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를 꺼려하는 베트남 사람들
얼마 전 한 지인(知人)이 북부 베트남의 한 성에 3성급 호텔을 짓는데 한국어를 잘 하는 통역원을 한 명 구해달라고
전화가 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성으로부터 호텔신축허가를 받는데 무려 3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인내가 필요하다. 이것은 베트남인이 속을 썩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와 행동방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새로운 것에 대한 변화를 매우 꺼려하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베트남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거주하는
촌락공동체의 폐쇄적인 특징 때문이다. 특히 북부베트남이 그러하다.
베트남정부가 개방이후 공업화 / 현대화의 구호를 부르짖을 때 베트남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나라가
곧 고속도로를 만들고 기술전문대학을 많이 세울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업화/현대화를 외친지 15년쯤 되어서야 이제 겨우 고속도로와 기술대학들이 하나 둘씩 세워지고 있다.
그동안 이들이 공업화 / 현대화를 위해 사회간접시설을 확충하는 것을 지금까지 몰라서 시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변화를 꺼리는 보수적인 사고의 성향 때문이다.
10년 전의 일이지만 필자가 북부 홍강유역 농민들에게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 때 아주 놀라운 대답을 얻었다.
그것은 60세가 되었어도 거의 촌락 밖으로 20km 이상 멀리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하노이 인근지역에서 근무하는 우리 기업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하노이에서 차로 1시간 반도 걸리지
않는 비엣 찌(Viet Tri) 지역에서 아직 수도 하노이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노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이(遷移=이동)를 꺼려하는 현상도 역시 새로운 것에 대한 변화를 싫어하는 베트남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보수적인 특징은 베트남인에게 전통적인 가치들을 유지하는 일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한편, 공업화와 현대화의
과정에서는 한 큰 장애 요소가 되고있다. 그래서 많은 외국회사들이 베트남에 투자할 때 일의 속도에 있어서 힘들어한다.
부지(敷地)를 정리하여 생산 공장을 세우고자 할 때 베트남측은 대단히 느리다. 왜냐하면 주민들의 봉쇄를 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적정선의 보상으로 주민을 이주 시키는 것이 민주국가 보다는 쉬운편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만만치가 않다. 그 이유가 보상을 더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변화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필자는 베트남의 한 식자의 평론을 언급하고 싶다. “당신들 한국회사들은 광고를 바꿀 때 지나치게 많이
수정을 합니다. 베트남인들은 광고가 자꾸 바뀌면 불안합니다. 일본회사들은 광고의 형식을 바꿀 때 눈치채지 않게
조금씩 바꾸면서 베트남인들이 언제나 기억하고 있는 핵심 문장을 고정시켜 놓습니다." 기업 마케팅도 상대국의
문화를 고려하여 만들때 그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잔인함
1. 압도적인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
(1) 제 5 특전단 (그린 베레) 소속의 초임 장교로 작전 지역내의 작은 마을을 드나 들며 대민 지원과 함께 적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베트콩의 접근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 소위가 있었습니다.
베트콩을 겁내며 미군의 접근을 꺼리고 비협조적인 다른 마을의 촌장들과 달리 이 마을의 젊은 촌장이 많은 도움을
주자 이에 고마움을 느낀 소위는 인간적인 친교와 더불어 마을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 어귀에 들어선 그들의 소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임산부인 촌장의 부인이 배가 갈라진 채 로
거꾸로 나무에 매달려 있는 참혹한 광경이었다고 합니다.
(2) 미군들에 의해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못했던 평균적인 남 베트남군 장교 와는 달리 강직하고 청렴한 젊은 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들도 그가 많은 회유와 협박을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이 사람을 다른 부대로 전속 시킬까 고민도 했지만 그가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그 만큼 업무를 잘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계속 근무를 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러차례에 걸친 회유와 협박이 모두 실패한 베트콩들은 500 km나 떨어진 초급 장교의 노모가 살고 계신 그 장교의
시골 고향으로 찾아가 노모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2. 약자라도 누군가에게는 폭압적인 강자가 된다
(1) 중국, 프랑스, 미국으로 이어지는 초강국과의 싸움을 수년 동안 계속해온 것에서 알수 있듯이 베트남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또 그 만큼 배타적이기도 했는데요. 베트남내 중부 고원지대에 살고 있는 고산 부족들 (몽타냐르)
을 베트남인들은 멸시하고 핍박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라는 모토로 그들 소수민족들에게 접근하는 집단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미군
특수부대원들.
"그 당시의 우리들은 총을 든 문화 인류학자 같았다" 라고 회고하듯 미군들은 소수 민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약품과 식품을 들고 가서 그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우호의 제스추어로 고산부족들의 민속주도 마시고 전통
의상을 입고 의형제 의식을 치르기도 하는 등 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데요. (이런 말을 하는 다큐멘터리속의
미군도 미국 남부사람이니 뭔가 통하는게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봄.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미군들 중에는
중서부 사람들 (MID-WEST) 이나 남부 출신들 (장교들) 이 많았습니다.)
베트남인들의 냉대에 시달리다 미군들의 관심과 지원을 접하고 마음을 연 고산 부족들은 미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미군이 지급한 무기로 무장하여 지역 방위대를 창설하기도 하고 추락한 미군 비행사 구출에 나서기도
하고 마침내 미군의 비밀 특수부대에 가담하기도 합니다.
(2) 미군을 놀라게 한 일화들 몇 개
고산 부족의 전통 술을 마시고 얼큰히 취한 미군이 자신의 소지품과 군복을 마을의 광장에 두고 온 것을 뒤늦게
기억하고 뒤늦게 달려가 보니 귀중품이 그대로 인채로 놓여 있었고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도 남의 물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부대 내, 외에서 남 베트남인들의 거짓말과 적개심에 익숙해져 있던 미군들은
고산부족의 정직함에 새삼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의 진술도 미군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겠지만 뭐, 남 베트남인들이 원래 인간성이 나빴겠습니까 워낙
전란과 외세에 시달리다보니 그렇게 되었겠지요.)
왜소한 체구 이지만 평소 전투에서 보여준 침착함과 남다른 용기로 미군 동료들의 존경을 받던 병사가 식당으로
들어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같은 소수민족 병사를 망치로 머리를 난타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란 미군들이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물어보자
"이 자가 내 약혼녀에게 무례한 말을 하며 희롱했다. 나는 그런 모욕을 참을 수 없다" 고 답했다고 합니다.
(3) 미군의 특수부대에는 남 베트남인, 베트남내 소수 민족등 베트남 사회의 하층에서 많은 핍박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 다수 가담하였습니다. 따라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대한 이들의 원한은 미군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 였는데요
어느 정찰 작전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베트콩을 생포하여 철수를 서두르던 시점에 베트콩 포로와 소수민족 대원간에
말 다툼이 벌어지자 미군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포로를 끌고 간 소수민족대원들은 포로를 맨손과 총으로 때려서
죽여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특수부대에 전입해온 장교는 방금 벌어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부하인
고참 부사관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 !"고 묻자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냥 모른 척 하세요" 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고 합니다.
베트남의 저력
베트남에 처음 온 친구를 위해서 나는 오늘 하루 가이드 노릇을 하기로 되어 있다.
대통령궁, 전쟁범죄박물관, 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난 친구는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두 장의 사진을 꼽는다.
첫번째 사진의 주인은 우옌반쪼이이다. 미국의 국방장관 맥나마라가 호치민에 왔을 때 폭탄을 설치했다가
사형을 선고받은 전기공의 사진은 누구에게나 강렬한 이상을 준다.
사형집행 직전 눈가리개를 벗어던지고 "호치민 만세", "베트남 만세"를 외치고는 스물 네살의 나이에 총살당한 노동자.
두번째 사진의 주인은 '모아 디 탕'이다. 반정부 투쟁으로 검거된 미모의 여대생이 법정에서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남긴 최후 진술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고 김병곤이 "영광"이라고 외쳤던 만큼이나 통렬하다.
"당신들, 미국의 앞잡이 정권이 앞으로 20년을 더 존재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 보라."
당시 스무 살이었던 그녀는 지금 국영 베트남 관광그룹의 사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것이 지나간 기억이라면 지금은 무엇이 남아있을까.
나는 베트남에 오는 한국인들이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베트남의 미국 영사관을 꼽고 싶다.
서울의 심장인 광화문 복판에 있는 미국 대사관과 한번 비교해 보고 갈 일이다. 모두들 기억할 것이다.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온종일 길게 늘어서 있던 미국대사관 뒷담 아래의 한국인들을.
몇 해 전 여름 실내 대기소를 만들 때까지, 한국인들은 50여 년을 오뉴월 뙤약볕 아래에서도 동지섣달 눈보라
아래서도 거지마냥 서서 기다려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20여년이 더 지나서 호치민에 다시 영사관을 개설한 미국은 한국에서 수십 년 동안 해왔던
버릇대로 베트남 사람들을 영사관 높은 담벼락 아래에 줄을 세웠다. 사흘이 지나지 않아서 베트남의 여론은 들끓었다.
베트남 정부가 영사업무 중지요구와 함께 미국에게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너희들이 뭔데 우리 국민을 길거리에 줄 세우느냐."
그 줄은 일주일 만에 사라졌다
베트남 문화에 대한 이해
1992년 말 한국과 베트남의 국교가 수립된 이래 양국관계는 전체영역에서 발전하였고 1990년대 말에는 양국이
교역순위에서 4번째 국가가 될 정도로 경제협력은 급성장하였다. 정치, 외교, 군사, 과학기술, 교육 부문에서의
협력관계도 괄목할 만한 정도로 나아졌고 최근에는 문화 영역에서 활발한 교류를 보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베트남에서 한류(lan song Han Quoc)이다.
얼마 전 한 인터넷 기사가 베트남 당국이 그 동안 양국 간의 문화교류가 일방적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통상에 제재를 가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보도하였다.
주(駐) 베트남 한국대사관에 사실여부를 확인한 결과, 올해 초 베트남에서 개최된 한류관련 세미나에서 나온
의견에 대한 기자의 추측이 가져온 오보임이 밝혀졌다.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베트남 학에 오랫동안
매진한 필자는 베트남의 문화가 국내에 충분히 소개되지 않고 있음에 동감하며 우리 대중이 이러한 상황
으로부터 직․간접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다.
한 나라의 문화를 한 두 단어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베트남 문화는 서로 다른
문화가 혼합된 가운데 정제(整齊)된 문화이다. 베트남 문화는 세계적인 문화가 충돌하면서 형성된 문화이다.
지리 문화적으로 베트남은 북쪽의 중국 문화와 서남쪽의 인도 문화의 접변 지역에 위치한다. 외부적 영향으로
이 양대 문화는 베트남 민족 문화의 형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의 경우, 서기전 2세기부터 베트남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불교와 유교식 종교와 사회사상을 전하였고 주자가례와 세시풍속 등 각종 생활
관습과 의식주와 관련된 규범을 통해 작은 중국을 만들어냈다.
인도의 경우, 해로를 통해 일찍이 기원을 전후하여 베트남 중부에 자신의 문화를 전래시켰다. 짬 빠
(Champa 占城)라는 힌두문명에 기초한 국가는 12세기까지 존립하면서 베트남에 힌두 및 이슬람 사상과
건축물 양식을 남겨주었다.
비록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베트남 문화는 결코 외래문화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았다.
외래문화가 도래하기 전에 베트남에는 이미 자기 문화를 형성하였었다. 선사시대에 해당하는 서기전
700년 전 당시 베트남인은 동 썬(Dong Son)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지녔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베트남인이 만든 청동고(Bronze Drum)는 표면과 옆면에 새겨진 생활상과
부조기술로 볼 때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지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청동고는 당시 오늘날 베트남 전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에서까지 발견되었음을 볼 때 당시 베트남은 인접지역은
물론 동남아시아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 형성 및 발달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인은 중국과 인도 문화라는 거대한 도전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자연 환경적, 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요인은 베트남 문화를 더욱 복잡하고 다양하게 하였다.
베트남은 북단에서 남단까지 약 1,650km 에 달하는 긴 영토를 갖고 있고 기후적으로는 북부 아열대, 남부는
열대 몬순 기후에 해당한다.
국토의 대부분 산악지대로 크고 작은 산봉우리(嶺)가 북부, 중부, 남부로 국토를 나누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동쪽의 산악지대, 평야지대, 서쪽의 해안지대에 주민들이 정착해 삶의 터전을 내렸다. 이 같은 자연 환경적
요인은 각 지역의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친환경적 의식주 문화를 형성토록 하였다.
그 결과, 해발 3,000 미터의 북부 산악 고지대의 차가운 기후에 속에서 사는 주민의 주택과 복장은 남부
해안지대의 무더운 날씨에서 사는 어민과는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54개 소수민족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전통문화를 계승, 보존함에 따라 국가적으로는 다소
분열적이면서도 풍요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언어 계통적으로 보면, 중국․티벳어족에 속하고 인종적
으로는 북방의 몽골로이드와 남방의 말레이족이 결합되는데 여기에 자신들의 고유한 민간 신앙, 관혼상제,
가정교육과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은 베트남 문화의 지역별, 인종별, 언어별 차별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산악지대 소수 민족의 화전, 수렵 및 채집 경제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평야지대의 농업 문화는
여전히 대도시 주민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해안지대의 어민들 사이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해양 문화는 베트남 문화가 지닌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습합(習合) 또는 혼용과정을 설명해 준다.
앞서 약간 소개하였지만 베트남은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많은 외침을 받았다.
