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시대에는 - 철기문화 꽃피우고 - 고려·조선시대엔 - 화약무기 등 제조 - 국방과학 전초기지 역할 - 개화기엔 '마마귀신' 퇴치 - 의료·보건위생 중심지로
- 조선 최고 과학자 장영실 - 유전공학 선구자 우장춘 등 - 걸출한 선현들 이곳서 나고자라 - 우리 과학사에 빛나는 업적 남겨
동래는 문화와 예술의 고장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과학기술 전통이 숨어있는 지역이다.
멀리는 한민족의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게 한 철기문화의 중심지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화약 제조 등
국방과학의 전초기지로 외적으로부터 우리 국토와 문화전통을 수호했다.
인물로는 장영실이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선현을 배출한 고장이며 가깝게는 우장춘 박사의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혼이 깃든 우리나라 유전공학의 시작점이다.
개화기에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마마귀신을 물리친 우두법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의료 및
보건위생의 중심지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더구나 동래는 우리 역사, 우리 과학사에 우뚝 서있는 큰 인물들을 여럿 배출한 고장이니
우리 조상들의 삶과 함께 해 온 '겨레과학'으로 이야기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 동래부
동래부 동헌은 옛 동래고을의 정취가 남아있는 동래전통시장과 접해 있다.
동래는 군사 ·외교적 상황에 따라 현, 도호부, 부 등으로 불렀으며 군사 요충지여서 무관들이 많았다.
행정의 중심이자 군사 작전본부 역할을 한 동헌에서는 고려말 왜적을 쳐부순 화약무기와
조선 초기 과학선현 장영실.
그리고 개화기에 마마귀신(천연두)을 물리쳤던 종두법 이야기가 숨어있다.
고려 500년 동안 과학기술의 대표적 성과로는 화약, 인쇄술을 꼽는다.
이 가운데 동래와 관련된 것은 화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 1377년(우왕 3년) 10월에는 '처음으로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판사 최무선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왜적이 40척의 배를 끌고 동래현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무선(1325~1395년)이 화약 무기의 제조와 무기 개발을 위해 화통도감을 만든 시기에 왜구들이 동래현을
침공했다는 내용이다.
화통도감을 설치한 뒤 바다를 건너 동래로 침입해 오던 왜구들과의 싸움에서 화약 무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또 조선 초기의 기록에는 동래에서 모은 흙이 당시 화약의 원료인 염초(질산칼륨) 제조에 사용됐다고 나온다.
세종 5년(1423년) 1월 9일, 그리고 문종 즉위년(1450년) 9월 19일 등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군기감(軍器監)에서 화약을 만들 때 동래 등 여러 지역에서 수집한 흙 등의 원료를 사용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에는 오래된 부뚜막 등에서 모은 흙을 재와 오줌, 말똥 등을 섞어 반년 이상 쌓아두었다가 끓여서
염초(또는 초석)를 얻었다.
그리고 염초 75%, 황 10%, 숯가루 15% 정도를 섞어 만든 것이 당시의 화약이다.
동래현은 고려 말부터 극성을 부린 왜구의 침입을 막는 국방 요지로 무장 및 군사기술자들이 상주한 곳이니
동헌에서도 화약을 포함한 병기구를 제조하거나 성능 향상을 위한 연구개발을 의논했을 것이다.
■ 조선시대 장영실의 궁리마루
고려·조선시대 왜구에 맞서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동래부 동헌.
동래는 조선 최고의 과학선현 장영실(蔣英實·1390?~1450?)의 고향이다. 장영실이 동래의 관노였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고려시대 말 우리나라로
귀화한 중국 가문의 사람(아산 蔣씨)이며 당시 동래현에 파견된 군사기술자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2002년 확인된 아산 장씨의 족보에는 장영실의 아버지 성휘를 비롯한
다섯 형제가 모두 무인들에게 부여되던 직책인 전서(典書) 벼슬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의 아버지 성휘도 군사기술자로 동래에서 근무하는 동안 서자인
장영실을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이 위인전 등에는 장영실이 10대에 발탁돼 대궐로 간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처음 간파한 사람이 태종(1367~1422년)이었고, 그의 활약이 세종 3년(1421년)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미뤄 그는 1390년 전후에 태어난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실록에 등장할 때 그의 나이는 이미 30대가 되었으며 20대까지는 이곳 동헌에서 관노로 지냈을 것이다.
장영실은 정교한 물시계장치인 자격루를 고안한 기계공학자이자 구리와 아연 등의 금속을 합금하여
갑인자는 물론 각종 천체관측기기를 만든 금속기술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배경 역시 그의 아버지가 군사기술자였고 태어나고 자랐던 동래가
국방 요지였던 것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군 주둔지에서는 보초 교대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물시계가 필요했고, 적과 싸우기 위한 병기 제조가
중요했다. 따라서
그의 기계공학적 지식과 금속 제련에 관한 기술은 고향인 동래에서 배우고 스스로 익혔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관노로 있었던 동래부 동헌은 언제나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고 새로운 장치들을 만들었을
장영실의 궁리마루였을 것이다.
■ 마마귀신 몰아낸 보건행정의 중심
개화기의 동래는 서구 문물의 접촉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조선 시대를 통해 조선통신사의 통로가 되어 일본에 조선과 중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던 동래는 일본이 앞서가게 된 19세기 이후에는 그들의 선진 과학기술을 조선에 전해주는 창구 노릇을
했다.
이 시기에 동래와 관련된 대표적인 일이 지석영(1855~1935)과 그의 우두법 도입이다.
호랑이보다 무섭다던 마마귀신을 이 땅에서 물리친 우리나라 우두법의 개척자인 지석영은
1895년 자신이 우두법을 처음 배운 곳인 부산의 동래 부사로 부임해 관내 주민들에게 우두를 보급했다.
