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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묵상글 ( 연중 제24주일. - 당하고만 살지 않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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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15 05:35
- 당하고만 살지 않는
지난주에 이어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예언하고,
복음은 예수께서 이사야가 예언한 그 메시아이심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심에도
수난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니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그러실 수는 없다고 반박합니다.
여기서 저는 베드로를 비난하기보다 그의 편에 서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꼭 수난과 죽임을 당하셔야 하나?
사실 이 질문은 수난뿐 아니라 육화와 관련해서도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꼭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나?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시고,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시듯 원격 구원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꼭?
능력으로 구원하신다면 이 세상에 굳이 오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구원하시길 원하셨고 그래서 육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 때문에 우리를 찾아오셨더라도
수난과 죽임까지 꼭 당하셔야만 하셨을까요?
사랑 때문에 우리를 만나러 오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사랑 때문에 죽어야만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은 베드로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죽지 않고도 사랑하실 수 있고
죽지 않고도 구원하실 수 있잖아요?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바란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이 치유는 바라지만 구원은 바라지 않고는 하지요.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가 구원을 바라게 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프란치스코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쟁 패배, 감옥 생활, 병상 생활 등의 고통을 통해
프란치스코가 인생에 대해 질문을 하게 하고 고뇌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고통과 고뇌가 주님께서 쓰시는 구원의 지렛대이고 사다리입니다.
왜 세상에 인간이 원치 않고 내가 원치 않는 고통이 있고 악이 있는지,
사랑과 선의 신이 있다면 왜 이런 고통과 악이 있는지 고뇌하고 질문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구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수난과 죽임을 당하심은 이런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시는 사랑이요 고통과 죽음에서 우릴 구출하시는 사랑입니다.
동참하시는 사랑을 통해 우리의 고통과 죽음이
저주받은 어느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고 수용하게 하십니다.
물론 이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렇게 일단 깨닫고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넘어서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이사야서에 잘 나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한 마디로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하고 살지 않고 스스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길이고,
그리스도께서 이 길을 앞서가셨는데 우리는 오늘 이것을 묵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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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봉성체하던 어느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이 할머니는 제가 방에 들어가면 곧바로 우셨습니다. 자기가 아직 할 일도 많은데 곧 죽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며느리에게 병원에서 뭐라고 하냐고 물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으니 조금 불편한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했던 친구, 가족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을 보며 이 할머니는 죽음이 두려우신 것입니다.
할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 드시려고 했고, 다리가 불편해서 밖에는 못 나갔지만 집에서 나름으로 열심히 운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몸 상태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걱정이었습니다. 이 걱정이 결코 할머니의 건강을 좋게 만들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에 대한 걱정과 죽음에 대한 걱정을 단번에 끊어내지 않으면, 평생 아무 일도 못 할 겁니다. 그런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세요. 뭐든 올 테면 오라지요. 몸뚱이가 우리를 조롱하는 일이 이리 빈번한데, 우린들 한두 번쯤 놈들을 조롱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한평생을 잘 싸우고 살려면 이 원수부터 정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멋진 성녀의 말씀입니다. 사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데도 걱정과 두려움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할 일이 그다지 많은데 겨우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신원에 관한 질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을 말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없었지요. 그 답을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 역시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리스도, 메시아의 모습을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인들을 몰아내는 개선장군으로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승리의 개선장군인 예수님은 끝까지 살아 남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제껏 거짓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실현될 말씀입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걱정, 두려움 등은 모두 사람의 일만 생각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희망과 기쁨만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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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돌봄은 우리가 서로에게 나누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찰스 디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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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도 우리는 길을 걷습니다. “나그네 설움”이라는 ‘옛 노래’가 떠오릅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그러나 우리는 정처 없이 걷는 발걸음이 아니죠! 우리는 분명 그분과 함께 동행 하여 걷고 있으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니까요!
오늘 <복음>은 바로 길을 동행하여 걸으면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이 가는 길’과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더구나 이 가르침은 스승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막 시작하면서 말씀하고 계시기에, 그 간절함이 베여있는 가르침입니다.
순교성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 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려준 ‘주님의 종의 노래’로, 메시아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이들에게 뺨을 내주고, 모욕과 수모를 받으면서도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이나,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전합니다.
