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부터 굵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를 보며, 원하던 장마빗속의 여행이
될 것이라 기뻤다.
손꼽아 기다리던 장마비, 드디어 내일 출발!
토요일 새벽, 장마 비를 찾아 떠나는 여행 날,
몇 번이고 창밖을 봐도 어제 저녁 내리던 그 굵은 빗줄기는 보이질 않는다.
비옷을 챙기고, 우산을 챙기고,
어느 회원인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상식으로 이해 하기엔 조금은 다른 사람들.
비를 찾아, 비오는 날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려 일정을 잡고 떠나는 사람들,
뭔가 싫은 소리 한마디씩은 듣고 집을 나섰음이 틀림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버스 안은 온통 즐거운 웃음이다.
이 버스 안은 장대같은 비가 차창을 두드리지 않아서들 수군수군 걱정이다.
열목어가 차가운 물을 찾아 상류로 몰려 온다는 강원도 인제의 내린천,
내린천 상류 칡소폭포는 어제내린 비로 황토빛이 되어 급류를 이루며 흐르고 있다.
거센 물줄기가 내는 우렁찬 소리가 거침이 없다. 거센 물살로 물줄기를 거슬러 튀어
오른다는 열목어의 행군을 볼 수는 없었지만 폭포 아래의 넓어진 강폭과 자갈길을
걸으며 저 멀리 보이는 폭포를 바라보는 것도,
폭포 한 가운데서 휘몰아 치는 소리에서 한발 물러서 관조할 수 있는 묘미가 있어 좋다.
내린천 살둔 마을은 싱싱한 고랭지 채소들로 푸르렀다. 싱그럽게 자라고 있는 양배추,
줄호박, 배추는 온 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실하게 가지가 휘도록 달려있는 고추는 몇몇
도시 여인네들의 손길을 유혹하고 있었다.
마을 길을 벗어나 내린천 옛길을 접으며 빗방울이
제법 후득 후득 우산 위를 두드리고 있다. 물 고인 황토 흙길을 걷는 철벅이는 발자욱 소리,
우산을 두드리며 튀어 나가는 빗방울 소리,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 그 모든 소리는
하나의 화음을 이루며 고요하던 옛길과 마을을 가득 채워 나간다.
허름한 농가 앞 뜰의 장독대는 빗물에 씻겨 갓 세수한 해맑은 얼굴처럼 빛이 나고, 장독대
뒤에 심어진 분홍 가시꽃이 순박한 시골 아낙처럼 수줍다. 왜 저 연분홍 빛은 싸아한 바람
한점 스치고 지나 가듯, 짠한 서러움을 몰고 오는 것일까.
계곡을 낀 산 아래 빈 농가 한 채. 지나는 길손의 눈길을 모은다. 고요하고 적막하게, 그저 덧없는
세상사 내려놓고 마음 쉬게 하고 싶은 쉼터였으면. 한번쯤 꿈꿔보는 소망.
텅빈 오두막 집 뒤로 안개가 살금살금 내려와 산허리를 감고 있다.
비 안개 자욱한 산길을 걷자던 무심재님들의 꿈이 이루어질 번했던 곳은 운두령 고갯길 계방산
에서다. 계방산 산길을 오르는 가파른 나무 층계에 서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우산을 뒤집어
놓는다. 멀리 비구름에 쌓인 산 능선이 보이고, 저만한 구름이면 비안개는 우리를 휘감으리라,
조심스레 물푸레나무 숲길을 들어선다. 아스라이 여린 비안개 속에서 안개는 우리를 휘 감았
는가 했더니, 어느새 살그머니 그 모습을 감추고, 빗속에 더욱 푸르고 선명한 나무 숲길을 보여
준다. 비안개가 감쌌다 내쳤다를 장난처럼 계속하는데 어디선가 아련한 피리 소리가 들린다.
바람결인 듯, 꿈결인 듯, 비 내리는 숲 속에서의 그 소리는 아주 기묘한 느낌과 상상을 끌어내며
흐른다. 비안개가 우리를 휘감고 흐르듯, 그 소리 또한 우리 귓전을 스치며 흐르고 있었다.
무심재님들 중 하나, 쪼마리(닉)님의 단소 소리였다. 산 중턱 물푸레나무 숲 속에선 단소의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단아한 쪼마리님의 친구는 악보를 들고 있고, 악사인 쪼마리는 단소의 구슬픈
가락으로 모든 마음들을 흔들고 있고, 어쩌다 바람이 흔들어 놓은 물푸레 나무 숲의 몸짓으로
후두득 떨어지는 빗방울은 받쳐 든 우산을 깨우고 있고.
단소 소리에 심취한 눈빛들은 점점 깊어지고 있고,
오늘 장마비 찾아 떠난 하루 일정은 한여름 낮에 꾸어 본 백일몽이었다.
신발 사이로 스며든 황토길 빗물,
황토빛으로 불어난 내린천 계곡과 칡소 폭포의 거센 물줄기,
빗물 뚝뚝 떨어지던 분홍 가시꽃,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던 텅빈 산자락 아래의 오두막집,
비안개와 숨박꼭질 하던 물푸레나무숲,
그리고 꿈 속 어디선가 들렸던 아련한 단소 소리가 안개처럼 흐르던
비내리던 계방산.
먼 산에 흐르던 비 구름의 흐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