외부 침략세력이 지배하는 동안 수행했던 각종 동화정책과 식민문화의 파급효과는 베트남 문화의 순수성을
희석시키는 한편, 동서양의 문화적 특성을 내포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초기 부족국가 형성기 때부터 북방에서 유입된 중국 문화가 남쪽에서 올라온 인도 문화 외에도 베트남은
중국 운남(雲南)성 지역에서 존립하였던 난 짜오(Nan Chao) 국의 따이(Tai) 족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문화 전이를 경험해야만 했다.
특히 이들이 베트남, 라오, 시암, 크메르, 미얀마 지역에 내려와 토착민과의 뒤섞이는 과정을 통해 정착한
이후에도 각기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동족간의 교류를 계속 함에 따라 해당국의 문화가 베트남에까지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근현대에 접어들어서는 서양의 문화가 베트남에 전래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미국과의 정치 군사적 갈등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선교사를 통해 일찍이 서양의 종교 사상을 전파하였던 프랑스는
현재 베트남인이 쓰고 있는 문자를 개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중반이후부터는 군사, 행정, 교육,
사회 영역에서 이전까지 베트남인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들여왔다.
특히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던 코친차이나(Cochinchina) 지역, 그 중에서도 사이공
(Sai Gon)은 '동양의 파리'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프랑스의 문화가 형식과 내용면에서 압도하였던 곳이다.
이 지역은 다른 서양인에게도 결코 생소하지 않았고 20세기 중반이후부터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면서
물질주의, 쾌락주의, 낭만주의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경제적, 지리적, 자연 환경적 요인에 의해 복잡하게 구성된 베트남 문화의 특성의 의식주 문화에서
베어난다. 사회 내 지배계층 혹은 일부 상류계층이 각종 의례를 포함한 공식적인 행사에 참가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베트남인은 의복은 그들의 기후와 경제 활동을 고려하여 매우 실용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열대지역의 전형적인 농업 사회인 베트남에서 대중은 농사일에 편한 복장을 착용하였다. 18세기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양인의 사진이나 그림 속에 나타나는 베트남 남성은 마치 씨름 선수가 메는 샅바 식으로 국부를
가리는 것으로 의복을 대신하였고 여성의 경우, 아오 뜨 턴(ao tu than)이라고 해서 상의는 비키니 수영복
에다 하의는 치마를 두르는 정도였다.
이렇듯 간단하지만 엉성한 복장은 중국의 지배 기간 중 중국관리가 중국인처럼 치마대신에 바지를 착용하라는
명령을 어기면서 지켜온 민족 자존심을 지키고자 그대로 보존하다가 이후 프랑스 식민지배기를 거치면서
서양의 복식을 반영한 전문가가 중국 상해의 복식과 후에 왕실의 복식을 가미하여 오늘날의 아오 자이
(ao dai)를 만들어냈다.
베트남, 특히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지역에 살다보면 우리가 쉽게 예상치 못한 베트남인의 복식을 보게 되는데
여름철의 긴 바지 및 긴 소매상의와 겨울철의 가죽잠바와 코트이다. 일 년 내내 섭씨 29도를 유지하는 남부
호 찌 민시(구 사이공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베트남을 무더위의 남국으로 상상했던 외국인에게는
다소 의아스럽지만 그것은 이미 베트남인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랍인이 디시다샤(Dishdasha)나 아바야(abayah)를 착용하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여름철 뙤약볕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찌는 듯 한 열기를 막기 위해 착용한 이 복장은 팔을 모두 가리는 긴 장갑과 진한 선글라스에
손수건으로 만든 삼각 마스크를 착용해야 비로소 한 세트가 된다. 현지에 출장을 가는 우리 바이어에게
베트남 파트너와 비즈니스 미팅에 입고 나갈 복장은 인천공항을 나설 때까지도 신경을 자극하지만 노이 바이
(Noi Bay)공항이나 떤 썬 ??(Tan Son Nhat) 공항에 내려 시내도 들어서면서 와이셔츠에 넥타이만 매고
다니는 샐러리맨들을 보면서 곧 안심을 하게 된다.
한국을 방문하는 베트남인의 쇼핑 품목가운데 가족 잠바는 필수항목인데 겨울철에 높은 습도를 나타내는
기후가 북서풍이 불면서 체감온도를 더 떨어뜨리고 오토바이가 주요 교통수단인 이들에게 맞바람이 불어
닥칠 때면 '뼈를 깎는' 추위에 견디기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전통적으로 농업사회인 베트남에서 쌀, 야채,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이 주식을 이루었다. 쌀은 1930년대
이미 베트남은 세계 3대 쌀 수출국에 포함된 이후로 계속해서 대표적인 작물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급격히 줄어든 쌀 생산량은 1990년대에 전 국민의 식량을 위한 자급자족을 이루었고 그 결과 베트남은
현재 태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농업을 주업으로 하다 보니 토지는 농민의 재산 중 가장 비중이 컸는데 농사에 사용한 소 역시 매우 소중히
여겨 봉건시대부터 소를 잡아먹는 행위를 금하는 법률을 따로 제정했던 때문인지 베트남인에게 소고기는
인기가 별로 없다. 반면에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베트남 식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돼지는 전통 사회로부터 촌락의 각종 의례나 집안의 경조사 때 기본 식단에서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었으며 닭고기는 오리와 칠면조 등과 함께 베트남이 인류사가운데 최초로 가금류를 사육한
동남아시아 국가 중 한 나라였던 이후로 대표적인 고기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약 3,200km 이상의 해안선을
지닌 베트남에서 생선은 매우 흔한 음식이다. 게다가 수많은 농업용수를 위해 파놓은 연못에서 양식하는
민물생선까지 합하면 베트남인들은 어렵지 않게 생선을 먹을 수 있었다.
비록 쌀이 풍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베트남인이 아침 식사를 길거리에서 퍼(pho 쌀국수)로 대신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고충과 편리성을 위한 선택이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냉장고가 가정에 보급되었지만
전통적으로 날씨는 무더웠으나 따로 냉장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전통 가정은 부엌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던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시장이나 동네 ?? 안(quan an 館食 간이음식점)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쌀이 풍부함에 따라 퍼이외도 분(bun 粉)이라는 얇은 국수가 분 짜(bun cha)와 분 보 후
(bun bo Hue)에 등의 음식에 들어가고, 쏘이(xoi)라는 바나나 잎에 싸서 찐 찰밥과 바인 꾸온(banh cuon)
이나 고이 꾸온 (goi cuon)등 쌀로 만든 쌈이 애용된다. 베트남 음식에서 야채는 결코 빠지는 일이 없다.
베트남인이 야채를 즐기는 데는 전통적으로 농업을 주로 하면서 집주변에 밭을 가꾸어 쉽게 경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등 지방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면서 이를 중화시키려는 음양학적
배려도 담겨 있었다. 특히 베트남은 수많은 향초를 즐겨 먹는 것으로 유명한 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방기가 많은 음식을 섭취할 때 입맛을 자극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한 삶의 지혜로 보인다.
베트남인들은 농업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면서 식사 예절을 중시하게 되었다. 전통적 습관에다 훗날
서양식 문화가 어느 정도 전래되면서 밥은 개인 그릇에 담기보다는 큰 그릇에서 먹을 만큼 덜어 먹는 문화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윗사람이나 손님에게 먼저 덜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개인 공기와 수저는 먼지를
닦아내기 위해 냅킨으로 닦는데 윗사람과 손님에 대해서는 먼저 닦아서 주는 것도 예절에 속한다.
베트남 쌀은 찰기가 덜 해서 우리처럼 젓가락으로 뜰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식사 예절과는 달리 밥그릇을
입에 대고 젓가락을 사용하여 입에 밀어 넣는 식으로 먹는다. 과거에는 식사 때 소리를 크게 낼수록 부의
상징으로 여겼으나 얼마 전부터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음식을 씹는 소리는 내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양식과 외식 문화도 정착하였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생활화된 외식문화를 위해 다양한 종류의 식당과 음식도 생겨났다.
농촌의 전통 음식과는 달리 새로운 음식은 더욱 다양한 조미료, 향초, 식재료가 사용된다.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과 전채, 주식, 후식의 코스 요리, 코냑과 와인에 대한 이해가 폭 넓게 보급되었다.
의복과 식사 못지않게 베트남의 주택 문화는 자연 및 인문 지리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반영한다. 우선 베트남의
가옥은 지역별, 지형별, 종족별로 다양하다. 산악지역에는 냐 산(nha san)이라는 오두막 혹은 판잣집 형식의
주택이 있는데 대부분은 채집과 수렵을 하고 3세대 이상의 대가족이 집단 주거를 하는 소수 민족의 가옥이다.
이는 열대지역 주민들의 대표적인 형식이기도 한 데 짐승, 해충, 습기를 피하기 위해 높게 세운 기둥위에
지은 집이다. 한편 평야지대에는 지표면위에 지은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사에 필수적인
집단 노동력을 담보하기 위해 하나의 촌락은 경작지 가운데 대나무로 쌓은 울타리 안에 50~100가구가 군집
하였고 각 가정은 우리의 전통 농가와 마찬가지로 3~4개의 방에 부엌, 곡간, 창고, 가축우리, 우물 등을 갖고 있다.
한편 도시의 가옥은 좀 더 특이하다. 장사를 목적으로 많은 주민이 밀집한 결과, 각 주택의 전면은 폭이
제한되었고 높이와 길이는 자유로웠다. 1층은 습기로 인해 주거 시설보다는 장사를 위한 좌판을 깔거나
창고로 이용하였고 2층 이상이 주거 공간이었다. 수많은 강가에는 수상 가옥이 지어졌다.
농수로를 따라 세워진 이 가옥들은 산악지대의 오두막과 형식은 유사하였다. 해안의 도서지역에는 해상가옥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주로 어민이었으나 육지로부터 탈출한 범죄자도 있었다. 이들은 조각배에 살림을 차려
어업 활동을 하고 수확물을 해안에서 거래하며 안전한 항구나 섬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편 한 가구에 해당하는
배가 서로 모여 묶어 놓은 해상 촌락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학교와 어민들을 위한 관청 뿐만 아니라 시장도
형성하고 있었다.
열대 몬순 지역에 해당하는 베트남에는 더위를 이기기 위한 건축 양식이 발달했다. 일단 각 층의 높이는
평균 4m 이상이며 1층을 더 높게 짓는 것이 상식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점령 및 주둔을 겪으면서 실링팬과
채광 창문은 서양 건축물의 채취를 나타냈고 겨울에도 실내 벽의 위쪽에 환기를 위한 창 또는 구멍을 열어두는 방
식은 습기로 인한 건강 피해를 실감하게 한다.
농촌 및 산악 지역이 대부분 좌식 생활 습관을 지니는 반면에 도시지역은 입식 문화가 보편화되어 침대, 소파,
식탁이 가정마다 구비되어 있다. 요약하면, 베트남의 의식주 문화는 비록 베트남 문화 자체가 역사적, 지정학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자연 환경적 요인에 의해 특징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베트남인의 대인 관계가 갖는 한 특징은 공동체문화와 개인문화가 공존하고, 수직적 질서와 수평적 질서가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베트남 농촌 사회는 수많은 홍수, 가뭄에 시달렸고 새로운 농지를 개간
하거나 둑을 쌓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친족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모내기와 추수 등의 농사일을 차치하고서라도
잇단 외침세력에 맞서 촌락과 국가를 지키는 데에는 집단공동체의 협력을 생사를 결정짓는 중대한 요인이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도 공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베트남의 경우 뭉치면 강하지는 결속력은 어떤 민족에 비해
뒤지지 않는데 이를 환언하면,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개인의 희생과 의무가 사회생활의 최우선적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나 집단노동에 절대적인 공동체를 위한 규범은 일단 난리가 해결되고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면 개인적인 것으로 완전히 모습을 바꾼다. 베트남에서 가부장적 가족 관계는 장자 상속 또는 말자 상속
이든지 부모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이 분배되고, 핵가족 중심의 소가족 제도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개인 문화
또한 동등한 수준에서 발달하였다.
동남아시아 만달라 (Mandala) 사회의 특성은 베트남에서도 나타난다. 천년 이상 중국의 오랜 지배를 받았음
에도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인은 유교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수직적인 위계질서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선호한다. 조직에서의 상하관계는 인정되지만 최고지도자만을 절대적인 복종과 상의하달은
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대신에 아랫사람을 포용하는 인격, 경륜을 갖춘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는 상하관계가 태생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다 프랑스 식민지배기를 통해 베트남에 유입된 인권 존중, 자유 평등, 민주 사상 등은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보기 드문 개인주의 인격 형성을 가져왔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 대중에게
다가선 공산주의 계급 혁명 의식 또한 수직적 사회질서보다는 수평적 동지 관계가 자리 잡는 데에 탄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인의 직장 문화는 여전히 전형적인 농업사회에서의 대인 관계를 여전히 많이 따르고 있다.
베트남 직원의 근무 태도는 성격이 급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다. 우선 외모 상으로 베트남인은
'멋'을 따진다지만 생머리를 길게 내리워 근무할 때 불편을 겪는 여직원이나 일을 안 한 사람인 체하기 위해
새끼손톱을 구부러질 때까지 기르는 남직원은 비위생적으로 비춰진다.
업무 수행 속도로 보면, 단순한 일도 시간을 지체하여 답답한 인상을 주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럼에도
출퇴근이나 점심시간은 정확히 지켜줄 것을 요구할 때면 같은 회사 직원임을 의심하도록 한다. 업무 수행
방식을 놓고 볼 때, 이들은 부서 간 토의나 협력을 통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대단한 비밀인양 혼자서
이기적으로 붙들고 있다가 결국 시기를 놓쳐 일을 망친다.