<제2 독서>는 그분을 믿는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녀야 할 ‘믿음의 실천’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권고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장면인데,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아야 할 고난’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군중들의 여론을 물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시험문제를 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그러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알려주는 ‘그리스도’는 황당하리만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우리는 “반드시”(Dei)라는 말과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로, ‘명백히’(parresia)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단어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의무와 책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고난과 배척을 겪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랑의 의무이며 책임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겠다는 뜻을 나타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배척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반드시’ 실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 곧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반드시’ 해내고 말리라는 투철한 사명감과 각오를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에서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한 번 쓰인 단어로, ‘자유를 가지고 용기 있게 그리고 분명하게’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어렴풋이 알아듣거나 대충 알아들어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명백하게 알아들어야 할 내용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길은 우리가 ‘명백히’ 알고 분명하게 따라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은 대체 어떤 길인가?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곧 <첫째>는 한두 가지나 혹은 몇 가지의 고난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단지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이요, <셋째>는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 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걸어야 하는 길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곧 스스로 만들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수행해 가는 길인 것입니다. 의탁과 신뢰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당하면서도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이러한 내용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개선하는 ‘왕’ 메시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부당만부당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에 당혹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바로 전에 “복 받은 이”(마태 16,17; “너는 행복하다.”)로 칭찬받던 베드로는 이제 “사탄”이라고 호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에 맞섰던 것입니다. 사막에서의 유혹자처럼, 그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계획과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구원자가 되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사람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르 8,3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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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하고 물으셨습니다. 바깥 떠도는 소리,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1) 세례자 요한. 2)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3)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여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얘기는 그것으로 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소신과 확신에 찬 대답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나의 신앙과 다른 사람의 신앙은 확실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1). 그리스어로는 ‘구세주’ ‘구원자’라는 뜻인데 2).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3).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약 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국가를 재건하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주변 강대국의 속박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세주를 보내주시어 선택받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를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1).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2). 사제와 같은 인물로 3).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임금, 사제, 예언자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장차 하느님이 보내주실 메시아를 1).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하길 원했고, 2). 사제처럼 율법에 충실하며 3). 예언자들처럼 죄인을 단죄하는 인물로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1). 이 메시아가 압제 세력인 로마인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2). 원수를 철저히 응징하며 3). 율법을 어기는 죄인을 엄하게 벌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원수의 죽음이 아니라 회개를 원하시며 죄인에게는 처벌보다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진리(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17,17)를 줄기차게 선포하였고, 그 진리의 이름으로 그 진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메시아 칭호는 예수님의 사명을 올바로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하고 그래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구세주이시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적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까지 감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은 이기적인 야망의 논리로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삶을 본받고 더 큰 희생과 사랑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물음은 결국 너희에게 있어서 내가 어떤 존재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나를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분 손에 들려 있으니, 연필을 사용하고 안 하고는 그분 뜻에 달려 있습니다. 혹 부러져도 그분께서 필요하다면 깎아 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뜻을 관철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나를 맞추는 삶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고백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를 이루길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현 중 한 분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잊고 훌륭한 분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힘들고, 지치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난제에 봉착해 있을 때도 여전히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 ‘구세주’ 이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나를 살리시는 분, 나의 주인으로 확실하게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행하시면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과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같은 뜻을 되풀이 강조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혀있지 말고 더 크고 위대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 안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을 버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숭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집자실지(執者失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움켜잡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움켜잡았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명예도 그렇고 재물도, 목숨도 그렇습니다. 잡으면 잃습니다. 잃기 전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에 소유하지 않은 물건을 도둑맞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라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주님으로 가득 채워지고 충만해질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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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구역 모임에서 ‘복음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그날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피와 내 몸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과 성공을 원했습니다. 현실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가치와 다른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를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데, 저희가 어디로 떠나겠습니까?” 구역 모임에 참석한 교우들은 성경 말씀 중에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서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저는 그날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저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게 천주교는 손에 있는 ‘지문’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유한 지문이 있듯이, 천주교는 제게 운명처럼 주어졌습니다. 친척들은 세례명을 불렀고, 주일은 당연히 성당 가는 날이었고, 기일에는 연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편안하듯이, 사람은 공기를 마셔야 숨을 쉬듯이 천주교는 제게 물과 같고 공기와 같았습니다. 천주교라는 신앙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천주교라는 신앙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인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저는 천주교라는 신앙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회의를 느낀 적이 없습니다. 형제 중의 한 명은 사제가 되기를 바라셨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저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무엘이 형제 중에 다윗을 선택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형제 중에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가브리엘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1982년에 104명이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신학교의 규칙과 기숙사 생활 따르지 못해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어떤 친구는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의 길을 따르지 못해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어떤 친구는 신학과 철학이 어려워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40여 명은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주는 음식이 좋았습니다. 신학교의 도서관도 좋았고, 나의 책상이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이 어려웠지만, 사고의 깊이와 폭이 넓어져서 좋았습니다. 방학 때는 본당에서 지냈습니다. 주일학교의 일을 도와주고, 성당의 일도 도와주며 지냈습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그만큼 피곤했습니다. 개학이 되어 신학교로 복귀하면 몸도, 마음도 편했습니다.
