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美淑) 외 4편
아버지는 미래를 보는 사람, 몸은 아름다움으로 마음은 맑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하셨으니 결국 하나는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아셨던 거지 그러나 오류는 여기서부터
美는 부르튼 입술로 벽 속에서 먹물이 흘러나와 발목을 잡는다고 하고 식탁에는 찬 물잔이 뜨겁게 휘청거리고 포크를 든 괴물들이 양홍색 골목을 지날 때면 길은 굳어가는 케첩처럼 끈적인다고 했지 음악은 16비트 숨은 24비트로 출렁거려서 밑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천정에는 별이 반짝인다고
淑은 고래가 사는 자작나무 숲으로 구름을 보러 가자 해바라기에 나오는 해바라기밭으로 팝콘을 먹으러 가자 채송화 문이 닫히기 전에 꽃 속으로 들어가 시를 지어 줄게 물수건을 들고 노래를 불렀지만 읽고 그리고 부르기를 멈춘 美에게는 이명으로 들렸지
둔다, 가만히
혼밥 혼술 반밥 반술 반의반 반의반… 일찌감치 쪼개지는 오늘이 보이셔서 나눠 놓으셨겠지만, 몸을 움직이는 건 마음에 있어 美가 퇴색하니 아름다워지지 않는다고 몸은 淑 마음은 美 순서가 바뀌어도 어차피 한 자식 아니겠냐고 눈을 감고 아버지께 편지를 쓴다
빈티지 인더스트리얼
린을 만나러 창고에 갔다
창고는 어둑해야 창고지
백 년 된 파벽돌 사이로 오래된 합성음 소리가 났다
집을 확장하고 지하를 뚫고 바닥을 달리고 파이프를 두드리고 탱고를 추고 시계가 표정을 나르고 거미는 일을 하고 빗자루는 춤을 춘다
몇 년을 더 들어가자 인부들이 물의 양을 재고 시멘트에 설탕을 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다 알갱이들이 풀어지고 벽돌과 벽돌을 붙여가며 공간이 그림자를 키운다
린이 커피에 설탕을 넣을 거냐고 묻는다 시멘트에는 설탕을 얼마나 넣는지 아냐고 물었더니, 글쎄…… 우리는 어떤 비율로 섞일까 얘기를 나누다 틈 사이를 본다
어느 날들이 쌓여가고 있다
천장에는 구상화가 그려져 있고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사라졌고 생명 없는 것들만 남아 시간을 쥐고 있다
누가 먼저 손을 흔들고 남아 있는 것들은 어떻게 멀어졌을까 커피를 마시다 이별의 표정을 지어본다 린이 손등을 때린다
그날의 모자를 쓴 노파가 볕에 앉아 동화를 쓰고 있다
마루
누구라도 움직이면 사이가 됩니다 햇빛이건 고양이건 모자이건
어디서부터 온 건지 볕이 뜨겁습니다 고양이가 졸린 눈으로 그늘에 찾아들고 모자가 바람을 밀고 나옵니다 마주 보던 문이 어긋날 땐 찬바람이 쌩하게 불지요
손가락으로 빗금을 만져보고 등으로 볕을 가려주고 발바닥의 안녕을 살펴보며 어두워서 서로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나는 그사이에 삽니다 따라가지 않는데 흘러가기도 하고 움직이는데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는 일이에요 귀퉁이가 부서지고 색이 바랠수록 우리는 둥글어지고 낡아지면서 깊은 강이 흐를 테니까
그림자가 마당을 밀고 나가네요 빛에 베인 담장이 어둑해지고 모자가 저녁을 쓰고 옵니다
날이 갈수록 나는 자꾸만 삐거덕거립니다 아는 사실에서 모르는 일이 되어갑니다 오늘이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죽은 새와 내게서 날아간 새 서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두고 가는 나에 대하여
그러나 오늘과 그래서 오늘의 사이를 삐거덕대며 오래 걸어 보는 것입니다
시접
꿰매 놓은 그늘이 쏟아진다
쥐고 있던 길이 땀을 놓자 지나온 시간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이사를 하고 창문에 맞춰 커튼을 잘랐다 잘려 나간 자리에 실을 뽑아 홀매를 치고 반은 서랍에 넣어두고 남은 것은 그늘에 걸었지 화단에 심어 놓은 자두나무가 서 서히 말라갔다 바람이 불면 금이 간 마당이 비틀거렸고 비가 오면 태풍이 불듯 방 안까지 물이 들이쳤다 그럴 때면 없는 볕을 찾아 빈방을 만들고 각자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커튼처럼
중심인지 경계인지 모를 길을 걷다가 부은 다리를 끌고 집으로 가는 길, 별들이 달의 살빛으로 둘러앉으면 두고 온 자두나무가 몸을 흔들고 서랍에 넣어 둔 커튼이 꿉꿉한 냄새를 내고 손톱 밑의 그늘은 더 깊이 숨곤 했다
해진 가슴에 올을 주워 시접을 댄다
구겨질 때마다 빛났던 침묵이 맞닿은 주름에서 일어서고 늘어난 너비만큼 침묵도 가난도 이해되는 폭이 생긴다
오늘도 비가 온다
흙이 뿌리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엉킨 뿌리가 흙을 잡아주고 있다 말라가는 자두나무에는 반복되는 고요가 저의 심장을 더 멀리 가게하고 커튼 안쪽에는 끝내 자라나는 생활이 있다
그런 손이 있다
지극히 사소한
창문으로 빗방울이 자늑자늑 붙었다 스카프는 벤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고 모자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하고 나는 매일 밤 집을 짓는다고 했다
루가 어깨를 털며 들어왔다 스카프는 묶인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고 모자는 빈 천장을 보는 것이 싫다고 하고 나는 그냥이라고 하자 나의 이유 없음이 더 문제라며 이름 붙이기를 계속하자고 했다 스카프는 휴식 모자는 수줍음 나는 자유 루는 캥거루
