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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그리스도가 출현 할 때
막 13:14-23
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21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막 13:14-23 / [가장 큰 재난;마24:15-28,눅21:20-24] ㄱ) 멸망케 하는 흉측할 것이 성전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으라- 그때 유대에 있는 사람은 산으로 도망하라. (ㄱ. 단11:31,12:11) 15-16) 너희가 지붕에 있거든 내려가지도 말고 물건을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가지도 말라. 너희가 들에 있거든 돈이나 옷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가지 말라. 17) 이런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18) 그러니 겨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 그날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 환난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 주께서 그 환난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 기간을 줄여 주셨다. 21) 그때 만일 어떤 사람이 `이분이 그리스도다' 또는 `저분이 그리스도다' 하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말라. 22) 많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이 보일 수 있는 모든 이적과 놀라운 일들을 다 써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속여 넘길 것이다. 23) 내가 미리 모든 일을 경고하는 것이니 너희는 삼가 조심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비로소 적극적인 답변을 하십니다. 성전 파괴의 임박성에 대한 위기 상황과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답변(14-17) 예수님의 적극적인 답변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성전 파괴 사건의 징조임을 시사합니다. 그 징조는 멸망의 가증스러운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는 것입니다. 이 징조를 보게 되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곧바로 행동을 취해야 하는데, 곧 산으로 도망해야 합니다. 그들이 직면하게 될 위기 상황은 너무도 급박한 것이어서 지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상황들을 예로 들며 그 급박성을 부각하십니다. 또한 임신한 상태, 젖을 먹이는 상태, 겨울 등은 피난을 불편하고 더디게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위기가 그러한 때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기도하라(18-19) 피난 상황보다 아마도 포위당한 예루살렘 성 안 상황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님은 포위당한 예루살렘 주민들이 겪게 될 환난이 세상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결코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케 된 환난은 예수님이 예언한 것과 같이 극심했습니다.
삼가라(20-23) 환난 가운데서도 선택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날들 곧 환난의 기간을 단축하기까지 하십니다.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감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보존시키시기 위하여 그 환난의 날수를 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전 파괴에 앞서 있게 될 위기 상황에 대한 예고와 경고를 ‘삼가라’라는 명령과 더불어 마무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 이전에 있게 될 이 모든 위기 상황과 미혹 위험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파괴에 앞서 있게 될 현상들에 대한 교훈을 주의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시고 마무리하십니다. 이는 이 교훈의 목적이 단순히 제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위기의 시기를 적절히 맞이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함임을 보여줍니다.
적용: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마지막 때라고 느끼는 현상은 무엇일까요? 그 현상 속의 나의 모습은 주님을 기다리기에 합당한 모습일까요?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할 때 담대하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시며 시험을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셔서 능히 모든 시험을 감당케 하십니다. 우리는 나 혼자 환난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위기 극복의 성경적 원리
박인걸 목사
위기란 위험한 고비나 시기를 총칭하는 용어입니다. 위기는 위험뿐 아니라 고난, 환란, 역경, 시험, 등 삶의 근거를 무너트릴 수 있는 어떤 상황에 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질병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 사업 실패나 사회 경기의 악화로 인한 도산 혹은 부도, 실직으로 인한 생활의 위협, 사고나 사건으로 인한 실패 혹은 파멸, 천재지변이나 사변으로 인한 삶의 근거를 읽은 경우, 절망적 처지에 놓여 재기하기 힘든 경우들을 우리는 위기라고 합니다.
위기 가운데는 개인적인 위기와 가정적 위기, 사회적 위기와 국가적 위기가 있고 회사나 교회와 같은 공동체 위기 등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금년 하반기에 가면 좋아 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대보고 있고, 그동안 우리나라가 겪은 경제적 위기들을 보면 제 생각에도 조금만 더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합니다.
어떤 분들은 “어렵다”“위기다”혹은 “힘들다”라는 말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 최면 효과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별것 아니다.”“이까짓 것쯤이야”라는 적극적 생각으로 문제를 덮으면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세상만사는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다, 힘들다”하면 더 힘들고“죽겠다, 죽겠다.”하면 죽을 일이 생기고, “아무것도 아니야”곧 좋아 질 거야“하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심리학적으로 맞은 말이고 신앙적으로 옳은 말이며 성경적으로 바른 주장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문맥적으로나 성경주석학적으로 종말에 있을 사건을 주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말씀입니다. 인류 종말에 일어날 일을 주님이 적나라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소 계시록이란 별명이 붙은 장이 마가복음 13장입니다. 인류 최후의 날에는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 대 재앙이 임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이말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한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막13:19)고 하였습니다. 다행한 것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런 환란을 감하셨다”(막13:20)고 하였습니다. 큰 환란의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 주님은 언제나 택한 자들을 생각하시고 다양한 방면으로 배려하시는 사랑과 동정심을 발견합니다.
