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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있는 무양서원은 중국 3대 기행문으로 손꼽히는 금남표해록을 쓴 탐진 최씨 최부 선생 등을 모신 서원이다.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의 옛 이름이다. 최부 선생은 33살(1486)에 과거에 합격하여 정5품 벼슬 홍문관 교리를 거쳐 34살(1487)에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추쇄경차관의 임무를 맡아 제주도에 갔다가 섣달그믐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상복을 갖춰 입은 최부 선생은 정월 초하룻날, 초상을 치르려는 급한 마음에 풍랑이 심해 배를 띄울 수 없는데도 강제로 배를 띄웠다. 그런데 최부 선생 일행이 탄 배는 추자도 근처에서 큰 파도에 휩쓸려 먼바다로 빨려 들어가 돛이 부서지고 물이 스며드는 등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풍랑이 멈추고 바다가 잔잔해지자 배에 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불평하였다.
“뭍에서 제주로 갈 땐 광주 무등산과 나주 금성산에 제사를 지내고, 제주에서 뭍으로 나올 땐 이도동의 광양당, 고산리 차귀당, 용담동 내왓당 등에서 제사를 지내고 뱃길을 나섰는데 경차관은 큰소리치며 신을 믿지 않아서 우리가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
최부 선생은 이들을 달래며 제주도 남쪽의 동중국해를 떠돌다가 중국의 저장성 영파에 도착하여 뭍에 오르려 하자 사람들이 말을 하였다.
“경차관께서 상복을 벗고 관복을 입어 조선의 관리로서 위엄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다를 떠돌게 된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는 것도 하늘이 시킨 일이다. 부친상을 당한 내가 어찌 거짓으로 행동할 수 있겠는가?”
최부 선생은 상복을 입은 채, 명나라 관청을 찾아가 도움을 부탁하였고 그들의 안내로 북경으로 길을 잡았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상복을 입고 장례 예절을 지키는 최부 선생 등 조선 사람들을 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이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어 명나라 황실까지 알려지자 영종 황제가 자금성으로 불러 이를 칭찬하게 되었다.
“황제 폐하를 뵙게 되면 큰 선물을 내릴 것이니 관복으로 바꾸어 입으시오.”
“나는 상복만 겨우 입고 바다로 나와서 다른 옷은 없고 또 상을 당하여 다른 옷을 입는 것도 예절에 맞지 않습니다.”
“명나라에서는 상복을 입고 황제 폐하를 뵐 수 없소. 그러니 상복을 벗고 황제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며 절해야 하오.”
“조선에서는 부모의 장례는 정성을 다해야 하는데 화려한 옷을 입으면 부모님을 위한 일에 어긋나니 어찌 상복을 벗을 수 있겠습니까?”
“명나라에서는 황제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면 초상 중이더라도 반드시 옷을 갈아입고 대궐에 들어와 절하고 나와서 상복을 다시 입소. 당신은 여기서 관복을 입고 들어가 절을 하고 다시 이곳에서 상복을 입으면 되오.”
최부 선생은 제주도를 떠나 136일 동안 8,800여 리를 걸어 무사히 돌아와 조선 선비의 학식과 행동을 명나라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풍습을 기록한 책을 쓰니 이것이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인 것이다.
무양사(武陽祠)는 굳세고 보배로운 햇볕이라는 뜻으로 광주의 옛 이름 무진(武珍之陽)에서 따온 것이다. 호남지역 향교의 특징은 대성전과 명륜당이 마주하는데 무양사와 이택당도 마주하고 있다. 이택당(以澤堂)에는 이택당(麗澤堂) 현판도 걸었는데 여러 개의 못물이 오가며 맑아진다는 뜻으로 친구들과 함께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리(麗)는 고울 ‘려’가 아니고 붙어 있다는 뜻의 ‘리’로 쓴 것이다. 늘 정확하게 하라는 유정유일(惟精惟一)과 크고 강하며 마음이 곧은 기운이라는 태화원기(泰和元氣) 글도 함께 걸었다. 끝없이 노력하라는 성지재(誠之齋)에는 형제의 정이 있고 높은 관직에 오르라는 자형황율(紫荊黃栗)과 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급시면학(及時勉學) 글이 있다. 공부는 즐거운 것이라는 낙호재(樂乎齋)에는 봄에 꽃향기를 멀리 보낸다는 춘산방화(春山芳華)와 평상에 앉아 단풍을 구경한다는 노상추수(老床秋樹) 글이 보인다.
