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52
5월9일[부할 제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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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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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vV2xYtxrc
[의정부교구 정택찬 마르티노(송산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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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좋았던 시절 단 순간의 기쁨과 축복, 그거 하나 간직하고 평생을!>
시골 살다 보니 재미있는 일이 참 많습니다. 한 가정에 경사가 생기면 너무 기쁜 나머지 만천하에 알립니다. 마을 입구나 사거리 눈에 잘 띄는 곳에다 큼지막한 플래카드를 내겁니다. '경축 *** 장남 *** 사무관 승진'
최근에는 정말 기쁜 내용을 담은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면민 모두 한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애국자 *** 득남!'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해 면주민 모두가 기뻐하는데 당사자인 부모나 가족은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 물론 부모로서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앞으로 겪게 될 고초나 상처도 만만치 않겠지만, 탄생의 기쁨, 존재에 대한 기쁨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평생을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시절 단 순간의 기쁨과 축복, 그거 하나 간직하고 추억하고 회상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
성모님의 생애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와 출산, 양육과 동반 과정에서 마리아가 겪었던 고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당신의 태중에 모시고 있던 분, 당신의 몸을 통해 탄생하신 분, 당신 가슴을 통해 양육하신 아기가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기쁨, 그 영광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성모님 역시 좋았던 그 시절의 기쁨과 행복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평생을 기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돌출 발언으로 속상할 때도,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실 때에도 그 좋았던 첫순간의 추억을 회상하며 기꺼이 견뎌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고, 그 이후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계속 머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은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다.
남아있는 우리의 지상 여정은 당연히 감사와 기쁨의 나날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축복 속에서도 기뻐해야겠지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 역경과 상처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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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oGVMm3d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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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들만 만나는 게 최선일까?>
조던 피터슨은 초 베스트 셀러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어떻게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책식주의’라는 채널에서 ‘진정한 친구 가려내는 간단한 방법: ‘딱 한 마디만 해보세요.’라는 제목으로 각색하였습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아주 작은 동네에서 살았다. 죽마고우였던 나와 내 친구들은 서로를 ‘진짜’ 친구라고 믿었다. 멋모르던 학창 시절, 우리는 술을 마시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런 삶에 회의가 들었다.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꿈도 크고 목표도 높았다. 대학 생활은 평온하고 행복했다. 하루하루 인생이 더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과거의 굴레를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좋은 직장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잘 지내냐?” 어느 날 고향 친구 병식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향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다. 병식이는 아직도 그때 그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고 삶의 모습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계속 어긋났다.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는 나에게 병식이는 ‘내가 널 아는데, 그게 되겠냐?’라며 코웃음을 쳤고 내가 변했다고 말했다.
병식이와 헤어지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엇갈린 삶을 살게 된 걸까? 병식이는 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조던 피터슨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렸을 적 친구가 아직도 안 좋은 친구들고 어울리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그냥 그런 삶이 좋아서일 것이고, 두 번째는 의리 때문이며, 세 번째는 그런 친구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의 꿈을 긍정해주지 못하는 이들은 떠나라고 말합니다. 굳이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좋은 친구들과만 어울리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로 안 좋은 친구들도 만날 때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를 오고 가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고 부활은 다시 제자들에게 오시는 일이며 승천은 다시 아버지께, 성령강림을 통해서는 다시 교회를 만나러 오십니다.