업무상 잘못에 대해 지적하거나 시정을 요구하면 자신의 실수를 시인하고 곧바로 시정하는 대신,
자기 행위에 대한 핑계나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급기야는 겸연쩍은 웃음인지 조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애매한 표정까지 짓는다.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조금의 불이익이라도 받을 때는 지체 없이 노동 착취이자
비인격적 대우를 내세워 단체 행동에 들어가려 한다.
이 모든 근무 행태는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과도기에 들어선 베트남이
내포하는 근본적인 한계이자 1986년 이후 전면적인 사회개혁에 착수한 도이 머이 쇄신 정책이 갖는
문제점이다. 그러나 주로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집단공동체 생활 속에서 생겨난 타성이자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인 베트남인의 이러한 소극적인 면은 지난 수 천 년 간 경험하고 발전시켜온 그들의 문화접변력을
놓고 볼 때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베트남 문화는 외래문화와 민족문화, 공동체문화와 개인문화,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복합문화이다. 오랜 시간동안 자기 것과 남의 것,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에서 베트남인은 자신만의
혼합주의와 접변력을 통해 최선을 추구해 온 경험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자존심
중국의 오랜 지배 맞서 싸우며 민족적 자존심 키워
가설 중에는 베트남인을 현지 원주민 혹은 중국의 광시성(廣西省), 윈난성(雲南省) 지역에서 이주해온 중국인 후손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티베트 지역 또는 태평양 군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베트남인과 우리의 몸속에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대다수 베트남인 역시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추정되는데 역사학자들은 베트남의 역사가 약 3000년에서 4000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 최초 국가는 락롱꾸언의 아들 ‘훙 브엉(雄王)’이 세운 ‘반랑(文郞)’이다.
따라서 베트남의 모든 왕조와 정권의 시조는 이(李), 진(陳), 호(胡), 여(黎), 막(莫), 정(鄭), 원(阮) 등 중국 성씨(姓氏)를 갖는다. 베트남의 각 왕조, 정권의 시조는 대부분 중국 본토의 지방관리였던 중국인 또는 중국계 이주민으로 이들은 베트남 토착세력을 규합해 왕조와 정권을 창출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베트남인은 중국에서 유입된 이주한인(移住漢人)과 남방의 미개인이라는 뜻의 만이(蠻夷)라 불린 베트남 토착민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주한인과 생계터전을 지키려는 베트남 토착민의 결합은 잦은 중국의 침입에 대항하며 시너지효과를 발휘하여 더욱 굳건해졌고 저항성, 독립성, 반골기질, 자존심이 강한 특유의 민족성을 낳았다. 속국으로서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베트남을 남국(南國), 중국을 북국(北國)으로 칭하고, 베트남의 군주를 남제(南帝), 즉 남국의 황제라 칭하며 중국의 북제(北帝)와 대비시켜 중국과 대등한 독립왕조임을 주장하였다.
베트남 왕조의 이러한 강한 자존심은 중국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길들이기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의 끊임없는 베트남 자존심 죽이기 전쟁은 오히려 베트남의 민족적 단합과 단결을 강화시키고 민족적 자존심을 고양시키는 작용을 했다.
이는 근세 베트남이 프랑스,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 이를 프랑스와 벌인 독립전쟁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이용했다.
호찌민은 프랑스와 전쟁, 미국과 전쟁 모두의 명분으로 ‘민족해방’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 시대에는 ‘청년’ ‘월맹(越盟)’, 그리고 미국과 전쟁 당시에는 ‘민족해방전선’이라는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 운영하였지만 민족주의자와 반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을 포섭하고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자신들을 민족주의 단체로 위장, 공산주의 색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 이념분쟁이 아닌 민족주의 간 대립으로 몰고 가는 전략을 취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호찌민이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바로 사회주의 도입을 위해 베트남인의 민족주의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청(靑)대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 속에서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피 흘려야 하는 굴욕의 역사를 가졌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 선진문명과 문화의 유입으로 베트남의 행정, 교육, 문화 등의 발전을 이룬 측면도 있다.
혼인의례, 장례, 제례 등의 가정의례를 지키고 있고, 음력설인 뗏(Tet)을 베트남 민족 최대명절로 쇠며, 중추절에는 중국식 월병을 먹는 모습 등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베트남과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기저에 중국문화의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두 나라 모두 중국의 남쪽 끝과 북쪽 끝에 국경을 접하면서 오랜 세월 중국의 영향을 받아온 공통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트남은 지리적으로는 동남아시아권에 속하면서도 다른 동남아 국가와는 달리 유교문화권, 한자(漢字) 문화권에 속하는, ‘동남아 속의 동북아국가’로 우리나라와 닮은꼴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의해 지어진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안남(安南)과 월남(越南)인데, 안남은 당(唐)나라 때 베트남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는 행정관청을 설립한 데서 유래한다. 이는 ‘남쪽을 안정시킨다’라는 뜻으로, 베트남을 식민지로 본 중국인의 시각이 반영됐다.
이 때 부터 베트남은 안남으로 불렸으며 훗날 우리나라, 일본, 서양에서도 안남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찰기가 없는 쌀을 일컬어 ‘알람미’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바로 베트남에서 산출된 쌀, 안남미(安南米)에서 온 것이다.
월남이라는 국호는 1803년 베트남 원(元)씨 왕조 때 남월(南越)을 국호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을 청나라에서 월남으로 수정, 제시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국명으로 불리고 있다. 베트남(Vietnam)은 월남의 현지 발음(비엣남)의 영어식 표기다. 독립전쟁을 벌일 때 중국이 약 200억달러에 해당하는 원조와 인적자원을 제공하고 1950년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세계 최초로 공식 승인하면서 오랜 갈등의 사슬을 끊는 듯했다.
당시 중국은 사회주의 선배 국가로서 베트남에 군사원조를 하는 등 우호협력관계를 재정립했다. 그러나 양국 관계는 1970년대 다시 악화됐다. 1973년부터 국경분쟁이 발생했고, 베트남 내 20만화교의 강제 축출과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1978년)으로 양국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급기야 1979년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함으로써 다시 원수의 관계로 돌아갔다. 협력관계가 회복됐고 이후 상호 경제적 협력자로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양국 간 오랜 관계의 흔적이자, 한때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100만화교는 이제 양국 간 경제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양국이 지난 1000년간 갈등의 역사를 끊고 21세기 새로운 경제적 밀월관계로 거듭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중국은 오늘날에도 베트남 경제개방정책의 ‘본보기 국가’로서, 그리고 최대 교역대상국가(2005년 기준 베트남 최대 수입국, 3위 수출국)로서 베트남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길고 긴 애증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두 얼굴 가진 가족애
베트남인의 특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자율성은, 뿔뿔이 흩어져서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함께 뒤섞여 가는 오토바이 행렬이 대변해 준다. 매년 설날 전야(前夜)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오토바이가 통제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가 되면 으레 교통신호등이 꺼지고 교통경찰관은 뒷짐을 지고 오토바이의 흐름을 운전자의 자율성에 맡겨 버린다.
이 같은 자율성은 베트남 사회가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베트남인의 자율성은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오랜 역사의 산물일 것이다. 키우는 습성은 베트남의 모든 계층과 지역에서 예외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사육습성을 단순한 애완동물관리에 대한 낮은 시민의식, 관련법규의 부재 탓으로 보기는 어렵다.
베트남인의 자율성은 베트남식 전술의 대명사가 돼 버린 게릴라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사병의 자율적 상황대처능력이 크게 요구되는 게릴라전은 자율성이 강한 베트남인에게 가장 적합한 전술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 적합성은 프랑스, 미국과 전쟁에서 입증되었다. 따라서 한국기업은 베트남 진출 초창기, 베트남 내 투자진출 전체 외국계 기업 중 ‘파업 발생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까라면 까야 한다”는 논리가 베트남인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일정한 규정의 틀 속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하면서 능력에 따라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당근요법이 더 효율적이다. 자리를 제외하면 직장, 학교 어디에서건 지위와 고하를 막론하고 그저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관념에 따라 서로를 ‘안(형·오빠)’ ‘찌(누나·언니)’ ‘엠(동생)’ 그리고 삼촌뻘되는 사람은 ‘쭈(작은 아버지)’, 조카뻘되는 사람은 ‘짜우(조카)’라고 부른다.
베트남 국민 모두는 형, 누나, 동생, 삼촌, 조카 등 가족호칭으로 불리는 한 가족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은 ‘박(큰아버지)’이라는 호칭을 붙여 ‘박 호(호 큰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사업을 잘 하려면 가능한 많은 베트남인 의붓아버지, 의붓어머니, 의형제를 만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가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러 사람과 친분관계를 통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법적으로, 원칙적으로 절대 안 되는 일이 형의 친구, 삼촌 친구의 친구 도움으로 일사천리(一瀉千里) 단숨에 해결되기도 하고 반대로 법적·원칙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일이 담당자와 친분관리를 잘못한 결과, 이상하게 꼬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족애는 베트남인에게 양면의 칼이라 할 수 있으며, 베트남인과 비즈니스를 하는 외국인에게는 때에 따라 약(藥)도 되고 독(毒)도 된다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 |
베트남의 중심은 현재나 과거나 마찬가지로 홍하 델타이다. 홍하강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중국의 운남성까지 다달을
수가 있기때문에 과거부터 지금까지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홍하델타는 베트남 민족에게는 영광과 치욕을 기록한
곳이다. 중국의 천년지배가 그러하였고 프랑스의 본격적 베트남 침략역시 중국과의 연결통로를 개척하기 위한것이
이유중의 하나이다.
중국인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거대한 대륙을 중심에 놓고 동쪽을 동이, 남쪽을 남만, 북쪽을 북적, 서쪽을 서융이라
하여 오랑캐라 비하하였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중국은 다기한 민족의 각축장이었다. 하,은나라가 동이의 시대라면
주,진은 서융의 시대이고 광동광서는 남만의 땅이었다. 남만의 민족은 월족 크게는 묘족이다. 민월과 백월등 중국
사기에 많이 나오는 민족들이 월족의 뿌리이다.
위의 신화는 이신화가 쓰여진 13세기의 이데올로기인 베트남 민족주의를 제거하다보면 본래 베트남 민족의 뿌리를
찾을 수가 있다.
데민과 턴롱의 사이에서 오늘날 베트남인들이 자신의 시조라 생각하는 홍부엉이 태어난다.
턴롱은 임신하고 알을 100개 낳는다. 이알에서 100명의 남자가 태어난다. 50명은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50명은
어머니를 따라 산으로 가고,산으로 간 50명중에 가장 힘이 센자가 왕이 되어 이름을 홍부엉이라고 하고 반랑이라는
국가를 세웠다. 반랑국은 현재 하노이지방근처인 홍하강 유역이다고 추정한다.
이처럼 베트남인들은 스스로를 수신과 산신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현재의 베트남인의 기원을 산신의 본류라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베트남족은 본토중국과 비교한다. 중국의 신인 신농씨의 자손에서 산신과 수신의
자손인 용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이다. 독립국가를 형성하던 베트남은 한무제시기 중국의 지배를 받고 1000년 후에야
비로소 독립을 하게된다.
중국의 베트남 지배전과 후로 독자적인 문화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시기 존재하였던 현재는 베트남중부지역인
점성국과 현 남부베트남과 캄보디아위치하던 부남국에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I.베트남의 국가 건설 (B. C 2879- B.C111)
1)반랑국(베트남의 독자문화 발달-동산문화)
반랑국의 건국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B.C7세기 경의 동선문화의 발달된 형태를 보면 단순한 전설의 국가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반랑국은 현베트남 사람들이 최초의 국가라고 생각되는 나라로써 고도로 발달된청동기을
사용하였다.
동선문화의 대표적인 유물은 동고로써 같은 시기 세계어느곳의 유물에서도 같은 크기를 발견할 수가 없는 독자적인
문화이다. 동고는 주로 종교의식과 같은 사회적인 의식을 진행하는 데 사용하는 신물이었고 지배계급의 도구였다.
그당시 남아시아 여러제국에서 비슷한 형식의 동고들은 발견되지만 동고의 형식과 내용면에서 베트남이 탁월하다..
동고에는 대부분 가느다란 용이 그려져 있다.
동고는 여러측면에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북은 대부분 계급사회를 나타낸다. 북을 치는 자와 듣는 자의 구별을
가져다 주는 행위로써 북을 권위이다. 북은 대부분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곳에서 발달한다. 기마민족이나
해양민족의 경우에는 북을 발전시킬 시간적인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랑국의 사회를 락사회라 한다.
임금을 좌우로 락장과 락후라는 계급이 존재하였고 락이라는 용어는 베트남 민족의 토템인 용으로 부터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베트남어로 하천이나 수로등을 의미하는 RACH,LACH과 관계가있다고 한다.
쌀재배로는 아시아에서 비교적이른 베트남이지만 락민은 아직 농경에 소나 물소를 이용해 쟁기를 사용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돌로 만든 호미를 사용하였다는것이 북베트남의 유물로 남아있다.
락사회는 세습적인 특권과 상호의무에 기반을 둔 계급사회였다. 어느 나라보다도 촌장의 힘이 강대한 베트남은
홍하델타의 홍부엉과 다른 지역으로 구별된다.