이곳에는 연꽃을 새긴 돌, 탑의 지붕돌 등을 주춧돌로 사용했는데 아마 절집을 옮겨와 지은 것은 아닐는지? 주련 중 장사는 고창군 무장읍의 옛 이름으로 무장현감을 지낸 유희춘으로 해석하였다. 소무는 소무목양(蘇武牧羊)에서 나온 것으로 ‘소무가 양을 기른다’는 뜻이다. 소무는 한나라의 사람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붙잡혀 큰 움 속에 갇혀서 혹독한 굶주림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나라의 신하로서 굳건한 태도를 보였다. 오경박사는 시·서·주역·예기·춘추 등 다섯 가지 경전에 능통한 분을 두어 제자를 가르치고 유교를 보급하는 제도였다. 청나라 건륭황제가 지은 시는 모두 34,160여 수로 중국에서 가장 많은 시를 남겼으며 세계에서도 가장 시를 많이 쓴 시인이다.
▲ 무양서원 무양사
무양사
扶綱常於欲墜之地 存社稷於旣亡之秋
- 부강상어욕추지지 존사직어기망지추
豊功偉業終不可泯 淸德大義久而益揚
- 풍공위업종불가민 청덕대의구이익양
明洞冶牧仗義松岳 乙巳網羅皆知宗匠
- 명동야목장의송악 을사망라개지종장
志邁羲農韜跡光山 長沙芬苾大振文風
- 지매희농도적광산 장사분필대진문풍
瀋陽抗節蘇武畵圖 海東有光乾隆詩句
- 심양항절소무화도 해동유광건륭시구
跋涉死地亦能華國 力扶大義竟成仁域
- 발섭사지역능화국 역부대의경성인역
도덕이 땅에 떨어진 이때 삼강오륜을 세우고
나라의 존망이 중요할 때
왕실을 굳게 지키네.
넉넉한 공과 큰 업적은 사라지지 않고
맑고 어진 성품과 큰 의로움은 오래도록
전하는구나.
고려의 야은 길재와 목은 이색은 개성에서
선비의 의로움 지켰고
1927년 을사년에 누구나 아는 성리학의
스승들을 이곳에 모셨네.
뜻을 멀리 복희와 신농황제에 두니 감춘
자취는 광산 고을이오
무장현감 유희춘을 모시니
학문을 존중하는
풍습이 크게 일어나네.
심양에서 꿋꿋한 태도를 보인 ‘소무’는
초상화를 그렸고 조선에도 빛나는
글 있으니 청나라 건륭황제의 시와 같네.
죽음을 밟아 헤치고 다니면서도 조선의
이름을 빛냈고 큰 의로움 세워 마침내
어짊을 실천하는 나라로 만들었네.
▲ 무양서원 이택당
이택당
丕顯元精五星南聚 用扶吾道百川東流
- 비현원정오성남취 용부오도백천동류
采術規模金管銀管 會同朋友南蘭北蘭
- 채술규모금관은관 회동붕우남란북란
淵源有來洙泗濂洛 講誦無斷禮樂詩書
- 연원유래수사렴락 강송무단예악시서
크고 맑은 별 다섯이 남쪽으로 모이니
좋은 일이 있고
우리의 유교는 모든 하천이
동쪽으로 흐르듯 함께 하네.
모아서 쓴 글들은 서로서로 문화가
잘 어울렸고 같은 생각을 한 친구들이
남쪽과 북쪽에서 모여드는구나.
유교의 근원은 공자로부터 주돈이와
정호·정이 형제로 이어졌고
예절과 음악, 시와 글씨 등 익히고
외우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네.
松寒竹翠四時感觀 山高水長一辭歎詠
- 송한죽취사시감관 산고수장일사탄영
永世克禋丹心靡懈 俊義相襲靑域以寧
- 영세극인단심미해 준의상습청역이령
겨울에도 변치 않는 대나무와 소나무의
푸름을 늘 바라보며 강보다 길고 산보다
높음을 한마디로 감탄하여 노래하네.
정결히 제사 지내는 일은 정성을 다해
어긋나지 않게 하고 뛰어난 분의 의로움을
이어받아 조선이 평안하게 되었네.
성지재
曰仁曰義前後同揆 地靈攸毓相得英才
- 왈인왈의전후동규 지령유육상득영재
天秩惟叙自任斯道 自東自西遠近畢來
- 천질유서자임사도 자동자서원근필래
어짊과 의로움은 선배와 후배가 지키는
것이고 좋은 땅에서 서로 뜻이 맞는
뛰어난 인재 기르는구나.
