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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방을 쓴다. 옳은 것 혹은 옳은 것들 중에서도 가장 옳은 것이, 본질 혹은 본질들 중에서도 가장 본질이, 진실 혹은 부분적 진실들 중에서도 가장 진실이, 진리 혹은 다양한 진리들 중에서도 가장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밝히는 기준은 사태 자체 혹은 사태 전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옳으며, 본질이며, 진실이며, 진리인가는 ‘사태 자체’라는 이데올로기 전장터에서 ‘끝장을 봐야하는’(칼 맑스) 문제라는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불변적이고 영원한 그런 사태 자체, 옳음, 본질, 진실,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 역시 사태 자체라는 전장터에서 승리한 순간일 뿐일 것이다.
사태 자체라는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사태 자체’에는 사태 자체를 인식하는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와 무관한 그런 사태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나는 사태 자체의 일부이며 나의 인식과 행위가 사태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태 자체가 남 일일 수 없는 것이다. 맑스가 ‘이데올로기 전장터’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생사가 달린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자본권력에 의해 사태 자체가 차단, 왜곡, 은폐 당하기 십상인, 자본권력에 의해 구성된 사태 자체를 살아가기 십상인 노동자민중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사태 자체는 목숨이 달린 전장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 자신도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데올로기 전장터에서 사태 자체에 충실하는, 사태 자체를 분석하고 폭로하는, 사태 자체에 몰입하고 정면돌파 하는 가운데 사태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전쟁 같은 삶을 글로 남긴 것이다.
사태 자체는 알 수 없다거나(불가지론), 보이는 그대로가 사태 자체라거나(실증주의), 모두가 옳다거나(상대주의)와 같은 주장들은 지식인들의 이론적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무기는 지식인들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자본권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무기가 된다. 그렇게 사태 자체는 옳은 것은 본질은 진실은 진리는 자본권력의 자본권력에 의한 자본권력을 위한 것이 되어 간다.
사태 자체를, 사태 전체를 알 수 있는가. 무엇이 옳으며, 본질이며, 진실이며, 진리인가. 알아 낸 만큼 아는 것이고, 그렇게 알아가는 것이고 지금까지 알아낸 전체에 근거해 가장 ‘옳은 것, 본질, 진실, 진리’를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주장들에서 가장 ‘옳은 것, 본질, 진실, 진리’를 가르는 기준은 주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주장들이 포함된 그 주장들이 구성한, 구성하고 있는 사태 자체일 수밖에 없다. 사태 자체가 어떠한가.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몰입
아도르노가 신좌파와 조금 구분되는 대목이 있다. 자기가 논박하더라도 자기 논박이 궁극적인 진리일 수 없다는 걸 안다. 왜냐하면 자기도 틀릴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나는 궁극적인 진리에 비추어 보면 틀릴 수도 있어. 이렇게 자기 논리를 상대화하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그런 건 전혀 안 한다.
자기가 논박할 때는 이게 절대적인 것인 것처럼 변증법 안에 완전히 몰입한다. 이게 진리라고 믿고 한다. 절대적으로 거기에 매몰돼야 한다. 안 그러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그 안에서의 진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예를 드는 게 프랑스 혁명 주역들이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인류 전체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한다고 믿고 싸운다. 그렇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나중에 보면 부르주아적 상거래의 자유, 상거래를 위한 평등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한계를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처음에 그렇게 믿지 않았으면 프랑스 혁명의 폭발력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도르노 논의가 지젝이 얘기하는 ‘사라지는 매개자’ 개념과 접하는 부분이 있다.
‘사라지는 매개자’는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희생을 하는 건 당연하고. 심지어는 반역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온갖 욕을 먹을 수도 있고 그런 걸 감수하면서 일이 되게 뭐든지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변증법은 긍정적인 뭔가를 예상하면서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상대적인 위치, 상대적인 태도 이런 것과 거리가 멀다. 변증법 운동 그 자체에 몰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맑스 논의들은 전체가 사회적 모순 관계 한가운데에서 특히 노동자 입장에 서서 이쪽에서 노동자 해방을 위해서, 나아가 인간 해방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전략적으로 투쟁하는 이론이다.
