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동부 리에주의 케르크홉스 주교는
파티마의 성모님이 요청하신 대로
그의 교구를 마리아의 하자 없으신 성심께 바치기로 졀정했다.
1933년 1월 15일 저녁,
그는 성체 앞에 꿇어 기도한 다음 봉헌 문서에 서명했다.
파티마의 발현이 공인된 지 3년 만이었다.
보랭의 마지막 발현이 있던 것은 1월 3일이었다.
온 벨기에는 물끊듯 했다. 무신론자들은 비웃었다.
천주교 신자들도 사실 여부를 두고 갈라져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열심한 교우들은 보랭의 발현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떤 뚜렷한 표지를 내려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했다.
주교가 성당에서 성체 앞에 무릎을 끊고 기도하던 바로 그 시간.
11세의 소녀 마리에토 베코는 창문에 코를 대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된 오빠 쥘리앙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코 일가는 리에주에서 40리 떨어진 바뇌 읍의 변두리 빈민가에 살고 있었다.
저녁 일곱시, 온종일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자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뒷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동생들도 자고 있었다.
그날은 주일이었다. 그러나 베코 가족 중에 성당에 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부모들이 열심치 않으니까 아이들도 모조리 그러했다.
그들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보랭과같이 프랑스말을 사용하는 바뇌 지방 사람들은
당시 대부분이 성당에 다니지 않는 한편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숭상하고 있었다.
마리에트는 달도 없이 캄캄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물가물하는 석유 등잔불의 그림자가 부엌 벽 위에서 흔들흔들 춤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리에트는 갑자기 소리 쳤다.
"엄마, 정원에 어떤 부인이 있네."
누구일까? 가난하게 사는 이 집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낮에는 나가 일하고 밥에는 피로하여 곧 자리에 누워 버리니
손님들이 와도 같이 놀 만한 여유가 없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베코 부인은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어떤 희미한 모습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여자 마술사인가 보다."
하고 부인은 떨면서 말했다.
마리에트는 자기가 등잔불로 인한 환상을 보지 않았나 생각하고
창문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니면서 밖을 보았다.
그러나 부인은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부인은 성당의 성모 동상과 비슷한 푸른 허리띠를 띠고 있었다.
소녀는 그것이 마술사가 아닌 것을 알았다.
"오, 아냐, 엄마, 성모님이야."
"뭐라고?" 어머니는 꾸짖었다.
마리에트는 언젠가 길가에서 주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묵주를 꺼내 들고 기도를 시작했다.
부인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여섯 단을 외우고 났을 때,
부인은 마리에트에게 정원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소녀는 일어나 방문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못 나가게 하고서 창문에 보자기를 씌워 버렸다.
얼마 안 있어 오빠 쥘리앙이 돌아왔다.
쥘리앙은 마리에트의 말을 듣고 그것은 고드름의 그림자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고 실제로 시험까지 해보였다.
다음날 그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마리에트가 바보라고 했다.
한편, 마리에트는 가장 친한 친구인 10세인 소녀 조세핀 레오나르드에게 얘기를 털어 놓았다.
조세핀은 자멩 신부에게 뛰어갔다.
신부는 성당에서 보랭이 발현의 진실여부를 계시해 주시기를 위한
9일 기도를 막 끝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세핀을 통해 들은 마리에트의 얘기가
보랭의 발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랭이 들은 얘기는 마리에트가 만들어 낸 말로 생각했다.
신부는 루르드의 발현 직후 '발현 유행병'이 프랑스를 휩쓸던 생각이 났다.
더구나, 베코의 가정은 성당에도 다니지 않고 있지 않은가?
신부는 마리에트에게 부인의 발현을 잊으라는 것과
그런 얘기를 입 밖에 내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수요일 아침, 신부는 놀랐다. 마리에트가 미사에 왔다.
그녀는 몇 달 전 첫영성체를 위한 시험에 세 번이나 떨어지자
주일학교도 집어 치우고 미사에도 참례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미사뿐만 아니라 다시 주일 학교에도 나왔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문답을 완전히 익혔다.
마리에트가 미사에 처음으로 참례하던 바로 그 수요일 저녁 일곱시,
정원으로 나가던 마리에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가 보니 소녀는 대문 옆에 무릎을 꿇고 묵주의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1월 중순이라 밖은 몹시 차고 어두웠다.
아버지는 겁이 나서 딸의 곁으로 다가 갔다.
이제 딸은 팔을 벌리기 까지 했다.
아버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런 말을 해도 마리에트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광에 바쳐 놓은 자전거를 타고 사제관으로 달려갔다.
마침 신부는 외출중이었으나 한 친구를 만나 같이 집으로 달려왔다,
집에 도착해보니 마리에트는 일어나 고속도로를 향해 걷고 있었다.
"너 어딜 가니?" 하고 그들은 물었다.
이번엔 소녀는 말을 알아 들었다.
"부인이 이끄는 대로 가고 있어요."
소녀는 부인을 따라 길 위를 걸어 갔다.
길 옆에는 옹달샘이 있었다.
거기까지 따라간 소녀는 부인이 시키는대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샘울에 담그었다.
"이 샘은 나를 위해 마련된 샘이다.
자, 그럼 잘 있어라"하고 부인은 말했다.
아버지와 그의 친구는 마리에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부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본 일을 신부에게 말했다.