하늘의 질서에 법이 있으니 유학의 도리를
스스로 지키고 동쪽과 서쪽, 가깝고
먼 곳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이네.
낙호재
喬嶽泰山擧世景仰 同墜遺緖於萬於千
- 교악태산거세경앙 동추유서어만어천
惟欽先謨弗三弗二 光風霽月曠代相傳
- 유흠선모불삼불이 광풍제월광대상전
태산같이 높은 산처럼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고 남겨 주신 배움을
천년만년 동안 함께 전하리.
선생의 가르침을 존경하여 다른 길로
가지 말고 맑은 날 바람과 달처럼
비교할 수 없어 대대로 전하네.
삼오문
天下共由之路 古今同得之理
- 천하공유지로 고금동득지리
하늘 아래 사람들이 같이 가야 할 길은
예나 지금이나 함께 터득한 도리뿐이구나.
서원 밖
詩書遠慕殷周日 絃誦定知鄒魯風
- 시서원모은주일 현송정지추노풍
先生在座咺譁息 弟子入門揖讓同
- 선생재좌훤화식 제자입문읍양동
시와 글은 멀리 은나라와 주나라의 것을
따르고 음악과 글 읽는 소리는
맹자와 공자가 즐기던 것이라.
선생님이 계시면 시끄럽게 않게 조용히 하고
학생들이 공부하러 오면
서로 인사하며 도와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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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덕헌 (羅德憲)
조선시대 창성부사, 의주부윤, 삼도통어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자헌지(憲之)호장암(壯巖)시호충렬(忠烈)
인물/전통 인물
성별남성출생 연도1573년(선조 6)사망 연도1640년(인조 18)본관나주(羅州)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아버지는 이성현감(尼城縣監) 나사침(羅士忱)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종군했다.
특히, 안현전투(鞍峴戰鬪)에서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외교적 수완이 능해 여러 차례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635년 창성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을 역임하고,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다시 심양에 갔는데 동지(同知) 이확(李廓)과 심양에 도착했다.
이 때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우리 나라 사신에게도 경축반열에 참석하라고 했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옷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는 구타를 당했다. 구타와 회유를 거듭해도 시종 거부하다가, 청나라가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내기로 하자, 내용을 알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고 받지 않았다.
100여 명의 기병으로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송되었는데, 기병의 호위가 풀리자 통원보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귀국했다. 이 사실을 안 삼사(三司)와 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관학 유생들은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고 논핵했다.
영의정 김류(金瑬)까지 가세한 조정의 거센 척화론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적절한 변호로 극형만은 면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과거 춘신사로 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으며, 163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병자록(丙子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집필자 유영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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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서원 (淸溪書院)
교육 유적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청등(靑嶝)마을에 있었던 조선후기 송세정과 이승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문화재자료.
1708년(숙종 3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세정(宋世貞)·이승간(李承幹)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뒤에 나덕헌(羅德憲)을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그 유허지에 청계사지(淸溪祠址)라는 석비만 남아 있었다. 근래 2008년에 복원되었다.
참고문헌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
『전고대방(典故大方)』
『변산의 얼』(부안군, 1982)
집필자 박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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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나씨] 나덕헌(羅德憲)
자(字)는 헌지(憲之), 호(號)는 장암(將岩),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부안 현감(扶安懸監)을 지내고 의주 판관(義州判官), 길주(吉州)․정주 목사(定州牧使), 창성 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안현(鞍峴)에서 이 괄 (李 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이듬해 진무원종1등공신(振武願從一等功臣)에 오르고 이어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안반사(按伴使)가 되었으며 교동 도호부사(喬桐都護府使)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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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유집(壯巖遺集)
1924년 간행된 조선 후기의 무신 나덕헌(羅德憲)의 시문집. 7권 3책. 목활자본.
장암집(壯巖集)
자료UCI: RIKS+CRMA+KSM-WC.1924.4617-20090724.RICH_1046
고서-문집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별집류 |
나덕헌(羅德憲, 1573-1640) 찬 나도선(羅燾線) 편 |
목활자본 |
나주(羅州) : [발행처불명], 大正十三年八月五日(1924) |
7卷3冊 : 四周雙邊 半郭 24.8 x 16.6 cm, 有界, 10行22字 註雙行, 上下向2葉花紋魚尾 ; 31.1 X 20.0 cm |
刊記: 大正十三年(1924)八月五日發行 序: 崇禎紀元後五癸亥(1923)...金福漢序 序: 歲壬子(1912)...八代孫...[羅]琪漢勤序 跋: 崇禎紀元六回甲子(1924)...李炳壽謹書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5563.7.6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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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최부의 '금남 표해록'[미암일기와 함께 떠나는 조선사림의 꿈과 일상 18] 유희춘의 조부에 대한 존경이 책으로 발간
22.09.19 13:34l최종 업데이트 22.09.19 13:34l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금남 최부가 쓴 <금남표해록>은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고 있다. 금남 최부는 역사서인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하는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지만 최부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표해록>이다.