33년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브리엘아!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처음 10년은 ‘질풍노도’와 같이 지냈습니다. 예비자 교리, 성경공부를 하였고, 청년 단체를 맡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청년 레지오, 청년연합회와 함께하였습니다. 아쉬운 점은 영적인 동반자가 되어야 했는데, 친교와 나눔의 동반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다음 10년은 ‘영신수련’과 함께하였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영신수련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신학교에서 영신수련 지도 사제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왕복 200킬로가 넘는 거리를 매주 다녔습니다. 영신수련은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신학생이 서품 받기 위해서는 30일 동안 영신수련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피정해야 합니다. 영적인 부족함을 느꼈던 저는 영신수련 지도 사제 모임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걸 택할 수 있다.” 영신수련은 제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
“가브리엘아!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저도 베드로 사도처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데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행동으로 고백합시다. 자기 목숨을 버릴 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신하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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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한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 내 맘에 드는 부분과 더불어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안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당신을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좋은 모습이지요. 사람들에게 스승님이란 소리를 듣고, 기적을 일으키고 빵이 없으면 빵을 만들고, 물에 빠져도 살려내고, 죽은 이도 살려내니 이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죽는다니까 그것을 못하게 합니다. 자기 욕심이지요. 죽음의 길로 가는 주님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 욕심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반쪽짜리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신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입니다. 사탄, 그것은 아마도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베드로와 같지 않을까요? 내게 필요하거나 좋은 점이 있으면 그를 사랑하고 내게 해롭거나 쓸모가 없으면 버리지는 않을까요? 신앙생활에 있어 좋은 것을 줄 때 주님을 좋아하고, 힘들고 어려움을 줄 때 예수님을 떠나려 하지 않는가요?
사랑하십시오. 영광만을 사랑하지 말고, 고통도 사랑하십시오. 영광이 사라지고 고통만 남더라고 사랑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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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끝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은 여행 준비가 본 여행보다 더 즐겁다고 말합니다.
본 여행을 즐기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여행을 준비하며 얻게 되는 설렘 또한 커다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연말의 성지 순례가 기다려집니다. 어떤 사람들과 어떤 길이 펼쳐질지 설렙니다.
저는 여행의 끝을 ‘돌아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주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 끝의 ‘돌아옴’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옴’에는 일상의 소중함이 들어있습니다.
‘돌아옴’에는 새로운 활력이 들어있습니다.
‘돌아옴’에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들어있습니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시작하는 작은 이벤트입니다.
더 소중히 여기기 위해, 더 사랑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행이든 순례든 떠나보세요.
멋진 마음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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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키엣 대주교님.
참 행복을 위한 십자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것들을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아주 옛날에는 태양이 지구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해가 뜨고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옛날, 구세주는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내려올 정도의 권능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여성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화려한 궁에서 세상을 호령하는 분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허름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너무나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주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통을 의미하는데 주님께서는 왜 인간에게 행복이 아닌 고통을 지라고 하신 걸까요?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세상의 짧은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이기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행복, 참 행복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겪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행복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것, 좋은 것을 얻으려면 그 만큼 고통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만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며 참 행복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받아들이기도 실천하기도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길로 이르게 하는 오직 한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헛된 약속으로 우리를 기만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그 길을 가시며 바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자녀인 우리 역시 지금의 삶에 취하지 말고 진정한 용기와 실천으로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저희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2.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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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꽃(花), 하느님의 시(詩)
예수 그리스도님
“믿음의 여정”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우리 믿음의 여정에 좋은 참고가 됩니다.
“잘못을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아첨하는 것이다. 아첨은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모두 무너지게 한다.”<다산>
믿음의 현자는 결코 아첨하지 않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논어>
이런 교정의 용기야말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의 거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순교자 성월 9월을 맞이하여 9.2-9.13일 까지 제45차 해외 사목 순례 여정은 그대로 “믿음의 여정”이었습니다. 역시 귀국중 기내에서의 장시간 언론인들과 인터뷰 시간을 가졌습니다. 초인적 힘은 순전히 기도의 힘, 믿음의 힘을 반영합니다. 도착하자마자 설립 500주년을 맞이히여 모인 테아티노 수도 참사 회원들을 향한 연설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쇄신, 친교, 기쁨의 봉사를 실천하십시오.”
“쇄신의 용감한 길을 선택하십시오. 환대의 집은 홀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회원들의 믿음을 촉구하는 말씀들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믿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도 믿음을 상기시키는 말마디들로 가득합니다.
“깨어 있어라!”
“모두가 지나간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없이 한결같이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맛, 기쁨, 재미로 살아갑니다.”
“어디에서도 인간의 존엄, 품위, 분별의 지혜를 지녀야 비로소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 프란치스코!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어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는 평생 좌우명을 써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붙여놓고 지극히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이제 집무실은 명실공히 지족암(知足庵)이 되었습니다. 엊그제 ‘꽃’에 ‘시(詩)’를 덧붙였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詩같은
하루
詩같이
살자!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느님의 꽃이, 하느님의 시가 예수 그리스도님입니다. 꽃같이, 시같이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하며 하루하루 날마다 믿음의 여정, 예닮의 여정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가 그 좋은 모범이 됩니다. 이런 믿음의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가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믿음의 전통도 정말 중요합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믿음을 살게 하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전통의 깊이, 뿌리의 깊이입니다. 전통의 뿌리 빈약하면 삶의 깊이도 잃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믿음에 관한 세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 신앙 고백입니다.