만약 부잣집 부모들 사교모임에서 돈만 있다고 계속 끼어있을 수 있을까요? 그들은 이미 자녀를 낳아 잘 기른 사람들입니다. 돈만으로는 거기 끼어있기 힘이 듭니다. 결혼하여 아기를 낳아 자신도 잘 길러야 함께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친구들과 사귀며 그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하늘 나라에 만에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지라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사귀고 세상으로 나아가 죄인들과 어울려야 하는 이유는 자녀로만 머무는 것보다 부모가 되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심으로 행복을 누리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길거리 아이들을 데려와서 키울 때 아이들은 한 달만 지나면 슬슬 목사님과 함께 사는 삶에 싫증을 느낍니다. 이때 목사님은 그들이 이전에 입었던 냄새나는 옷을 다시 입어보게 시킵니다. 그들은 생질색을 합니다. 내가 기도와 활동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죄인들도 만나야 하느님과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압니다. 그래서 다시는 뒤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을 불러준 것에 감사해서 또 그들도 자신들의 지위에 올려놓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우리 관계의 모델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조금 있으면 기도하러 갈게요.’라고 하느님께 말해야 하고, 하느님을 만날 때는 ‘조금 있으면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해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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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울다가 웃으면 약간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울다가 웃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고로 죽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식구들이 슬퍼서 울고 있었는데 다행히 살아 돌아왔다면 울다가 기쁨으로 웃게 됩니다. 본당에서도 울다가 웃는 때를 본 적이 있습니다. 5년간 정들었던 신부님이 인사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가면 아쉬움과 슬픔에 눈물을 보입니다. 곧 새로 부임하는 사제가 오면 환한 웃음으로 맞이합니다. 웃다가 슬퍼서 울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10년 전입니다. 진도 앞바다에 배가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었고, 구조대가 올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잠시나마 텔레비전에서 전원 구조되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 국민이 함께 아파했던 ‘세월호’의 슬픔입니다. 저도 울다가 웃었던 때가 있습니다. 31년 전입니다. 건강검진을 했는데 위에 이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인데 걱정이 되었습니다. 정밀검사를 받고, 위내시경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큰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가슴이 덜컹했었지만,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한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난은 고난을 몰고 다닌다는 말처럼, 형제님은 한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합니다. 잘 되던 사업은 IMF의 국가적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접어야 했습니다. 큰 결심으로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첫 사업이 사기를 당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우울증이 생겨서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삶의 큰 의지가 되었던 아내가 아프니 형제님도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부모 몰래 신청해서 군인이 되었는데, 당시 전쟁이 시작되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울며 전화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아내의 우울증, 전쟁터에 있는 아들까지 정말 고난은 고난을 몰고 다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성당에서 큰 위로를 받았는데 그것은 시편의 말씀을 들었을 때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도 무사히 돌아왔고, 성당에서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내도 우울증에서 벗어나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형제님도 하루하루 감사드리며 지낸다고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은 형제님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새롭게 조성된 성지가 있습니다. 기존의 성지는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회당, 베드로의 집터, 참된 행복 성당, 오병이어 성당,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온 사제가 성지순례를 왔다가 호수 반대편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텅 빈 터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곳에 순례자들을 위한 피정의 집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미그달’이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고향 근처였습니다. 피정의 집을 만들기 위해서 공사를 하던 중에 가파르나움에 있던 회당보다 더 오래된 회당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전에 있었던 어부들의 마을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회의 관심과 이스라엘 정부의 도움으로 피정의 집보다 먼저 성당이 생겼습니다. 성당의 이름은 ‘더 깊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였던 베드로 사도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조성된 ‘막달레나’ 성지를 보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로마는 막달레나에 있던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그곳의 주민들도 로마에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파괴된 마을은 2000년이 지난 지금 한 사제의 ‘꿈’에 의해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잡풀밖에 없었던 텅 빈 곳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일곱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인들과 대화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은 ‘더 깊이’ 그물을 던지는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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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16-20: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셨고,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다음 무덤에 모셔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그들은 다시 그분을 보았다. 주님께서는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시어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7절).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돌아오시리라는 것, 당신이 그들을 떠나는 것은 잠시뿐이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시며 어둠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주님을 사랑한 이들은 주님께서 잡혀 결박당한 채 최고 의회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시고 묻히시는 것을 보고 울며 애통해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한 자들은 보기만 해도 거슬리던 자가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하자 기뻐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죽음에 처했을 때는 슬퍼했지만 주님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슬퍼했으나 세상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을 때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으나 세상을 사랑한 이들에게는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기뻐한다면 세상과 함께 슬퍼하게 되겠지만, 세상이 즐거워할 때 슬퍼한다면 나중에 세상이 슬퍼할 때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 기쁨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자신과 싸움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내가 죽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이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인 후에 얻는 기쁨이므로 부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옷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 옷을 입지 못한다면,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가? 내가 우선 기쁨을 가져야 기쁨을 행복을 전할 수 있다. 