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만둣국
홍 성 자
“앗 뜨거! 앗 뜨거! 와우……”
후후 불면서 먹는 떡만둣국은 생각만 해도 몸이 훈훈해지고 금방 입맛이 당긴다. 엄동설한 일 끝나고 집에 와 시장기를 느낄라 치면, 라면대접으로 뜨겁게 한 그릇 만복감을 느끼며 먹고 싶은 한국 고유의 음식이다.
어느 한국음식보다도 떡국이나 떡만둣국은 생각만 해도 고국의 진한 향수를 느낀다.
캐나다 토론토는 지구본에서 보면 한국지도의 북쪽으로 토끼 귀 끝보다 좀 더 위에 있다. 캐나다는 대체적으로 한국보다 겨울이 한 달 빠르게 오고 한 달 정도가 늦게 간다. 결국 캐나다의 겨울이 한국보다 두 달 정도 길다는 말로 풀이되겠다.
11월부터 으슬으슬해지는 날씨가 어깨를 움츠리게 만든다.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부는 토론토의 겨울엔 오늘도 떡만둣국을 끓이게 한다.
떡만둣국은 아주 뜨거워서 후후 불며 먹는 그 맛이 제격이다. 매웁지도 않고 달작 지근한 국물에 떡국 떡 은 매끌매끌 쫀득쫀득 씹히다가 목구멍을 편안하게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여유 있는 맛이란 감칠맛이 절정을 이룬다. 만두는 또 어떤가,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갈아서 만든 만두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다 못해 단물이 쏙쏙 나온다. 반찬은 김치만 있어도 만족이다.
힘들게 일하고 추운 날 배고플 때, 떡만둣국 한 그릇을 배부르게 뚝딱 먹고 나면 잡생각이 다 물러나고,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힘이 솟는다. 어떤 힘든 일도 다 해 낼 것 같다. 어깨가 뒤로 떡 벌어지며, 때때로 느끼는 타국의 외로움도 떡만둣국 한 그릇에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내 인생도 뜨끈뜨끈하며 포만감을 느끼는 넉넉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본마음이라고 고백하는 바이다.
떡국을 먹을 때면 어릴 적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는 떡국을 아무 때나 먹지 못했다. 음력설이나 되어야 먹어보는 음식이었다.
설 며칠 전에 엄마가 불은 쌀을 바구니에 담아 물을 빼고, 그 쌀 바구니를 큰 그릇(자주색 큰 고무 다라이)에 담아 수건으로 똬리를 틀어 머리위에 얹고, 그 쌀이 담긴 큰 그릇을 똬리 위에 이고, 새벽부터 떡 방앗간에 가서 떡국 떡을 만들 가래떡을 빼오신다. 금방 빼온 가래떡은 말랑말랑 엄청 맛있다. 아버지는 그 가래떡을 먹을 만 하다시며 간장에 찍어 드신다.
엄마는 떡집에 아침을 먹고 가면 줄서서 기다리는데 여러 시간이 걸려서, 하루해가 다 간다고 새벽 미명에 가시는데, 가서 보면 늘 1등으로 가셨다고 한다.
가래떡들을 빼오면 하루 정도 물기 있는 보자기로 덮어 놨다가 썰기에 알맞게 굳으면 칼로 써는 것이다. 물기 있는 보자기로 덮어 놓지 않으면 떡가래의 겉이 말라 딱딱해져서 떡을 써는 데 칼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식구마다 엄마를 도와 떡을 썰어 보는데 오른손 검지가 부르텄던 기억이 난다. 다 썰지 못한 딱딱해진 가래떡은 나중에 물에 푹 삶아서 먹는다.
그때만 해도 어른들은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해서 떡국 떡을‘첨가병’이라고 했다.
떡국 떡의 기원을 보면, 이미 한반도에서는 기원전부터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었는데 이 쌀을 그대로 보관하고 사용하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함이 컸다고 한다. 급하게 쓸 수 있도록 쌀을 쪄서 말려 비상식량을 만들어 썼었는데, 언젠가부터 보다 조직을 치밀하고 단단하게 하기 위해 떡 매로 쳐서 덩어리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쟁에 쓸 야전 식량으로 떡을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하고 떡국은 그렇게 만든 떡을 야전에서 끓여 먹던 흔적이라고 한다.
딱딱하게 굳은 떡일망정 불에 구워도 먹고 물에 끓여 먹어도 떡가래는 굳이 밥이 아니더라도 쌀로 만든 것이라 아쉬운 대로 한 끼 식사로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투식량으로 쓰던 환경이 사라지면서 지금의 설음식 풍습으로 자리매김 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고 즐거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만두의 기원을 보면, 만두라는 말 자체가 한자인데, 글자의 뜻에 중국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삼국지 후반부에 제갈공명이 남쪽 오랑캐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군사들이 탄 배를 삼켜버릴 기세의 큰 풍랑을 만난다. 그곳 사정에 밝은 남만 인이 말하기를 사람 머리 아흔 아홉 개를 물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가는 길인데 부하의 목을 친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꾀돌이 제갈량이 머리를 굴린다. 밀가루 반죽으로 사람 머리 모양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니 풍랑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신에게 사기를 친 이야기로서, 만두란 단어가‘기만(欺瞞)하다’에서 만의 음을 딴 만(饅)과 머리 두(頭)를 합친 글자라고 한다.
