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33]문화를 享有한 봄나들이 4題
畏友 갈뫼형에게 빛고을에 ‘영양가’있는 전시회가 3개 있다는데 같이 가자고 유혹했다. 그는 ‘마음이 양식’을 쌓는 일이라면 언제든 좋다며 달려왔다. 나는 마음의 양식보다는 우리 눈이 호사할 것이라 했다. 하여, 어제를 우리는 <문화의 날>로 정해 버렸다(실제로 ‘문화의 날’은 10월 셋째 토요일이라 한다). 10시 20분, 광주시립미술관(GMA) 도착. 입구에 하서 김인후의 좌상과 내력이 쓰여 있어 꼼꼼히 읽어봤다. 문정공 하서 김인후는 겨레의 스승(18명)으로 전국 향교 240여곳에서 춘계-추계로 추모하고 있는 조선 전기 대표적인 학자가 아니던가. 오른쪽에는 인종대왕이 그리고 써 河西에게 선물했자는 <墨竹圖>가, 왼쪽에는 하서가 유학을 그림으로 정리한 <天命圖>가 새겨져 있어 인상적이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Ⅱ-75]인종대왕의 묵죽도墨竹圖와 하서 김인후 - Daum 카페
# 첫 번째 관람한 전시회는 <신학철-시대의 몽타주(A Montage of the Times)>展. 1987년 신학철(1943- ) 화백이 어느 미술전 출품작 <모내기> 그림이 국가보안법으로 파문을 일으켰는데, 알고보니 어느 누가 부채에 그 그림을 실어 2년도 더 지나 눈에 띄어 문제가 되었다한다. 원본은 지금도 국가에서 돌려주지 않았다는데, 93년 다시 그린 그림을 감상해 보자. 도대체 창작의 자유를 구속하는 국가보안법이 무엇인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으로 10년도 넘게 작가를 괴롭힌 것이 생각났다. 이 '미친 정부' 초기에도 그랬다. 한 고등학생이 그린 <폭주기관차>에 대해 얼마나 말이 많았던가.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는 독재자뿐이다. 아무튼, 당연히 한국현대사 속에서 살아온 신화백의 청년기부터 현재까지의 삶과 예술을 하나의 전시공간에 압축적으로 담아내어 감상하기에 좋았다.
열흘 전쯤, 서울 동숭동의 <백기완 마당집>에서 백 선생 덕분에 탄생한 신화백의 그림과 삽화 30여점을 감상하며 도록을 2만원 주고 사면서 광주 전시회를 알게 된 것이 고마웠다. 역시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큰 작가였다. 포토몽타주 기법이 뭔지 잘 모르나, 우리의 근현대사와 동시대 현실을 형상화한 작품과 우리 사회의 시대상을 歷史畵로 날카롭게 비판하며, 사회 변혁에 대한 예술가의 강한 의지를 표출하는 작품은 혀를 차게도 하고, 가슴을 뛰게도 했다. <모내기> 작품을 비롯해 현대인의 초상을 거대한 서사로 표현한 <갑돌이와 갑순이>, 광주민주홛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한국현대사-초혼곡>과 <유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등의 거작을 보면서, 대작가의 애린한 "찐진보" 창작의욕이 부디 ‘빛의 혁명’으로 불꽃을 활활 살아나기를 빌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통문 29]아름다운 사람(49)-신학철 화백 - Daum 카페
# 3층에 전시되고 있는 전시회는 <송필용-곧은 소리>. 솔직히 송필용(1959- ) 작가는 처음 들었는데, 꼭 봐야 한다는 <전라도닷컴> 기자의 강추로 알게 됐는데, 2023년 <오지호미술상>을 수상했다는 한마디에 구미가 금세 당겼다. 오지호(1905-1982) 작가를 아시리라. 우리나라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로 민중미술의 선구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인근 생가표시판을 스쳤는데, 화순에 그를 기리는 미술관이 있다한다. 아들 오승윤 화백도 2006년 별세. 나는 추상화는 몰라서도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은 역시 민중의 삶과 연관되고 일관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게 나의 지론. 그의 작품 전혀 실망시키지 않았다.
