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드리려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길 더 원하시기에 차라리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사건이 등장합니다(3절). 순전한 나드(Pure nard) 한 근을 예수님께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 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리트란(λίτραν)이란 단어로 그 원형은 리트라(λίτρα)입니다. 한 리트라는 약 340g입니다. 그런데 그때 가룟 유다가 이 향유의 금액을 약 300데나리온으로 추정하고 있는데(5절),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하루에 8만 원 정도로 계산하면 약 2,400만 원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이 엄청난 금액을 순식간에 예수님의 발에 부어버린 마리아의 행동에 가룟 유다는 이 비싼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훨씬 나았을 텐데, 이렇게 낭비하느냐고 마리아를 책망합니다(5절).
가버나움에 잠깐 머무셨던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로 다시 오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1절).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기에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시기에 적합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이기에 매우 위험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가까워져 감을 알고 있으셨기에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로 가셔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2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시니,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집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인지(마 26:6), 나사로의 집인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만,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위해 일하고 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으며(2절),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으니(3절) 나사로의 집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튼 엄청나게 비싼 향유를 마리아는 예수님께 망설임 없이 부었고, 가룟 유다는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을 책망했습니다(3절~5절). 사실 자기의 오라버니인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니 나사로의 목숨값으로 따진다면야 그 정도의 금액도 아깝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아의 헌신을 가룟 유다는 낭비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러한 가룟 유다의 말에 대해, 가룟 유다가 정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돈에 대한 탐심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해설을 달고 있습니다(6절).
그런데 이러한 가룟 유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며 자신의 장례를 위해 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7절),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너희들 곁에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8절).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하시게 될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이러한 것을 미리 알고 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적절한 때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례를 치를 때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관습이 있는데, 이를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베다니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보려고 했지만, 죽었다가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를 보기 위함이기도 했었습니다(9절).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대제사장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합니다(10절).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바람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모의까지 한 것입니다(11절). 이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음에도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자기들의 이권(利權)을 위해서라면 몹쓸 짓도 마다하지 않는 매우 악한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력과 탐욕에 빠진 자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한 섬김은 하나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낭비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때론 낭비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을 많이 사용하는 것보다 그 시간을 더 유용한 일에 쓰는 게 낫다고 말할 수도 있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 등을 위해 뭔가 물질을 더 사용하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마구 사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하나님께 시간과 물질과 은사를 기꺼이 드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고르반(κορβᾶν, Corban;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악용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는 의무를 회피하는 이들처럼(막 7:10~13)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욕심이나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빙자하여 마구잡이로 물질과 시간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다해 드리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셔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서 거룩한 낭비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시간, 물질, 은사, 재능 등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길 원하십니다. 그러한 헌신을 낭비라고 말하지 말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헌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