박 목사는 20여 년을 농촌의 작은 교회에서 일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려고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던 박 목사 부부는 혼자 사시는 노인들의 생활을 보고 놀랐다. 지금은 국가의 복지 정책이 잘 되어 돌봄 서비스 지원으로 정기적인 안부 확인, 가사 도우미, 목욕 서비스 등 기본적인 생활 지원이 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거동하기 어려워도 집에 방치되어 있고,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는 식사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술 한잔 드시고 취하면 그대로 주무시기도 했다. 이것이 안타까워 반찬을 해서 갖다 드리는 걸로 시작했다. 자신들이 조금씩 모으는 회비를 뜻있게 쓰고 싶다는 어느 회사의 신우회와 연결되어 정기적으로 반찬 봉사가 이루어졌다. 박 목사 부부는 일주일에 한 번은 서너 가지 반찬을 만들어 들고, 또 한 번은 빵과 음료수를 가지고 어르신들을 찾아뵈었다.
그중에서는 특별히 더 안타까운 사람도 있었다. 인호 청년은 누나가 한 명 있다고 하는데 연락이 끊기고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어느 날 박 목사 부부는 그 집 앞을 지나가다 애타게 아들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들어갔다. 어머니는 거동을 못해 마당에서 간질로 넘어진 아들을 보고도 쫓아가지 못하고 대답할 수 없는 이름을 애끓게 부르며 괜찮냐고 묻고 있었다. 들어 가서 조치를 해주고 때때로 찾아가서 도와주었다. 복지 담당 공무원에게 상황을 알려 어머니는 가까운 도시의 요양 시설에 보냈다. 어려서부터 간질로 사회생활을 안 해 본 인호가 어머니를 만나러 가려면 박 목사가 차에 태워 데려가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교회로 오면 데리고 다녔다. 어머니의 임종을 같이 지켜 주고 교회에서 장례까지 치러 주었다. 인호는 고맙다는 말도 할 줄 모른다. 요즘에는 핑계를 대며 교회에도 나오지 않는다.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시는 인방 할아버지는 거동도 못 하시고 치매에 걸리셨는데 다행히 할머니가 건강하셔서 돌보셨다. 딸의 권유로 교회에 할아버지는 나오고 싶어 하시는데 할머니는 거부하셨다. 박 목사가 수 차례 찾아가 설득하자 마음이 녹은 할머니가 본인은 안 나와도 할아버지는 씻기고 옷을 입혀 준비해 주셨다. 그러면 박 목사가 모시고 오는데 업어서 차에 태우고, 내려야 했다. 한 번은 할머니가 바빠서 못 보내니 그냥 가라고 했다. 한참 예배 중에 할머니가 휠체어에 태우고 들어왔다. 교회 가고 싶다고 울면서 떼를 쓰는데 당할 수 없어 데리고 왔다고 했다. 돌아가시기까지 찾아다니며 배운 적도 없지만 이발과 면도도 해 드렸다. 할머니는 지금도 교회는 안 다니셔도 손수 기른 채소를 갖다 주신다.
곽영심 할머니도 치매 환자에 혼자서 걷지도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보시니 그 형편이 참 딱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할머니를 씻기는 것인데 몸집이 커서 어려웠다. 박 목사의 사모는 그 일을 해냈다. 도시에 사는, 할머니의 작은딸은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할아버지가 경운기에 태우고 함께 교회에 나오셨다. 할아버지가 주무시다 갑자기 돌아가셨다. 혼자 남은 할머니는 큰딸이 모시고 가고 싶으나 우선은 형편이 안 되었다. 또 나서서 요양 시설을 알아보고 보내드리는 것은 박 목사가 해야 할 일이 되었다. 요양원에 계시다가 다행히 몇 달 후에 큰딸이 모셔갔다.
