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면동의 여러 명소들
▲ 월산대군 태실을 품은 태봉(태봉근린공원) |
우면산 동남쪽에는 서초구의 일원인 우면동(牛眠洞)이 자리해 있다. 서초구의 서남쪽 끝이자
경기도 과천시와 살을 맞대고 있는 변두리로 우면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는데, 형촌과 식
유촌,
송동, 성촌 등 1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시골이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주택과 아파트들이 마구 들어섰다. 비록 적지 않게 성형은 되었으나 우면산 자락에
자
리해 있고 녹지가 많아서 전원 분위기는 조금 남아있다.
우면동 한복판에는 태봉이란 조그만 언덕이 있다. 우면지구를 개발하면서 언덕 주변을 손질하
여 태봉근린공원(이하 태봉공원)으로 삼았는데, 그 언덕 정상에 태봉의 주인인 월산대군 태실
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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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산대군 태실로 인도하는 숲길 -
수풀의 패기가 가히 천하를 찌른다. |
태실로 가는 산길은 수풀이 살벌하게 우거져서 그렇지 경사는 거의 느긋하다. 숲으로 들어서
니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 공기부터가 다르며, 강렬한 햇살도 숲의 기운에 눌려 옆으로 비켜
간다. 공원에서 3분 정도 오르면 그 산길의 끝에 태실이 모습을 비춘다. |
▲ 월산대군 이정(月山大君 李婷) 태실 - 서울 지방기념물 30호 |
태봉 정상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월산대군 태실은 태실비(胎室碑)와 석함(石函) 1기로 이루어
져 있다.
태실(胎室)이란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탯줄을 버리지 않고 태항아리에 넣어 특별
히
엄선된 명당(明堂) 자리에 봉안한다. 조선의 군주는 총 27명, 그들의 아들, 딸까지 합치면
수백 명이 넘으니 태실도 그만큼 조성되었을 것이다. 허나 정작 서울 토박이 태실은 월산대군
태실이 유일하다.
태실비는 난쟁이 반바지를 2번 접은 정도의 매우 작은 크기로 비신(碑身)과 비석 받침이 하나
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月山君婷胎室)'이라 쓰여있어 태실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으며, 뒷쪽에는 '천순6년 5월18일 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 立石)'이라 쓰
여있어 1462년 5월에 세웠음을 속삭이고 있다.
태항아리를 머금던 석함은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데, 안에 담긴 태항아리와 지석(誌石)은 왜정
때 싹 털려 지금은 왜열도 아타카(安宅) 콜렉션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그 항아리가 희소가치
가 대단했던지 왜열도의 어느 미술잡지에 세상에 딱 2개 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소개되기
도 했다.
<항아리의 출처도 나와있음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현 우면동)'>
서울 유일의 태실이자 제자리에 원형대로 남은 태실이고, 조선 왕실의 안태(安胎) 의식이 담
긴 현장으로 2010년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럼 월산대군은 누구일까?
월산의 이름은 이정,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1454년 세조(世祖)의 맏아
들로 일찍 죽은 덕종(德宗, 추존된 묘호)과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성종의 친형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할아버지인 세조의 귀여움을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다. 1460년 월산군(
月山君)에 봉해졌고, 1468년 동생인 잘산군(乽山君)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었다.
1469년 작은아버지인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 1순위로 지목되었으나 한명회(韓明澮
)와 소혜왕후의 뜻으로 동생인 잘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성종이다. 성종은 형을 달래고자
1471년 월산대군으로 급을 올렸으며, 그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하여 전지(田地
)와 노비, 구사(丘史) 등을 넉넉히 주는 등 성의를 보였으나,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좌리공신
이나 받아야 되는 자신의 처지에 열불이 나 자연으로 뛰쳐나가고 만다.
월산은 양화도(楊花渡, 양화대교 주변) 북쪽 언덕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을 수리해 망원정(望
遠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살림을 차려 매일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팔자 좋은 삶을
누렸다.