오늘이라는 현실이 비단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더라도 인생 자체가 늘 고난과 환란과 위기의 연속입니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데 위기를 겪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모두 다 겪는 삶의 한 성격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신 위기 극복의 지침들을 찾아 적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포기하지 못한 것들을 포기하게 하십니다.(막3:14-16)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무슨 뜻입니까? 삶의 무게를 줄이라는 뜻입니다.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앞을 향하여 나가라는 뜻입니다.
요나가 탄 배가 지중해를 항해 할 때 하나님이 대풍을 일게 하여 배가 일엽편주 할 때 선장을 살아남기 위하여 배 안에 있는 화물들을 모두 다 바다에 던졌습니다.(욘1:5)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여 가라안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살고 보려는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수단이며 재물을 포기하고라도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화물선에는 엄청난 보물들과 보화들이 들었을 것이며 선장이나 혹은 화물 주들의 목숨만큼 귀한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과감하게 재물을 바다에 던진 것입니다. 이런 일화는 사도행전 27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탄 알렉산드리아 호가 역시 지중해를 항해 하던 중에 유라굴로 태풍을 만나 침몰 위기에 처했을 때 선장과 선원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배 안의 화물들을 모두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들은 살아났습니다. 여름철에 바람이 세게 일어나면 과일 나무에 죽정이 과일들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든든한 과일들만 가을 까지 붙어 있어 극상품이 됩니다.
참 신앙은 버릴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지 않을 때 하나님이 버리게 하십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눅5:10-11)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지긋지긋한 삶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가나안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결국 오늘의 이스라엘이 있게 한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욕심들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무게는 가벼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18-19)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칠 배나 뜨거운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밧줄은 모두 다 탔습니다. 그들을 옭아맸던 끈들을 모두 태워버림 같이 우리들 삶에 찾아오는 위기와 환란들은 세상 줄을 끊어 버리고 하늘의 줄을 붙잡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고난을 통하여 그릇 행하던 삶의 부분들을 모두 내려놓고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할 때 주님을 능히 따를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12:1)라며 얽매이기 쉬운 죄와 짐 모두 끊어 버리라 말씀합니다. 아직도 포기 하지 못한 신앙의 장애 적 부분들이 있다면 아무리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일 찌라고 포기할 때 더 큰 은혜와 복이 임할 것입니다.
2. 지혜롭게 처신하라는 것입니다.(막13:14-17)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14)이는 주후 70년에 일어나 로마와 이스라엘 전쟁에서 참혹한 죽음이 있을 텐데 산으로(유대 남부에 있는 요르단의 페트라, 실제로 이 때 이곳으로 도망을 쳤음)로 도망하라. 는 뜻이고 “지붕에 있는 자들은 무엇을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가지 말고”(15)“밭에 있는 자들은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고”(16)“아이밴 자들은 화가 있으리라”(17)이는 지혜롭게 처신하라는 뜻입니다. 전쟁이 나서 포탄이 터지는데 집안에 금, 은 보석을 찾으러 들어갔다가 죽습니다. 적군이 점령한 지역에 자신의 재물을 찾겠다고 들어갔다가는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합니다. 이 때는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우리들 삶의 현장에 위기가 찾아 올 때 피할 수 있는 일이면 피하라는 것입니다. 소나기가 쏟아 질 때는 우산이 없으면 처마 밑이나 나무 그늘에 잠시 피해야 합니다. 그냥 걸으면 비르 흠뻑 맞게 됩니다. 생의 위기 앞에 내가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얼마든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한 선비가 한양을 다녀오는 길에 이웃 마음에 사는 친한 친구의 외아들을 나루터에서 만났습니다. 선비는 내렸고 선비 아들은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강 한 가운데 가더니 뒤집혔고 배에 탄 사람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이 선비는 집으로 돌아와 친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차마 친구의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말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입을 다물 수만도 없었습니다. 한 참을 망설인 후에 무겁게 입을 열어 “자네의 아들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내가 보았네. 차마 이 말을 할 수 없어서 많이 망설였네.”그러자 선비의 친구는 크게 웃으면서 “걱정 말게 내 아들은 살아 돌아 올 걸세. 그러지 말고 나와 술이나 한 잔 하세”아들의 사망 소식을 가지고 온 선비는 친구의 그런 행동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죽었다던 아들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선비는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의 아들이 말하기를 “저의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제게 말씀하시기를 ”위험한 일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선장이 배에 정원을 크게 초과하는 것을 보고 저는 그 배를 타지 않았습니다. 이런 교육이 살아있는 교육일 것입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위기나 위험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만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혜, 총명, 명철, 직관력, 통찰력, 분별력, 결단력, 등을 주셨습니다. 이런 사고와 행동은 우리들 앞에 펼쳐지는 상황들을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이며 분별하여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은사들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짐이 무거울 때면 짐을 하나 내려놓을 수도 있고 씀씀이를 줄일 수도 있고, 시작하려던 사업을 뒤로 미룰 수도 있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일을 계속 할 수도 있고, 더 참고, 견디고, 극복하는 것도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참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매사에 적응하는 지혜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막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절벽에서도 살아 돌아 올 수 있고 우주에서 미아가 되어도 지구로 돌아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많이 구하시기 바랍니다.