하다 보면 오해를 받는 일도 있다. 김희자 할머니는 들에서 일을 마치고 남편과 나란히 돌아오고 있었다. 집 근처 삼거리에서 갑자기 나타난 차가 할아버지만 그대로 밀고 가버렸다. 눈앞에서 남편을 그렇게 보낸 충격으로 할머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엇이든지 검정 비닐봉지에 싸서 감춰 놓았다. 냉장고에는 상한 음식들이 가득차 있었다. 치워 줘도 소용이 없었다. 청소를 해 주다 보니 공과금을 안 내 고지서와 독촉장이 쌓여 있었다. 박 목사가 설득하여 농협에 모시고 가서 자동 납부 신청을 해 줬다. 몇 달 후에 이분은 교회 목사가 다달이 자신의 통장에서 돈을 다 빼간다고 동네에 소문을 내고 다녔다. 사람들이 알아줘서 다행이지 크게 망신 살 뻔한 일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 승우는 특수 학교 전공과에 다니는 스물두 살 청년이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박 목사 부부를 잘 따른다. 정신 지체라 또래 아이들과는 친구 맺기가 어려워 늘 혼자 논다. 가끔 오늘 학교에서 무엇 배웠냐고 물어 보면 늘 그냥 있었다고 대답했다. 특수 학급도 없는 작은 시골 학교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지내는 듯해서 걱정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박 목사는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특수 학교에 보낼 것을 제안했다. 할아버지는 본인들 품을 떠나 보낼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할아버지가 등하교시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손자가 안타깝고 불쌍해서 뭐든 다 해 줘 버리니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박 목사는 승우를 보면 혼자 남겨지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데리고 다니면서 사회 적응 훈련을 시킨다. 만 원을 주고 거리에서 핫도그 하나 사고 거스름돈 받아 오라고 한다. 가기 전에 차분히 물어보면 계산이 되는데 막상 현장에 나가면 못한다. 대화가 공부다. “승우야, 커피 한 잔에 3000원이야, 승우하고 목사님하고 가서 사 먹으면 얼마 내면 돼” “6000원이요.” “그럼 사모님하고 셋이 가면 얼마야?” “음, 음”하다가 씩 웃는다.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도, “승우야, 우리가 주차한 곳은 지하 1층이야, 여기는 20층이야, 위에 1층이 더 있어. 그러면 이 아파트는 모두 몇 층이냐?”라고 물으니 한참 만에 “22층?”하며 자신이 없는지 눈치를 살핀다. 옆에서 보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하다. 아버지처럼 공중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먼저 온몸을 씻겨 주고 등 좀 씻어 주라고 했더니 한 부분만 벗겨지도록 밀어놓고는 그래도 다음 날 괜찮냐고 걱정하더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이제는 특수학교 전공과로 보내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첫해는 떨어지고 다음해에 다시 도전할 때는 기출 문제를 분석해서 운동화 끈 묶기, 간단한 물건 해체해서 다시 조립하기 등을 반복 연습시켰다. 다행히 합격해서 2년째 다니고 있다. 다른 군에 있는 학교 기숙사에서 살다가 주말에는 혼자 버스 타고 온다고 하니 많이 똑똑해졌다. 얼마 전에는 박 목사 사모가 기숙사 친구들 모두 나눠 먹으라고 아이스크림을 넣어줬더니 아주 기가 살았더라고 한다. 거기서 지내는 저녁이면 하루는 박 목사에게, 하루는 사모에게 번갈아 가며 날마다 안부 전화를 한다고 하면서, “우리 애들보다 나아요.”라고 박 목사는 자랑한다. 승우는 박 목사 부부가 떠날까 봐 불안해 하며 자기네 옆에 집 짓고 같이 살자고 한다.
박 목사는 내 남동생이다. 어렸을 때도 달랐다. 내가 초등학교 5,6학년쯤 겨울 방학이었다. 그때는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하는 것이 어른들의 겨울 일이었다. 우리 집은 다행히 산이 있어서 추수가 끝나면 일꾼을 사서 일 년 동안의 땔감을 장만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산 주인의 눈을 피해 몰래 나무를 했다. 할머니는 남들이 우리 산에서 나무하는 걸 말리셨다. 어느 날 동생과 나에게 그 임무를 주어 보내셨다. 산에 가서 나무하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 할머니가 나가라고 했다고 전하라는데 어른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할머니가 시키시니 할 수 없이 갔다. 하필 무슨 병으로 다리 한 쪽을 허벅지까지 자르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동네 아주머니가 엉덩이로 뭉치면서 갈퀴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분은 남편은 따로 사시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딸들은 공장에 보내고 시어머니와 어린 딸들과 사시니 나무할 사람이 없었다. 그분 사정은 딱하지만 갈퀴로 솔가리를 다 긁어 버리는 것은 할머니가 더 싫어하시는 일이어서 우리는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덤불 뒤에 숨었다. 가만히 보니 모아 놓은 나무는 비료 포대에 담아 초등학교 2학년쯤 되는 내 동생보다 더 어린 딸이 지고 갔다. 고지식한 나는 할머니가 내준 숙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생에게 빨리 말하고 오라고 재촉했다. 동생은 아무 말 없이 지켜 보고 있더니 “내가 한 번 져다 주고 와야겠다.”라고 의외의 말을 하고 나섰다. 할머니께는 야단맞을 것이니 비밀로 하기로 하고 동생은 나무를 져 날라 주고 우리는 돌아왔다. 그 집 할머니가 이런 아이 처음 봤다고 동네에 소문을 내는 바람에 들통나고 말았지만, 우리 생각과는 달리 할머니가 동생을 칭찬해 주셨다.
10여 년 해오던 반찬 봉사도 4년 반 전 동생에게 큰병이 생겨 치료하느라 멈췄다. 다행히 이제는 국가에서 그 일들을 잘하고 있어서 동생네는 좀 편안해졌다. 지금도 가서 보면 가끔씩 부침개 만들어서 새참으로 들고 찾아다니곤 한다. 삼십 대 어릴 때도 쉰 살이 넘은 지금도 그곳의 약한 분들을 돌보는 내 동생은 어른이 맞다.
첫댓글 멋진 동생을 두셨군요.
어른 맞네요.
동생이지만 존경하고 싶은 어른이네요. 자신의 위치에서 어려운 이들을 진심으로 돕고 실천하는 남매가 참 닮았네요
선생님도 동생분도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글 읽으면 마음이 흐뭇하답니다. 좋은 글 늘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시고 댓글로 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바쁜 시간 내서 일일이 댓글 써 주시는 선생님들도 진정한 어른이십니다.
그 누나에 동생이네요.
부모님께서도 선하디선한 분들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