그러니까 이 사회가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바깥에서 전체를 기술하고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경우도 그 양자 위에서 전체가 관리되는 사회야 이러는 양비론적인 듯한 요소가 강하다. 모든 현대 좌파 이론들이 그런 측면이 있다. 구조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회를 노동자 관점에서 바꿀 것이냐는 전략적 사유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ㅣ정면돌파
오히려 정면돌파를 꾀했다는 점, 즉 아주 간단히 말해서 세계의 화해는 그 객관적 모순 상태 위쪽에서의 조율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 모순상태 자체를 통과하면서만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펼쳐봤다는 점입니다.(<변증법 입문>, 번역본 135쪽)
헤겔이 모순을 받아들여서 그것들에 대해서 끝까지 사고해 봤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헤겔이 모순을 사고 영역에서만 중요하다고 본 게 아니라 칸트를 넘어서고, 인식론적인 영역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현실의 모순들도 정면 돌파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걸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시민사회가 가면 갈수록 한쪽은 야만화 하고 무지렁이가 되고, 그다음에 비참해지고, 그런가 하면 다른 쪽은 그에 비례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이런 얘기를 헤겔이 한다.
아도르노는 그걸 지적하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적당히 타협해서 같이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양극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갈 때까지 가면 결국 전체주의까지 간다는 것이다.
시민사회로 유지할 수 없는 단계로까지 간다는 것. 결국 붕괴한다는 것. 이런 논리로 가는 것이다. 이 당시 철학자 중에 그나마 경제 문제를 열심히 연구한 게 헤겔이라고 한다. 그 연구 결과로 헤겔이 얘기한 것이다.
그건 계속 가봐야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가봐야 하는데, 그러니까 내적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것, 맑스는 [자본론]을 통해서 그게 왜 그런가 하는 것을 경제학적으로 얘기한 것이고, 헤겔은 관념적으로 얘기한 것이다.
관념적으로 한쪽에서는 부가 쌓이고 한쪽에서는 서민들 빈민들이 막 늘어나고 있는 그런 양극화가 당시에도 이미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봤고 그걸 주목한 것이다. 이게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시민사회 자체의 원칙이라고 본 것이다.
양극화, 자본주의도 마찬가지고 지금 뭔가 붕괴가 되거나 그런 문제들이 있다. 근데 그걸 끝까지 파보다 보면 원인이라든지 그런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걸 극복할 수 있느냐. 대안이 뭐냐.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 때 실증주의처럼 계속 밝히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헤겔이 들고 나온 것이 국가다. 국가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센 체제 옹호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맑스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풀었느냐 할 때 아닌 것이다. 헤겔식으로는 국가는 중재자, 심판관이다.
맑스 해법과 헤겔 해법은 분명히 다르다. 과학적 인식 수준에서 다르다. 그런 문제를 눈감지 않고 그걸 명시하면서 들춰낸다는 것에 초점이 있다. 변증법이라는 게 그것들이 없는 것처럼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 모순을 들춰내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답이 나온다고 봤고. 아도르노는 헤겔이 던져놓은 문제의식을 끝까지 밀고 갔으면 그냥 맑스주의로 넘어간다 이렇게 생각한다. 또는 자본주의를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논리다. 근데 그것을 헤겔 쪽이든, 좌파 쪽에서든. 헤겔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 이런 정도로 해석해 준다. 그러니까 헤겔이 보여주는 그 논리 자체는 정면 돌파하려고 하는 그런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헤겔의 국가론 가지고는 답이 나올 수 없다. 맑스를 겪고 난 다음에는 그건 부르주아들의 지배 도구 아니냐. 그러니까 헤겔 국가론과 맑스 국가론의 아주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걸 극복하려면 시민사회의 생산관계 자체가 변해야 한다.
