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인간의 숙명적 요소는
다차원으로 구성된
인간의 작은 영역에 국한됩니다.
운명과 자유의지는
차원론으로 설명됩니다.
판단 주체가 작용하는
개인의 의식 영역(마음)에선
자유의지는 존재하지만
개체를 넘은
확장된 의지인 인연의 차원에선
자유는 무의미해지지요.
운명은
인연의 흐름이며
자유의지는
그 인연의 일부입니다.
자유는 절대적 자유가 아니며
규모의 측면에서
부분성을 지니지요.
자유는
상위 차원인 인연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인연과 자유의지의 합작이
삶의 구체적 사건이지요.
여기서 일반적으로
자유의지의 지분은 적습니다.
그러나
비록 적은 지분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차원에서
자유의지는 막강한 힘을 지녔습니다.
의미는
사건의 크기나 종류에서 자유로우며
항상 새롭게 열어가는
창조의 차원이기 때문이지요.
도식적 측면으로 보아
현상에서
의미의 차원을 제외하면
인연의 흐름은
사건의 기계적 인과로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연은 결정론적이며
바뀔 수 없는
숙명이 될 수 있지요.
의미를 이해하는 관찰자가
없으면
우주의 존재와 그 움직임은
거대한 기계 장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의미의 차원이 열리면서
인간은
기계 장치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지요.
의미 이전의 인간은
단순한
생화학적 반응체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다차원적 존재라 함은
상이한 차원들이
구조적으로 층을 이루고 있음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양파나 양배추 그리고 고층 빌딩에
비유되기도 하지요.
빌딩의 비유는
차원들의 역량을 잘 설명해주는데
2층에서 확보하는
시야나 이해의 지평이 있으나
20층에서의 시야나 이해 지평은
많이 다릅니다.
의식의 확장은
이들 차원의 층을 높이는 것과 같지요.
생화학적 반응체로서의 인간은
낮은 층이나
지하층일 것이고
의미의 인간은
다소 높은 층이겠지요.
그리고 의미의 차원도
하나의 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층을 높이는 과정에서
특정 층에서 발생하고
그 이후 층을 올라가며
더 미세해지고 고도화됩니다.
고층으로 갈수록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기 때문이지요.
이런 사실은
인간이 지닌 다양성과 가능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어떤 이들은
평생을 3층에서만 살며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로
여기지요.
30층에 있는 이는
제한된 부분에서만 그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40층에 있는 이는
지하층에서 40층까지 오르내리며
다양한 삶을 경험하지요.
50층의 어떤 이는
끊임없이 층을 올리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50층과 51층 사이엔
중간 지대가 없지요.
50이든
아니면 51일 뿐입니다.
이것은
의식의 확장이 '도약'으로 이루어짐을
가리킵니다.
빌딩엔 많은 층이 있으나
각 층은 고유하고 독립이지요.
하나의 층이
하나의 차원이라 하는 것은
차원의 정의에 의한 것인데
차원은
독립된 고유한 원리가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다차원의 빌딩이
인간의 구조적 모습입니다.
자유의지는
빌딩 전체에서 유용하지 않으며
개체 의식의 발현 이상에서만
일부 층에서 부분적으로
적용되지요.
빌딩엔
의미나 자유의지가 발현하지 않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 층에선 모든 것이
숙명이지요.
우리의
생체적 조건, 인종, 성별,
타고난 개인의 기질, 역사적 배경 등이
이에 속합니다.
그리고
아직 발현되기를 기다리는
많은 사건이
이것으로 분류되지요.
숙명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특정 영역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숙명을 무력화시킬
마스터키master-key인
의미를 지녔지요.
의미에도
많은 차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미에서마저 자유로워지는
영역이 있지요.
우리가 층을 높이려는
이유입니다.
아득한 높이 저마다 세상
긴 무게 바닥 홀로 견디고
공간 열어 멀리 보내고도
알지 못하는 첨탑의 이유.
..260519小野
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나 잘랐다, 너 잘랐다 삐쭉삐쭉
질기고 무거운 업장 짊어진 채
비상하려 멀리멀리 날아오르고도
어딘지 가늠치 못하는 헤매임!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