락사회에서의 여자가 비교적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만약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남편의 동생과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일처다부제 사회에서 많이 발생하는 제도로써 여자의 지위를 설명한다.
특히 훙부엉이 부계출신이 아닌 모계출신인 점은 이러한 점을 더욱 반영한다. 락사회는 베트남의 고유한 문화
로써 이후 나타나는 중국이나 인도의 영향이 전혀받지 않았다.
반면 일부학자들은 모계중심과 문자의 발달을 이유로 베트남의 후진성을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아프리카
지대의 미개척지의 주민중의 대다수는 모권중심의 사회이다. 반랑국의 건국시기에 대한 다수설은 B.C2879년
전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배경은 이왕조때 편찬된 검정월남 이라는 역사서에 베트남의 최초의 설화가 나타나고
이것은 중국의 신농씨의 3세손으로 설명한다.
신농씨는 중국의 신화적인 시대인 3황시대의 마지막 시대이다. 아득히 먼 옛날 중국의 원시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류라고 생각되었던 지금까지의 생각은 1963년 섬서성부근의 남전원인이 발견됨에 따라 4,50만년
전으로 생각하는 북경원인에 비하여 1만년전으로 운남성의 원인이 무려 170만년전으로 생각되어 진다.
그러하기에 일반적인 중국의 문화주도권을 지금의 베이징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이다. 중국의 역사서
에서도 살펴볼수 있듯이 중국을 중심에 놓고,북쪽에는 적족이,남쪽에는 묘족이 ,서쪽은 강족이,동쪽에는
이족이 5,6천년전 부터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민족간의 투쟁은 주도권을 가지던 이족의 두령 치우가
서쪽의 두령 공공에게 패함에 따라 중국의 헤게모니는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시기을 지나 복희와 여화의 시대가 흘러간다. 이후 다시 신농씨의 시대로 접어든다. 신농씨는 8대
530년간 지속된다. 바로 이시기 신농씨의 3대손이 남쪽지방을 순행하다가 그곳의 아가씨와 결혼하여 북쪽과는
비교된는 왕조를 남기게 되고 이를 남양왕이라 부르고 씩귀국이라고 한다. 락롱권은 수신의 딸인 어우꺼와
결혼하여 100명의 아들을 낳아 50명은 자신과 함께 바다로 50명은 산으로 가고 산으로 간 50명중에서 가장
힘이센 자가 왕이 되어 반랑국을 세우게 되니 이가 바로 홍부엉으로 18대 2600년동안 유지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후기 베트남 사가의 소중화라는 베트남 민족주의에 의한 첨가로 판단된다.
그당시의 통킹문화라고 알려진 베트남 청동기 문화는 중국으로 부터 전래되어 졌다기 보다는 베트남의 자
생적인 문화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추 베트남 청동기 문화는 말레이반도를 거쳐 인도네시아
지역에 이르기 까지 폭넓게 퍼져나갔고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 그 질과 형식을 달리 한다.
이 당시의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베트남 고유의 문화 임에 틀림없다. 역사학자들은 국가형성을
청동기사용과 계급의 분화,문자사용유무등으로 판단한다. 베트남의 고대사를 이해하느데는 '농,롱'이라는
언어을 이햐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농사를 의미하는 뜻으로도 용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이당시 동남아시아의 문화의 주체는 바로 이러한 롱의 민족에 의하여 발원하였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서에서도 기록하였듯이 동남아시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은 형성하지 못하였고
베트남만의 자주적인 문화가 성장하였다.
베트남 전설에 의하면 DE MING은 신농황의 3대손으로 남방을 순시하다가 NUG LINH산에 가서 한 선녀를 만나
결혼하여 LOC TUC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후에 DE MINH은 왕위를 장남인 DE NGHI에게 북쪽지방을,LOC TUC을
남방에 봉하고 경양왕이라 칭하고,국호를 XICH-QUY라 하였다.
씩뀌는 그당시 북으로는 동정호를 남으로는 HO-TON(참파)과 서로는 사천,동으로는 남해와 접경을 이루고 있었다.
경양왕은 대략B.C2879년 왕이 되었고,동정군의 딸인 롱느와 결혼하여 숭람을 낳았고 그를 왕으로 봉했으며
그가 바로 락롱권이다.
락롱躥은 데라이왕의 딸인 어우 꺼와 결혼하였고,한번에 100개의 알을 낳았고 그안에서 100의 아들이 태어났다.
락롱권은 어우꺼에게 이야기했다."나는 롱군의 후손으로 당신은 신선의 후손이므로,오래동안 같이 살수없다.
지금 100명의 아이가 있으니,50명은 그대를 따라 산으로 나머지 50명은 남해바다로 갈것이다."
이러한 전설은 아마도 락롱권 이후에 씩뀌국은 북월(오늘날 호남성,광동성,광서성)과 백월로 나뉜 기원이다.
락롱권은 장남으로 하여금 반랑국의 왕으로 봉하였고,칭하기를 훙부엉이라고 하였다.
반랑국의 오랜 역사에 의한 기록에는 15개 부로 나뉜다.
훙부엉 왕은 퐁저우에 수도를 정하고(오늘날 VINH-YEN성 BACH-HAC현해당)락장과 락후라는 문무계급을
설치하였다. 왕의 아들을 QUAN-LANG(군랑),공주를 MI-NUONG이라고,아래관리를 BO-CHINH이라고 불렀다.
정치적권력은 부자승계였고 이를 불러 PHU-DAO(부도)라 하였다.
홍방가는 18대를 이어왔고,B.C258년 촉씨에 의하여 점령을 당한다.
경양왕(B.C2879)부터 18대 홍붕엉왕(B.C258)까지 모두 20명의 왕으로 볼 수가 있다. 가감을 한다한들 각왕들은
대략 150년간 통치하였다. 비록 상고시대라 할지라도 어찌 인간이 이렇게 오래동안 살수가 있으리요?
이처럼 홍방시대의 이야기은 확실한 시대가 아닌 전설의 시대인 것이다.
2)어우락(중국의 세력 확대)
반랑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훨씬 가까운 시대이지만 신화적인 요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어우락을 세운 안양왕에 대한 기록은 툭판이라는 이름외에는 신화적인 요소만이 남아있다.
툭(촉)은 중국의 촉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당시의 교통수단의 발달정도나 문화공동체 정도를 이유로 오늘날의
중국이 아닌 베트남 동북 지역인 까오방성 부근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당시 중국은 전국시대라는 혼란기에 있었다. B.C770년부터의 춘추전국시대의 중국내란은 국내적으로는
민중들의 피폐와 궁핍을 가져다 주었지만 역시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주나라에 비하여 민중들을 궁핍을
면하기 위하여,전쟁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이 활발하여 졌고 이러한 곳은 상대적으로
미개척지인 양자강과 광동,서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광동의 민월과 같은 여러 민족들이 점차 남으로
피난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철기문화가 북부 베트남을 중심으로 전래되었다. 청동기와는 달리 철기에 대한
사용은 미개하였던 반랑족은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히 군사적인 약화을 가져다 주었다.
툭판은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멀리하고 윤택한 평야지대인 남쪽으로 천도하였다. 안양왕은 정치적으로는
락사회를 지배하였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들의 전통을 단절하지 못하였다.
비록 이당시 문화적인 접촉은 있었지만 그러한 접촉이 베트남의 내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당시의 생활을
전하는 하나의 설화가 있다. '오늘날 하노이에서 30KM떨어진 꼬로아에 천도한 안양왕은 잔존세력의 공격에
대비하여 나선형 모양의 성을 쌓았다. 하지만 밤마다 쌓아놓은 성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이에 근심한 안양왕이 강에서 기도를 하였더니 거북이 한마리가 나타나 전왕조의 왕자가 죽어 귀신이 되어
밤마다 성을 무너뜨리고 밤에는 한마리의 하얀닭이 되어 땀비엔산 기슭에 살고있으니 이를 죽이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이에 왕이 닭을 죽이니 다음 부터는 성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었다.
거북이는 물속으로 들어가기전에 자신의 발톱을 주며 활깍지로 사용하면 전쟁에 절대 패하지 않는다고 하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금귀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전쟁신이다. 즉 서쪽 오랭캐인 강족의 전쟁신이다. 이에 반하여
백계는 베트남의 전통적인 세력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중국문화의 베트남 침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이시기 중국의 개척정신에 의한 베트남의 진출로 해석된다.
3)조타의 남월국
남월이라는 뜻은 '아주 머나먼 곳'이다. 중국의 지배 중심지인 낙양과 장안에서 보면 황하강과 양자강을 건너야
하는 베트남은 아주 머나먼 곳이었다. 분열된 중국을 일통한 진시황제는 곧이어 수많은 실정을 하게 되고 죽고 만다.
이에 따라 진시황의 통일에 반감을 가지던 이전의 지배계급은 또다시 중국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간다.
북중국과는 머나먼 곳이었던 남해군의 군수는 반란의 마음을 먹게 되지만 질병으로 죽고 조타에게 후사를 부탁한다.
남해군은 북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남으로는 바다로 가로막혀있으면 주위에 땅이 넓어 중국과는 다른
독립국을 세워볼 만 하였다. 이에 조타는 중국중앙정부에 충성을 다하는 관리들을 숙청하고 B.C207년 광서성을
중심으로 남월국을 세우게 되고 곧이어 어우락국을 정벌하게 된다. 중국인에 의한 최초의 베트남 정벌로 이해할 수있다.
하지만 조타생전의 남월국은 북중국과는 비교되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중앙과 멀리 떨어진 이유로
남월국은 문화적인 체계들이 중국보다는 베트남적이다. 조타의 문화정책은 이미 베트남화 되어 중국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조타는 120년을 생존하였다. 그의 재위시기에는 중국과 대등한 자세로 나갔으나 조타사후 남월국은 볼모를 장안에
보내는 등의 중국에 대한 자세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내란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된다. 이당시의 중국을 베트남을
남방물자의 집산지로 여겼다. 중국에서 생산되지않은 귀중한 남방자원등을 남월국을 통해 얻으려로 하였다.
4)임읍
북부 베트남이 중국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으며 발전할 당시에 중부 베트남에는 임읍이라는 해상왕조가 건설되었다.
임읍은 제정일치의 국가로써 정치적인 수도와 경제적인 도시 그리고 정신적인 성산으로 나뉠 수가 있다. 참파족만의
독특한 종교의식은 비교적 개방적이다. 왜냐하면 북부베트남과는 달리 참파족의 임읍은 중국의 문화적인 영향이
덜하였다.
반면 말레이 반도를 통해 각기 다양한 민족을 접하게 됨에 따라 보다 진보적인 문화를 이룩할 수가 있었다. 건축물의
양식도 중국이나 북베트남과는 형식이나 재료사용등에서 매우 다르다. 건축물의 재료가 되는 목재의 경우 중부
베트남은 매우 부족하였다. 울창한 수풀은 많이 있었지만 건축물의 재료로 사용하기에는 매우 부적당하였다.
그래서 임읍은 목재보다는 흙을 사용하여 사원이나 건축물을 건설하였다.
임읍의 문화적인 주체는 인도문화의 주류이다. 인도인이나 아라비아인과의 교섭은 일찍부터 중국의 철기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북베트남 보다도 경제.정치적인 면에서 인도지나반도의 주류를 만들어 갔다.
베트남은 1975년 통일 이후 국내적으로는 정치적인 안정과 세계적으로는 개방과 개혁정책으로 세계속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은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나라들과의 투쟁속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끌어
왔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영토정책으로 그들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만들어 왔다.
여기에 우리들은 베트남의 정체성을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베트남의 기본대외정책은 남진정책이다. 중국이라는
거대 대국에 비하여 동남아시아국가로 태어나려고 노력한다. 베트남 역시 동남아시아의 제국가처럼 화교인들의
힘이 막강하다. 하지만 이제 베트남의 화교들은 베트남인들과 별로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베트남은 조국이 되어 버렸다.
베트남 전쟁과 이후 미국과의 대립속에서 이전에 불란서에 대한 반식민지 투쟁속에서 화교인들의 노력은 대단하였고
역사적으로 베트남에 귀화한 중국인들은 본토 중국인과는 다른 베트남화한 중국인들이었다. 따라서 베트남의
정체성을 중국인이니 베트남이니 구별하는 것은 별로 베트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재 베트남에는 54개 민족이 살고 있지만 이들은 주민족인 경족과 한동아리가 되어 살고있다. 각기 한민족마다의
장점을 살려 서로 보완하며 생존하였다. 그들에게 민족이라는 의식은 국가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각개의 민족보다는 위혐에 처해있을 시기에는 국가 공동체를 이끌어 오늘날 까지 유지되어 왔다. 베트남 문화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융합과 독자성이다.
역사의 전환기마다 베트남은 과거의 3대제국 즉남부일대의 오케오 문화를 발생한 지역과 참파민족의 중부 그리고
북부베트남의 협력과 연대로 무사히 극복되었다. 전인구의 11%를 차지하고 80년대에는 무장봉기투쟁까지 있었던
베트남은 이제 54개 민족이 서로 화합하고 베트남만의 독자적인 길을 함께 걷고있다.
1988년 12월 베트남 국회에서 헌법전문의 수정이 결의되어, 프랑스.미국.중국에 해한 비판적인 말은 삭제시켰으며
더욱이 지금은 도이모이 정책에따라 서구제국과의 협력관계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 베트남군이 캄보디에서 철수
함을 계기로 최근에는 중월의 국경무역이 재개되었고, 1991년 11월에는 중국과의 국교정상화가 선언되어서 중월관
계는 약 20년만에 수복되었다.