이렇게 얻은 기쁨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변하면 쉽게 변할 수 있으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분이 변할 수 없는 분이기에 그 어떤 세상의 힘도 빼앗을 수 없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그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며,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기쁨도 완전한 기쁨이 되어 없어지지 않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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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에서 유독 눈에 띄는 문학적 기법이 있습니다. 두 개의 대조되는 낱말을 조합하여 주제를 두드러지게 하는 방법입니다. “조금 있으면”과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 대조되고, ‘보지 못하다’와 ‘보다’가 대조되며, “근심”과 “기쁨”이 대조됩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구문은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오는데, 그리스 말 본문을 그대로 옮기면 “조금 있으면(‘미크론’) …… 다시 조금 있으면(‘팔린 미크론’)”입니다. 이 구절은 ‘보다’라는 동사와 연결되어,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보게 될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만듭니다. 제자들조차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며 술렁이자 예수님께서 그 의미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니 ‘근심’스럽겠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으니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언급된 기쁨은 인간적 쾌락이나 즐거움과는 구별되는 매우 깊은 내적 감정으로,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깨닫는 역설적 신비를 일컫습니다. 상실을 체험하고 견딘 뒤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영적 기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빛나는 순간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 뒤 다시 어떤 사건을 만나면 이내 하느님의 부재를 느끼며 버려진 듯한 느낌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은총입니다. 슬픔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겠지만, 조금 더 있으면 그 슬픔이 다시 진정한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모순적 진리를 번갈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어떤 순간에 체험한 가슴 아픈 ‘상실’이 조금 뒤에 지나고 보면 깊은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역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여정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진리의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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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19-20)
1)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이제 곧’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닥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4장-16장의 말씀은 ‘최후의 만찬’ 뒤에 하신 말씀이고, 체포당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군인들이 이미 출발해서 겟세마니를 향해서 가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이고,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짧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체포되어서 그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재판을 받았고,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된 시간은 실제로는 만 이틀이 안 됩니다.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처지에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을 것이고, 부활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과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을 복음서 저자가 반복해서 기록한 것은, 아마도 ‘수난 시간의 짧음’과 ‘부활 후의 영원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몹시 슬퍼하면서 나의 장례식을 치르겠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은 나의 죽음을 좋아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박해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하거나 좋아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뒤에, 자기들을 심각하게 괴롭히는 고민거리가 마침내 제거되었다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라는 자가 스스로 예고한 대로, 정말로 부활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는 못했습니다.(마태 27,62-66)>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묵시 11,10)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땅의 주민들’과, 당신의 죽음을 보면서 기뻐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은 모두 하느님을 등지고 사는 ‘악인들’을 뜻하고,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그들이 ‘악’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냅니다.>
3)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근심’이라는 말은, ‘슬픔’으로 바꿔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너희가 슬퍼하겠지만,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겠지만, 그 슬픔은 부활의 ‘큰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뜻이고,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믿음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뒤에 ‘세상의 기쁨’은 무엇인가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습니다. 굳이 그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실제 상황을 보면, 세상의 ‘기쁨’은 ‘슬픔’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마태 28,4.11-14) 그 두려움이 좋은 쪽으로 작용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고(사도 2,41), 끝끝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안 믿은 자들도 있었습니다.(사도 4,2)>
4)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적용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우리 인생은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인생과 지상에서의 인생을 비교하면, 우리 인생은 글자 그대로 ‘찰나’일 뿐입니다. <‘영원’과 ‘찰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면, 지금의 고난과 시련은 금방 지나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부귀영화도 역시 금방 지나가는 것이고, 덧없고 허무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이고, 알면서도 외면하고, 지금의 인생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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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런이런 경로로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하리라'고 구체적으로 예고하실 때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오늘의 대목에서처럼 빗대어 말씀하셔도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요한 16,18) 정말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직면할 자신이 없어 모르는 척 무지를 선택한 것인지 그들 자신만 알 겁니다만, 사실 꽃길만 걷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 앞으로 닥쳐올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미리 대면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아, 이대로 계속 가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지요. 대개 뭔가 순조롭고 평탄하고 미래의 빛이 보일 때 그렇게 여깁니다. 터무니없이 큰 걸 바라지 않으면서 소소한 만족과 안정감이 일상으로 자리잡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뭔가 그 일상성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이 닥칠 때가 다가옵니다. 인간 삶에서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조금 있으면……"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그런 불길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곧 닥쳐올 어둠의 시간, 스승을 빼앗기고 목자 잃은 양처럼 흩어져 목적과 의미의 혼란을 겪게 될 두려움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수수께끼같은 이 말씀에서 감지할 수 있으니까요.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도 여느 인생길처럼 슬픔과 기쁨이, 고통과 평화가, 죽음과 생명이 항상 짝을 이루어 다닌다는 걸 알려주려 하십니다.