맑스는 그런 입장이라는 것인데, 아도르노는 헤겔 논리가 최종 답이라고 보는 게 아니라 헤겔이 던져놓은 것을 끝까지 끌고 가면 결국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데 기초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헤겔이 답을 줬다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결론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물변증법이든 관념 변증법이든 그걸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
끝까지 밀고 가야지. 끝까지 밀고 간다는 얘기는 많이 하는데 그게 어디까지냐 좀 갑갑한 것이 있다. 뭔가 답이 나왔을 때가 끝까지 간 것이다. 이런 얘기는 할 수 있다. 아도르노가 무슨 답을 놓고 간 게 아니고 돌이켜보면 서독이 야만화 하는 걸 조금 막아준 그런 게 좀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계속 이렇게 하다 보면 뭔가 어떤 빛 같은 해답 같은 게 조금씩 나오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최선’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는 최선일 수 있다. 그러니까 최선이라고 얘기하는 게 이미 뭔가 절대적인 답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다. 후에 보면 차선일 수도 있다. 그때는 최선. 후에 보면 차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서독, 프랑스 모두 68로 막 휘말려 들어가는 과정이 있다, 68 운동이 체제를 바꾼 건 아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한 게 아니다. 내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재생산 구조를 유연하게 더 강고하게 한 측면이 있다.
끝까지는 못 간 것이다. 이때 끝까지 간다는 건 뭐냐 했을 때 본질적인 부분을 어떻게 정면 돌파하느냐 했을 때, 근본적인 문제가 분명히 있다는 건 아는데 뭔가 지금 당장 어떻게 안 되니까, 우회하거나 아니면 적당히 조율하거나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제기했던 반권위주의, 다양한 차이에 대한 존중, 비동일자에 대한 배려 등등 이런 것들을 포함하면서 지배 체제를 바꾸는 쪽으로 목표 차원에서는 다 좋은데 그것들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그게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거나 그건 아니다.
예컨대 국가 권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지배 계급의 지배 도구라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느냐. 방법상의 문제도 있다. 어느 정도 국가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고. 생산관계를 바꿔야 하고 생산수단은 국유화냐. 사회화냐. 이런 걸로도 방법상으로 충돌하는데. 그게 같이 어떻게 되느냐는 방법도 문제인 것이다.
그런 것들이 아도르노 선에서 답이 나올 수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무의미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방법만 옳다고 할 수 있냐,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이게 지금 최선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근본적인 문제, 자본주의든 그걸 포기해 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자본주의를 그냥 받아들이자는 얘기는 어디서도 안 하지만 야만이라고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데 그걸 극복하려는 문제의식이 얼마나 강하냐. 그 부분에서는 대충 부분적인 얘기 하다가 끝난 느낌은 있다.
그게 아도르노의 한계다. 독일이 그때 잘 나가던 시절이다. 서독이 라인강의 기적 하면서 팽창하는 시기. 그런 시기에 바꿉시다 해서 통할 단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회 전체가 관리되는 사회로 가고 있다는 건 아주 확실하다.
노동자들이 지배 체제에 그냥 다 흡수됐다고 생각하는, 옆에서 보면 다 그렇다. 바꿀 생각 하나도 없고 돈 돈 돈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안 됩니다는 얘기가 씨도 안 먹히는 사회다.
2차 대전 이후에 잘 나가던 서구 제국주의가 독점적으로 전 세계를 누빌 수 있는 시기. 미국, 서독, 일본 그런 단계라고 봐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동독이나 소련 보면 왠지 후지다. 힘들어 보인다. 사람들이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한다. 권위주의가 자리 잡은 것 같고 그러니까 다른 시야가 안 생기는 것이다.