86년 12월의 공산당 제6회대회에서 채택된 도이모이정책은 농업과 공업의 개혁을 한층더 강화했다. 즉 이것은
식료품.소비재.수출품의 3대 증산정택이다. 또 통제경제의 축소화와 시장경제의 도입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외국자
본과 기술의 도입도 거론되었다. 이정책에 따라 세계 제3위의 쌀수출국이 되었다. 구소련의 원조삭감에 따라 최근
서구제국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화시키고 있으며 아시아제국과의 무역을 확대했다.
독립과 통일,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베트남
지구상에서 한국과 가장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코 베트남일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대륙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으면서
수천 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문화세례와 침략을 받았다.
이런 시련 속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창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한국과 베트남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똑같이 피신민지배와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이미 ‘독립과 통일’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고 경제개발과 국가발전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통일’이란 토끼를 찾아 눈 덮인 깊은 산속에서 헤매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베트남이 마냥 부럽기 만하다. 그리고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베트남이 독립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민족적 과제를 달성하는 데에는 호찌민의 지도력과 헌신이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
한국과 베트남이 자리 잡고 있는 반도는 그 지정학적인 특수성 때문에 대륙과 해양의 문화와 문물이 교차하는 문화
네트워크의 중심점이 되는 장점이 있는 반면, 대륙과 해양의 적들로부터 쉽게 침략을 당하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역사상 한국도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베트남의 경우 정확한 외세침략에 관한 통계를 제시할 순 없지만,
한국 이상으로 많은 외세의 침략을 겪었다.
오죽했으면 어떤 학자는 베트남을 “2천 년간 끊임없이 전쟁을 치른 나라다.”라고 했겠는가! 베트남이 전쟁을 벌인
상대를 보면 역사상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중국의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는 물론이고 13세기
유라시아대륙을 제패했던 몽골, 유럽 제국주의의 선봉장 프랑스, 동양의 신흥 제국주의 강자 일본, 세계 최강 미국 등
손꼽히는 강대국들이었다. 이러한 숱한 강대국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독립과 통일을 달성한 베트남인들이 당당한
자부심과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광야에서 독립을 꿈꾸며
19세기의 제국주의 물결 속에서 베트남의 운명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베트남의 마지막 봉건왕조였던 응우옌
(Nguyean, 阮)왕조는 건국과정에서 프랑스 출신 신부와 용병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응우옌왕조
초기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베트남에서 자유로운 포교활동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1857년 7월 베트남 북부에서 일어난 가톨릭 선교사 살해사건은 프랑스가 무력을 동원할 구실을 제공하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되었다. 1858년 8월 31일 14척으로 구성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수도 훼(Huea)
에서 가까운 다낭(Naø Naung)에 침입, 약 5개월간 점령하였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드는 침략과정은
마치 한국의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나오는 호랑이를 연상시킨다. 비극적인 상황은 프랑스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요구에 베트남이 줄 수 있는 떡은 불과 몇 개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1859년 2월 18일 쟈 딘(Gia Nonh, 嘉定, 오늘날 사이공)을 함락시키고, 1861년에는 사이공을,
1862년에는 비엔 호아(Biean Hoøa, 邊和)를 수중에 넣어 코친차이나(Cochinchina) 동부 3성을 모두 점령하였다.
프랑스와 응우옌왕조는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비엔 호아, 쟈 딘, 미 토(Myo Tho,
美湫)와 꼰 다오(Coan Nauo, 崑島)가 프랑스에게 양도되었다.
이러한 응우옌왕조의 망국적 조약체결에 대해서 코친차이나 대중들은 쯔엉 딘(Troong Nonh)과 그의 아들
쯔엉 꾸엔(Troong Quyean) 등과 함께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프랑스에게
본격적 침략의 구실을 주었다. 1874년 ‘제2차 사이공조약’이 체결되어 무력으로 제압된 빈 롱(Vonh Long, 永隆),
안 지앙(An Giang, 安江), 하 띠엔(Haø Tiean, 河僊) 서부3성을 포함한 전코친차이나를 프랑스에게 할양해주고
대신에 응우옌왕조의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와 같이 베트남이 프랑스에게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은 것은 응우옌왕조의 조정이 프랑스의 침공에 대한
저항에서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침략에 대해 부패한 조정의 관료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며 무사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무감각했던 응우옌왕조의 조정은
코친차이나 6성을 상실하고서야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충격은 단순히 충격으로 끝나버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적극적인 개혁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제2차 사이공조약’으로 베트남과 프랑스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국내사정으로 인해 베트남의 식민화를 완성하기 직전에 잠시 멈추었기 때문에 형편이 허락하면 침략을
재개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이었다.
1881년 통킹지방에서 상업적 야심에 가득 찬 프랑스인의 홍강 항행문제로 촉발된 프랑스와 응우옌왕조간
군사대결은 일방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계속 군비를 증강시킨 프랑스군은 1883년 왕위계승 분쟁으로
혼미상태에 빠져있던 응우옌왕조의 수도 훼의 바로 코앞까지 진격했다. 이에 다급해진 응우옌왕조의 조정은
프랑스와 ‘아르망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미 프랑스가 독자적인 행정기반을 구축한 코친차이나는 직할 식민
통치령이 되었고, 북부의 통킹과 중부의 안남은 보호령이 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인정하고 대외관계는 프랑스를 통해서만 하기로 약속했다.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대하여 베트남의 종주국으로 행세해온 중국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아르망조약’이 체결된 직후 청조는 자신들이 승인하지 않는 베트남과의 국제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마침내 1884년 프랑스와 중국 청조는 베트남의 종주권을 놓고 베트남 북부에서 충돌하였다. 그 결과 1885년
중국과 프랑스 사이에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청조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조약을 존중하고 중월(中越)간의 변경무역을 개방하며, 프랑스는
타이완과 펑후도에서 군대를 철수한다는 것이다. 1885년 청불조약의 체결로 이제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어느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고 베트남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응우옌왕조는 청불전쟁 후에도 여전히 존속했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이었을 뿐 실질적으로 베트남의 모든
영토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프랑스 관리들의 통치를 받았고 훼의 황제는 의례적인 행사에만 참석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하나로 묶지 않고 코친차이나는 식민지로 통킹과 안남은 보호령으로 3분해서 통치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서 우선 이 지역의 경제적 재편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랑스 식민행정당국은 우선 약간의 왕실연금을 주면서 응우옌왕조의 징세권을 박탈하고 인두세 등 서구적
개념의 직접과세를 도입하는 한편, 술, 아편, 소금의 전매제도를 시행하고 도박장세 등 각종 명목의 대중과세를
부과하여 과도한 재정수익을 올렸다. 또한 각종 은행의 설립을 통해 고리대적 수탈도 행하였다.
식민지당국은 1888년 9월 프랑스법에 따라 촌락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무주지 뿐만 아니라 촌락공동체의
공유지에도 사유권을 설정하고 그 자신의 직할지로 재편해 막대한 토지를 강제로 탈취하였다. 프랑스의 이주민과
베트남인 고관은 식민지당국으로부터 개간하지 않은 토지를 싼 값으로 취득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러한 식민당국
의 토지수탈 결과로 프랑스의 식민통치 이전에는 베트남 농민의 자기 농지경작 비율이 60%였으나 식민통치가
시작된 이후 70%가 자기농토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식민당국은 인도차이나의 장래 개발을 위해 사이공과 하노이간 종단철도를 건설하는 한편, 남북종단도로를
기초로 한 기간도로 정비사업도 추진하였다. 철도건설 이외에 운하를 개통하고 항만시설을 확충하였으며,
댐을 축조하고 관개시설도 확충하여 농업생산력을 제고시키는 사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간접자본 건설 및 수리시설 정비는 베트남의 이익보다는 프랑스의 효율적인 식민지 착취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식민당국은 각종 직·간접세를 신설하고 세율을 인상함으로써 인도차이나의 재정자립화를 성취하고, 프랑스
본국에 대해 ‘이익이 많은 식민지’라는 것을 인식시켜 하노이와 사이공간 철도건설을 위한 2억프랑의 기채를
파리에서 성공시킬 수가 있었다. 베트남 농민들은 토지수탈과 가중되는 세금으로 토지에서 유리되어 떠돌이
직인이 되든지 저임금의 노동시장으로 유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광물 채굴과
같은 단기간에 높은 수익성이 보장되는 사업에만 열을 올리고, 커피, 차, 사탕수수, 고무농장 등에서는 낮은
임금과 인간 이하의 대우를 하는 등 베트남 노동자들을 착취하였다.
이에 따라 베트남 농민들의 프랑스 식민정부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고 공장노동자들도 노동조건의 악화로 항불
민족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인도차이나 식민지는 문자 그대로 ‘이익이 많은 식민지’가 되어, 잃어버린
인도 식민지를 대체하여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강고한 프랑스 본국의 극동 근거지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물론 프랑스에게 ‘이익이 많은 식민지’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베트남인들에게는 정치적·사회적 종속의
심화와 경제적 궁핍을 의미할 뿐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뿌리 깊은 베트남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938년 독립왕조 수립
이후 외국으로부터의 침입을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자력으로 격퇴시킨 역사를 갖고 있던 베트남이란 나라를
식민화시킨 것이 불행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군의 침략에 대응하여 코친차이나 지역의 항쟁은 18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고 1880년대에는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함 응이(Haøm Nghi, 咸宜)황제의 호소에 의해서 일어난 껀 브엉(Caan Voong, 勤王)운동은 전직관료, 유학자
등 문신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껀 브엉운동은 유교적 사고방식에 기반을 둔 것으로 조선왕조 말기 일제의 침략
앞에서 일어났던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을 연상시킨다. 1888년 함 응이황제는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해외로
유배당함으로써, 껀 브엉운동은 구심점을 잃어버렸지만 응우옌왕조의 문신들에 의한 항불운동은 19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유학자들에 의한 무력항쟁이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던 시기에 새로이 등장한 애국계몽운동가들은 반불투쟁과
독립을 위해 내적인 변화를 먼저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기초한 항불운동은 전통적 유가계층
출신이면서도 서구의 정치사상이나 중국, 일본에서 보이는 정치적 변화에 자극을 받아서 추진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은 판 보이 쩌우(Phan Boai Chaau, 潘佩珠)와 판 쭈 찐
(Phan Chu Trinh, 潘周楨)였다. 판 보이 쩌우는 입헌주의자로서 일본의 개혁과 그 성공을 인상 깊게 받아들인
인물이다. 그는 중국 양계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1905년에는 싸오 남 즈(Saøo Nam Du, 巢南子)란 필명으로
양계초와 함께 ≪월남망국사≫를 펴내기도 하였다. 판 보이 쩌우는 1906년부터 1908년까지 ‘동유운동’을 추진하여
약 300여명의 베트남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새로운 문물을 배워오게 하였다.
1908년부터는 항불운동의 방향을 바꿔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무장봉기를 시도하였고 1912년에는 「월남광복회」
를 만들어 자체 군대까지 조직하고 해외로부터 베트남 진공계획까지도 시도했다. 판 쭈 찐은 판 보이 쩌우와 달리
좀 더 급진적인 공화제를 추구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오히려 온건한 노선을 선택했던 인물이다.
그는 1907년 하노이에서 ‘동경의숙(東京義塾)’을 열어 꾸억 응으(Quoac Ngoo, 國語) 사용, 신사조의 소개,
과학교육 등의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각종 강연회와 출판물을 통한 애국사상 전파를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은 프랑스측의 양해아래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이들의 활동이 점차 과격해지자 1908년 ‘동경의숙’은
폐지되고 말았다. 형태와 추구하는 바는 달랐지만 판 보이 쩌우와 판 쭈 찐으로 대표되는 두 갈래의 반불운동은
베트남의 전통적 지도자들에 의해서 지도된 운동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25년 사이공에서 거행된 판 쭈 찐의 장례식은 구세대에 의한 민족주의 운동이 끝남과 아울러 새로운 세대에
의한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될 것임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식민지배 아래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자란 1세대
지식층인 응우옌 반 빈(Nguyean Vaen Vonh), 팜 꾸인(Phaim Quyønh), 부이 꽝 찌에우(Buøi Quang Chieau)
등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채 근대화 추구, 각종 계몽운동, 서구사상의 소개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프랑스와의 협조를 통해 국력을 신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베트남 독립운동에 뒷북을 치는
친불적 행동이었으나, 이들이 전개한 문화·계몽 활동은 어느 정도 유익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베트남에는 새로운 서구사상이 유입되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중 식민당국에 의해 강제 징집되어 유럽전선으로 보내졌던 수만 명의 베트남인들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돌아왔다. 1925년에는 사회주의 색채를 띠는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
가 호찌민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927년에는 중국국민당을 모방한 베트남국민당이 혁명조직으로 출범했다.
베트남 국민당은 헌신적인 애국주의자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베트남의 독립을 부르짖었을 뿐 베트남이 독립한 뒤 어떤 사회를 실현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지 못했다.
1930년 국민당은 옌 바이(Yean Baui)의 프랑스 병영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시도했으나,
지도자들의 미래에 대한 비전 부족과 무장봉기에 대한 사전준비 부족, 그리고 프랑스의 적극적인 진압으로 조직이
와해되었고 국민당 지도부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이로써 우익진영의 항불 민족주의운동은 쇠퇴일로에 접어들고 항불투쟁의 주도권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던 공산주의 계열로 넘어갔다. 이 해에 공산주의 세력은 호찌민의 지도하에 베트남공산당으로 통일되었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혁명운동에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농민의 역할을 중시한 노선을 견지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1930년대에 있었던 응옌 안(Nghea An)과 하 띤(Haø Tonh) 지역의 소비에트운동은 농민의 역할이 결코
무시될 수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이들 혁명운동에 대한 프랑스 측의 대응은 단호했고 그에 대한 상승작용
으로 베트남 혁명운동 역시 점차 과격해졌다.