짧은 생각으로는 좀 더 좋고 편한 쪽만 계속되면 좋겠건만 인생은 그걸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조금 인생을 살아 본 제자들은(우리는) 제법 알고 있지요. 코헬렛 저자 역시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코헬 3,4)고 누구나 다 아는 (누구나 다 알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요.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선교를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겪어온 것처럼 여기서도 바오로는 성공과 실패를 두루 체험하게 됩니다. 서로 도우며 힘이 될 신앙의 동료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를 만났고 또 기다리던 실라스와 티모테오까지 합류하여 온전히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게 되니 더 바랄 나위가 없었을텐데, 이대로 쭈욱 갈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곧 난관에 부딪히지요.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는"(사도 18,6) 이들에게서 또 한 번 거부 체험을 당해야 했던 바오로 사도는 옷의 먼지를 털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체험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에게로 갑니다."(사도 18,6)
이 선언은 진정으로 동족의 구원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며 최선을 다한 이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는 그래도 유일신 사상과 종교적 체험의 뿌리를 공유하는 유다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 했지만 번번이 난관에 부딪혔던 것이니까요.
그래도 오늘 제1독서의 마무리는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방금 겪은 어둠과 절망처럼 보이는 체험이 빛과 희망으로 이어지고 있네요.
과연 예수님 말씀처럼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먼저 근심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먼저 실패가 있어야 성공을 느끼고, 먼저 상실을 체험해야 획득에 감사합니다. 먼저 없어 봐야 작은 것에도 만족하게 되고, 먼저 죽음이 있어야 부활을 압니다.
일상의 삶에서처럼 영성생활에서도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빼앗길 때가 있으면 다시 얻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충만히 머무르며 진보하고 성장할 때가 있고, 주님이 안 계신 듯 공허하고 메마를 때가 있지요. 대부분의 고통의 순간이 그렇듯, 영적 메마름이 오면 언제 좋았는지 언제 주님을 누리며 행복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영혼은 슬픔에 빠져버립니다만, 그럴 때는 "조금 있으면"과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견디어야 합니다. 꿋꿋하게 나아가다 보면 살짝 가려졌던 은총이 다시 비칠 때가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조금 있으면"과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에는, 일상 삶과 영성생활에서 주님의 현존과 부재의 리듬을 잘 타라는 예수님의 자상한 예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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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앞날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것이지요. 이어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뜻이지요.