3. 가짜 정보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막13:21-23)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택한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가짜 정보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2,000년 교회사에 가짜 그리스도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도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있습니다. 문선명, 박태선, 안상홍, 신천지 교주 이만희, 모두 다 가짜 그리스도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짜 교리들도 있습니다. 정통성을 벗어난 이단 교리들은 모두 다 가짜입니다. 현혹되면 안 됩니다. 가짜 영도 있고, 가짜 신자도 있습니다. 현혹 되면 안 됩니다. 가짜교회, 가짜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현혹 되면 안 됩니다. 큰 것이 모두 진짜는 아니고 작은 것이 모두 가짜는 아닙니다. 설교를 잘 한다고 모두 진짜는 아니며 설교를 못 한다고 모두 가짜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가르치느냐 아니냐, 하나님이 부르셨느냐? 아니냐에 따라 진짜와 가짜로 나뉩니다.“너희의 지도자는 너희 중에서 나오고, 너희를 다스리는 자가 그 백성 가운데서 나올 것이다. 내가 부를 때에 그가 가까이 나아올 것이다. 누가 감히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나아올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0:21)고 하였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마포구 성산동에 다미교회를 중심하여 수 백 명의 교인들은 예수님이 그날 재림하신다고 믿고 하얀 옷을 입고 밤 12시 까지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름 때,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하겠네.” 그런데 큰 나팔이 울리며 이영자, 배철수, 최진실, 최백호, 하면서 부르기는커녕 나팔도 울리지 않았고 주님이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집 팔고 땅 팔아 이장림 교주한테 바친 사람들만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거짓 정보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할 때 그런 거짓 정보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삶 속에 위기를 당할 때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무 다급한 나머지 사람의 말에 홀까닥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계실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기근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 하나님은 “그릿 시내로 가라”그곳에서 얼마를 지난 후 양식이 떨어지자 하나님은“사렙다 과부에게 가라”그것에서 3년 반은 지난 후 하나님은 “갈멜산으로 가라”그것에서 아합과 싸워 이깁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정보를 가지고 움직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은 성경말씀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면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전문가의 말도 어느 정도 과학적이지만 100% 신뢰할 일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이 미네르바만도 못한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서울 대, 연대, 고대 카이스트에 수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많은데 왜 우리나라에 IMF가 왔으며 이번 미국 발 금융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습니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만이 나의 길을 가장 바르게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4.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막13: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실화 하나를 소개하고 설교를 맺습니다. 2003년 7월 22일 삼성의료원에서 받은 김종태 안수집사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서울의 유명한 대학 병원을 돌며 재검사를 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피부암 4기에서 식도암으로 전이되고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까지 왔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안수 집사님인데 그의 부인 신앙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주일날 조용기 목사님께서 몸에 병이 있거나 암에 걸린 분들은 주기도문은 하루에 100번씩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부인이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하루에 100번이 아니라 남편을 위하여 금식하며 새벽 5시 30분부터 저녁 11시 30분까지 주기도문 3,000번을 했습니다. 그 다음날 일산에 있는 국립 암 센터를 찾아 정밀 검사를 하였습니다. 식도암과 피부암이 너무 깊어 5개월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할 경우 식도가 녹아 더 위험하기 때문에 아무 치료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왔습니다. 그들 부부는 더 이상 의술에 의한 치료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오직 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김종태 집사는 항암치료 4차례 방사선 치료 25회를 받았고 암이 이제는 전신세포와 뼈까지 모두 퍼져 도저히 회생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주기도문 3,000번씩을 외우고 이사야 53장 5절 말씀“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를 역시 하루에 3,000번씩 외우며 기도하였습니다.