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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평양 레이스와 차량화의 역설
굴락 머장이 제공해준 자료가 꽤 흥미로워서 쓰는 글. 생각 외로 한국군이 북진을 시작하면서 미군보다도 빠르게 평양을 향해 진격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의 배려도 있었다기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보고 판단할 문제들이 많았음.
당시 미군은 상당히 심각한 보급난에 시달리고 있었음. 일선부대들에서는 탄약 등 군수물자가 하루치를 확보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는데, 문제는 상부와 현장의 보급에 대한 시선이 좀 달랐음.
오히려 극동군 사령부는 한국으로 선적되는 물자가 상당히 많은 것을 떠나 포화상태라고 인식하였는데, 전체적으로 한국에 하역된 물자 자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음.
문제는 이것이 후방에만 가득 쌓여있고 전방까지는 제대로 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임. 미 1군단의 경우 10월 10일 보고에서 최소한 3천톤 규모의 중간탄약창을 개성에 놔둬야 서부축선으로 진격하는 미군과 한국군이 버틸 수 있다고 경고했음에도 이것이 기각된 이유가 바로 저 위에 언급한 극동군 사령부의 시선 덕분.
즉 대충 이런 상황인 것.
극동군 사령부 : 아니 물자 자체는 한국에 선적 엄청나게 됬잖아.
일선 부대 : 아니 싯팔 그게 전선으로 안오잖아요!
당시 미 제1군단장이었던 밀번 장군은 하루치 전투물자를 받기도 어려워 허덕였다는 보고를 올렸고, 특히 미군의 큰 장기인 전차와 트럭과 같은 기동장비들은 다음날 전투에 투입을 우려해야할 정도로 연료 수급 상태가 너무 좋지 못했음.
역설적으로 이러한 부분 덕분에 한국군이 평양 레이스에서 상당히 우위를 차지했는데, 애초에 1사단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차량은 약 50여 대에 지나지 못했음.
밀번 장군이 백선엽과 나눈 대화를 보면, 선두에 선 제1기병사단과 제24사단은 차량이 총합 1,700대를 보유하고 있지만 한국군 1사단은 50여 대에 지나지 않아 그런 기동력으로는 평양 진격이 어려울 것이라 말한 적도 있을 정도.
그러나 오히려 38선에 도착한 직후, 미군은 보급선이 위태로워지면서 진격과 정지를 반복하던 반면, 한국군은 차량이 원체 적다보니 기존에 보급받는 연료량으로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한데다가 보병들의 도보 진격 속도가 상당한 수준이기도 했음. 정 급하면 북한군이 버리고 간 차량에서 연료를 충당해서 써도 충분했다던듯.
뭐...물론 중간중간 북한군이 버리고 간 지스 트럭들 줏어다가 그거타고 가기도 하고 그러긴 했는데 전반적으로 한국군은 거의 도보로 진격했었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미군이 한국군보다 평양 레이스에서 느리게 된 원인이 됨.
물론 미군도 보급을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은 했음. 그러나 이미 10월 10일 이후, 38선 이남에 남은 미군 부대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가장 남쪽에 있는 부대가 개성의 미 제1군단이었다는 증언을 볼 때 이미 감당가능한 보급선은 사실상 무너졌다고 보아도 무방했음.
정확히 따지자면 한강 이남이 더 옳은 표현일 듯. 어쨌거나 가장 가까운 지원부대도 전선에서 최소 100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상태였으며 매일 200대의 트럭을 투입해 전선의 아군을 위해 군수물자를 수송했지만 역부족이었음.
그나마 송유관이 인천에서 김포 비행장까지 연결되면서 미 극동공군이 C-119 수송기 70여 기를 대거 동원해서 공중 수송도 제공했지만 이를 총동원해도 20만이 넘는 연합군의 하루 필요 물자를 충당하기는 굉장히 어려웠던 모양.
철도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았으나 9월 말 기준으로 그나마 남은 선로가 부산의 경계를 넘지 못했고, 급한대로 서울의 철도를 수리했으나 이는 10월 21일의 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철도는 50년 10월 기준으로 서부축선의 주전선으로부터 200마일 이상 떨어져있어 큰 도움을 주지 못함.
수송부대의 피로도 누적도 굉장히 심각했음. 하루 평균 100~200마일의 거리를 트럭으로 주파하며 필사적으로 물자를 실어날라야 했는데, 아주 잘 닦인 길이라도 힘든 과업인데 한국의 도로는 그마저도 아니었고, 오히려 최악의 도로에 가까운 상태.
즉 극동군 사령부의 전선 보급에 대한 낙관적인 관망과 파괴된 도로 및 철도의 미복구는 미군의 진격을 굉장히 느리게 만든 주 원인이 됨.
실제로 미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하루 평균 18km를 주파했지만, 한국군은 동부와 서부축선이 모두 24~25km 가량을 하루만에 주파하며 도보로 진격했던 것을 보면 굉장히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던 셈.
증언을 보면 한국군 사단들은 거의 밤낮없이 강행군을 실시했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중간중간 적을 격퇴시키고 얻은 차량으로 예하 연대들을 차량화시키는 경우도 적잖았음. 19연대가 이덕분에 연대 병력의 반이 차량을 타고서 진격했고, 어느 대대는 대대장 지프 1대만 있던 부대가 평양 공방전 직후 30대의 차량을 운용했다는 보고까지 있었으니.
아예 6사단의 경우 하루 진격 속도가 40km에 달한 적도 있다는 것을 보면 보통 정신나간 도보 진격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음. 여튼 상당히 아이러니컬 한 문제였는데 이 때문에 중공군의 기습 개입 때 미군이 저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철수하는 원인으로도 지적될 정도.
물론 51년 중반부터 남한 지역 곳곳에 ASP들 잔뜩 지어두고 그때서부터 화력과 기동으로 중공군을 상대하기 시작하니 굉장히 두려운 상대가 된 것임. 50년 북진 시기의 미군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고 보면 편할듯.
출처
USAWC (U.S. Army War College) Military Studies Program Paper. Logistics and the Chinese Communist Intervention during the Korean Conflict (1950-1953)
민족의 증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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