이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머지않아 세상은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역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악함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선과 생명으로 가득 차게 만드셨습니다. 미움과 파괴의 문화를 사랑의 문화로 바꾸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가치를 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의 틀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밖에 모르고, 자신만을 모든 기준으로 삼다가 어느 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하고 삶의 모든 기준이 바뀐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악과 불신에 가득 찬 나머지 세상을 미움과 증오로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이 열려 선과 사랑을 지닌 존재로 바뀌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를 바로 ‘나’부터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나 자신’이 변화되면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직장과 사회마저 서서히 변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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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6,16. 20)
천년도 하루 같이 느껴지실 하느님에게서의 ‘조금’과 시공의 제약을 받는 우리에게서의 ‘조금’은 비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만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16) 하는 말씀을 시공간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없고 영적이고 신앙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 엄마가 이웃집에 볼일 보러 가시면서 ‘엄마 얼른 갔다고 올게!!’라고 했을 때,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그 시간은 왜 그렇게도 길게만 느껴졌던지. 시간의 흐름은 항상 일정하고 규칙적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때나 고통 중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그 상태에 따라서 평소와 다르게 느낄 것입니다. 사랑할 때는 시간이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지만, 고통 중에는 그 시간이 흐름이 느리게 간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어 고향을 찾아가서 예전 국민학교 시절 소풍 갔던 곳이 사실 별로 멀지 않고, 뛰놀던 운동장이나 교실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잖아요. 어쩌면 세월을 통해 우리 마음의 크기 혹 넓이가 그만큼 확대되었기에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는 의미도 그렇지만 ‘근심이나 기쁨’도 지나고 보면 한순간이듯이 그것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느껴집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듯’ 그렇게 시간을 지날 것이기에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지금 겪고 있는 슬픔은 ‘조금 있으면’, ‘곧 멀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당부에 화답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최선책은 一切唯心造 곧 만사는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런 마음 먹기의 대표적인 시조가 바로 정조 때의 ‘여선덕의 5刑論’에 반론으로 쓴 「심노숭의 5樂論」에 잘 드러납니다. 『잘 보이지 않으니 눈감고 정신 수양을 할 수 있고, 이가 빠져 연한 것밖에 먹을 수 없으니 위가 편해서 좋다. 다리 아파 못 걸어 집에 편안히 있게 돼 힘 아껴서 좋으며, 귀가 어정쩡해 나쁜 소식 못 들으니, 마음이 고요해 좋다.』
코린토에서 바오로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때론 거부와 모독의 말을 듣기도 하지만 유스토스와 같은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네 삶에는 밝음과 어둠, 슬픔과 기쁨이 늘 교차하기에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자기 일에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조금 있으면”(16,16~19) 이라는 표현을 무려 7번이나 언급합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조금 있으면’과 제자들이 느끼는 ‘조금 있으면’의 시간에 대한 느낌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전혀 다르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떠나가실 예수님과 기다리는 제자들의 다른 시선과 자리의 차이로 시간의 흐름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으리라 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조금 있으면’이란 의미는 글자 그대로 짧은 순간일지 모르지만, 주님을 떠나보내고 남아 있을 제자들에겐 ‘부활’이란 상상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조금 있으면’은 정말이지 길고도 아주 긴 시간이었으리라 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자들의 슬픔과 절망의 깊이는 비례했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 신앙을 전제로 한 믿음이요 신앙이기에 제자들과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처럼 ‘죽음의 시간과 부활의 시간’, ‘이별과 재회’라는 상반적이고 대조적인 시간과 삶의 이중성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차하는 삶의 상황에서 저희가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고 떠난다면 더 이상 인간의 肉眼으로 그분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전처럼 육안으로 볼 수 없고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은 오직 믿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보지 못함과 다시 봄’의 대조는 곧 ‘떠남과 다시 오심’, ‘부재와 현존’을 내포하고 있고 이런 대조는 곧 삶의 양면성과 이중성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비움이 곧 채움이며, 떠남이 다시 만남이며, 죽는 게 사는 것, 이라는 저 삶의 파라독스! 이러한 모순성을 알아듣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 이 양극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파스카 여정이 단지 예수님만의 여정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와 유사한 내적 태도와 인식의 전환을 위한 건너감이 요구됩니다. 단지 외적인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서 우리의 인식 전환을 위한 ‘영적 죽음과 비움’을 체험하고 통과할 때 비로소 그 시간이 왜 그분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인지를 알게 되리라 봅니다. 이 체험은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충분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의문을 주님께 직접 묻기보다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의 문제를 공유하며 나눕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반응할 때가 많습니다. 당혹감을 함께 공유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안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근심과 불안을 직시하거나 직면하지 못할 때 몰이해는 더 깊은 어둠으로 절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인생살이에서 꼭 해답을 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마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좋지만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또한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입니다. 해답을 찾지 못해도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직시하고 직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버려짐, 남겨짐’의 시간이 참으로 유익하고 성숙할 수 있는 가장 의미로운 시간으로 다가오리라 봅니다. 삶이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 여정은 ‘오름과 내림’, ‘충만과 텅빔’, ‘낮아짐과 들어 올림’, ‘죽음과 부활’, ‘부재와 현존의 순간’이 교차해서 다가옵니다. 이런 상반성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고, 함께 얽혀 있고 함께 어울려 있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나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에 신뢰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그 부재의 순간이 가장 강력한 현존의 순간일 수 있고, 죽음의 순간이 곧 부활을 위한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런 내적 태도를 형성하도록 도와줍니다.