1940년 일본군이 베트남으로 진입하자 프랑스 식민정부는 무력상태에 빠졌다. 초기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이
‘동유운동’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협조를 기대했었으나, 일본은 1907년 맺어진 ‘일불협약(日佛協約)’에 따라 베트남
유학생들을 강제 추방함으로써,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렸었다. 이로부터 30여년이 지나서
비록 일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이 베트남을 점령하여 베트남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기대하지 않은 역할을 해 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변화에 대응하여 베트남공산당은 발 빠르게 지주, 상공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계층과 연합을
시도하였다. 1941년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 越盟)」이 창설되어 프랑스 식민주의 및 일본의 파시스트들과의
투쟁을 표방하는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프랑스를 대신한 일본의 지배에 유일하게 저항한 세력인 베트민은 한 때
미국정보부(OSS)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기능을 완전히 박탈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종결시켰다. 베트민은 일본군이 만들어준 예기치 않은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농촌지역에서 행정체계를 장악하고 조직을 구축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베트남에 주둔한 일본군이 무기력해지면서 베트민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 졌다.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의 항복이 임박해 올 무렵 베트민은 전국적인 총봉기를 단행했다.
8월중 하노이, 훼, 사이공 등 베트남 전역이 베트민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8월 30일 응우옌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Bauo Naii, 保大)가 퇴위했다. 호찌민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가 8월 29일 수립되었고 9월 2일에는
역사적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베트남 독립의 앞길에는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하였다. 독립이 선언된 지 채 2주가 지나지 않아서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으로는 중국의 국민당 군대가 남으로는 영국 군대가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명목으로 진주했다.
두 세력은 이듬해 물러났지만 영국의 뒤를 이어 프랑스가 다시 남부에 들어왔고 1946년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프랑스간 제 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시작되었다.
통일만이 진정한 독립의 달성
나치 독일의 치하에서 갓 해방된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찾으려고 1945년 10월 남베트남에
진주하였다. 흔히 위대한 정치가로 불리는 드골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 재구축이란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은 강대국 정치가들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1946년 2월 ‘중불협정(中佛協定)’ 체결로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운남철도 부설권, 광저우항 조차권 등 식민지적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북베트남 지역에서 중국군의 철수가 이루어지고 프랑스군은 다시 북베트남에 복귀
할 수 있었다. 매우 어려워진 상황 속에 처한 호찌민은 전쟁에 임할 준비는 철저히 하되, 우선 프랑스와 협상에
들어갔다. 1946년 프랑스와 ‘예비협정’이 체결되어 베트남은 ‘자치정부와 군대 및 재정을 가진 자유국’임을
인정받았으며 프랑스 연방에 통합되기로 결정되었다.
베트남과 프랑스가 체결한 이 협정은 양쪽의 극단주의자 모두를 불만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1946년
6월부터 파리에서 제 2차 협상을 벌였으나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9월 14일에 이르러서야 그 성격이 모호한 잠정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내용을 단순화시킨다면 프랑스의 이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베트남에서 두 나라 사이의
무력충돌을 방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곧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1946년 11월 프랑스는 베트민과 외국 선박의
관세징수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자 하이퐁 항구에 포격을 가하여 6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드디어 베트남인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고, 베트민군과 프랑스군간 전쟁이 발발했다.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한다는 명분하에 미국은 베트남의 재식민지화하기를 원했던 프랑스에 대해
대대적인 지원을 결정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미 베트민과 미국측간 협력했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호찌민은 미국측의 지원과 협력관계의 구축을 희망했다. 그러나 냉전질서가 도래하고 전쟁 후 유럽부흥 계획인
‘마셜플랜’을 추진 중인 상황에서 미국이 핵심협력 국가인 프랑스를 버리고 호찌민의 베트민과 미뉴에트를 출 수는
없었다.
제 1차 인도차이나전쟁 기간 중 미국은 프랑스군의 전쟁비용의 80%를 부담했다. 프랑스는 전쟁이 시작되자 1949년
사이공을 중심으로 베트남 공화국을 세우고 홍콩에 있던 바오 다이를 불러들여 국가원수로 옹립하였다.
베트남 전통 지배계층의 환심을 사서 베트민을 약화시키려고 하였으나 바오 다이는 국정에는 뜻을 두지 않고
향락에만 몰두했다.
전쟁 초기에는 우수한 장비를 갖춘 프랑스군이 기선을 제압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황은 베트민에게 유리
하게 전개되었다. 보 응우옌 지압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의 유격전술에 프랑스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한편, 호찌민은 1951년 2월 11일에 베트남노동당을 창당하고 이를 통해 소련 및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국제적인 유대를 강화했다.
1953년 말 전세는 베트민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됐다. 민족주의에 눈을 뜬 베트남 민중의 독립 열망에 바탕을
둔 보 응우옌 지압의 게릴라전술과 테러행위 앞에 시대착오적인 식민주의 프랑스군은 계속해서 무너져갔다.
마침내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에 57일간 포위된 프랑스군이 항복함으로써 제 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막을 내렸다. 세계 역사상 식민지배를 했던 국가가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에 패하는 최초의
전쟁이었고, 이로써 프랑스는 국제사회에 자신의 무력함을 그대로 노출하게 되었다.
제 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베트민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영국, 프랑스, 미국, 남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소련, 중국,
북베트남 등 9개국은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1954년 5월 8일부터 7월 20일 사이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담을 가졌다. 1954년 7월 21일 폐막된 제네바회담은 포로교환 문제를 논의, 북위 17도선을 잠정적인 군사분계선
으로 책정하여 300일간 남부와 북부 베트남인들의 자유왕래를 허용하고 1956년 7월 20일 자유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회담에서 잠정적인 군사분계선 설정을 둘러싸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북베트남은 15도선을, 남베트남은 19도선을 주장했다. 그러자 소련의 외무상이었던 몰로토프(Molotov)는
‘15+19/2=17’라는 수학이 아닌 산수의 정확한 계산을 이용하여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결국 몰로토프의
제안대로 17도선인 벤 하이(Bean Haui)강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베트남의 민족적 숙원이
성취되고 인도차이나전쟁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제네바협정’ 체결 후 남베트남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들과 가톨릭신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응오 딘 지엠의
정부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응오 딘 지엠은 ‘제네바협정’에서 합의된 1956년 자유총선거를 실시할 경우 호찌민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확신하고, 미국의 지지를 얻어 이 협정의 이행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의 통치에 대한 남베트남 국민들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투표결과 남베트남 국민의
98.2%의 찬성했다고 발표했다. 흔히 독재정권이 조직적으로 투표결과를 조작하듯 응오 딘 지엠정권도 동일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어째든 이러한 투표결과를 바탕으로 응오 딘 지엠은 1955년 10월 23일
대통령이었던 바오 다이를 내쫓고 베트남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57년 응오 딘 지엠은 미국을 방문하였고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응오 딘 지엠을 ‘아시아 기적의 사나이’,
‘제2의 이승만’으로 칭찬했다. 1955부터 1957년간 미국의 남베트남 원조는 11억 달러에 달하였으며 이중 60%가
군사비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원조 체제하에서 응오 딘 지엠정권은 토지개혁을 선포하였고, 1955년 5월에서
1956년 5월까지 제1단계 멸공작전을 시행했다. 응오 딘 지엠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방과 치안에 위협을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여 수감했다.
체포된 대상은 주로 대불항전에 투신한 후 남부에 잔류한 혁명전사들과 제네바협정에 근거하여 통일선거를
요구하는 집단 및 개인, 그리고 가톨릭에 대항하는 종교단체 인사들이었다. 1955년에서 1958년까지 남베트남
지역의 공산당원의 90%가 제거되었다. 그러나 응오 딘 지엠의 집권이 장기화될수록 정통성 없는 정부의 특징인
독재정치와 공포정치의 성격이 나타났다. 정부 고위직에 그의 친척을 임명하고 반체제인사들에게는 혹독한
고문을 가했으며, 가톨릭 세력을 지나치게 옹호하고 불교도를 탄압했다.
급기야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반정부 데모가 연일 발생하였으며 1963년 불교탄압에 항거하여 틱 꽝 득
(Thich Quaung Nouc)스님이 분신자살하자 반정부 데모는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은 1963년 응오 딘 지엠에게 등을 돌렸다. 미국의 묵인아래 자행된 쿠데타로 응오 딘 지엠정부는 무너지고
그의 가족들은 피살됐다. 이후 남베트남은 군장성들의 잦은 쿠데타 시도와 군부의 강압통치로 인해 부패는
극에 달하고 정국은 혼미에 혼미를 거듭했다.
1958년부터 응오 딘 지엠정권을 타도하려는 반정부주의자들이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하였으며, 1959년에
베트남노동당은 남베트남 내 반정부 게릴라들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천명하였다. 1960년에 들어서 남베트남
내 반정부 인사들은 외국세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베트남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민족해방전선(NLF : National
Liberation Front)」을 창설했다. 「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 내의 반체제세력을 규합하고, 응오 딘 지엠
정권의 압제에 대한 저항과 민족적 애국심에 호소함으로써 남베트남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주로 가담했다.
1969년에 「민족해방전선」은 자신들의 지배영역을 기반으로 하여 임시혁명정부(Provisional Revolutionary
Government)를 결성하고 1973년 종전을 위한 파리평화회담의 당사자로 초청되었다.「민족해방전선」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이후로 남베트남 정부의 전반적인 군사력은 급속하게 약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원조를 대폭 확대했다. 남베트남 정부와 미군은
농민과 「민족해방전선」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지원을 사전예방할 목적으로 ‘전략촌정책(Strategic Hamlet
Program)’을 실시했으나, 남베트남 농민들은 이 정책의 비능률성과 잔인성을 비판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이 정책의 무모성을 이용하여 남베트남 국민들로 하여금 남베트남 정부와 미군에 대한 반감을 갖고 격렬하게
저항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미국이 구상하였던 베트남 전쟁의 ‘단순화 전략’이 여지없이 실패하자 케네디 정부는 ‘유동적 대응전략’으로
수정하고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고문단을 증파하고 원조를 증액함으로써, 점점 더 베트남 전쟁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1964년 북베트남 정부는 실질적인 전투수행과 「민족해방전선」의 군사훈련을 위해 북베트남
정규군을 남베트남에 투입했다. 1965년 초 남베트남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1개월에 평균 2천명이 탈영하는 형편이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은 더 이상 베트남을 남베트남군에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군이 직접 남베트남에서 전쟁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1964년 8월 미국의 전투함 2척이 북베트남 영해에서 공격을 당했다는 소위 ‘통킹만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직접적인 전투개입을 시작했다. 미국 의회는 대통령 존슨에게 해외파견 군사작전 권한을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 없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1968년 ‘구정대공세’는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정책이 전환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민족해방전선」
소속의 특수부대가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을 점령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전세계인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미군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던 미국 국민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아 베트남전쟁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꼈고,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반전여론이 확산됐다.
존슨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대통령 재출마를 포기해야만했다. 존슨에 이어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닉슨은 ‘베트남화정책(Vietnamisation)'을 발표하면서 미군 없이 남베트남 군인들에 의한 전쟁수행이 가능
하도록 함으로써, 미군이 베트남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 했다. 동시에 베트남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북베트남과의 비밀협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순순히 협상테이블로 나오지 않자 하노이와 하이퐁
등 북베트남 지역에 대한 대량 폭격을 감행했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미국은 파리에서 남베트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북베트남,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 전쟁당사자가 참여하는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써, 실질적으로 베트남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릴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파리평화협정은 휴전동의, 595명의 미군포로 석방, 외국군 철수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20만 명의 북베트남 정규군의 남베트남 내 잔류문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북베트남에게는 아주 유리한 것이었다. 제 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란 것은 그 시작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남베트남 내 베트남공화국과 민족해방전선 사이의 전쟁 형태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미국, 한국, 호주, 태국 등 외국동맹국들과 북베트남이 개입, 전쟁개념이 국제전으로 확대됨에 따라 전쟁은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남베트남 대 북베트남의 싸움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이 종결되고 20년이 흐른 후
당시 미국 국방부장관이었던 맥나마라(McNamara)는 그의 회고록에서 “우리는 공산주의 위협을 너무나 과대평가했고
호찌민의 민족주의적 측면은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적었다.
1975년 1월 북베트남 정규군은 17도 휴전선을 넘어 ‘호찌민작전’이란 계획에 따라 남베트남에 대해 총공세를 취했다.
이것은 1973년에 체결된 파리평화협정의 명백한 위반이었다. 그동안 미국에 의존하여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남베트남 정부와 군부는 북베트남의 침략에 대해 저항을 회피하고 두려워하면서 무조건 후퇴만 했다. 예상보다 허약한
남베트남군의 대응에 북베트남군은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주요도시를 점령하면서 남진속력을 더욱 높였다.
궁지에 처한 남베트남은 미국에게 즉각적인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미 베트남전쟁에 지치고 재정난이 심각해진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거절하였다.