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병든 강아지가 자꾸 집으로 들어오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태우면 계단으로 올라오고 또 올라오고 대문을 닫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차례 한 후 억지로 문을 닫아 병든 강아지를 내쫓고 나서야 깨어났습니다. 그 다음날은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고 나서는 걸레를 깨끗이 빠는 꿈을 꾸었습니다. 마음속에 믿음이 왔습니다.“하나님께서 치료해주신다는 것을 꿈을 통해 보여 주시는구나” 나는 설레 이는 마음으로 암 센타에 가서 전신촬영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담당 의사는 무척 상기된 채 우리 부부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암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네요. 기적입니다” 하마터면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고 합니다. 기도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입니다. 그 집사님을 위하여 그의 주변에 많은 분들이 중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기도는 꺼져가던 한 생명을 살려냈습니다. 생명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난 각가지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은 기도입니다. 깊이 기도하십시오. 많이 기도하십시오. “기도해도 응답이 없더라.”는 마귀에 속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결론입니다.
① 포기하지 못한 것들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② 지혜롭게 처신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③ 가짜 정보에 속지 않게 하십니다.
④ 깊이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택하심을 받은 자들
막 13:14-27 / 지성례 목사
미국에서 1000만 달러 즉 100억 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들은 답하기를 소득이 줄어들거나 투자 수익률이 낮아질까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또 하나는 자녀교육이라고 답했다. 최근 CNBC에 따르면 법률회사 엘엘피앤스콜피오가 조사해 보니 “꿈을 잃어버리고 동기 부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녀들”로 인한 걱정이 가장 크다고 했다. 즉 자신들의 때에 이루어 놓은 경제적인 안정이 자녀들에게 오히려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라고 하였다.
영국의 배우이며 유명 가수인 스팅(Godon Matthew Sumner Sting)은 자신의 재산이 3억 달러 즉 3,000억 원이 넘는데 이를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미 미국의 억만장자인 빌게이츠, 워렌 버핀, 샌디 웨일과 같은 사람들도 유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 발전 기금으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실제 그런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렇다.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재물이라도 영원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아들딸에게 재물을 물려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재물보다 천배, 만 배 더 소중한 그 무엇, 그 보이지 않는 무형의 위대한 신앙 유산을 물려 줄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젊음, 아름다움, 건강, 재물, 명예, 권력, 힘 그 어느 것 하나 이 땅에 영원한 것이 있나. 영원한 것은 오직 주의 말씀뿐이다. 마가복음 13장 31절에서도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 이와 같은 선언에 앞서서 이사야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라고 하였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지은 것이다. 솔로몬 성전이 아니다. 스룹바벨 성전도 아니다. 헤롯이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예전의 성전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지었다. 요한복음 2장 20절에 보면 건축 기간만도 46년이나 걸렸다. 14절은 그 유대인의 신앙의 자존심과 같은 곳, 예루살렘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은 기초석 크기 하나가 길이 12미터, 높이 4미터, 폭이 6미터나 되는 아프리카산 녹백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었다. 멀리서 보면 바다같이 보일 정도였다. 성전의 전면부에는 금관을 입혀서 햇빛에 반사된 성전은 마치 찬란한 황금산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성전 건물 자체를 이스라엘의 이상으로 여기며 우상화하려 했다. 그 유대인의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은 물론이고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에 이르기까지 이미 이방인들로 인해서 수치를 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성전이 완성 된지 7년 후인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도 (Titus)장군이 앞장선 군대의 점령으로 다 무너지고 불탔다. 마가복음 13장 1-2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고 말았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트려지리라”는 말씀 그대로 되고 말았다. 로마의 점령군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로마황제의 초상화를 걸고 독수리가 그려진 군기를 세우기도 하였다.