“너희는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제자들이 애통해하고 슬퍼함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슬퍼함은 슬퍼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퍼한 만큼 그 기쁨 또한 강하리라 봅니다. 주님은 남겨질 제자들이 애통해하고 슬퍼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떠나지 않으면 다시 올 수 없고,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기에 떠나야만 했습니다. 사랑하기에 떠나갑니다.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제자들과 달리 세상은 기뻐할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된다, 는 표현처럼 제자들과 달리 당대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위협적인 존재요 적대자였던 주님의 죽음을 통해 잃었던 백성들의 지지와 세속적인 권위와 권력을 다시 회복할 기회였기에 얼마나 좋아하고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 이치가 한쪽이 밝으면 한쪽은 어둡기 마련이고, 한쪽이 웃으면 한쪽은 울게 되었습니다. 진리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 정의와 자비가 숨 쉬는 세상을 고대하던 제자들에겐 낡은 기득권 세력의 득세는 곧 그들을 더욱 주님의 죽음과 함께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슬펐을 것이고 애통했으리라 봅니다. 다시 어둠과 죽음의 문화가 판치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고 생각할 때 그들의 절망과 슬픔의 느낌이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세상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니, 부활이라는 새로운 현실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으니, 부활은 멋진 반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게 바뀌는 역전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미가 드러난 예언의 성취요 실현입니다. 슬퍼하라, 그러면 기뻐할 것이다. 기다려라, 그러면 다시 볼 것이다. 오늘 예상하지 않은 슬픔이나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부디 기뻐하시고 기쁨이 오리라는 기다림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주님을 다시 볼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곧 희망이며 믿음이고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기다림을 헤아려 주십시오. 지체하지 마시고 사뿐히 다시 오시는 당신을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기다리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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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출신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스물여덟에 윌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곳 생활을 통해 나온 그의 사상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쳤지요.
그의 책 중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유명한 ‘윌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1800년대 당시에는 이 책이 사람들에게 전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윌든’은 소로의 두 번째 책인데, 1854년 출간 당시 총 7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팔린 책도 그의 어머니가 산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렇다면 첫 번째 책은 어떠했을까요? 1,000권을 인쇄해서 총 219권이 팔렸는데, 후에 나머지 책은 다락방의 단열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상에 감명받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법정 스님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도,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등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던 시대에서는 이해해 주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자기만의 삶을 묵묵히 살아온 소로의 모습에서 자기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남들처럼 살고, 남들 눈치를 보고, 남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나만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처럼 살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우리를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외모로 거의 같은 쌍둥이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만 봐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떤 목적으로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나답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겪을 고난과 부활을 알려 주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당혹스러워하지요. 우선 알아듣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고난이 예수님을 덮쳐서도 안 되고, 또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울며 애통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런 말씀을 미리 해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답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가 아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알려 주시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잊지 않고 성실하게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나’가 될 때, 우리가 가졌던 모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나’가 된다면, 우리의 근심은 커다란 아픔으로만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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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근심과 걱정거리를 안고 다닙니다. 아마도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도 안고 갈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마리아 임금 아합왕은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해서 근심합니다. 궁전 곁에 있는 포도밭을 정원으로 사용하고자 이즈르엘 사람 나봇에게 더 좋은 포도밭을 줄 것을 약속하며 포도밭을 달라고 합니다. 나봇이‘조상으로 물려받은 포도원을 임금께 드릴 수 없다.’고 거절하자 왕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음식도 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1열왕 21,3-4)
