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진묵스님이 주석했던 전북 완주 용진면 간중리 위치, 서방산 봉서사(鳳捿寺). 한국불교 태고종(대한불교조계종과 분규 사찰) 사찰. 서방정토 즉, 극락을 의미하는 서방산(해발 617m) 자락에 자리하고, 이 서방산이 마치 봉(鳳)의 모양이라 하여 봉서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하늘을 나르는 새 중의 왕은 봉황새요, 꽃 중의 왕은 모란이요, 백수의 왕은 호랑이다’라는 말처럼 봉황은 모든 새의 우두머리다. 또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 하여 귀하게 여겼다. 우리나라 청와대의 상징이 봉황인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봉서사란 사명(寺名)도 봉황의 상징성.
727년(신라 성덕왕 26)에 창건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때 나옹스님이 중창하였다. 고려 때는 보조국사 지눌스님, 조선시대에는 부처님 후신으로 칭송받던 진묵스님이 주석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전주 경기전의 비보사찰로 당시 300여 대중과 9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 조선시대 선조 때에는 진묵(震默)스님이 중창하고 이곳에 머물면서 전국승려대조사(全國僧侶大祖師)로 추앙받으며 중생을 교화하였던 유서 깊은 절이다.
1945년 전까지는 대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공비토벌을 이유로 군경에 의해 전소된 것을 1957년부터 일부 중창이 이루어져 왔다. 호산스님이 1963년에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건하고, 그 뒤로 여러 전각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로 올라가는 길목에 방치되어 있는 귀부와 '노벨평화상후보자, 세계평화의날제정, 세계법왕일붕존자비'라고 적힌 비를 포함한 미완의 석비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대웅전 전경. 봉서사 대웅전 편액은 일붕선교종 종정을 지낸 일붕 서경보 스님의 글씨이다. 서경보 스님은 126개의 박사학위, 1,042권의 저서, 757개의 통일기원비 건립, 50여만 점의 선필(禪筆), 최대 석굴법당 건립 등 5개 분야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을 마친 이후 1970년과 1980년대에는 해외포교에 전념하였다.
입적 이전까지 그가 방문한 국가는 무려 157개국에 달하며, 미국 템플(Temple)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26개 분야 126개의 국내외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때 조계종 원로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1988년 대한불교 일붕선교종(一鵬禪敎宗)을 창종(創宗)하면서 조계종단을 떠났다. 1992년에는 그가 계속 추진해 오던 세계불교 법왕청 설립 총회가 개최되자 초대 법왕(法王)에 추대되었다.
대웅전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좌우협시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한 건물에 尋牛堂(심우당), 影閣(영각), 七星閣(칠성각), 山神閣(산신각)이라고 적힌 현판을 함께 걸어놓고 내부에는 尋牛堂(심우당)만 벽으로 막아 별도의 방이고, 나머지는 트인 공간이다.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의 모습, 야외 산신재단에 모셔진 서방산 산신상
길다란 건물의 좌측에 별도의 방을 마련하여 尋牛室(심우실)이란 현판을 달고,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그 뒤벽에는 16아라한의 존명을 적은 한지를 붙여 놓았다.
왼쪽부터 기둥만 보이는 종각과 삼천불전(아직 편액이 없음), 그리고 칠층석탑과 함께 보이는 진묵전 전경
일붕 서경보 스님이 쓴 震默殿(진묵전) 편액
진묵전(震默殿)에 모셔진 진묵대사와 진묵대사의 어머니 진영(眞影) - 조선시대 전북 김제 출신의 승려로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는 1568년(선조 1)에 봉서사(鳳棲寺)에서 출가하였는데, 사미승으로 있을 때 부처님앞에 밤이 되면 촛불을 켜고 불공을 올리도록 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주지승의 꿈에 신장(神將)이 나타나서 봉양을 받아야할 부처님이 촛불을 켜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어찐된 일이냐고 꾸짓더라는 것이다. 그날후로 주지승이 진묵의 촛불켜는 일을 멈추게 하고 불도 연구에 전념케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진묵의 신이로움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뒤 일정한 주처 없이 천하를 유람하였면서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적(異蹟)을 많이 행하였다고 전한다. 경전 중 능엄경을 즐겨 읽었고, 좌선삼매에 빠져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늘 만취하였으므로 스스로 비승비속(非僧非俗)임을 자처하였다. 그가 남긴 유일한 게송은 술에 관한 것이었다.
진묵전 우측면에 봉안되어 있는 신중탱
삼천불전 내부에 모셔진 약사여래삼존불과 3천 부처님
진묵스님의 부도탑 초라한 모습 부처님의 후신으로 칭송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초라한다.
봉서사 부도밭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인 진묵대사부도를 비롯한 몇 기의 부도가 있으며, 또한 봉서사에는 1979년에 세운 일붕선시비(一鵬禪詩碑)도 있다.
봉서사에 주석하셨던 진묵대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진묵대사와 관련된 숨은 이야기 또 하나는 진묵대사가 산책을 하며 주변의 냇가를 걷고 있을 때 동네 젊은이들이 철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물고기를 가마솥에 넣고 펄펄 끓이고 있었는데 마침 진묵대사가 지나가므로 대사님을 불러 골탕을 먹이기로 했다. 스님이 물고기를 먹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대사를 보고 물고기탕을 먹으라고 권했다. 이말은 들은 대사 역시 이들의 음모를 모를리 없어 그 물고기탕을 먹겠다고 했다. 그런 후 진묵대사는 펄펄 끓는 가마솥을 통째로 들고 단숨에 마셔버린 것이다. 이것을 본 젊이들은 너무놀라 기겁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대사는 냇물 아래로 내려가 먹은 물고기를 그대로 배사했다. 그런데 그 물고기들이 모두 산채로 배설되어 유유히 헤엄쳐 갔다. 이것이 바로 ‘중택이’로 전북지방에만 있다고 한다.(자료출처 : 전북도민일보)
2. 또한 이 절에는 진묵대사와 해인사 대장경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이 절에서 수도하던 진묵은 자주 해인사를 내왕하면서 대장경을 모두 암송하였다 한다. 하루는 진묵이 제자를 데리고 급히 해인사로 갔는데, 그날 밤 대장경각 옆에서 불이 났으나 도저히 끌 수 없게끔 되었다. 이때 진묵이 솔잎에 물을 적셔 불길이 번지는 곳에 몇 번 뿌리자 갑자기 폭우가 내려 불길을 잡음으로써 대장경판의 위기를 구하였다는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