동헌은 흉년이 들었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고, 전염병이 돌면 현재의 보건소 역할도 했을 것이니 지석영의 우두 보급도 동헌을 중심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지석영은 1879년 초량 왜관의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서울로 올라갔으나 두묘(종두의 원료)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데다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때 일본에서 마술을 수입했다 하여 체포되기도 했다.
동래지역에서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정부가 법적으로 우두 접종을 권장하고 이듬해 지석영이
동래 부사로 부임해 온 뒤 우두 보급이 본격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래부 동헌은 지석영이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소원인 마마귀신을 퇴치한 주무대라는 의의도 있다.
지석영은 이와 함께 교육과 한글 보급에 앞장섰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사를 하는 등 친일행각이 드러나
지탄을 받았다.
■ 부산지방기상청
동헌을 나와 동래구청을 지나면 바로 옆 건물이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 받들겠다는
부산지방기상청이다.
기상청의 상징은 '측우기'. 서양보다 200년 앞서 개발되었고, 1777년 이후 현재까지 240년 가까운
세계 최장의 강수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상관측의 상징인 측우기 개발도 장영실의 업적이니
부산지방기상청이 2002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측우기의 의의는 하늘의 뜻으로만 여기던 비의 양을 수량적으로 측정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해서 장마와 가뭄의
발생시기와 지속기간 등을 예측해 미래에 대비한다는데 있다.
측우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빗물이 땅속에 스며든 정도를 측정하거나 풀뿌리에 스며든 물기를 보고 추정했다. 장영실의 다른 발명품과 달리 측우기는 각 도와 군현까지 전국 각 고을에 보급되었고 수령이 직접 자, 치, 푼(2㎜) 단위까지 정확히 재어서 중앙부서인 서운관에 보고해야 했다.
기상청내 체험관에서는 아이들에게 '나도 기상캐스터'가 되도록 해보자.
TV모니터에 나오는 모습이 영락없이 꼬마 기상캐스터다.
우리 생활과 뗄 수 없는 비와 바람, 태풍과 열대화 등 다양한 기상과학을 보고 체험할 수 있다.
■ 우장춘기념관
어린이들이 우장춘기념관에 있는 우장춘 박사 흉상을 보고 있다.
이어 온천동의 우장춘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 '씨없는 수박'의 진실과
그 보다 훨씬 중요한 씨앗이야기를 들어보자.
민비 시해에 관련된 매국노의 자식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랐던 우장춘(禹長春 1898~1958) 박사는
아버지의 죄를 씻기 위해 1950년 3월 귀국했다.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갖은 노력 끝에 새로운 품종의 감자를 개발해
수천 년을 이어온 보릿고개를 이겨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돌아가시기 전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자 "조국은 나를 알아주었구나"하고 눈물짓던
우 박사의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정신이 이곳에 서려있다.
우장춘 기념관은 우 박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99년 건립됐다.
한적한 주택가에 우장춘 기념관이 세워진 이유는 바로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우물이라는
자유천(慈乳泉)이라는 샘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천은 일본에 있던 어머니가 사망한 뒤 각계에서 보내온 조의금으로 판 우물이다.
우 박사는 물이 부족한 주위 사람들에게도 물을 나눠 주었으며 매일 아침 우물 주위를 청소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우 박사의 정성이 깃들어 있는 자유천에 기념관이 지어진 것이다.
■ 장영실 과학동산
장영실과학동산을 찾은 어린이들이 해시계를 살펴 보고 있다.
동래읍성의 '장영실(蔣英實) 과학동산'도 빠트릴 수 없다.
부산 동래구가 청소년 시민들에게 전통과학을 체험할 수 있도록
2009년 10월 문을 열었다.
장영실 과학동산에는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조선 태조 때 만든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천문관측기기인 혼천의와 일성정시의, 농업기상관측기인 측우기, 수표, 풍기대 등 조선시대 각종 천문관측기기 복원품
18종 19점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천문관측기기 복원품은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한 세종대왕 능(영능 英陵)에도 있다.
그러나 천문기기의 다양성이나 배치면에서는 장영실 과학동산이 훨씬 뛰어나다.
복원품 자체가 문화재가 되도록 전상운(전 성신여대 총장), 박성래(전 한국외국어대 부총장), 이용삼(충북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등 국내 최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최대한 실물에 가깝게 제작됐으며 실제로 체험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위치도 동래읍성의 남쪽 탁 터인 언덕자락에 자리 잡아 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 관측과 체험이 용이하다.
장영실 과학동산 바로 옆에는 가야시대 철제유물이 대거 발굴된 부산지역 최대 고분군을 보존하고 있는
부산복천박물관이 위치해 있어 고대 철기유물과 조선시대 과학유산을 한꺼번에 보고 배울 수 있는
역사학습장이기도 하다.
■ 동래 철기문화의 증인 복천박물관
복천박물관에 전시된 실물 크기의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복천박물관에서는 오늘날 탱크의 전투력에 맞먹는다는
'말 탄 무사'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가야시대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인
철기제작에 숨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특히 복천동고분군은 우리나라에서 덩이쇠가 가장 많이 나온 고분이다.
덩이쇠는 제철과정 중에 만들어지는 철판 형태의 쇳덩이다.
덩이쇠는 다른 철기를 만들기 위한 중간 단계의 철 소재 구실을 했고
오늘날의 돈과 같은 기능도 지녔다.
이토록 중요한 덩이쇠가 복천동고분군에서 많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당시 철 생산이
매우 활발했고 이를 바탕으로 동래 사람들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위치가 높았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