유대인의 절기 중에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오늘 날도 세계 처처에서 제대로 반드시 지키는 절기 중에 하누카라는 절기가 있다. 하누카는 유대인들의 역사 속 수전절에 있었던 사건을 계기로 오늘날 이스라엘의 절기로 정착되었다. 하누카는 기원전 173년 유대지역을 다스린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를 제단에 올려놓고 제사하였다. 일체 모든 유대 의식을 폐지하고 유대 문헌을 불사르고 성경을 공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동굴에 숨어서라도 몰래 안식일을 지키다가 발각되면 그 장소에서 불태워 죽였다. 남자 아기에게 할례를 행하는 자는 아기와 그 엄마를 벽에 던져 죽였다. 이처럼 유대인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며 유대교의 모든 예식을 금지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항거하기 시작하였다.
9년 세월이 지난 후인 기원전 164년에 마타티아의 아들 마카비의 다섯 형제들이 앞장선 혁명을 통해 이방인들이 더럽혀 놓은 성전을 되찾아서 다시 여호와에게 봉헌하고 제사를 회복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때가 마침 수전절이어서 촛대에 초를 켜려고 했는데 촛불을 태울 기름이 겨우 하루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하루치의 기름으로 8일간 초를 켤 수 있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때문에 하누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촛대는 하누키아(Hanukkiyah)라고 해서 8일간 하나씩 붙일 수 있는 8개의 촛대와 그 불을 붙이기 위한 보조 촛대를 합해 총 9개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하누카를 "빛의 축제"('Festival of Lights)라고 한다.
예수는 이 땅의 어둠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밝히는 빛으로 오셨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수전절과 하누카는 11월 말에서 12월 중에 지켜지는 절기이다. 그 때 쯤이 지나면 곧 성탄절이 다가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절기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따라야 한다. 예수도 수전절을 지켰다. 요한복음 10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을 거니실 때에 동족인 유대인들이 예수께 시비를 건 적이 있다.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느냐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하라” 그 때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니느라”(요10:26-27) 그리고 교훈하신 말씀이 영생에 관한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28, 30)고 하셨다.
마가복음 13장은 세상 끝 날의 징조를 말씀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난리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은 재난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주며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는 패륜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 믿는 이들이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세상에 환란이 많을 것이나 택하심을 받는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 환난을 감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주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하셨는가. 20절에 “택하신 자들을 위해 환난의 날을 감하셨다.”, 27절에는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셨다.
산으로만 도망하지 말고 주께로 피하라.
예루살렘 성전조차 파괴되고 이방인들에 의하여 초토화 되는 그런 재난의 날이 오면 유대 땅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곳은 산이 맞다. 예루살렘은 고도 800미터의 곳에 세워진 도시요 성곽에 둘려 쌓여 있는 곳이다. 예루살렘은 사사시대까지도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도성이었다.(삿1:21) 그 곳 예루살렘을 유대인들이 완전히 정복한 것은 다윗 왕 때의 일이다.(삼하5:6-8) 예루살렘은 군사적으로 매우 견고하고 안전한 요새와 같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 예루살렘에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 그 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재난이 생기면 줄 곧 가까운 산으로 도망하고 피신하고는 하였다.
실제 주후 66년에 세스티우스 갤러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 때 적지 않은 예루살렘 백성들은 벧스안 남동쪽의 요단 계곡의 펠라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4년이 지난 후인 주후 70년에 토디 장군의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초토화 되고 말았다.