제자들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아는 것 역시 제자됨에 필수입니다. 따르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이자 답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여기 그리스도의 정체는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영광의 주님에 앞서 고난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런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하느님을 배경한 천하무적, 주님의 종, 믿음의 종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이런 주님 고백을 늘 새로이 하면서 추종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노자의 말씀대로 날로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해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신원을 밝힙니다.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그리스도, 주님의 종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는 것을 제자들에게 명백히 가르칩니다. 곧장 성급한 베드로의 조건반사적 거부 반응이 뒤따르자 주님의 지체없는 호된 질책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요, 우리 모두에 대한 평생 깨우침이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다 실패한 사탄이 재차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을 유혹한 것입니다. 멋진 신앙 고백으로 반석이라 칭찬받던 ‘주춧돌’ 베드로가 졸지에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까맣게 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던 것이며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닫고 배우며 성장하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충격요법적 꾸중은 평생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런 충격적 깨우침을 받은 베드로인데 후에 세차례 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셋째,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실천적 믿음입니다.
추상적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 책임을 다하는,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여 지고 가는 믿음입니다. 제2독서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실천으로, 즉 선행의 실천, 자비의 실천, 섬김의 실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실천으로, 믿음의 정수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마디가 모든 인류에 해당되는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한결같이 추종하는 믿음이, 주님과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순교적 믿음이 진짜 실천으로 보여주는 믿음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이고 어제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오늘 9월15일은 원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본보기가 되는 아들 예수님과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순교적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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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이에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이에서
사랑
미움
사이에서
받듦
누름
사이에서
나눔
앗음
사이에서
이음
가름
사이에서
품음
밀침
사이에서
함께
홀로
사이에서
살림
죽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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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4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따른 행동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초대 은수자와 수도자들이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입니다. 참된 나의 정체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겸허한 질문과 아울러 다른 사람들의 판단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사람들은 ‘자기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해 겸허히 바라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의 도덕과 선행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아름답고 착하고 정직하고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신앙인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이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다른이들의 판단에 좌우되면 자신의 모든 삶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것보다는 행복에 주의를 기울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아름다움을 바라다 보아야 합니다.
푀멘 교부가 어느 날 요셉 교부에게 “수도자가 되는 길을 일러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요셉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에서나 저 위에서 안식을 누리고 싶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만 묵상하고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무엇보다도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누구이시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끌어 줍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참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다른 이들의 잘못을 탓하지 않습니다. 남에 대한 판단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표지입니다. 자신의 죄를 겸허히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영혼의 평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통해서 내가 참으로 누구인가를 알게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으며 좀더 활동적이 되고 숨겨진 보물인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처를 통해서 내가 스스로 덮어쓴 가면들을 부수어 그 안에 있는 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라’는 의미는 자기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아가 ‘대단한 사람’이라든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보겠다는 생각마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말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대해 언제나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기 위한 완전한 자아포기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 안에는 예수님이 계실 뿐이다”는 바로 이러한 겸허한 대답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깨닫고 일상에서 실천으로 드러나기를 오늘 복음은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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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 파스칼 바이론 (Pascal Baylon)
---성스러운 성체성사의 소년목동---
스페인 : 1540-1592년
때때로 파스칼은 사제들을 따라서 도시와 시골로 선교여행을 다녔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거리와 공원에 사람들이 모여들 때면 선교사들은 자주 파스칼에게 뭔가 신앙심을 불러 일으킬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면 그 옛날에 단순했던 이 목동은 소박한 웅변술과 사랑으로써 성스러운 성체를 모신 제단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듣고 회개했다.
파스칼 수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주 고해하고 성찬에 참여하도록 충고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곧 우리들을 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 위해, 그리고 미사성제와 영성체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시기 위해 늘 감실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종종 이 성인 파스칼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깊이 생각하면서 성체를 모신 감실 앞에서 밤을 새우곤 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예감하고 있었다. 파스칼리스 바이론은 1592년 5월 17일 성신강림절 날에 임종했다. 수도원 성당에서 그를 위한 미사가 접전되는 동안 그의 시신이 관대에 얹혀지고 있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그의 시신이 성체를 축성하는 동안에 생기가 돋아나더니 마지막 다정한 눈길로 성체에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성 파스칼은 모든 성찬식에 참례한 신자들의 수호자가 되었다.(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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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나기정 다니엘 신부님.
