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딸과 같이 몹시 아끼셨던(‘딸 같다’는 말에서 모든 ‘딸 같지 않은’ 문제는 시작되기 마련이다) i교수는, 교환교수로 지냈던 일본의 한 대학에서의 생활을 어느 날 문득 길게 이야기하시면서, 당신이 속해 있던 과의 조교였던 한 일본여성에 대해 한참이나 찬양조의 감탄을 늘어놓았다.
i교수에 의하면 그녀는 매일 아침, 정성스럽게 말차 한 잔을 만들어 당신의 연구실로 가져다주었다는 것이었는데, 조신하게 말차를 ‘올리는’ 그녀의 태도가 어찌나 아름답고 우아하던지 여태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제 보니 i교수는 내가 바로 ‘그녀’가 되어주길 내심 원했던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나는 눈치가 1도 없었기에, “아.... 그러셨군요...아....네....”를 반복하며 장황한 이야기를 그저 듣고만 있었을 뿐, 그 이후로 나와 i교수 사이에는 별다른 사건도,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눈깔사탕 녹여먹듯 자신들만의 환상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현실에 녹여내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마당에, 개개인의 환상과 현실이 어떤 방식으로 교차/교호하는지를 문제시 삼을 일은 결단코 아니다. 그런데 유독, 지식인 남성들이 자신들의 환상을 굉장히 ‘저렴한’ 방식으로 현실에 적용시키길 원한다는 현상에 대해서만큼은 과도하게 명확히 잡히는 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들의 여제자나 여조교가 여비서라는 환상으로 옮아가기를, 그리고 그 ‘(환상 속) 여비서’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애첩이나 애인으로 번져나가길, 자신들도 모를 사이에 바라고야 마는 까닭에 그 환상이 수시로 현실 속 취약지반을 뚫은 채 고약한 모습으로 누수되고 있다.
물론, 이게 그저 ‘생각’에 그친다면 문제라고 소란을 떨 수조차 없다. 문제가 된다면, 그건, 현실에서 실제 존재하는 여제자나 여조교가 그렇잖아도 팍팍한 자신들의 현존을 지식인 남성의 환상충족을 위해 확대/변주/변용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시도 때도 없이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윗분'을 위해 자신의 현존을 확대/변주/변용하도록 강요된다는 사실에 있다. 오해가 없어야 하는 것이, 나는 지식인 남성들이 여성들을 향해 어떤 '환상'을 품고 있다는 점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It's none of my business). 자신만의 여비서나 애첩/애인을 부리고 싶은 남성이 있다면 그는 여비서를 고용하면 되고, 애첩/애인을 얻으면 될 일이다. 다만, 이 모든 행위에는 적잖은 비용이 요구되는 법인데, 내가 본 대부분의 남성 지식인들은 이 부분에서 상식 밖의 수준으로 인색하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여제자/여조교를 통해 개인 비서노릇과 애첩/애인노릇까지를 한방에 해결해 보려는 그들의 태도는 가히 가성비의 끝판왕 수준에 닿아 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많은 경우가 이같이 상식 밖의 수준으로 ‘가성비’를 앞세우는 개인의 특성이나 직군의 풍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생활의 어둑한 부분까지를 기민하게 manage 해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따로 있고, 심리적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재능을 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들이 따로 있고, 육체적 외로움을 솜씨좋게 해소/해결해 주는 이들도 따로 있다. 자신과 일터가 겹치는 하위직급의 여성들을 통해 wild dreams를 한방에 해결하려는 시도가 의식과 무의식에서 반복되어 표출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 몇몇 남성들의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해서만이 아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환상을 처리하는 비용에 있어 너무도 인색하다는 게 오히려 근본적이다(이 지점에서만큼 한국과 일본이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곳이 또 있을까). 환상은 자유고, 그 환상을 현실에서 지펴나가는 방식도 자유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단 말인가. Wild한 Dream일수록 그 환상의 실현을 위해 공포스럽거나 고통스러울 지경으로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의 '있는 분'들이 이제는 좀 뼈아프게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을까.
꿈과 현실이 서로에게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면, 그건 그/녀가 몹시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다. 자신의 이상과 희망을 위해 현실의 모든 걸 쏟아 바쳤다는 방증이다. 존경받아 마땅한 삶을 살았다 해도 좋을 그런 인생임에 틀림없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진짜 사는 법을 좀 배울 때다. 가성비 따위에 놀아나선 안 되고, 세간의 뒷말에 끄달릴 것도 없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낙엽 태우듯 비용을 치루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마땅하다(가장 중요한 점은, '귀한 것'의 기준조차 세평을 따를 일이 아니라, 반드시 스스로 깨단해야 한다는 사실!).남들이 뭐라던 자신만의 비용을 치르며 사는 삶. 그게 바로 지성인이고 양심가이다.
세상사가 하 얄팍해 진다지만, 이런 세상일 수록, 가성비만 따져 언제 성인(成人)이 되고 어찌 성인(聖人)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