루는 캥거루를 보러 호주로 가는 꿈을 자주 꾼다고 하고 린은 스카프를 두르면 플라타너스의 속삭임이 들릴 것 같다고 하고 빈은 쓸쓸할 때 모자를 써야겠다며 수줍게 웃는다 이름을 이어가는 동안 빗방울이 세차졌고 호수는 제 몸을 불리며 더 많은 빗줄기를 받아내고 있다
린 스카프 휴식 빈 모자 수줍음 나 장갑 자유 루 캥거루 커진 품에서 이유들이 잦아들고 불어난다
오후 다섯 시 저녁이 서둘러 온 듯 보이지만 휴식은 화색이 돌고 수줍음은 자꾸 이마를 만지고 캥거루는 힐리어 호수*에 대해 말한다
힐리어 호수를 생각하자 분홍이 따라오듯이
우리는 되어가는 중이다
*호주에 있는 분홍색 호수
서이교
본명 서미숙 전남 순천 출생 증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 연출 감독 캘리그라퍼 2023년 문학뉴스 & 시산맥 신춘문예로 등단
심사경위 및 심사평
처음으로 개최된 2023년 문학뉴스 & 시산맥 신춘문예에 480여 명이 응모하였다. 일일이 작품을 읽고 예심위원들은 좋은 작품들을 매의 눈으로 낚아 올렸다. 총 17명의 응모작이 1차 예심을 통과하였다. 그중 6~7명의 응모작을 최종심에 올리기 위해 다시 한번 예심위원들은 옥석을 골랐다. 그 작품은 아래와 같다.
1번 김 우 「오디세이, 일만 년의 유영」 외 4편 4번 장은미 「반쯤 열린 서랍들의 세계」 외 9편 5번 최보슬 「Skeleton」 외 8편 7번 서이교 「미숙(美淑)」 외 9편 9번 형 석 「컵과 폴라」 외 9편 12번 서영우 「말의 부족」 외 6편 13번 김시연 「수(手)」 외 4편
위의 응모작품을 본심 심사위원 앞으로 무기명으로 보냈다. 심사위원은 문학뉴스 추천 백학기 시인(1981년 현대문학), 시산맥 추천 이혜미 시인(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정현우 시인(2015년 조선일보 신춘)이었다. 아래는 심사위원의 수상작 선정과정이다.
심사위원들은 무기명 응모작품을 읽고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작품성이 있는 수준작을 뽑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백학기 심사위원은 7번과 12번 두 편을 추천하였고, 이혜미 심사위원은 5번 7번 9번을 정현우 심사위원은 5번 9번 1번을 추천하였다. 그 결과 5번은 두 심사위원이 첫 번째로 추천하여 당선작으로 결정을 하였고 7번과 9번 두 작품 중에서 고심하였으나 의논 결과 7번이 조금 더 작품성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어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심사위원의 선정 사유는 아래와 같다.
백학기 심사위원은 7번 응모작 「미숙」 외 9편은 시와 언어의 경계가 신선하며 시상의 단단함이 잘 여물어 있고 12번 응모작 「말의 부족」 외 6편은 시적으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특히 「말의 부족」이나 「비누」 같은 작품은 시상과 언어가 잘 결합 되어 있어 가능성이 엿보였다고 평하였다. 한편 이혜미 심사위원은 5번 응모작을 언어의 사용 폭이 넓고 인상적인 사유에 신선한 이미지가 더해져 독특하면서도 진중한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평하였다. 7번 작품은 리듬감이 좋고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 뛰어나며 일상의 흔한 장면에서 시적인 지점을 일구어내는 장점이 있다고 평하였다. 정현우 심사위원은 5번 작품들을 안정적인 리듬과 자유롭게 시상을 넘나들고 있으며 자기만의 세계를 힘주지 않으면서도 긴장감이 끊기지 않는 과감성이 돋보였다며 첫 시집 발간이 기대된다고 평하였다. 7번 작품은 추천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은유를 숙련된 솜씨로 안정감 있게 대상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이미지의 자유로운 배치와 적재적소에 들어가는 정제된 언어 선택이 좋다고 하였다.
응모작품 중에는 실제로 아직 시로 영글어지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으면 단단한 내공을 갖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는 습작을 꾸준하게 해야 한다고 모두 입을 맞추어 말하였다. 서정시는 마음이 흘러가면서 대상을 통과하는 지점을 참신하게 자기만의 시어로 적어내는 것이다. 이미 익숙한 표현이나 상투적인 내용 그리고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성에 머문다면 좀 더 퇴고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꾸준히 열정을 가지고 계속 도전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당선된 두 신인은 이제 시작이라 생각하고 참신성을 갖도록 노력하기를 바라며 시인으로서 한 발자국 발을 디딘 것을 축하한다고 하였다.
한편 평론 부문에도 5편이 옹모 되었으나 아직 심사를 통과할 수준에 이르지 못하여 당선작을 내지 못하였다.
본심 심사 : 백학기 이혜미 정현우 예심 심사 : 지관순 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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