<금남표해록>은 최부가 1487년 제주도 추쇄경차관이란 관직으로 부임하여 갔다가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육지로 나오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최부는 표류하여 중국 절강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 내륙지방을 거쳐 다시 우리나라로 오게 되는데 약 6개월 가량 중국에서 겪고 느낀 과정을 적은 표류견문기를 남겼다. 최부는 그의 나이 35세에 성종의 명에 의해 1488년(성종19년) 이 표류기를 완성하여 바쳤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작된 지 80여년 뒤인 1569년에야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여 간행되었고 1578년에 다시 재간행되었다. <금남표해록>이 간행된 것은 외손자인 유희춘의 힘이 매우 컸다. 유희춘은 외할아버지 최부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컸던 것 같다. 그는 <미암일기>에서 자주 최부에 대해 언급하며 <금남표해록>과 <금남집>의 발간 과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미암은 최부의 <금남집>을 직접 편집하고 발문을 써 간행하였다. 또한 중국 기행문인 <표해록>을 직접 간행한 것을 보면 그의 외조부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미암일기>에서 이 책들을 간행하기 위한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568년 戊申 8월 초1일
나사침을 붙잡아 두고 함께 금남선생집을 교정했다.
미암 유희춘은 조부인 최부의 생애를 찬(撰)한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를 남겼는데, 이 기록에서 최부에 대해 말하기를 "경술과 기절이 뛰어나 성종대왕에게 발탁되어 시종신(侍從臣)이 되었고 박학과 씩씩한 기절로 온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라고 평한다. <미암일기>에서는 유희춘이 표해록을 간행하기 위한 일을 꾸준히 추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569년 己巳年 8월 15일
표해록의 발문을 초했다. 관서로 보내기 위함이다.
1569년 己巳年 8월 17일
지평 최정과 유경심이 이어서 다녀갔다. 경심이 아침 저녁 두 번을 왔는데 나를 위하여 표해록의 발문을 고쳐줘 기쁘다.
해남 인물사의 개산조
미암 유희춘이 태어난 해남은 고려시대까지는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문풍(文風)이 별무한 곳이었지만 16세기 사림시대를 통해 문향 고을로 변모해 간다.
미암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이 순천에서 살다가 최부의 사위가 되어 처가 고향인 해남에서 살게 된 것도 금남 최부로 인해 이 지역에서 문풍의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낯선 유배자나 드나들던 해남이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16세기 조선 사림의 한 축을 형성한 것은 최부가 학문과 문화적 기틀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 다. 이 때문에 최부를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사람이라 하여 해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라 부르기도 한다.
최부가 제주로 떠난 관두량
금남 최부는 본래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떻게 하여 해남에 있는 해남정씨와 연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해남에서 최고 거부이자 영향력을 지닌 호장직의 해남정씨 정귀감의 사위가 됨에 따라 처향인 해남으로 오게 된 것이다.
최부의 <표해록>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해남 화산면 관두량이다. 관두량은 제주로 부임하는 목사나 사신, 제주 등 인근 섬으로 귀양 가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항구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중국으로 향하는 국제항의 역할도 하였다. 지금은 관두량 앞의 바다를 막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영터만 남아있고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 해남 관두량 포구 금남 최부가 추쇄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로 가기위해 출발한 포구이다. 표해록은 제주로 가기위해 이곳에서 배를 기다리는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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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는 1487년(성종18) 7월 추쇄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로 떠나게 되는데 그가 쓴 <표해록>에는 제주도로 가기 위해 이곳 관두량에 머물며 40여일 동안 순풍을 기다리는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표해록>에는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 바다의 정황 그리고 중국 내 운하와 그 주변의 풍광 등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중국의 수차제도에 대해 소개하는 등 중국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그의 실용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최부의 묘 늘어지와 출생지 동강마을
▲ 영산강 곡강의 늘어지 <금남표해록>을 썼던 최부의 묘가 몽탄면 이산마을 늘어지에 있다. 늘어지 전망대에서 보면 굽이쳐 흐르는 곡강의 모습이 아름답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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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을 따라 나주시 동강면과 무안 몽탄에 이르면 영산강이 한번 굽이쳐 흐르는 '늘어지 곡강'이 있다. 이런 곳은 보통 주변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곳에는 영산강을 내려다 보는 강가에 유서 깊은 정자인 '식영정'이 있는데 바로 옆 이산마을에 최부의 묘가 있다.