그랬을 때 어떤 식으로든 바꾸는 게 정치적으로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아도르노한테 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정면돌파라는 말이 풍기는 뭔가 있어 보이지만. 헤겔이든 아도르노든 다 시대적 한계가 있었고. 게다가 헤겔 같으면 관념론자로 최대한 가는 게 국가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ㅣ사유의 힘, 사유의 함정
ㅣ사유의 힘은 제법 세다
사유와 실재는 다르다. 사유가 곧 실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유가 실재를 만들기도 하고, 사유는 실재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유와 실재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유와 실재는 상호 작용하며 서로를 만든다.
사유가 실재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에, 사유가 실재의 반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에, 그럴 여지가 있다는 것에, 사유가 실재로부터 그만큼의 자율성을 지닌다는 것에, ‘사유의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을 발판 삼아 사유는 실재를 바라는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유의 힘은 제법 세다고 할 수 있다. 실재가 ‘사유하기 나름’인 것은 아니지만 사유하는 대로, 사유하는 만큼 실재를 만들 수 있는 여지는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이 실재가 실제로 어떠한지 파악하는 것일 테다.
부단히 변화하는 실재를 따라잡으며 파악할 때, 그런 가운데 실재의 운동 법칙이나 변화 경로를 파악할 때 실재를 사유가 바라는 대로 만들어가기 수월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실재에 대해 사유가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ㅣ파악한 만큼은 파악했다
애초에 실재에 대한 사유의 파악은 ‘불완전, 불명확,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유의 파악’이 문제 되거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완전한, 명확한, 확실한’ 파악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조차 ‘불완전, 불명확, 불확실’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 명확, 확실’하지 않다고 해서 실재에 대한 모든 파악이 잘못된 것, 틀린 것일 리는 없을 것이다. 잘못된 것, 틀린 것이라는 파악도 마찬가지로 완전, 명확, 확실하지 않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어떤 사유든 파악한 만큼은 파악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파악된 것의 절대적 아닌 상대적 완전, 명확, 확실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의 완전, 명확, 확실을 두고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ㅣ실재에는 자신의 사유도 포함된다
그러한 논의(논쟁) 가운데 자신의 파악이 옳다고 주장하는 기준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와 실재 사이의 일치 여부, 정합성 정도, 혹은 파악된 것의 현실성(현실적인 의미, 힘, 이익 등) 등이 있다. 그럴 경우에도 기준이 되는 것은 ‘실재’일 수밖에 없다. 사유 자신이 포함된 실재 말이다.
‘실재’에 대한 사유들이 ‘실재’에 대해 파악한 것들을 두고 논의하며 합의에 이르면 좋겠지만, ‘이익과 권리’ 앞에서 대립하고 충돌할 수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실재’가, 그들 사이의 ‘이익과 권리’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유’가 첨예하게 충돌 할 경우 ‘사유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실재는 알 수 없다며 자기가 아는 것도 부정하는 ‘불가지론’, 자신은 ‘중립’이라며 자신 없이 지배적인 사유를 따르게 되는 사유, 모든 사유가 똑같이 옳다는 ‘상대주의’의 사유, 실재를 자기와 무관한 듯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는 ‘실증주의’의 사유 등이 그렇다.
이들 사유가 ‘함정’에 빠졌다고 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실재에는 자신의 사유도 포함 된다’는 사실, 심지어 자신의 사유에 따라 ‘실재가 변하여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한 사유는 자신의 현실성(현실적인 의미, 힘, 이익 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l 자신이 바라는 실재를 만들어가는 것
자신을 만드는, 자신이 만드는 실재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려는, 실재 속의 자기를 부정하는 사유는 실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유가 된다. 실재를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서 사유하는 ‘자본주의국가권력 및 기득권 세력’이 바라는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불가지론’, ‘중립’, ‘상대주의’, ‘실증주의’의 사유에서처럼 실재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사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사유의 힘’에 따라 ‘실재’를 파악하며 실재 속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바라는 실재를 만들어가는 것일 테다.
하영진(작가, 현대사상연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