https://blog.naver.com/soulpilgrim/22358422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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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제 십자가를 지고서 따라야만 /
박윤식 [big-llight] 240914. 20:11 ㅣNo.175959
누가 믿음이 있다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한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가? 이처럼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일 게다.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기에. 사실 믿음은 실천과 함께 작용하고 실천으로 그 믿음이 완전하게 될게다. 그러니 신앙인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되고,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어쩌면 창조주 하느님만을 믿으면서 산다는 우리역시 많은 유혹을 받는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베드로처럼 가까운 친구나 친지가 감언이설로 설득할 때, 그것을 유혹이라 생각하기보다는 격려나 충고로 생각해 물리치기가 어려워진다는 거다. 인생을 바로 살려면 가까운 이가 유혹할 때,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결단 있는 용기가 필요하리라.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를 향해 나섰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 또 다른 이들은 예언자 중 한 분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누구라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또다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이는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는 구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대뜸 성질 급한 베드로가 반박한다. 그는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겪으셔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 뜻을 깨우치려고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느님 일은 생각지를 않고, ‘사람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셨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일은, 아버지 뜻을 실천하는 것일 게다. 이는 십자가의 고통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당장의 결과보다는 먼 앞날을 내다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것을 잘라 내며, 십자가를 받아들이자.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한다. 희생 없이 그저 축복만 받으려는 편안한 신앙생활을 바란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는 것을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수도. 아니 의당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다음에도 십자가를 보고서 도망갔던 그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랐다.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하신 그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고,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깨달았기에.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며 꾸짖으셨다. 신앙은 불행을 피하는 게 아닌, 그 역경을 버티려는 힘으로 실천하는 거다.
따라서 우리는 저마다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고통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다른 이들 것보다 더 크고 무겁단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가장 크고 무거웠을 게다. 그분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시지만, 고통을 받지 않으실 분이셨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분명 그 의미가 남달리 있다. 왜냐면 이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이기면서 그분 말씀을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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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16장까지 있는 마르코 복음서의 8장, 곧 한가운데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고 시작한 이 책에서, 진도를 절반쯤 나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분께서 어떤 그리스도이신지를 알지 못하였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아의 모습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겠지요. 베드로 스스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고백하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부터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시겠지만 그때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높은 자리를 두고 다툽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로서 합당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상상하는 무엇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전하는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가서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따르려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가만히 계시면서 우리에게 구원되라고 하신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수고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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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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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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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쪽 발은 주님께로, 다른 한쪽 발은 세상에!
남아있는 삶을 예수님과 함께 보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영광스럽게도 베드로는 사도단의 대표이자 수제자로 발탁됩니다.
스승님과 밀착 동행하다보니,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신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장엄하게 신앙 고백을 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그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극찬도 받고 지지도 받고, 마침내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손에 쥐게 됩니다.
한 마디로 승승장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두 발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한쪽 발은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영적인 세계로 건너갔지만, 다른 한쪽 발은 아직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세상 한가운데 남아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베드로의 성소 여정은 흔들리는 작은 배 한 척 같았습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장엄하게 스승임을 따라 나섰지만 아직도 베드로 안에는 인간적 야심들과 미성숙, 다양한 결핍과 긴가민가 하는 망설임이 남아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결핍은 스승님께서 조만간 겪으실 수난 여정과 십자가 죽음을 거부함으로 인한 결핍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마르 8,32)
그 결과 베드로는 스승님으로부터 결코 들어서는 안 될, 정말이지 충격적이고 모욕적인 지탄을 받게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 숱한 인간적 약점과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그 많은 결핍을 상쇄하고도 남을 덕행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지속적인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러웠지만, 마지막 순간, 베드로에게는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자비를 청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분께서 운명으로 주신 십자가를 기쁘게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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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과 내가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되는 때에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보면 그렇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힘없고 지친 자들을 위해 영과 예언을 받으신 야훼의 종으로 나타난다(이사 50,4). 그에게 온순과 겸손과 순명을 주시고(이사 50,5; 참조: 필립 2,8), 모든 것을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따르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침 뱉음과 수치를 당한다(이사 50,6). 그러나 그는 주님 앞에 단 하나의 도움이 있음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나름대로 느낀 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일 수 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답한다. 하느님께 축성된 분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실 분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정치적인 결정적 실현을 기대하고 있다(사도 1,6).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뜻으로 메시아를 알아듣지 않도록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어떤 착각도 하지 않게 하려고 첫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31-32절).
여기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반응이 나타난다. 베드로의 모습이 그렇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힘없는 무기력한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죽는 메시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의 모습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것인데 그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며, 원수의 일이고 고소하는 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 호통을 치신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사막에서 사탄이 놀라운 메시아적 기적들을 행하도록 했던 것이나, 십자가 아래에서도 그 옆에 있던 이들이 세 번이나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내려오라고 했던 것처럼 베드로의 발언을 사탄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계시다(33절).