최부가 태어난 곳은 나주시 동강면 성지촌이다. 그런데 최부는 강 건너 영산강이 휘돌아 감고 있는 늘어지, 행정구역으로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마을에 묻혀 있다. 나주시 동강면 '늘어지 곡강 전망대'에 오르면 영산강이 휘돌아 굽이쳐 흐르는 아름다운 곡강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늘어지는 멀리서 보면 한반도의 형상을 하고 있다.
최부의 명성에 비해 그가 태어난 동강면 성지마을에는 '금남최부유허비'만 덩그런이 남아 그의 흔적을 말해 줄 뿐이다. 주변을 의미있게 정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최부 생가마을 유허비 최부는 지금의 나주시 동강면 인동 성지촌에서 태어났다. 생가마을에는 유허비만 덩그런히 남아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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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몽탄 이산 마을에는 최부를 추모하는 재각인 경모재와 최부의 묘가 있다. 무덤 앞에는 문인석이 호위하듯 서 있고 오래된 여러 개의 묘비가 들어서 있다. 위쪽에는 아버지 최택의 묘가 있다. 최부의 묘는 유희춘의 아버지인 유계린이 모셔져 있는 해남군 마산면 모목동牟木洞에 있다가 1947년 후손들에 의해 무안군 몽탄면 이산마을로 옮겨졌다.
그가 지은 <표해록>을 기념하여 그린 듯 경모재 담벽에는 표해록의 장면들을 묘사한 여러 그림들이 있다. 약간은 만화 스타일로 보이기는 하지만 <표해록> 속에 담긴 장면들을 회상할 수 있게 한다.
최부는 김종직의 제자로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김굉필 등 동문들과 함께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처형당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당시 많은 인물들이 사화 속에서 유배되거나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금남 최부 역시 사화의 한복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가 갑자사화로 처형당할 때 그의 가족은 해남 마산면 버드나무골(상등리)에 살았다고 한다.
▲ 금남 최부 묘역 무안군 몽탄면 이산마을 늘어지에 최부의 묘가있다. 아버지 최택과 함께 묻혀 있다. 본래는 해남 마산면 모목동에 있었으나 1947년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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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광주 무양서원의 이택당(以澤堂)
출처 광주 무양서원의 이택당(以澤堂) by 오인교의 녹색건강
광주시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이택당(以澤堂)은 무양서원(武陽書院) 강당으로 좌우에 합의문과 일반적인 통용문으로 사용되는 합인문이 있다.
문 안에는 오른쪽에 성지재(誠之齋)와 왼쪽에 낙호재(樂乎齋)가 있으며, 높은 대지 위에 무양사(武陽詞)가 있다.
앞쪽의 삼오문 좌우측 문짝 위에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이다.
여기서 이택(여택 麗澤)은 이택은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연못이라는 뜻으로서,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의미한다. 주역(周易) 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따라 붕우 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는 말에서 유래한다
1984년 2월 29일 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인종 때의 어의 장경(莊景) 최사전(崔思全 1067~1139)을 주벽으로 그의 후손인 손암 최윤덕(孫菴 崔允德), 금남 최부(錦南 崔溥)와 문절공 유희춘(柳希春), 충렬공 나덕헌(羅德憲) 등 다섯 명을 배향한 서원이다.
1927년 탐진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웠으며 광주의 옛이름 '무진의 볕' 즉 무진지양(武珍之陽)에서 이름을 따 지었다.매년 음력 9월 6일 제향하고 있다. 탐진최씨 문중에서는 서원의 교육기능을 살려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량중학교(현 비아중학교)를 설립하였다.