그러다가 어머니(소혜왕후)가 병에 걸리자 입궐하여 극진히 간병을 했는데 너무 무리를 했는
지 그만 1488년,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은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中善)의 딸로 소생은 없었으며, 첩을 통해 아들 2명을
얻었다. 또한 1473년까지 집에 별묘(別廟)를 세워 아버지 덕종의 제사를 주도했으나 덕종이
종묘(宗廟)에 봉안되면서 그의 위치는 종실의 일부로 떨어지게 된다.
월산은 학문을 좋아해 왕족을 위한 종학(宗學)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경사자집(經史子集)
을 두루 섭렵했다. 성품은 침착 결백했고, 술과 산수를 좋아했으며 부드럽고 율격(律格)이 높
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속동문선(續東文選)에 그의 시가 여럿 실려 그의 시심(詩心)을
보여
주며, 저서는 풍월정집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월산의 저택은 지금의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자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망친 선
조(宣祖)와 신하들은 1593년 2월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모두 파괴된 상태라 머물 곳이 여
의치 않았다. 이에 선조는 크게 발작을 하며 거처를 찾으라고 다그쳤는데 다행히 월산의 저택
이 멀쩡하게 살아있어 그곳을 임시 궁궐로 삼고, 주변 집을 몰수해 궁역(宮域)에 넣었다.
그
것이 바로 덕수궁<경운궁(慶運宮)>의 시작이었다. 이후 궁궐을 보수하면서 월산의 집은 철거
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을 메운 건물은 모두 고종(高宗) 때 지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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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
▲ 서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
석함에 담겼을 그 귀한 알맹이는 언제나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안그래도 작은 태실, 알
맹이까지 강제로 털렸으니 태실의 우울한 그늘은 언제나 거두어질지 모르겠다.
*
월산대군 이정 태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91-1 |
▲ 형촌마을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28호 |
태봉 북쪽에는 형촌(荊村)마을이 자리해 있다. 1740년대에 풍양조씨가 들어와 터를 닦은 마을
로 당시 이곳에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가시내꿀(또는 샛말)이라 불렀는데, 그것을 한자로 표시
해 형촌마을이 된 것이다.
풍양조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대까지 이어오다가 1963년 경기도 시흥군(始興郡)에서 서울
로 편입되었으며, 강남 개발 이후 마을 개량 사업을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개량 사업으로 인해
주민 절반 이상이 마을을 떠났고 그 틈을 타 외지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하여 토박이 주민의
평범한 주택과 졸부들의 현기증 나는 저택과 빌라가 공존하는 어색한 현장이 되었다.
형촌에는 수백 년 묵은 보호수 2그루(회화나무와 돌배나무)와 석불, 성정승묘, 우면산 자연생
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는데,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230년 묵은 나무로 높이 12
m,
둘레 280cm이다. 골목길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주택들이 바짝 붙어 있어 나무의
생육
공간은 넉넉치 못하다. 마을의 오랜 내력을 알려주는 존재라 예우 차원에서 나무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 마음 편히 살게끔 해주는 것이 마땅하나 사람들의 욕심이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하여 골목길 중앙과 집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나무와 사람, 차량 서로가
불편하게 되었다. |
▲ 회화나무 그늘에 깃든 우면동 석불 (동자상미륵) |
회화나무 북쪽 그늘에는 조그만 석불이 우두커니 서 있다. 이곳에선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힘
을 지닌 동자상 미륵 또는 미륵불(彌勒佛)로 여기며 신성시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그에게 제를
올렸다.
허나 토박이 주민들이 많이 빠져나갔고 우면동의 오랜 무형자산인 우면두레도
희미해진 상태
라 그에 대한 숭상심도 많이 떨어져 나무의 밑도리나 뚫어지라 바라보며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맞아야 되는 우울한 신세가 되었다. 만약 그에 대한 숭상이 여전했다면 그를 위한 집을
세우
던지 무슨 배려를 했을 터인데 그런 것은 없다. 그러니 석불은 마냥 나무에 의존하고 있다.