그리고 이어서 충실한 제자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즉, 자기의 존재를 그분과 복음 때문에 잃어야 한다는 것이다(34-35절 참조).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게 되며, 단지 인간적인 의지는 은총이 함께 하지 않으면 확실한 죽음만이 있을 뿐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 신앙이 요구하는 행위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강하게 말하고 있다. 믿음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야고보 2,14).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야고보 2,15-16). 진정 이 믿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로 살아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17). “만일 믿음이 자비를 통해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아무것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갈라 5,6; 참조: 에페 6,25; 1테살 1,3).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이다. 이 은총이 나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항상 현실과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믿음은 외적인 환경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적인 행위와 태도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우리 신앙인들도 복음에 충실하다면, 형제애를 통하여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 찬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믿음의 행동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믿음은 결코 자신의 이기주의 바람막이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편하지 못한 생활환경에서도 믿음을 실천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 믿음이 십자가 위에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베드로가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것이나, 또는 궁핍한 형제들에게 위로의 말만 해주는 것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우리의 생활을 통해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의 구체적인 실현을 살아가는 용기와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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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탄의 정체: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로 믿느냐고 제자들에게 먼저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묻고 계신 것일까요?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왕, 예언자, 사제의 역할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 당신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의 죽임을 당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십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가 사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물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탄은 잘못된 대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부터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50년째 동물 사료를 먹으며 산속에서 숨어 사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무서운 부모 때문에 도망쳐서 산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누구에겐가는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산에서 내려와도 되는데 여전히 자기 욕구에 봉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겐가 속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관계도 없습니다.
혼인을 하려고 해도 상대를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게 있고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고 친구를 만날 때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는 것입니다.
관계는 무엇을 지향할까요? 결국 행복과 안녕을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천황이 내린 사케 한 잔씩 마시고 비행기를 몰고 자살하던 카미카제는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요? 천황이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존재에게 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질 때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십자가를 지면 자녀가 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부모의 유산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97년 허난성, 당시 나이 50의 노총각 장 솽치 씨는 폐지를 주워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겨울 짚 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4개월 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자신은 굶어가며 아이를 키웠지만, 사춘기가 된 백기는 아빠를 원망했고 아빠는 그때마다 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하지만 백기가 상처받을까 봐 여전히 버려졌던 아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커가면서 아빠와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한 백기는 결국 아빠가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백기는 도시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리고 올해 스물넷이 된 백기는 놀랍게도 연 매출 190억에 달하는 한 회사의 CEO가 됩니다. 이제 백기는 74세가 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예 캠핑카를 사서 아빠와 함께 세계 일주하고 있습니다.
또 연애 한 번 못하고 평생 혼자 산 아빠를 위해 결혼도 시켜드렸습니다.
[출처: ‘버려졌던 갓난아기의 보은... 노총각 아빠에게 일어난 기적’,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장 백기는 아버지를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딸이 되었고 고아였지만,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창조자이신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 안에 속해있어야 사랑하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자동차는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속해있어야 고쳐지고 새로 만들어집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인간을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합니다.
사람에게 속하지 말고 하느님께 속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사탄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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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매를 생각하면, 십자가는 숙제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29-35)”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왜 내 제자가 되었느냐?”, 또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찾고 있었고, 또는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기들의 희망이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느닷없이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했고, 기다렸고, 믿었기 때문에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을 그리스도(메시아) 라고 믿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고, 스승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에 따르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모든 신앙인에게 다 해당됩니다.
그래서 세례성사 예식에 이 질문과 대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2)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는, “당신이 그리스도(메시아)라는 것을, 아직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하셨다.”인데,
당신의 부활 때까지는 당신이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뒤의 9장에 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이야기”에 똑같은 명령이 나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9-10).”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을 갖게 된 때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이 모두 이루어진 다음입니다.
그 전까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긴 했지만, 그 믿음은 참된 신앙의 시작 단계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깨닫고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자격도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침묵을 지키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그때까지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이 없으니 당신에 관하여 아무것도 선포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 부활 전에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복음 선포의 주 내용이었는데(마태 10,7), 부활, 승천, 성령 강림 후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가 복음 선포의 주 내용이 됩니다(사도 2,32).>
3)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실 때 사용하신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을, 당신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 ‘사람의 일’이라는 말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말씀을, “나는 수난 예고만 한 것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 다음의 부활도 예고했다.