무양서원(武陽書院)에 배향된 인물로 최사전(崔思全, 1067~1139)은 자 휼세(恤世). 시호 장경(莊景). 내의(內醫)로서 예종의 등에 난 부스럼을 가볍게 보고 치료하지 않은 죄로 2년 도형(徒刑)을 받았다.소부소감(小府少監) ·군기소감(軍器少監)을 거쳐 1126년(인종4)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남용하자 인종과 협의, 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설복, 그로 하여금 자겸을 제거케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이 되었다.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 ·지도성사(知都省事)로서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가 더해졌고, 삼한후벽상곡신(三韓後壁上功臣), 뒤에 수태위(守太尉) ·주국(柱國)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표절사 두문동 72현 명단 [表節祠 杜門洞 七十二賢 名單]
항절실 항절반 봉안 (抗節室 抗節班 奉安)
손암(遜菴) 최윤덕(崔允德) 탐진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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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무신으로서 정승이 된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은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운해(雲海)이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올라 1396년(태조 5) 아버지를 따라 영해(寧海)의 반포(磻浦)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등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1400년(정종 2) 태종이 불러 특별히 훈련관부사직에 임명했으며, 1402년(태종 2)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가 되었으며,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면서 동북면조전병마사(東北面助戰兵馬使)가 되었다.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어, 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로 나가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킴으로써 여진족의 준동을 막았다. 1415년 영길도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가 되었고, 우군총제·중군도총제를 거쳐 1419년(세종 1)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병선 227척, 군사 1만 7,000여 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對馬島]을 정벌했다(→ 쓰시마 정벌). 1421년에는 공조판서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23년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 파저강(婆猪江)의 여진족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하자 다시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황해도·평안도의 군사 1만 5,000여 명을 동원해 이를 정벌하고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했다. 그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다시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진압했으며, 돌아와서는 소를 올려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며 무관직에 전임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야인정벌). 1435년 좌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영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통천 상렬사(尙烈祠)와 안주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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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崔溥, 1454~1504)는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아버지는 진사 택(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478년(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 김굉필(金宏弼)·신종호(申從濩) 등과 교유했다. 1482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저작·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했다.
최부는 1485년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하여 논(論) 120편을 집필했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87년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되었다. 최부는 다음해 1월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나주로 돌아오던 중 초란도(草蘭島)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한 끝에 명나라의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도착했다.
왜구로 오인되어 살해될 뻔했으나 야음을 틈타 관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베이징[北京]으로 호송되었다가 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성종의 명을 받아 그동안의 견문을 일기 형식의 〈금남표해록 錦南漂海錄〉 3권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리 왕명이라 하더라도 부친상을 당한 몸으로 귀국 즉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지체한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헌부의 탄핵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뒤 지평·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논란이 일어 승문원교리로 밀려났다. 최부는 연산군대에 일찍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의 제작 및 이용법을 보급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최부는 1498년(연산군 4) 7월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하인 이종준(李宗準)·이구(李龜)·김굉필·박한주(朴漢柱) 등과 함께 붕당(朋黨)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했다는 죄명으로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당했다. 금남표해록은 국내에서 한문·한글본으로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도 당토행정기 唐土行程記.통속표해록 등으로 간행되었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해남출신이다.
계린(桂麟)의 아들이며, 부인은 여류문인인 송덕봉(宋德奉)이다.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다. 김안국(金安國)·최두산(崔斗山)의 문인으로서,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그뒤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참조:전라남도 지역에 서원은 나주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창계서원(滄溪書院) 장연서원(長淵書院) 월정서원(月井書院) 설재서원(雪齋書院) 봉산서원(蓬山書院) 미천서원(眉泉書院)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이 있다. 그 다음으로는 광주시에 많이 있다. 임계서원(臨溪書院) 운암서원(雲岩書院) 두암서원(斗巖書院) 유애서원(遺愛書院) 월봉서원(月峯書院) 무양서원(武陽書院) 등이다.
곡성에는 방산서원(方山書院) 신재서원(新齋書院)-봉양사 영귀서원(詠歸書院) 덕양서원(德陽書院) 구암서원(龜巖書院)이 강진군에는주봉서원(胄峰書院) 수암서원(秀岩書院) 박산서원(博山書院) 남강서원(南康書院) 군자서원(君子書院)이 있다.
또한 영광에는 이흥서원(驪興書院) 보촌서원(甫村書院) 묘장서원(畝長書院) 무령서원(武靈書院) 내산서원(內山書院)과 화순군에는 해망서원(海望書院) 지곡서원(芝谷書院) 죽수서원(竹樹書院) 도원서원(道源書院) 이 있다.