석불의 높이는 1m 정도로 그나마 밑도리는 땅 속에 묻혀있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
르겠으나 나무 밑도리를 바라보게 배치한 것도 이상하며 밑도리도 모두 끄집어내 온전한 모습
으로 세상 앞에 섰으면 좋겠는데, 마을 사람들이나 서초구청, 서울시에서 그런 의지까지는 없
는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얼마나 울었길래 얼굴이 죄다 지워진 것일
까?
그저 얼굴과 귀의 윤곽만 확인이 가능하다. 머리에는 돌갓을 쓰고 있는데 고려와 조선의
많은
미륵불들이 돌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로 조성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성시기는 조선 너머까지는 갈 것 같지는 않고 형촌마을이 형성된 1740년대 이후 마을 수호
신으로 세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얼굴이
저 지경이 된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불우한 시간을
보내며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이곳으로 가져와 마을 수호신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설
마 마을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못된 짓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돌갓을 쓰고 있으니 자연의
괴롭힘의 의한 얼굴 훼손도 적을 것이다.
그가 동자상미륵이 된 것은 키가 어린이처럼 작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동네 미륵
불로 서울시에서는 그에 대한 조사를 벌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씌워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의 어두운 얼굴도 조금은 밝아지지 않을까?
* 형촌 회화나무, 석불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18-4 |
▲ 망루근린공원 정상에 자리한 정자 쉼터 |
형촌마을에서 형촌천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를 타고 바깥으로 나오니 서초네이처힐2단지
서쪽
에 자리한 망루근린공원(이하 망루공원)이 마중을 한다. 처음에는 이 땅에 흔한 근린공원으로
여겨 넘어가려고 했으나 공원 안내도를 보니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겉보기와 달
리
이곳에는 구석기시대부터 근대까지 여러 시대를 초월한 유적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은 우면동 유적이라 불리는데, 망루공원을 중심으로 태봉 주변과 서초네이처힐단지
에 분포되어 있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2008년 이후 우면지구와 우면산터널 도로를
닦는 과정에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2010년까지 발굴조사를 거치면서 수백 점의
유물
이 쏟아져 나왔으며, 발굴이 끝나자 유적이 집중적으로 나온 서초네이처힐2단지 서쪽을 공원
으로 꾸며 망루공원으로 삼았다.
허나 유적은 모두 흙과 수풀로 덮었고, 그 위에 조그만 표지를 세운 것이 전부라
이곳이 유적
지란 기분이
거의 나질 않는다. 일부 유적에 한해 속살을 드러내고 유리 보호막을
설치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 부분이 참 아쉽다. 게다가 망루공원 외에 유적은 아파트와 도로로 죄다 밀어
버려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땅의 개발의 칼질은 참으로 천박하기 그지 없어
옛 유적이고 사람이고 죄다 갈아버리는 못
된 습성이 있는데 우면동 유적은 그나마 2년 동안 발굴조사라도 했고, 일부는 공원이 되면서
그런데로 살아남아 다행이다.
이곳 유적은 구석시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난 문화층부터 신석기시대 야외 화덕 자리, 백
제와 신라의 마을 유적과 무덤 흔적, 신라 후기부터 고려까지 이용되었던 논과 물길의 흔적,
조선시대 구들과 무덤, 기와가마터, 근대 수레길 등이 확인되었다. 구석기 문화층은 태봉 남
쪽과 동쪽에서 나왔는데, 긁개와 밀개, 여러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곳이 발견됨으로써 서울
의
구석기 유적은 면목동(面牧洞) 유적과 함께 2개가 되었으나 아쉽게도 둘 다 개발의 칼질로
사라졌다.
