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인 줄 알았는데 악마였다는 설정의 공포영화들이 많습니다. 예전의 ‘처키’가 바로 그런 영화였습니다. 귀여운 처키 인형에 도둑의 영혼이 들어가 사람을 해치려한다는 설정입니다. 인형이 분명히 움직였는데 배터리를 확인하니 배터리가 없는 것을 발견할 때의 공포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요즘엔 제임스 완 감독의 ‘애나벨’이 있습니다. 인형을 통해 마귀가 사람의 영혼을 빼앗으려 한다는 내용입니다. 성당의 유리로 쓰였던 곳에 가두어놓고 매주 사제가 와서 기도하고 성수를 뿌려주지만 누군가 호기심으로 그 문을 열었다가는 큰일이 벌어집니다. 그 안에 숨어있는 마귀가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형은 그냥 죽어있어야 가장 예쁩니다. 인형이 칼 들고 서 있는 포스터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보일까요? 나도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또 다른 사람도 나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런 많은 만남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사람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밀쳐내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내가 위 공포영화처럼 겉모습은 인형이지만 손에는 칼이 쥐어져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왜 하늘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일까요? 어린이는 무언가 달라고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의 손에는 칼이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안아주면 만족하는 인형과 같습니다. 어린이는 예수님께서 그저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께 뭔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예수님을 좋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형에게 준 재산을 자신에게도 주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가진 것이 없어야 어린이처럼 욕심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내 손에 쥐어진 칼입니다.
어린이는 왜 욕심이 없을까요? 무언가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먹어 봐야 맛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먹어보지 못해서 맛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고, 힘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권력을 쥐고 싶은 것입니다. 이 욕구가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내 손에 쥔 칼이 됩니다.
톰 행크스의 ‘그린마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두 여자 아이의 살인누명을 쓴 몸집이 거인 같고 험악하게 생긴 흑인 죄수와 그를 지키는 간수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처음엔 그 거인에게 잡히면 자기 목숨도 위험할 것 같아서 항상 주의했지만 나중엔 마음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자신의 병도 고쳐줍니다.
사실 그 흑인은 죽어가는 두 아이를 살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 생김새만 보고 사람들이 그 사람이 죽였다고 믿어버린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인데, 어린이들은 사적인 욕구가 적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 줄 아는 능력이 있어서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어린이처럼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욕심이 없다는 말은 ‘가난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