청년시절 5.18 민주화운동을 목격했다면, 죽지 않은 이상, 어찌 화가(판화, 조각 등 포함), 가수, 문인(소설가, 시인 등)이 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고등학교때 애송하던 김수영 시인의 <폭포>에서 딴 그림전 제목 <곧은 소리(The Straight Sound)>도 마음에 들었다. 이 땅의 숱한 어머니들이 새벽마다 정제(부엌)에서 떠놓고 빌던 ‘정안(한)수’ 그림을 시작으로 <땅의 역사>와 <물 시리즈> 등 40여점에는 그의 생각대로 歷史가 흐르고 있었다. 역사가 아닌 사건 사고가 어디 한 건이나 있을 것인가. 동학, 광주 등 사회적 변화를 향한 민중들의 의지와 역사의 상처에 대한 작가의 연민 그리고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금세 눈치채게 된다.
김수영의 <폭포> 한번 오랜만에 읽어본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구본창-사물의 초상(The Look of Things)>전도 강추받은 전시회. 인물사진 전문작가 이름 석 자는 들어봤지만, 그(1953- )의 작품을 본 것은 처음. 알고 봤더니 그가 선택한 事物들(달항아리 등 백자, 꼭두와 탈 등 민속품, 금관 등 고대 유물, 한국전쟁 유물 등)을 영상과 설치작품으로 변주한 게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보고 싶었던 것은 초상화가 아닌 그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肖像寫眞. 한강과 박완서 작가, 안성기, 강수연 등 많은 예인과 문인의 사진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팜플렛에는 한국 현대사진의 선구자로 적혀 있다.
# 돌아오는 길, 구례구역 근처 <섬진강책사랑방>에 들렀다. 이 땅의 ‘헌책 지기’ 김종훈 (74) 대표가 반긴다. 舊面인 김대표는 부산 헌책방골목인 보수동에서 42년동안 책방을 운영하다 뜻한 바 있어 고향(남원 수지) 인근인 이곳에 5년 전 책방을 옮기는 擧事를 단행했다. 허나 그해 섬진강 범람으로 5만권도 더 되는 1층의 藏書가 물에 잠겼다. 보상 한푼 받지 못했으나 그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3층 건물에 빼곡이 진열된 책이 20만권이 족히 넘는다한다. 언제나 하루종일 찌대고 싶은 곳. 북카페를 운영하며 지역에서 책읽는 모임에 앞장서는 등 고군분투를 하시는 그분 역시 ‘아름다운 사람’에 틀림없다. 부디, 망하지 않고, 건강하시기만을 빈다.
* <마한지>라는 식당에서 6인의 점심. 돈을 서로 내겠다고 티격태격하는 것은 전통 미풍양속인가. <닷컴>의 두 여기자(남인희-신희)와 벌써 오누이로 사귄 지 6년이 되는 광주 S누이(김순희. 인간극장으로 맺어진 우리 아버지 수양딸?)와 그가 언니라고 부르는 여인(권정희), 모두 이름이 '희'자여서 재밌었다. 희자매 네 분도 반겨줘 고마웠다. 어쨌든 역시 광주는 ‘빛고을’이다. 아시아문화전당 지근지처의 북카페는 규모부터가 놀라웠다. 이 도시엔 이런 영양가 있는 전시회도 자주 열리는 듯하다. 물론 서울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그래도 이런 문화를 享有할 수 있는 도시가 부산 말고는 쉽지 않을 터. 나의 제2의 고향 ‘全州(온고을)’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낙후될 대로 낙후된 전주는 우리 중학교때만 해도 전국 7대도시로 역사, 전통, 깨끗함을 자랑했다. 2026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우뚝 솟아났으면 좋겠다. 낙향해 시골에 살면서 아쉬운 것은, 이런 그림전이나 음악회, 영화 등 문화행사를 자주 즐길 수 없다는 거다. 슬기로운 文化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윤활유이자 ‘힐링 그 자체’인 것을. 우리 삶의 틈새(구멍)는 모두 문화가 메워야 한다는 것도 나의 오랜 지론. 책읽기로 소일하는 까닭이다. 아무튼, 어제의 문화를 즐긴 ‘봄 나들이’는 따봉. 하루종일 운전기사를 자청한 외우가 거듭 고마워 부대찌개를 대접했지만, 약소했다. 이런 소풍은 자주 해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같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