백제시대 마을 유적은 망루공원 일대에서 11동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4호 집자리가
이들 마을 유적의 중심부이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시루, 병, 굽다리 접시, 뚜껑, 장군, 납작
밑단지
등의 토기가 나왔고, 도끼, 끌, 손칼, 화살촉, 창의 물미 등의 철제품과 가락바퀴, 소
형 절구
등의 석물도 나와 당시 생활상을 알려준다. 특히 재가 나온 집터가 많아 화재로 소실
되었음을
알려주는데 아마도 백제와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서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백제와 신라의 무덤도 여럿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집자리 유적과 같은 언덕에서 발견되
었다. 무덤은 마을이 사라진 이후 들어선 것으로 백제의 무덤은 2기가 나왔는데 모두 굴방무
덤이다.
백제 1호분은 네모진 돌방과 다른 돌방으로 연결되는 널길이 덧대어진 모양으로 돌방은 길이
330cm, 너비 336cm이다. 이들 묘는 귀족이나 지방 세력의 묘로 여겨지는데, 돌방 바깥 위쪽에
는 눈썹
모양의
도랑이 둘러져 있으며, 살포와 도끼낫, 창의 물미를 비롯한 여러 철제 유물과
관못, 꺽쇠 등도 나와 목관(木棺)을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신라의 무덤은 신라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것들로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룬다. 여
기서는 굽다리사발과 둥근밑항아리, 손칼 등이 발견되었다. |
▲ 백제시대 집터 1호 자리 |
망루공원 정상에는 조촐한 정자 쉼터가 있다. 그 안에는 여기서 발견된 삼국시대 마을 유적과
무덤 유적에 대한 설명문, 유적과 출토유물 사진이 걸려있어 이곳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와준다. 정자 주변에는 집터와 고분이 발견된 자리에 조그만 표시를 설치했는데, 유적은
모
두 흙과 수풀로 덮어버렸다.
구석기부터 근대까지 수천 년의 흔적이 복합적으로 담긴 이 땅에서 흔치 않은 유적으로 국가
사적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부여하여 어엿한 사적(史蹟)공원으로 꾸몄으면 좋겠다.
그냥 이렇게 조그만 동네 공원의 일부로 썩히기에는 장대한 세월을 이어져 내려온 그들 유적
이 너무 아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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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 석실묘 6호 자리 |
▲ 백제시대 집터 5호 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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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시대 집터 4호(왼쪽)와
6호(오른쪽) 자리 |
▲ 삼국시대 석실묘(石室墓) 1호 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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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아리송한 석곽묘 1호 자리 |
▲ 시대가 아리송한 석곽묘 2호 자리 |
▲ 식유촌(植柳村)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5호 |
우면동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망루공원을 보너스로 둘러보고 과천 방향 47번 국도(중앙로
)를 따라
식유촌으로 이동했다.
식유촌은 우면동의 서쪽 끝이자 서초구의 서남쪽 끝에 자리한 시골마을로 경기도 과천시가 바
로 코앞이다. 마을 이름은 버드나무를 심는다는 뜻으로 우마니(우면동의 옛 이름) 마을 근처
인 이곳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허나 마을 이름과 달리 버드나무는 없
다 싶이 하여 그 이름은 무색해졌다. (종종 이름을 혼돈하여 석유촌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음)
식유촌에는 마을의 장대한 내력을 알려주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다. 그는 약 360년 묵은 나무
로 높이 18m,
둘레 3.8m에 이르며 예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존재로 1945년에 나무에서 구렁이
4마리가 튀어나와 사방으로 사라졌다고 하며, 이내 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식유촌 회화나무를 끝으로 우면산, 우면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식유촌 회화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595-5 |
첫댓글 산 이야기에서 사찰이 빠지면 섭섭하지요.
우면산 대성사, 구경 잘 합니다.
마애불지기님, 행복한 나날 되세요.()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주 토요일에 오랜만에 연등회 연등축제가 열리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