상황이 악화되자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옌 반 티에우(Nguyean Vaen Thieau)는 1975년 4월 21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외국으로 도피했다. 그 후임 즈엉 반 민(Doong Vaen Minh)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든 남베트남의 멸망을
막아보기 위해 북베트남측에 평화협상을 절박하게 외쳤으나, 메아리 없는 일방적인 절규에 불과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 탱크가 남베트남 대통령궁의 철문을 밀치면서 돌진했다. 즈엉 반 민대통령은 항복 외에는 할 일이 없었고
수분 후 옥상에 걸려있던 남베트남 국기가 내려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남베트남 국기는 베트남 땅에서 다시는
게양되지 못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총인원 310십만 명의 군인이 참전하여 약 58천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고 3,689대의 전투기,
4,857대의 헬기가 소실되었으며, 천 5백만 톤의 포탄을 사용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650억 달러의 전비가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공식 전비의 2배 이상이 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이 한국전쟁 때 사용한 전비
180억 달러와 비교하면 베트남전쟁에 사용된 전비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한국도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총인원 32만 2천명의 군인이 참전하여 약 5천명이 사망하였고 10만여 명이 부상
당하였다.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남베트남 군대의 사망자는 약 22만 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민족해방전선」측 사망자는
약 44만 명으로 추산되고 부상자는 약 90만 명에 달했다. 또한 그 당시 베트남 인구의 10%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여튼 전쟁이라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피해를 안겨 주는 끔찍한 괴물과
같은 것이다.
베트남인들
베트남인의 특성중 하나는 "일이 주어지면 함께 풀어나간다"
우리 한국인들이 창의력이 앞서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 스스로
문제 풀기를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베트남 사람들은 어떤 일이
던져 지면 혼자 하는 방법보다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노력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더라 하는것 입니다
그게 어떤 이유에선 학습 과정이나 아니면 주변에 할일없어
노는 사람들이 그저 관심 가지고 따로 오는 정도 일수도 있지만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96년 여름에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중부지방을 여행 한적이 있었습니다
오토바이 이름이 보너스 인가 125cc 였는데 조금 오랜된 오트바이라
먼 중부 지방을 왕복하는데는 불안했습니다만 충분한 시간을
갖고서 가는거라 강행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팟티엣 도착 직전에 오토바이 측면에 있는 기어 변속 교체하는
스위치 발판이 망가져 버린것 입니다. 설펴보니 크게 상한것은 아닌데
스위치 발판을 고정해 주는 키 (key)가 물러 망가져 있었습니다
교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오토바이 한 수리점을 찾아
망가진 부분을 보여주곤 고치라고 부탁을 하는데 외국인이라 그러서인지
그주변에 있는 할일없어 보이는 베트남 사람들도 다 모이더라고요
약 6-7명이 되어 보이는데
그 망가진 스위치를 함께 이리저리 만지고 보고 빼내서 돌려가며
서로들 이야길 하면서 웅성웅성 그리는 겁니다
아마 부품은 없어 교체는 어렵고 조금 수리를 해서 다시 사용해야 겠는데
방법을 찾는듯 했습니다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베트남 온지도 얼마 안돼서 무슨 할일 없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아라고 생각도 들고 무슨 토론을 저렇게 오래 하는지..
이윽고 그들의 토론에 답을 구한듯
담배갑내에 알루미늄 박을 꺼집어 내서 해보기도 하고
얇은 동판을 오려서 집어 넣어 보기도 하더니만
약 40분 이 지나니 다 고쳤다고 하더군요
정말 보니 깨끗하게 고쳐져 있더군요
이제는 가격이 걱정 되었습니다 외국인인데다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으니 조금 수리값이 비쌀것으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1만동만 돌라고 하더군요 걱정했던 가슴을 쓸어 내리며
배운 "신깜언"을 외치면 얼른 그자리를 빠져 나온적이 있었습니다
1만동에 대한 수고도 그러하지만 하나의 조그만 수리 내용 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주변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서로 진지하게 방법을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고 "기술력이 없으니까" 라고도 생각할수
있었지만 나름대로 이 베트남 국민의 강한 내면을 이해 할수 있는
사건으로 저의 기억에 정리 되어 있습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역시 베트남 기술자들도 주어진 과제에 대해
열심히 상호간 토론과 시간을 갖고 풀어 나가는 모습을 자주
보곤 합니다
우리가 배운 교육과는 조금 다른 과정이라고 생각 됩니다
미국에게 이긴 저력도 이런 국민성 때문이라고도 생각을 해 봅니다
공장 근로자 아침식사
며칠전 정기적인 모임자리에서 베트남 에 온지 1년정도 되시는
한국분 께서 나에게 공손히 물어봅니다
베트남 사람들 하는 말 / 행동 /
전부가 속과 겉이 다르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 하고 물어보는 것을
대답할 범위가 너무 넓고 / 마땅히 대답할 수가 없어
본인이 그냥 생활속에서 느낀 것 본 것을
꾸밈없어 술-술- 몇마디 답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베트남 사람들 중에서, 공장 근로자들 대상으로 말을 하겠습니다
베트남에서 공장에 다니는 근로자들은
보통 한달 월급(잔업포함)이 140불 정도 입니다
한국돈으로 15만원정도 이지요 우리생각으로는 1달을 살아갈수 없는 돈이지만
그들은 그돈으로 고향의 부모에게 돈을 보내가면서 살고있습니다
시골에서 호치민 도시에 올라와서 1달에 140불짜리 공장에 취직을 하기는 했는데
당장에 돈이 없으니 최저의 생활을 합니다
방는 친구2-3명과 함께 50불짜리에서 살고
아침밥은 30-40쎈트짜리 바나나 껩질에 들어 있는 찹쌀밥을
점심밥은 회사에서, 저녁밥은 잔업과 같이 공장에서 해결하고
자전거타고 귀가를 하지요 . 옷 3벌에 20불이면 3-6개월 입지요
이렇게 살면 한달에 10만원 모으고 /
1년이면 약 120만원 모우고 3년이면 360만원
보통 이런생활을 약-3=-4년정도 합니다
아침에 국물 없는 찹쌀 주먹밥을 먹고
주먹밥 먹은후 2시간 정도후에 냉수를 들이켜서 배를 채우고
회사에서 점심 저녁을 먹고 잔업을 하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가고
그것이 반복되고
이런것들이 반복되는 기간이 길수록 그들은 더더욱 강하여지는 듯 합니다
아침에 찹쌀 주먹밥을 , 그리고 냉수로 배를 채우는 최저 생활을
부담없는 맘으로 3 - 4년을 합니다 그리고 2- 3천불을 저축합니다
그렇게하여 강하여지고 단련되여 질수록
그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들의 감정을 자우자재로 바꾸거나 꾸밀수가 있는
능력의 사람으로 변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3-4년을 주먹밥 으로 아침을 때운사람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50가지 얼굴표정
우리 한국사람들 /
서로에게 말을 하지않고 상대에게 나에 의사를 전하는 표정들이 있지요
예를 들어
1) 두눈을 상대 에게 한두번 깜빡 깜빡 거리면 /
나 지금부터 거짓말하니 당신은 모른채 해라
2) 입술을 꾹 다물면서 코로 숨을 밖으로 보내면 / 천만에-- 할테면 해봐
3)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안돼
앞뒤로 끄덕이면 오케이
45도로 한번 쳐들면 가자 (떠나자)
등- 여러 가지가 있지요 막상 적어 볼려 하니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이곳 베트남인들도 상기와 같이 말하지 아니하고
나에 의사를 순간적으로 상대의 자기동족 에게 ( 타인에게 숨기면서 )
전할 수 있는 얼굴표정이 50가지 가 넘는 답니다
정말 그렇게 먾은 것이 사실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눈치와 분위가 살피는 것에는 매우 발달해 있는듯 합니다
베트남사람과 같이 있을때 당신의 등뒤가 뭔가 찜-찜- 할때는
말표현이 필요없는 정보교환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증거 겠지요 이상-
남편의 순위
여자가 결혼을 한다
결혼한 여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남편 이겠지요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에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한 여성에게는 남편보다 무엇이 더- 중요 하겠습니까?
요즈음 한국 20-30대 여성의 생활관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이유불문 하고 결혼한 여성에게는 남편이 최우선 이겠지요
허지만 이곳 베트남에서는
신혼이든 구혼이든 베트남 여성이
자기 남편에 대한 중요도를 자기생활에서 최우선에 두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여성 자신의 생활능력이 있고 없음을 떠나서
늘- 생활주변에서 남편이 부인 뒤로 쳐지는 것을
보고 듣고 경험을 하다보니 남편에 대한 푸대접이 자연스레이 생겼나 봅니다
또한 푸대접을 당한 남편 또한 그러한 행위에 대해 무감각해진 듯 합니다
예를 들면
집안에서 좋은 것은 남편 먼저 -
좀 힘들지요 , 부인이 허락후 가능하지요
집안 이권이 걸린 협상은 남편 생각이 우선 -
천만에요 , 부인생각이 최-최-우선이지요
집안 행사에 대한 방법은 남편과 상의한다
안되는 말이지요 , 부인이 혼자 결정후 남편에게 통보하지요
집안 가족소개 할 때 , 남편이 부인과 가족을 소개한다
그 경우 보다는 부인이 남편과 가족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지요
말이 좀-- 길어졌는데 지금까지 한말을 줄이면
보편적인 대다수의 베트남 여자가
자기 남편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
베트남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문득 - 문득- 뻔히 보이는 거짓말하고 있는 베트남인을 상면할 때가
가끔씩 있을 것입니다
잠시후 조금만 알아보면 허구임을 알 수 있는 상황을
장황하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현실을 기만하고 있는
베트남인을 보고있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왜 저렇게 말도 안돼는 것을 가지고 사람으로는 할수없는 말을 할까
하고 의구심과 오장육부가 비틀리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가 본인이 앞에 했던 자신의 말을--
조금전에 했던 자신이 표현한 의사를, 순간적으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니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거나 상황변화가 급변 한 것에 대해서는
자기의 의사를 정연하게 표현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일괄적으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선천적으로 순발력과 재치가 뛰어나
대화 하고있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마다 말꼬리에 맞추어 순간 순간 대응 하다보니
전체적인 흐림이 흐트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한 것을 반복할까요?
그것은 모든 부분에 대해서 많은것을 동시에 이끌고 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 한국사람 들은 누구든지 무척이나 난해하고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들을
아무런 부담감 없이 이끌면서 풀어가면서 생활을 꾸려가지만
이곳사람들은 우리들처럼 그러한 경험을 할 기회가 많지 아니하지요
그러다 보니 동시 다발적인 상황을, 상황별로 정리하거나 요약 할 수 있는
순간적인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죠
우리들은 그것을 모르고 우리처럼 생각 못한다고, 우리처럼 처신 못한다고
베트남사람 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다- 접어두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서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들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을 아-마 당신께서는
조금은 힘이 들겠지만 지금까지 별 무리 없이 ,
부담 없이 이끌고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곳 베트남인의 특성
생활 속에서 우리처럼 동시에 많은 것들을 이끌고 가야하는 상황이
별로 없습니다
그 점이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금계산서
베트남에서도 상거래를 할 때 우리들처럼 세금계산서를 발부하게 되어있지요
이곳 베트남은 우리보다 늦게 부가세를 시행한 관계로
업종별로 부가세 요율이 합리적으로 책정 되였답니다
예를 들어 유흥업소쪽 10% 이상이고
일반 업소는 10% 이고 행정 서비스업 일 경우는 10% 미만이지요
우리 나라 구멍가게 일 경우는 괴세특례로 부가세가 없는 것처럼
이곳 또한 마찬 가지이지요
원천적으로 정부와 은행을 믿지 못하는 국민들의 습성으로 인해
세금계산서 발부자체를 꺼려하는 업체가 참으로 많습니다
부가세가 시행 되여 세금계산서를 발부하다 보니
모든 것들이 공개되고 숨길수가 없어 자신의 판매영업 정체를 감추고
기존의 거래를 지속시키기 위한 별의별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고 있답니다
1)물건은 팔지만 세금 계산서는 없다/ 긴-말을 하지 마라
2)물건을 사라
그렇지만 세금계산서는 우리 업소 것이 아니라 다른 업체 것이다
3)구매 총금액과 세금계산서의 총금액은 맞지만
세금계산서 상의 단가는 맞지가 않다
1000원짜리를 9개 총금액 9,000원 에 구입 했을 때
세금계산서 상에는 900원짜리를 10개 9,000원으로 기입된다
4)세금계산서가 없다 그렇지만 꼭 필요하면 줄 수는 있다,
받고싶으면 적정 세금이율을 추가로 주어야한다 .
