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은 동학농민전쟁을 총체적으로 다룬 소설가 송기숙의 대하소설이다. 1981년 연재를 시작으로 그동안 일곱 권이 발간된 <녹두장군>은 햇수로 14년 만인 1994년 1월 말 창작과비평사에서 다섯 권이 마저 나옴으로써 모두 12권으로 완간됐다. 이 작품은 1994년 당시 100돌을 맞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사회 각계의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나온 것으로 동학전쟁을 소재로 한 기존 소설들의 성과와 한계를 일거에 뛰어넘는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미륵불의 배꼽에 숨겨진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설화로부터 시작되는 <녹두장군>은 전봉준의 제자인 청년 김달주를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달주 외에도 충직한 종이었다가 계급적 각성을 거쳐 농민군으로 다시 태어나는 만득이, 전봉준의 자금책인 물상 객주 김덕호, 임오군란에 가담했다가 입산한 임진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의 두령들, 그밖에 이름 모를 농민군·화적들, 식자층, 스님 등이 <녹두장군>의 거주민들이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명백한 패배였다. 하지만, 이 패배는 작가의 문학적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승리와 낙관으로 뒤바뀐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만득이와 유월례가 관군의 총에 맞아 죽는 부분이 농민전쟁의 현실적 패배를 가리킨다면 연엽이의 등에 업혀 떠나가는 그들의 자식 미륵이는 끝끝내 사그라들지 않는 변혁에의 열망과 희망을 상징하는 불씨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붙들고 소설로 꾸미는 사이 민중이 자발적인 합의에 이른다면 엄청난 힘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도덕적 정당성을 담보하는 민중의 힘은 위대한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전쟁과 80년 광주민중항쟁은 역사적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작가 송기숙의 말)
<녹두장군>의 연재가 시작된 것이 광주항쟁으로부터 불과 1년여 만의 일이기도 했거니와 사실 우리 사회에서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광주’라는 집단적 입사 의식을 치르고 난 198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소설 <녹두장군>의 주제적‧세계관적 측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문학적 형상화일 터이다. 특히 농민과 노비 등 하층민들로 하여금 목숨을 건 싸움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봉건 지배계층의 수탈과 일본 자본의 횡포, 1892년 11월 삼례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 풍경, 주먹밥과 기름소금 식사법, 장대기둥과 이엉으로 엮은 움막 생활, 소시장 말뚝에 묶어놓고 짚더미를 쌓아 불태워 죽이는 농민군 처형 방법 등의 생생한 묘사는 많은 동학전쟁 소설 가운데서도 <녹두장군>만의 돋보이는 미덕으로 꼽힌다. 이 작품을 위해 “각종 사료를 꼼꼼히 검토하고 농민전쟁의 현장을 일일이 답사하면서 1세기 전의 농민군 입장이 되어보고자 노력했다”는 게 작가의 변이다.
이런 성실성으로 말미암아 농사 절기와 농민군의 움직임이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가령 동학군이 갑오년 6월 9일 서울 출정 계획을 포기하고 전주화약을 맺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무렵이 한창 농사철이었기 때문이라는)을 밝혀내 작품에 반영했는가 하면 국사학계에서 황토재를 황토현으로, 우금티를 우금치로 잘못 쓰고 있는 사례를 지적하기도 했다.
1988년부터 광주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인 순천 선암사의 해천당海川堂에 작업실을 마련해 당시 대학 강의(전남대 국문과) 이외의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한 채 오로지 <녹두장군>의 집필에만 전념했다는 사실에서 작가의 핍진한 노고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