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외국세력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이처럼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애국의 선각자들이 나라의 위기를 이겨내고
자주 독립과 민권 신장운동을 일으켜 민족적 각성에 이바지하려고 하였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이후에 미국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과 함께 1896년에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독립문을 세웁시다!" "독립관도 세웁시다!"
독립 협회는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였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관을 세웠다.
독립관은 정치 집회를 자주 열어서 민중의 독립의식을 높였다.
또한, 독립협회에서는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는데, 한글과 영문으로 기사를 썼다.
독립신문은 정부의 잘못도 꼬집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쫓아 보내고 조선 러시아 은행을 없앴다.
"전하, 대궐을 비우신 지 1년이 되었사오니 환궁하옵소서."
1897년, 독립협회는 러시아 공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을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오도록 하였다.
1898년, 10월 29일에 종로 네거리 광장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민중 대회인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헌의 6조를 결의하여, 우리 나라도 이제 자주적인 길을 걸읍시다."
처음에는 정부 대신들도 끼어 있던 독립협회가 정부를 비판하자, 정부와 대립이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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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정부는 독립협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정권을 잡은 보수파들과 일본제국주의의 견제로 독립 협회는 탄압을 받게 되었다.
"독립협회 본부와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여 부숴 버려라!"
군부 대신 민영기는 독립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황국협회를 조직하고 폭력을 쓰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마침내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 17명을 옥에 가두었다.
황국협회는
정부를 지지하는 민영기, 이기동, 홍종우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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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올려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나라 안팎에 선포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근대국가를 건설해야겠다는 깨달음이 일어났다.
때문에, 여러 가지로 혼란을 겪으면서도 개화문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1884년, 우정국이 새로 생겼다가 갑신정변으로 없어진 뒤에
1895년, 을미사변 뒤에 다시 우정국이 세워졌다.
1900년에는 만국 우편연맹에 가입했다.
1885년에는 서울과 인천, 서울과 의주사이에 전신선이 가설되었다.
1888년에는 일본과 합작으로 서울과 부산 사이에 전신선이 가설되었으며,
통신원을 두어서 통신사무를 관리하였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전화가 놓인 것은 1897년으로, 이때 경운궁 안에 처음 가설되어 사용하였다.
철도는 1899년에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경인선이 개통된 것이 시초다.
경부선은 1904년에,
경의선은 1905년에 각각 부설되었다.
또한, 1899년에는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와 종로와 용산 사이에 처음으로 전차가 다녔다.
1886년에는 전운국이 마련되어 정부기관의 해운업이 이루어졌다.
또 1892년에는 이운사 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민간 해운회사로는 1900년에 대한 협동 우선 주식회사와 인천 우선 주식회사 등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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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근대 공업시설로는
근대 무기를 만드는 기기국,
화폐를 찍는 전환국,
출판물을 맡는 박문국,
옷감을 생산해 내는 직조국,
광산 개발을 위한 광무국 등이 정부 운영시설로 세워졌다.
근대 의료는 미국의 선교사이며 의사인 알렌이 1884년에 미국 공사관 의사로 들어와서 전해졌다.
정부에서는 1885년에 광혜원을 세우고, 알렌으로 하여금 근대 의술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종두법은 1879년에 지석영에 의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지석영은 우두국을 설치하였다.
근대 건축물로는 독립문, 덕수궁, 명동성당 등을 들 수가 있다.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 건축양식을 본뜬 것이다.
1909년에 완공된 덕수궁 석조전은 르네상스식의 건축물이며
1898년에 세워진 명동성당은 중세 고딕식 건물이다.
우리 나라가 받아들인 근대 문물 중에는 열강들의 야욕에 의해 건설된 것들도 있다.
가령,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만 보더라도 이것은 일본이 러·일 전쟁을 목적으로 부설했던 것이다.
순전히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