급박한 재난과 환난의 날은 사실 어디로 안전하게 피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때가 아니다. 15절에서 말씀하시지 않나. 만약에 네가 지붕 위에 있다면 지붕에서 내려 가려하지도 말아라. 더군다나 집안에 있는 그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아라. 밭에서 일하고 있던 중이라면 밭의 저 쪽에 벗어 둔 겉옷을 가지려고 뒤도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그 날이 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이 다가 오고 만다는 말씀이 아닌가. 그러므로 환난과 재난을 생각하고 준비하되 산으로 도망하려 하지 말고 주님께로 피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두 천사들의 경고를 들은 롯이 아내와 두 딸과 함께 급하게 소돔성을 빠져 나갔다. 소돔 성에 머물게 된 두 천사를 낯설게 여긴 소돔 성의 젊은이와 노인 할 것 없이 무리들이 롯의 집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 두 천사를 이끌어 내라고 아우성을 쳤다. 저들은 소돔 성에 사는 동성애자들이었다. 당시 소돔 성이 얼마나 타락한 도성이었나를 입증하는 내용들이다. 당황한 롯이 저들을 설득하며 하는 말 중에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으니 그들을 너희들에게 이끌어 내리니 제발 내 집에 들어 온 이 두 사람 즉 천사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창19:8)는 간청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을 보면 당시에 롯 조차도 도대체 어떤 윤리 의식을 갖고 살던 인물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그런 롯이었지만 하나님이 자비를 더 하셔서 그와 그의 아내와 두 딸을 소돔 성에서 급하게 몰아 내셨다.(창19:16) 그 때 두 천사들이 롯의 가족들에게 도망할 곳으로 지명하신 곳이 산이다.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급하게 여긴 롯은 가까운 작은 성 소알로 피하겠다고 하였다. 롯의 네 가족이 밤새 피신하여 소알 성에 피신해 들어갈 즈음에 해가 솟았다. 하나님은 그 아침에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가 내리듯이 쏟아 부으셨다. 그 큰 재난으로 성의 안과 밖에 사는 모든 백성들과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다 죽고 말았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유황과 불을 뒤 돌아 보던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아침 일찍 일어난 아브라함은 저 만치 서서 옹기 가마의 연기처럼 치솟는 소돔성과 고모라 성의 심판을 목격하였다. 롯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은 롯의 믿음이라기보다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용서의 덕분이었다.(창19:29) 얼마간 소알 성에 거주하던 롯은 두 딸과 함께 소알 성을 나와서 산에 올라가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롯은 그 산에 머무는 동안에 술을 가까이 하였고 두 딸들을 통하여 모압과 암몬이란 아들들을 낳는 해괴한 인생을 살아갔다.
그러므로 인생은 산으로만 피하고 도망하지 말고 주님께로 피신하여야 한다. 주님은 그를 믿는 자의 영원한 도피성이요 영원히 피할 구원의 반석이시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찬송 70장의 3절에 보면,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 데 없네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환난이 더 심하지 않도록 기도하라.
태중에 아기를 밴 여인이나 젖을 먹이는 아기가 있는 여인이 환난의 날을 만나게 된다면 그 어느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고 더 두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주님은 그 날에 그런 처지의 여인들은 화가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누가복음의 같은 본문에서는 반대로 설명하였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이르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눅23:29)
더군다나 그런 재난의 날, 환난의 날이 한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 같은 본문을 다루는 마태복음 24장 20절에 보면, 그런 환난의 날이 겨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6.25 전쟁도 적지 않은 군인들이 외출과 외박을 나간 주말인 주일날 새벽에 일어났다. 주전 168년에 있었던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침공도 안식일 날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5리 이상 이동하는 법이 없다. 나귀와 같은 짐승도 부리지 않는다. 그러하다 보니 유대인들은 그 침략군 앞에서 꼼짝 없이 피하지도 못하고 침략을 당하는 바람에 더 크게 살육 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교훈해 주시는 기도의 원리를 또 하나 깨닫게 된다. 우리는 대개 일상생활 중에 가족이나 자녀들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하면 무슨 그런 기도를 그렇게 자주, 그렇게 많이, 그렇게 기복적으로 하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이와 같은 예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18절에 보라.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살던 곳에서 산으로라도 도망하고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될 환난의 날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깨우쳐 주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안전, 평화, 행복, 기쁨, 건강, 축복, 번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이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원리에 합당한 것이다.
기도는 기도다. 우리가 공부를 하든,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직장에서 그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면 그 열매가 다르듯이 부지런히 기도하면 그 기도의 결실이 다른 법이다. 매우 사소해 보이는 동작과 운동의 끝없는 반복이 세계적인 음악가를 탄생시키고 세계적인 운동선수를 탄생시키는 원리처럼 말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교훈대로 기도하여야 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구하게 되고 찾게 되고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왜냐.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기도에 대하여 교훈해 주지 않았는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 숨을 쉬지 않고 계속 쉬는 것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란 말이다.
나의 장모님은 평생 장로교 목회자 사모였다. 1932년생이시니까 83세이시다. 요즘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 다니신다. 하루는 새벽 기도 차량 운행자가 오질 않았다. 걸어서 40분후에 도착해 보니 새벽 기도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더란다. 요즘도 새벽 기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아침이면 500구절의 성경을 줄줄줄줄 외우고 묵상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자신과 가족과 주변의 그 누군가의 영혼을 위한 중보 기도의 능력이 된다.
새벽기도, 수요기도, 금요 기도회에 여건을 따라서 고단해고 피곤해도 기도해야만 한다. 우리의 지난 4년이 기도 응답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새 성전 시대에 개인, 가정, 교회, 나라, 민족, 썩을 대로 썩고 부패한 우리나라의 군대와 나라의 구석구석을 위해서 기도하여야만 한다.