그런데 너는 왜, 부활 예고는 흘려듣고,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느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세의 안락한 생활만 중시하는 것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로 읽을 수도 있고,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십자가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가 될 것이고, 힘들고 어려운 ‘숙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초점을 맞추면, 그 ‘큰 은총’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도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열매를 생각하면, 십자가는 숙제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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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은 그 안에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가에 따라 겉모습까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 하느님의 뜻을 품고 살아가며 그 뜻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겉모습 역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마음 속에 욕심과 집착을 품고 살아가며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마저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둠 속에 숨어지내는 ‘악마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가 그런 두 가지 모습을 다 지니고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마음 속에 올바른 ‘그리스도상’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믿음과 희망의 힘을 바탕으로 당신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지만, 그 답은 원론적으로는 ‘정답'이면서도 인간적인 편견과 오해 때문에 아주 큰 ‘오답’이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실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강력한 카리스마와 정치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압제세력인 로마를 힘으로 물리치고, 그동안 자기들을 괴롭혀 온 주변의 이방민족들을 철저히 응징하며, 율법을 어기는 죄인들을 엄격하게 처벌해 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되고자 하신 ‘그리스도’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시고, 원수의 죽음이 아닌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며, 죄인을 가혹하게 처벌하시기보다 큰 용서와 자비로 끌어안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원칙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당신께 맡기신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마지막엔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결심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되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바란 것과 너무도 달랐기에, ‘스승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자칫 당신의 신원에 대한 오해를, 더 나아가 그리스도 신앙 자체에 대한 오해와 절망을 야기할 소지가 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던 겁니다.
그러고 나서 하신 일이 제자들의 마음 속에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과정에 있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겨울을 보내지 않고는 봄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거센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심어주신 말씀의 씨앗은 노력과 수고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과정에도 고난과 역경이 빠질 수 없는 것이지요. 둘째, 그리스도는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박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놀라운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방식은 자기 욕심을 먼저 채우려 드는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하시는 예수님은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쥐고 흔들려는 권력자들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져 배척과 박해를 피할 수 없는 겁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뜻에 철저히 순명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고 그가 당신 나라에서 큰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받을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이자 그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지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그분의 모습을 마음에 품고, 나도 그분처럼 되기를 희망하며 이 힘들고 어려운 신앙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과 생각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입으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삶으로는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일’보다,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사람의 일’을 우선시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이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영광의 길’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처럼 보였기에, 예수님이 그 길에 들어서시면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뜻과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아 불안했기에 예수님이 그 길에 들어서시지 못하도록 그분 앞을 가로막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어디 베드로에게만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그저 내가 어렵고 힘들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시는 분, 나에게 특별한 은총과 복을 내려주셔서 내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지는 않은지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그분의 일보다는 내가 그분을 이용하여 이루고자 하는 나의 일에만 신경 쓰고 있지는 않은지요? 기도할 때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뿐, 정작 그분이 내 삶에 관여하시지 않기를 바랄 때가 더 많지 않은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불호령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데 필요한 ‘사람의 일’ 자체가 별 거 아니라고 폄훼하시는게 아닙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 아예 신경쓰지 말라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엄연히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존재이니 당연히 ‘사람의 일’도 신경 써야지요. 다만 그걸 ‘하느님의 일’보다 우선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얻는 수준을 넘어서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고 팔고 심고 짓고’ 하는 세상의 일에 목숨걸고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일’이라는 이정표만 보며 길을 걷다가는 하느님 나라로부터 점점 멀어져 멸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길을 걷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이정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매번 세상과 하느님 나라로 갈라지는 갈림길을 마주할 때마다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지요.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마음 안에 심어주신 ‘양심’이라는 훌륭한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고집과 편견이 우리 눈을 가리고, 욕심과 집착이 우리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그분 목소리를 귀로 들을 수 없는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직접 앞장 서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먼저 구원의 길을 걸어 가실테니, 당신을 믿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선택의 갈림길을 마주할 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억지로 힘들게 다른 노력들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내 안에 자리잡은 고집과 편견, 욕심과 집착들을 조금씩 비워내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머리로 아는 ‘믿음’과, 그분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짊어지신 십자가를 나도 기꺼이 짊어지는 ‘실천’사이의 거리가 곧 주님과 나 사이의 거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라는 헛된 망상을 쫓는 이는 신앙생활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회피하는데에만 신경을 쓰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참으로 믿는 이는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지요. 그 실천이 주님과 나 사이에 견고한 사랑의 유대를 만들어 줍니다. 그 유대가 있어야만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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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이곳 오기 전에 본당에는 화단이 있는데 지렁이가 많습니다.
비가 내리고 나면 여러 마리의 지렁이가 마당으로 기어 나와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어떤 것은 말라서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손으로 그 지렁이들을 들어
정원 흙에다 갖다 놓곤 했습니다.
그런데 교우들이 어쩌다 이런 모습을 보면 징그럽고 더럽다고 하면서 본당신부에게 성체
안 받아 모시겠다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지렁이는 징그럽고 혐오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고마운 동물이지요. 토지가
중금속, 제초제, 농약 등으로 병들어 가는데 흙속에 살면서 그 해로운 것들에서
땅이 다시 숨을 쉬도록 흙속에 먹고 배설하며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여러 가지 세상살이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로 오염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병들어 가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세상에서 신앙인은 희망으로 너그러움으로 사랑으로 살아 있는 삶의 자리로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카이사리아 필리피 부근의 마을을 향해 길을 가시다가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라고
질문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ㄱ)라고
질문하십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원로들, 수석사제,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예고를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꼭 붙들고 ‘그럴 수는 없으시다.’고 반대합니다.