마리에트는 부인에 관한 애기를 했다.
부인의 복장은 길고 희었다.
오른쪽 발은 맨발이었다.
푸른 띠를 띠고 있었으며 머리 위로부터는 빛줄기가 뻗쳐 나왔다.
키는 다섯 자쯤 되었다.
부인의 손은 가슴 위에 얹혀 있었으며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오른쪽 팔에는 묵주가 걸려 있었다.
마리에트가 표현한 부인의 모습은 루르드의 성모와 비슷했다.
마리에트의 애기가 끝나자 아버지는 신부에게 다시 성당에 나가
고백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본당신부는 베네딕토회 신부 한 사람을 찾아가
그 일에 관해 상의하고 돌아와서,
마리에트에게 그 부인의 이름을 물어 보라고 지시했다.
그날 저녁 부인은 다시 마리에트에게 나타나셨다.
소녀는 신부가 시킨대로 부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가난한 이의 동정녀이다."
부인은 다시 소녀를옹달샘으로 데리고 갔다.
소녀는 역시 신부가 시킨대로 질문을 했다.
"부인, 당신은 어제 저녁 '이 샘은 나를 위해 마련된 샘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부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말하기를 "이 샘은 모든 국가와 모든 병자를 위하 것이다.
나는 병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그럼 또 만나자."라고 말했다.
부인은 밤의 어둠을 타고 자취를 감추었다.
1월 20일, 2월 11일, 15일, 20일, 그리고 3월 2일에도 소녀는 부인을 만났다.
1월 20일, 소녀는 부인에게 원하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조그만 성당 하나를 원한다."
부인은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었다.
소녀는 감격에 넘쳐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2월 11일은 첫번째 루르드 발현의 77주년이었다.
그날 성모님은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상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표시하였다.
2월 15일, 소녀는 어떤 기적의 표지를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성모님은 "나를 믿어라. 그러면 나도 너를 믿겠다,
너는 항상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2월 20일, 성모님은 마리에트를 옹달샘으로 인도하셨다.
그날 성모님은 웃지 않으셨다.
그리고 급한 목소리로 "나의 사랑하는 소녀야, 열심히 기도해라,
그럼 또 만나."하고 말씀하셨다
3월 2일 성모님은 마지막으로 나타나셨다.
마리에트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땅 위에 무릎을 꿇고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영복 3단에 이르렀을 때 질풍이 몰아치더니 성모님이 이 소녀 앞에 서 계셨다.
성모님은 오랫동안 미소도 없이 소녀를 바라보고 계시다가
"그럼 잘 있어"하고 말씀하셨다.
그전까지 성모님은 헤어질 때 "또 만나."하고 인사하셨는데
그날은 "잘 있어"라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은 또다시 마리에트에게 강복하셧다.
소녀는 기절했다. 그날 소녀는 성모님이 떠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곧 이어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소녀의 기족은 모두 모범적인 신자가 되었다.
소녀는 거듭거듭 이야기했다.
조금도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가 없었다.
하던 말을 고쳐 말하는 일도 없었다.
의사, 심리학자, 기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소녀를 시험했다.
많은 기적이 발행했다.
이점에 있어서는 루르드와 견줄 만했다.
이단자와 이교도들의 회개가 꼬리를 물었다.
1942년 독일군 점령 당시, 주교는 '바뇌의 성모'를 공식적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1947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5년간의 계속적인 기도와 관찰을 거친 오늘,
이와 같은 승인을 선언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참으로
기뻐해 마지 않는 바이다."
성모님이 요청하신 성당은 곧 착수되어 1933년 8월 15일 준공을 보았다.
1948년에는 또 하나의 새 성당을 기공했다.
마리에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네델란드의 한 세일즈맨과 결혼했다.
미국의 한 군종 신부는 1944년 발지 전투에서 참가하던 중
마리에트 부부와 15개월 된 아기가 미군 점령 지역의
한 조그만 집의 지하실에서 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 어찌하여 보랭의 발현과 바뇌의 발현은 시간적으로
거리로나 그렇게 긴밀히 연결되었을까?
혹자는 대답 대신 이렇게 반문할는지도 모른다.
즉, "하느님의 섭리를 설명할 수 잇는 자는 누구냐?"라고.
벨기에의 사정을 잘 아는 한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성모 마리아는 열심한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가 선조의 유산인 신앙으로부터
그 국민을 이간시키려는 냉소자들과 영신적인 늑대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 나라와 그 주위를 언제나 맴돌고 계신다."
성모님께 바치는 노래...이시몬 작사,작곡 /이종철 신부님 편곡
1)해와 같이 찬란하고 달과 같이 아름다운
저 여인은 누구신가
별과 같이 반짝이고 저녁노을 위에 계신
저 여인은 누구신가
성모여, 우리 위해 빌으소서
성모여, 이 노래를 당신께 바칩니다.
2)우리 위해 기도하고 우리 위해 눈물 흘린
저 여인은 누구신가
식은 태양 덥히시고 어둔 달을 밝히시는
저 여인은 누구신가
성모여, 우리 위해 빌으소서
성모여, 이 노래를 당신께 바칩니다.
3)우리 가정 돌보시고 우리 가족 지키시는
저 여인은 누구신가
거센파도 달래시고 성난파도 재우시는
저 여인은 누구신가
성모여, 우리 위해 빌으소서
성모여, 이 노래를 당신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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