우리나라는 기도로 건국된 나라이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는 감리교 장로였다. 그는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국회 부의장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다 성심(誠心)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윤영 목사가 단상에 올라가 올린 기도는 국회 속기록 제1면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이윤영 목사가 드린 '하나님께 드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문'으로 국회 속기록에 있는 내용이다. 갑자가 부탁 받고 드린 기도인데도 그 내용이 일목요연하고 훌륭하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중략)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를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는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南北統一)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民生)의 복락(福樂)과 아울러 세계 평화(世界平和)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중략)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중략) 역사의 첫 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기도의 사람 E. M. 바운즈는 기도의 4가지 원리를 말하였다. “간절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구체적인 기도, 긍정적인 기도”를 드리면 때가 되면 주님께서 이루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교훈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으라.
그렇다. 우리가 믿을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민의 구주로 믿도록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땅 끝까지 이르도록 하여야만 하는 일이다. 마가복음 13장 10절에도 이미, “또 복음이 천하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세계에는 6528개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76%가 신구약 성경의 번역본을 가지고 있다. 6500개가 넘는 그 많은 언어들 중에서 아직도 자기 말로 성경이 번역 되지 않은 경우가 2/3에 해당하는 4564개 언어이다. 안타깝지 않나. 물론 인구의 숫자로는 그와 같은 많은 종류의 언어 사용인구의 수가 세계 인구의 6%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님은 그와 같은 땅 끝의 소수 민족들에게까지 골고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것을 분부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유한 언어인 한글로 우리말 성경이 번역된 이와 같이 행복한 환경에서 마음껏 성경을 읽고 대하며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축복인가.
그리스도만을 믿고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할 것을 반복하여 강조해 주셨다. 마가복음 13장 5절,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기 않도록 주의하라.”, 6절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9절에 "너희는 조심하라.”, 21절에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절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 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23절에 “너희는 삼가라” 이처럼 예수께서는 반복해서 미혹을 주의하고 삼가라고 교훈해 주셨다.
21절에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는 강조가 무엇인가. 믿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라는 말씀이 아닌가. 우리나라와 세계 열방에 흩어져서 ‘자칭 예수’라하고, ‘자칭 재림 주’라고 하고, ‘자칭 그리스’라고 하는 이단과 사이비의 우두머리들을 믿지 말란 말씀이시다.
요한 사도는 요한 2서 10절과 11절에서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고 경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2서 7-8)
이단과 사이비의 미혹을 받지 말라 그리고 항상 주의하고 삼가며 살아가라고 하셨다.
또 하나,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분명히 믿으라고 하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2천 년 전에 베들레헴 마구간에 오신 것처럼 때가 되면 이 땅에 재림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 같이 믿어야 제대로 주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사도 신경의 신앙 고백 그대로이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에는 해와 달과 별들에 징조가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13:26)고 하셨다. 또 그 때에 천사들을 보내셔서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 모으시겠다고 하셨다.(막13:27)
예수의 재림은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시던 예수의 초림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초림 때에는 양 치던 목자들과 동방의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들 정도에게 먼저 보이시며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으나 예수의 재림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갖고 신령한 모습으로 구름 타고 오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큰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시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실 것이다. 만약에 그날이 되면 CNN이 실시간 생중계를 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 날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듯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불러 모으시는 대 추수의 날이 될 것이다.
알곡 신자 되고 양과 같이 칭찬 받고 상급을 약속 받는 택하심을 받은 자다운 축복된 신앙을 지켜 나가자. 아멘
가장 큰 환난
막 13:14-23
14-20절에서는 성전 파괴의 임박성을 알려 줄 유대땅에 임하게 될 위기 상황이 기술되고, 21-23절에서는 그 위기상황에서 더욱 기세를 떨치게 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기술된다.
예수님의 적극적인 답변은 ‘그러나 너희가… 보게되면(호탄 데 이데테)로 시작된다. 이는 이후 답변이 제자들이 기대하는 성전 파괴사건의 ‘징조’임을 시사한다. 그 징조는 ‘멸망의 가증케 하는 것이’이 ‘서지 못할 곳에 서는 것’이다.
(다니엘 9:29)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이 징조를 보게되면 유대에 있는 자들을 곧바로 행동을 취해야 하는데, 곧 ‘산으로’도망해야 한다.