역시 전쟁터에서 기원이 된 만두이고 보면 떡국 떡과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다. 그 옛날부터 전쟁은 있어 왔으니 인간의 역사란 전쟁의 역사요 슬픔의 역사다. 전쟁 없이는 살수 없는가? 전쟁 중에도 먹는 것이 제일 중요 했을 테니, 떡국 떡도 만두도 전쟁의 흔적이 붙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두 찜통뚜껑을 열었을 때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찐 만두,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언 몸이 녹는다. 만두를 생각하면 어릴 적이 떠오른다.
충청도 식의 만두 만드는 법으로는 엄마는 또 큰 양푼에 고기 다진 것, 익은 배추김치 꼭 짜서 썬 것, 당근을 채칼로 썰어 다시 잘게 썬 것, 당면 익혀서 썬 것, 숙주나물을 삶아 꼭 짜서 썬 것, 두부 으깬 것, 달걀, 후춧가루, 소금, 참기름 등을 넣은 만두소를 가득히 만들어 놓으신다.
오빠와 남동생 둘, 딸은 오직 나 하나인데, 사남매가 빙 둘러 앉아 만두들을 예쁘게 빚어 보라고 하셨다. 여자인 나는 솜씨가 왜 그렇게 없었는지 만들어 놓고 보면 예쁘지도 않고 제일 크게 만들어져 있다. 아버지는 열 살 정도의 나를 보고 “울 애기가 손이 커서 5백 원짜리 챔피언 만두를 빚었구나.”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그 당시 만두 하나는 30원이나 50원 정도였다.
또한 그 때는 권투선수 김기수씨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꺾어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복싱 세계챔피언을 따내어 한국을 휩쓸고 날리던 때였다.
아버지는 아들들의 만두보다도 딸이 만든 만두가 맘에 드셨던 가보다. 챔피언 만두라는 말을 쓰신 것을 보면 우리 아버지도 멋쟁이인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에도 오빠나 두 남 동생들보다도 만두를 빚으면 크게 빚어졌다. 나는 무조건 큰 것이 좋았다. 만들기도 쉽고 큰 것은 하나를 먹어도 배부를 테니까, 감질나게 작은 것 몇 개먹는 것보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큰 거 한개 먹으면 역시 든든하지 않은가, 어렸을 적에 만두를 빚을 때만 해도 조그맣고 예쁘게 여성스러움을 나타내는 것 보다는 무조건 크고 실질적인 면을 생각했던 것 같다.
푹 익은 김장김치로 속을 채운 시큼시큼한 김치만두는 효소 만점일터이고, 매콤 칼칼한 맛에 배가 불러도 한없이 먹게 된다. 또 만두는 우리나라에서 보면 원래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 북쪽 사람들의 설음식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설날 아침에 떡국대신에 만둣국으로 차례를 지내야 나이 한살 더 먹는다고 했다 고한다. 역시 푸욱 익은 김치가 넘쳐나는 겨울에 먹는 만두가 제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요즈음은 만두소를 김치뿐만이 아니라 표고버섯이나 당면, 두부, 당근, 달걀 , 고기 등을 듬뿍 넣어 만들어 먹으니 영양 면에서도 만점이라 할 수 있다. 두껍고 누런 놋대접에다 부드럽고 윤이 나는 익은 떡에 국물이 알맞게 채워지고, 그 위에 색스럽게 올린 희고 노란 달걀 지단채와 약간의 김 가루를 뿌리면 환상적인 우리 한국고유의 떡국이 된다. 우리 할머니는 만두 넣은 떡국을 좋아하셔서 떡국에 꼭 만두를 넣고 끓이셨고, 나는 지금도 그 맛과 향기를 잊을 수가 없다.
외국인들에게 김치나 불고기, 갈비, 김밥, 잡채, 등은 잘 알려지고 그들도 좋아해서 그야말로 국제적인 음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떡만둣국을 내가 사는 아파트의 폴랜드인 친구 에바 보고 우리 집에 와서 함께 먹자고 했다“와우 스멜스 굿! 스멜스 굿!” 만두를 넣은 것이 더 맛있다고 두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리며 코리아 음식이 최고라고 야단이다.
맛도 좋고 냄새도 좋고 흥분된다며 잘도 먹는다. 나도 떡이며 떡국, 떡 만두 국을 질리지도 않게 먹어대고 있으니 외로움은커녕 겨울이 긴 캐나다 땅에서 그 떡 먹은 떡심으로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얼마나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캐나다 토론토 땅에서도 한국인 떡집에서 떡국 떡을 만들어 비닐봉지에 넣어 식품점에 갖다 놓고 판다. 한국 같지는 않아도 여러 가지 떡들도 많다.
떡만둣국은 오직 앞만 보고 일 해야만 산다는 외국 땅에서, 잠시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때, 나도 한국의 작은 외교관이라는 자부심의 새로운 메시지로 다가 온다. 친구 에바나 에바 사촌들이 나를 부를 때는 떡, 떡, 하고 부른다. 떡을 사올 때는 가끔 그들에게 줄 떡도 사와서 나눠 주곤 한다.
이제는 떡도 빵처럼 국제적인 음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노라니 한국인임이 자못 자랑스럽다.
토론토에는 대형 한국식품점들이 여러 군데 있어서 우리 고유의 음식재료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년 중 아무 때나 외국인들과 떡만둣국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 일인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 2025. 2.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