해남군에는 해촌서원(海村書院) 방춘서원(芳春書院) 미산서원(眉山書阮),장흥에는 자산서원(紫山書院) 예양서원(汭陽書院) 연곡서원(淵谷書院) 강성서원(江城書院), 장성에는 필암서원(筆巖書院) 죽림서원(竹林書院) 봉암서원(鳳岩書院) 가산서원(佳山書院), 영암에는 죽정서원(竹亭書院) 녹동서원(鹿洞書院), 보성에는 이천서원(伊川書院) 율봉서원(栗峰書院) 용강서원(龍岡書院) 대계서원(大溪書院), 고흥에는 재동서원(齋洞書院) 덕양서원(德陽書院), 담양에는 운산서원(雲山書院)이 남아 있다.
문화.오인교/ nox91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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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양사 / 무양서원
주(州)의 북쪽 20리의 거리에 위치하여 장경공(壯景公) 최사전(崔思全)을 비롯한 손암(孫菴) 최윤덕(崔允德), 가의(嘉義) 최응원(崔應遠)을 제향한 장소이다. 고종 계묘년에 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5인이다. - 광주읍지(1924) 무양서원 (武陽書院)은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어의(御醫...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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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옹이의 부뚜막 두문동 72현 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두문불출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주말을 보내고 출근해서 "두문불출하고 집에만 있었지" 하고 하죠... 그 두분불출의 유래를 아시나요? 조선초 고려의 충신들이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자 나오게 하려고 그들이 있는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고 집과 함께 재가 되어 버렸다는...슬픈... 그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입수되었습니다. ■표절사 두문동 72현 명단 [表節祠 杜門洞 七十二賢 名單] 개성 성균관 표절사(表節祠)에 봉안(奉安)된 현인(賢人) 명단 표절실 순절반 봉안 (表節室 殉節班 奉安) 호(號) 존함(尊銜) 관향(貫鄕)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 죽산 박씨 휴암(休菴) 임선미(林先味) 순창 임씨 원촌(遠村) 조의생(曺義生) 창녕 조씨 용호(龍湖) 맹호성(孟好性) 신창 맹씨 두문자(杜門子) 성사제(成思齊) 창녕 성씨 산광(山狂) 조대운(曺大運) 창녕 조씨 퇴우당(退憂堂) 신익지(申翼之) 평산 신씨 신귀제(愼歸齊) 신이(申彛) 평산 신씨 신우(申瑀) 평산 신씨 복애(伏崖) 국유(鞠濡) 담양 국씨 고천상(高天祥) 개성 고씨 악은(岳隱) 심원부(沈元符) 청송 심씨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 하빈 이씨 적암(積巖) 서중보(徐仲輔) 장성 서씨 신순(申珣) 평산 신씨 신기(申淇) 평산 신씨 현계생(玄繼生) 의창 현씨 - 이상 17현- 표절실 항절반 봉안(表節室 抗節班 奉安)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 경주 김씨 농은(農隱) 민안부 (閔安富) 여흥 민씨 어은(漁隱) 이치 (李致) 합천 이씨 뇌은(뢰隱) 전귀생 (田貴生) 담양 전씨 해은(海隱) 이유(李裕) 옹진 이씨 송은(松隱) 구홍(具鴻) 능성 구씨 앙천제(仰天齊) 곽추(郭樞) 청주 곽씨 송촌(松村) 송인(宋寅) 남양 송씨 고천우(高天祐) 개성 고씨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 정선 전씨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인천 채씨 박침 (朴枕) 밀양 박씨 천은(川隱) 이맹예(李孟藝) 옹진 이씨 모려당(慕麗堂) 변숙 (邊肅) 원주 변씨 고죽제(孤竹齊) 조안경(趙安卿) 함안 조씨 신답(新沓) 서보(徐輔) 이천 서씨 해은(海隱) 박심(朴諶) 면천 박씨 법촌(法村) 박령(朴寧) 면천 박씨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나주 범씨 황의옹(黃衣翁) 신안(申晏) 평산 신씨 