유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유다지방이 산악지대이므로 동어반복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견고한 도성으로 도피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고 산들은 전형적인 도피처라고 본다면 난점은 제거된다.
역사적으로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는’사건과 관련된 것이 무엇일가? 2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 70년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장군들과 함께 성전의 성소에 들어가 성소를 더럽히고(요세푸스), 후에 로마 군인들이 군기를 들고 성전 뜰에 들어가 동편 문 맞은 편에 세우고 그 앞에 제사를 드린 사건이다. 하지만 인상적 사건이긴 해도 ‘징조’로서 기능은 적절치 않다. 예루살렘이 점령당한 상태에서 그곳에서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미 전쟁이 지나간 상황에 도망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 67,68년 겨울 기스칼라의 요한 지도하의 열심당원들이 성전을 자신들의 본부로 삼고, 판니를 놀림감 대제사장으로 세워 조롱조로 제사 의식을 행하고, 성전 경내에서 난폭한 행동과 싸움을 벌인 사건이다. 이 사건이 베스파시아누스가 68년 초 유대지역 전면전을 펼치기에 바로 앞서 일어났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유대지역 그리스도인들이 피난을 위한 징조로서 충분한 가능성을 갖는다.
‘도망하는 주체’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눅 21: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구약에서 ‘산’은 종종 멸망 상황에서 피난의 장소로 언급된다. 그들이 직면하게 될 위기상황은 너무도 급박한 것이어서 아무런 지체도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다양한 상황을 예로 들며 그 급박성을 부각시키신다(15-16절). 도한 임신한 상태, 젖을 먹이는 상태, 겨울 등은 피난을 불편하게 하고 더디게 할 것이기에, 그 위기가 그러한 때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할 것을 촉구하신다(1-18절).
무엇을 가져오려고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말고 즉시 옥외 계단을 통해 도피해야 한다. 무엇을 가져온다 해도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겉옷을 길 가에 벗어 놓았다고 해서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겉옷 때문에 되돌아가서는 안된다. 이 전승은 론ㅅ의 아내를 염두에 두지 않지만 눅 17장 31-32절의 넓은 문맥에서는 롯의 아내가 생각되고 있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도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임신했거나 아기에게 젖 먹이는 여인들이 언제나 모든 재난을 당한다. 요세푸스는 히르카누스치하 팔레스틴이 당한 파르터인(고대이란의 유목민)의 침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여인들이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흐느껴 울면서 조국과 포로가 된 가족들을 떠나 정처 없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도 동정심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전쟁의 곤경에 대한 경험이 마지막 때의 끔찍한 일들에 적용된다.
그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환난 가운데서도 선택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놀랍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날들’, 곧 환난의 시간을 단축하기까지 하시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예루살렘이 포위된 기간은 5개월은 남짓되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다. 이는 성전을 파괴하는 전쟁 자체과 그 기간마저도 실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보여준다. 본 절에서 언급된 ‘구원’은 13절의 경우와 달리 육체적 생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원의 대상이 ‘모든 육체(사크르스)’로 표현된 것은 이러한 추론을 지지해 준다. 하나님은 환난이 기간에 복음증거를 위해 목숨을 내놓기까지 인내하는 당신의 백성을 반드시 영적으로 구원하시지만, 이 환난의 기간에 모든 백성이 육체적으로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육체적 생명을 보존하셔서 환난 이후 복음 증거 사역을 예비하도록 하신다.
어려움을 말씀하신다. 한편, 마태가 본 단락의 내용을 제자 파송 강화에서 소개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아마도 마태는 성전파괴상황(13장/마 24장)과 제자파송강화(마 10장)사이의 시간적 내지는 상황적 연관성을 전제한 것 같다. 이 기간 동안 제자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그로 인하여 적대자들로부터 미움과 고난을 받게된다. 이 고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그 상황을 빨리 멋어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마지막 가장 큰 곤경에 처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즉 하나님 세상의 창조자였듯이 역사의 지배자이기도 하다는 것, 그가 자신의 공동체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악마적인 미혹에 대해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된 이후에 끝이 올 것이다. 특별히 고난을 언급한 구절(9,11절)사이에 이 복음 전파의 필연성을 언급한 것은 마지막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의 사명이 바로 고난을 무릅쓴 복음증거임을 보여준다. 내 주변에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은 없는가? 이적과 기사로 미혹하는 지도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말씀을 외면한 이 시대의 기복주의와 은사주의에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