주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다음 베드로를 향하여 뜻하지 않는 심한 말씀으로
나무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1)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고통은 나의 의사에
관계없이 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라지지요.
인간의 삶에서 설명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데, 사람들이 표현하기를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지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동안 병들고 늙는 것인데,
누구도 이 사실 앞에 거역할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일에 맞서 당신이 어떻게 죽음을 맞으실지
미리알고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명한 하느님의 뜻을 강한 표현으로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짧은 말씀이시지만 신앙인의 어떻게 고통을 받아들이는 지에 대한
조건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무병장수(無病長壽)’ 다시 말해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을 원하는데
주님의 뜻은 이와 반대로 스스로 죽음을 불러오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들과 함께 스승을 지금처럼 모시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는 것인데,
주님께서 느닷없이 전혀 다른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 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34절)
세상은 고통의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다른 조건을 말씀하시지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
그런데 이미 구약에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5-6)
주님께서는 세상이 피하고 싶은 고통과 죽음을 메시아 모습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도 수난 받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도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수난을 받아들이십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지만 주님께서는 수난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고통 앞에서 불평과 회피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삶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을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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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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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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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연중 제24주일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삶
<2024.9.15>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7:3~20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삶❞
❚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이미 말씀해 주신대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 말씀이 역사하는 기적을 기대해야 합니다(3~10절).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은 굶주림으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살질을 찾고자 했습니다(3절).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적군에게 항복하는 길이 낫다고 생각하여 비장한 각오로 아람 군대의 진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4~5절). 그 이유는 “주께서...듣게 하셨으므로...도망하였음이라..”(6~7절)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신 후 장막에 있는 은과 금과 의복을 가졌습니다(8절).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던 나병 환자들은 이 기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안타까움을 느꼈고, 속이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즉시 일어나 달려가 성안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침묵하고 있도다...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9~10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런 마음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작고, 연약한 우리 자신을 통해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들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이 역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음으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과 처지를 구원을 이루는 귀한 재료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복음을 받았기에 이제는 감추어 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바로 오늘로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엄청난 것을 공짜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추어 두기만 하고, 말하지 못하고, 침묵만 하는 비겁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말씀이 역사하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기억하여 응답을 소망해야 합니다(11~15절).
사마리아 성문 앞에 이른 나병 환자들은 문지기들을 불러서 모든 상황을 알렸고, 문지기들은 왕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왕은 “...그 진영을 떠나서 들에 매복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그들이 성읍에서 나오거든 우리가 서로잡고 성읍에 들어가겠다 한 것이니라...”(12절)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무능한 왕의 모습을 보입니다. 직접 상황을 경험하고 와서 전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왕은 절망하면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반면에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왕에게 적진을 정탐하도록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정탐을 보냅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들의 말처럼 아람 군대 진졍이 비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결국 왕의 잘못된 판단이 확인되는 순간 백성들에게는 살길이 열리는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13~15절).
왕은 나병 환자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솔직히 왕의 추측과 판단이 전혀 황당 무계한 것만은 꼭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공동체와 격리되어 살던, 나병 환자들에 지나지 않은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서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인 나병 환자들이었지만, 왕이 이들의 말에 귀담아 들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좀더 신중한 판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옳고, 합리적이라고 판단되어 어떤 일들을 해 보았지만, 잘못되고, 일을 그르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말씀 안에서 어떤 일을 계획하기 보다는 내 판단과 경험에 의지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고, 내 자심만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주변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사소하게 여겼던 그 사람의 말이 어쩌면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소망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16~20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16절)... 두 가지의 예언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될거라는 약속과 엘리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장관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정확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믿지 못한 것의 결과는 분명한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밝으매 죽었더라"(20절).. 왕의 신임을 받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믿질 않았고, 오히려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말씀을 믿지 않고, 조롱하는 자들의 최후는 ‘비참함...’입니다.
광야 생활을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과 믿지 못한 자들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눈엔 보이지 않지만, 당신의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 계시고, 결국엔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가심을 믿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힘은 약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런 약한 자를 통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세상적으로 볼 때는 아루먼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통해 인류 구원이라는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의 발자국 소리를 연합군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하신 것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물가가 정상적인 가격으로 돌아온 것 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왕의 장관이 죽은 것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되어 간 하나님의 능력 행하심입니다. 곤란한 상황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어둠이 지배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말씀대로 아람 군대를 쫓아내 주시고 모든 물자를 풍성하게 채워 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풍성한 은혜의 삶을 주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풍성하고 영원한 기쁨을 나누는 아름다운 발걸음이 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의 그림자에 묻혀 있지 말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7:3~2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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