양촌(陽村) 원선(元宣) 원주 원씨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함안 조씨 신감(申鑒) 평산 신씨 미산(眉山) 성부(成溥) 창녕 성씨 음촌(陰村) 김약시(金若時) 광산 김씨 조유도(曺由道) 창녕 조씨 쌍회당(雙檜堂) 도동명(陶東明) 순천 도씨 임탁 (林卓) 나주 임씨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 공주 이씨 모은(茅隱) 이오(李午) 재령 이씨 존암(尊庵) 이수생(李遂生) 수안 이씨 -이상 31현- 표절실 정절반 봉안 (表節室 靖節伴 奉安)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흥해 배씨 변빈(卞斌) 초계 변씨 이성인(李性仁) 안성 이씨 채옥택(蔡玉澤) 평강 채씨 충제(忠齊) 최문한(崔文漢) 강릉 최씨 이탕휴(李湯休) 영천 이씨 허징(許徵) 양천 허씨 -이상 7현- 순절실 순절반 봉안 (殉節室 殉節班 奉安)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영일 정씨 도은(陶 隱) 이숭인(李崇仁) 성주 이씨 인제(麟齊) 이종학(李種學) 한산 이씨 이유헌(理猷軒) 신득청(申得淸) 평산 신씨 초옥자(草屋子)김진양(金震陽) 경주 김씨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경주 김씨 손등(孫登) 밀양 손씨 하경(河敬) 진주 하씨 경제(敬齊) 홍로(洪魯) 부계 홍씨 이초(李初) 정선 이씨 운암(雲巖) 차원부(車原부) 연안 차씨 -이상 11현- 항절실 항절반 봉안 (抗節室 抗節班 奉安) 목은(牧隱) 이색(李穡) 한산 이씨 손암(遜菴) 최윤덕(崔允德) 탐진 최씨 석계(石溪) 최첨노(崔添老) 경주 최씨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 성주 도씨 고산(孤山) 공은(孔隱) 곡부 공씨 이중인(李中仁) 용인 이씨 조은(釣隱) 이옹(李邕) 아산 이씨 병제(丙齊) 남을진(南乙珍) 의령 남씨 송은(松隱) 장안세(張安世) 안동 장씨 동포(東浦) 맹희도(孟希道) 신창 맹씨 만육당(晩六堂) 최양(崔瀁) 전주 최씨 회곡(檜谷) 최호(崔瑚) 평양 최씨 두노(杜老) 최유강(崔有江) 경주최씨 박덕공(朴德公) 죽산 박씨 금은(琴隱) 조열(趙悅) 함안 조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남평 문씨 오은(梧隱) 김사렴(金士廉) 안동 김씨 퇴제(退齊) 신우(申祐) 아주 신씨 손호정(孫孝貞) 밀양 손씨 이옥(李沃) 양성 이씨 동강(東岡) 이린(李璘) 원주 이씨 송은(松隱) 박천익(朴天翊) 밀양 박씨 둔옹(遯翁) 최이(崔邇) 경주 최씨 건곡(虔谷) 조유(趙瑜) 옥천 조씨 정은(正隱) 옥사온(玉斯溫) 의춘 옥씨 호은(湖隱) 허기(許麒) 김해 허씨 묵은(默隱) 정희(鄭熙) 하동 정씨 죽송오(竹松塢) 서견(徐甄) 이천 서씨 여강(驪江) 윤충보(尹忠輔) 무송 윤씨 보승(保勝) 최원(崔原) 수원 최씨 호촌(壺村) 신포시(申包翅) 고령 신씨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원주 원씨 금은(琴隱 ) 이양소(李陽昭) 순천 이씨 -이상 33현- 정절실 정절반 봉안(靖節室 靖節班 奉安) 농암(籠巖) 김주(金澍) 선산 김씨 나천서(羅天瑞) 안정 나씨 사암(思菴) 민유(閔愉) 여흥 민씨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담양 전씨 자포옹(自逋翁) 김전(金鈿) 안동 김씨 조공(趙珙) 백천 조씨 회정(晦亭) 전자수(全子壽) 담양 전씨 악은(岳隱) 노신(魯愼) 함풍 노씨 한천자(漢川子) 신아 (申雅) 평산 신씨 만은(晩隱) 홍재(洪載) 풍산 홍씨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고령 신씨 상서(尙書) 이춘게(李春啓) 합천 이씨 맹유(孟裕) 신창 맹씨 묵제(默齊) 양우(梁祐) 남원 양씨 수운당(睡雲堂) 송교(宋郊) 여산 송씨 불강(弗降) 김약(金瀹) 광산 김씨 퇴휴당(退休堂) 선윤지(宣允祉) 보성 선씨 어일(漁逸) 민유의(閔由誼) 여흥 민씨 이조(李條) 경주 이씨 민보문(閔普文) 여흥 민씨 -이상 20현- 이상 두문동 배향 성인은 총119명입니다. 72현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데 72현 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성으로 옛날 중국 공자의 제자 칠십이현(七十二賢)을 모신것을 상징적으로 인용해서 두문동 72현이라고 합니다. [출처] 두문동 72현|작성자 얌전한 냐옹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