100만원 짜리를 구입했을 경우 부가세 10% 인 10만원과
100만원 짜리 세금계산서를 발부했을 때 ,
정부에게 세금을 최소한 5% 납부하므로
세금계산서 발행 액의 5%인 5만원을 추가로 주라
이것을 수용하면 사라 안되면 말고
베트남 측과 일반적인 상거래를 하실 때
결정적인 순간에 꼭 나오는 말 일수도 있습니다
상기의 4가지 경우를 먼저 숙지하신 다음에 거래협상을 시작하세요
(작은 것에서 속이 뒤집혀 거래가 깨질 때 가 참으로 많지요)
이곳 베트남인의 특성-
어떤 경우든 먼저 집고 넘어간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모양이든 증거만 있다면 오리발 내미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코-옥 찔러보기
지금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3-40년전 쌀이 없이 찐고구마로 점심을 대신할 때
허기진 배를 안고 고구마를 찌고 있는 상황에서 익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젓가락으로 찌고있는 고구마를 코--옥 찔러보았던 기억이 있는지요
배가 고파 익지도 아니한 것을 수차례 여러 번 질러본 탓 에
고구마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 된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곳베트남 사람들
일상의 생활 속에서 살-짝 찔러보는 것 무척 좋아합니다
물론-- 모르니까 알고 싶어서 찔러 보겠고,
증거가 없으니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또는 다른 이유로 도 그러하겠지만 / 가만히 보면 습성 인 듯 합니다
늘 생활에서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다보니
그들 자신 자체도 찔러 본다는 것에 대해
미안해 하는 마음 또는 죄의식을 전혀 못 느끼는 듯합니다
한국사람들도 / 사알-짝- 떠-보는 / 한번 툭-하고 던져보는
대화의 경우가 물론 있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문화는 자기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의도나
본인의 흑심을 감추기 위해서 그러한 경우는 별로 없지요
그렇지만 이곳 베트남에 살면서 생활곳곳 에서
그러한 경우를 당하고있는 자신을 무척이나 많이 발견하실 것입니다
대처하는 방안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확실한 것 한가지, 급하게 하는 대응, 자제 해야하지요
베트남인의 특성 큰소리치는 상대보다는
상대의 눈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더 무서워하지요
내국인 명의 빌리기
개인적인 친분으로든지 / 어떠한 연으로 든지
베트남 명의자와 명의를 빌린 사람간에 서로의 나은 내일을 위해
명의를 빌려주고 빌려 받았겠지요
잘되면 다행이지만 요즈음 처럼 어렵다 보니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지고 외상 차입이 늘어나고
외상차입이 늘어 날수록 베트남인 명의제공자는 불안이 가중되고
불안이 가중되니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의심하다보니 본업보다는 담보확보가 우선이 되고
그러다 보니 회사는 더욱 엉망이 되고
회사가 엉망이 되다보니 갚어야할 외상 부채는 갈수록 커지고
베트남 명의 제공자는 담보확보를 위해 공장의 자산을 담보로 잡고
명의빌린 사람에게 공장 출입을 금지시키고
명의제공자 임의대로 공장의 자산을 처분하는 과정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명의빌린 사람은 베트남 명의제공자 에게 당했다고 말할 것이고
명의제공자는 명의 빌린사람 에게 사기꾼이라고 말하겠죠
잘잘못을 따지기전에 보통 그러한 경우에는
무조건 명의 빌린사람이 이길수없게 되였습니다
베트남인의 특성 // 어려운사람 에게는 매몰차게 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 어려운사람 에게는 매몰차게 하지는 않습니다
끝까지 가기 전에 // 마지막까지 가지말고 상황을 정리하세요
최종까지 가면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남는 것 없습니다
해외취업 생활
마담 - - 하고 가정부애가 부른다.
왜냐고 물으니 자기도 공항에 마중을 나온다고 한다
참 기특하다고 살짝 웃어본다
남편이 동남아시아로 부임 받고
3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준비중 이였다
가정부의 공항마중 나온다는 소리에 지난 일들이 필름 되여 재방송된다
말이 안통하고 /
문화가 틀리고/
사고가 틀리고 /
습관이 틀리는 / 가정부를 데리고
그동안 싸웠던 일들 /
고함쳤던 일들 /
인간적으로 무시해 했던 일들 스쳐가면서 이제는 추억 속으로 묻혀 버릴
일들을 생각하면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보였다
시간이 되여 출국장 입구에서 한사람씩 인사를 하면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가정부와 인사를 할려할 때
그 애의 눈빛이 정색이 된다,
깜짝 놀라 얼굴을 마주하니
그 애 하는 말
마담은 내 가래침을 1년동안 먹었다
나는 밥을 담기전 밥솥에다 1년동안 나에 가래침을 뱉었다
1년동안 당신이 나에게 행했던 인간적인 모독
이제부터는 다른 곳에서는 하지 말아라
동남아시아 어느곳 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상기의 글은 픽션이 아니고 있는사실 그대로 이야기 입니다
젓가락 문화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젓가락 문화를 가진 국민은
보편적으로 섬세하고 영리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곳 베트남 또한 우리들처럼 젓가락을 사용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지 이곳 베트남인들이 손재주가 좋고 눈치가 빠르고
일을 빨리 배운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졌지요
그런데 베트남에 살수록 궁금한 것이
이곳 베트남 사람들 손재주도 좋고 영리한 사람들 인데
왜 현재의 이모양 이꼴일까?
현재의 베트남을 좋게 보면, 좋게 보이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복장이 터질때가 이만 저만이 아니지요
왜그럴까 ? 자꾸 생각하다 보니까 --- 어느 한면은 이럴것 같습니다
베트남인의 특성
베트남사람들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선천적인 눈치와 손재주와 영악스러움 으로
새로운 것을 쉽게 나에것으로 만드는 재주는 있으나
새로운 재주나 기술이 한번들어 오면 거기에서 만족해 버리고
그것만 가지고, 별의별 방법으로 재탕 삼탕으로 우려 먹을줄만 알았지
본인이 새로 배운 지식을 통하여서 한단계 높은 창의력 추구와
미래 지향적 이고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지적인면은 부족한 듯 합니다
베트남사람이 당신을 미치게 만듭니까? 그렇다면 화내지 마시고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 자리에서 당시의 상황을 글로 적어 남기세요
화를 내면 안되는 일도 될수가 있겠지만
당신의 나이와 건강으로 는 허구헌날 화낼수는 없을 것입니다
몸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 베트남 오래 살려면 ---
매입 매출 맞추어야
베트남에서 단독투자 이든지 현지인 명의 투자 이든지
베트남에서 사업을 한다치면 매출건 마다
매입 자료를 무조건 필히 받어 두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상품을 팔고 세금 계산서를 발행했다 치면
그상품을 구입한 세금계산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판상품에 대한 구입한상품 세금계산서를 받는 것이 매우 쉽게 생각되지만
판매한 매건마다 준비하는 것이 베트남 에서는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꼭 해야할 사항입니다
구입 세금게산서를 그때마다 받지 않고
소급해서 한번에 받기는 어려울뿐 아니라
불가능하며 베트남 세무서의 세금임의추징에 대해 반론을 제기 할수가 없습니다
베트남에서 상품을 세금계산서를 주고 팔았다치면
꼭 구입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점 매우 중요합니다)
구입근거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베트남측과 대항 할수 있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모둔부분에서 전부분에서
근거만 있다치면 무엇이든지 할수있다는 것 입니다
베트남에서 구두언약은 한국과 다르며 모든게 증거가 있어야하지요
베트남에서 필요할 근거는 생활속에서 필요시마다 준비해야 하며
그길만이 이곳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길 이지요
속내 감추기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꼭 무엇을 해야겠다고 다짐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았던 것들이 // 경험했던 것들이 아하-- 하고 새롭게 느끼는 것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태도를 감정을 생각의 표현을 극히 자제하며 억누르면서 살아가는 베트남인들이 생각보단 훨씬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베트남인)에 생각을 표현 한다거나 나에 견해를 밝히는 경우가 별로 없지요 특히 직책이 이권과 밀착되여 있는 보직의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는 베트남인 이라면 그러한 경향은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러한 베트남사람의 속내를 알기위해 베트남에 거주하는 외국사람이 그들에게 급여를 크게 인상 하거나 근무조건을 좋게 하거나 별의별 대화로 유도 하거나 무척이나 가까운 감정의 교감을 갖는다 해도 그들의 속내를 알수가 없으며 알려고 할수록 더욱 알수 없을뿐더러 설령, 안다 할지라도 자기가 이미 표현했던 속내를 아주 쉽게 번복 할것입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혹-- 그럴경우가 있을 경우 힘이 들더라도 사람을 바꾸는 것이 최선 일수도 있지요 |
베트남에 처음 적응하기
요즈음 한국에서 뭔가의 돌파구를 찾다가
이곳 베트남에 오시는 분들이 부쩍 눈에 띄게 많네요
각 개인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각기의 모양으로 오시지만
결국은 이곳 베트남인과 생활이 쉽지는 아니하지요
이곳 처음오면 베트남 적응에 대한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뒤에야 베트남의 모순된 모든 것을 알게되지만
알땐 너무 늦어, 이미 날라가버린 원금이 너무크게 보일수가 있겠지요
혹- 베트남에 개인자격으로 오셔서 뭔가를 해볼려는 구상이 있다면
여러방법이 있겠지만 다음의 방법 권해봅니다
베트남에 오셔서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다만 최저의 생계비로 베트남 언어공부만 무척이나 열심히 하십시오
한-- 6개월에서 1년 정도
공부 하다가 빈공간이 있으면 틈틈이 주변생활을 눈여겨 보십시오
그런 생활을 어느정도 했다 싶으면
뭔가를 해볼려는 의지를 가지시고 베트남을 다시한번 새롭게 보십시요
앞으로 가야할 길이 좀더 크게 보일수가 있을 것 입니다
또한 수업료 지불을 하지 아니해 원전이 그대로 남어있을 것 입니다
상기의 말이 참으로 쉬운말 같으나 행동으로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지요
베트남에 처음 왔습니다 , 어느정도 나이가 있습니다
영어를 못합니다 / 베트남어는 더더욱 못합니다
베트남 길도 문화도 모름니다
베트남사람과 의사소통은 고사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나에 의사를 표현도 못합니다, 외국생활이 처음입니다
이런 상태의 지적능력은 5살미만 이지요 ----
본인 또한 그런 상태이지만
당장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베트남을 잘아는 사람이 도와줄수 있기에
같이 하는 사람이 베트남을 잘알기 때문에
모든것이 다준비 되여있기 때문에
당장 거래할 품목이 있어서
돈만 투자하면 되기 때문에
----라는 이유로 베트남 오자마자 일을 시작하시는분 들이
참으로 많이 계십니다
건축 완공후 절반만 사용
가끔 중국계열(대만인 및 중국인)의 생산공장을 방문하다가
문득 우리와 틀리는 부분을 발견하고는 내가 질문을 해본다
---------------------------------
질문 건물 준공이 6개월전에 되였고
본 생산가동은 앞으로 6개월후 이라고 하는데
이해가 안간다 설명을---
답 당신들도 베트남에 살고 있으므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곳이 빨리 원한다고 빨리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생산에 들어가면
생각지못한 난관들과 안생길 불량품이 워낙많이 생기어
부-러 천천히 생산한다
----------------------------------
질문 완공된 건물을 50%만 사용하는 것 같다
사용하지 아니한 부분은 필요할 때 건축하면되지
완공하고서 텅비어 놓은 이유가 뭐냐
답 어차피 건축할 것이니 먼저 건축하는 것이다
오더는 없지만 차후의 오더가 있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텅-빈 공장 을 바이어가 볼때
오더 주고 싶은 맘이 절로생길 것이다
------------------------------------
건물을 완공은 빠를수록 이득이니 무조건 서둘러야 하며
공장 완공에 맟추어서 생산계획 및 오더는 필히 있어야하며
또한 생산에 들어갔으면
바로 상품이 나올수있게 인력 및 장비를 준비해야하며
오더만 있다면 전공장을 풀 가동할수 있게 사전 준비해야한다는
나의 사고로는
건물 완공후 6개월 후부터 본생산 한다는 그들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야할지 잠시 어리둥절했다
Tommy Reilly / 하모니카 연주모음
1: Scarborough Fair
2: Kathleen Mavourneen (Frederick Nicholls Crouch)
3: David of the White Rock (Welsh Traditional)
4: Pavane (Gabriel Faure)
5: Norwegian Dance (Edvard Grieg)
6: Auf Flugelndes Gesanges
(On Wingsof Song-Felix Mendelssohn)
7: 사랑의 밤( 칸-샤르징어)
8: 감상에 젖어 (엘링톤-쿠즈)
9: ConcertinoI (Tausky)
10: Tausky (Concertino)
11: James Moody (Little Suite,III.Cantilena)
12: Little Suite,III.Cantilena (James Moody)
13: James Moody
(하모니카와 현악4중주를 위한 5중주)
|
첫댓글 언제나 참 깊이 있는 글만 올리시네요.
직업이 뭐예요? ㅋ
시간날때 찬찬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
부족한 글을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길어서 대충 봤지만, 벳남의 모습이 모두 다 있는듯 합니다...
전 복사해서 차량 이동할때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틈날때마다 좀씩 읽어야 겠네요..내용이 넘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내공이 있으신 글을읽으니 참으로 대단 하십니다.저의 주변에도 베트남에 가면 손쉽게 돈벌거라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가기전에 이글을 한번읽어보고 가보라고 권하고십네요.이글을보니 현지에 살고 계시는 분들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힘내시고 화이팅 하십시요.
못난 글을 칭찬해 주시고,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어 봐야 겠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쁜 연기새활 중에도 늘 좋은글 올려줘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차태현옹만이 쓸 수 있는 글들 입니다....
저도 자료를 좀 가지고 있습니다만은 님 글을 통해서 한층 더 깊은 공부가 됩니다..._()_
과분한 말씀에 얼굴이 붉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체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오래된 이야기나 주관적인 측면이 좀 있네요
그러나 정성스런 글 잘 보고 갑니다^^*
부족한 글에 관심과 좋은 말씀주셔서
감사합니다.
베트남 초보로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전에 언듯 보니 한국에 사신다고 한것 같은데... 아닐 수 있구요..
서울이시면 한번 뵙고 싶습니다.
쪽지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잘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으흠 감명깊은 소설을 읽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