욥(3,23-26)은 시련을 견딜 수 없어서 두려움에 근심했고, 잠언(10,1)에서는‘어리석은 자녀를 두는 것은 어미의 근심거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거리도 많아지고 근심거리가 느는 법’이라고 코헬렛서(1,18)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이 위태로워서 근심하였습니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3-25) 하였습니다. 마르타는 너무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다가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라는 예수님의 충고를 들었습니다.(루카 10,41-42)
근심 걱정거리는 이렇게 다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중에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반대자들은 큰 승리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넋을 잃었습니다. 너무 큰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그 근심과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해산의 진통을 앓듯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기쁨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믿고 기다리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면 영광을 만나게 됩니다. “조금 있으면”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간절함을 지니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너희의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27)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하고 선언했습니다. 시편을 보면,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의 흔들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시편55,23) 하고 노래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고 큰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조금 있으면”해결되고 풀어지며 좋아지리라 믿습니다. ‘실패는 미루어진 성공일 뿐’입니다. 등산할 때 많은 사람은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조금만 가시면 됩니다.” 아직 한참을 가야 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희망을 주는 위로의 말입니다. 조금 더 힘을 내라는 동료애의 표현입니다. 이 위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사랑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대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하느님 안에 두십시오”(오상의 비오). 지금의 근심 걱정이 하느님 안에 있다면 그것이 기쁨의 바탕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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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런 사람이고 싶다>
요한 16,16-20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런 사람이고 싶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기쁨과 헤어지니
기뻐하는
사람 아니라
기쁨과 헤어지니
슬퍼하는
사람이고 싶다
슬픔을 만나니
기뻐하는
사람 아니라
슬픔을 만나니
슬퍼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하여
참으로 슬퍼하는
사람이고 싶다
기쁨을 만나니
슬퍼하는
사람 아니라
기쁨을 만나니
기뻐하는
사람이고 싶다
슬픔과 헤어지니
슬퍼하는
사람 아니라
슬픔과 헤어지니
기뻐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하여
참으로 기뻐하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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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시편 98.1)
하루하루가 주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어제 69년도 교대 입학동기의 부음訃音 소식을 들었고 이에 대한 댓글도 읽었습니다. 55년 전이니 반세기 전에 만나 공부했고 그 이후로는 한번도 못만난 동기입니다. 댓글의 내용입니다.
“입학해 같은 반 친구가 되어 이승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먼길을 떠났군요. 그 먼길 편안히 가시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태어날 때는 어느 곳에서 왔으며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는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 생기는 것이 태어남이고 한조각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구름은 본래 그 실체가 없듯이 태어나고 죽음도 이와 같구나.”
참으로 죽음을 대할 때 마다 삶의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날마다 죽음을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과 더불어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참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무로 끝나는 여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 인생이요, 날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어제서야 1343쪽의 방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독료했습니다. 2020년 10월부터 틈틈이 읽었으니 거의 4년이 걸렸습니다. 성인은 “젊어서 착수했는데 늙어서야 끝냈다” 고백하는데 399-425까지 집필했으니 20년 이상 걸려 집필한 대작입니다. 책 마무리의 기도 내용이 마음에 와닿아 일부 내용을 나눕니다.
“주 나의 하느님, 내 유일한 희망이시여, 빌건데 내가 기진하여 당신을 탐구하기 싫어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항상 열렬히 당신 얼굴을 찾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이해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나를 온전히 고치시기까지 내 안에 이럴 능력들을 키워주십시오. 오로지 당신 말씀을 설교하고 당신을 찬미해서만 말을 하기가 소원입니다. 내 하느님 수다스러움에서 나를 구해주십시오. 내 영혼 저 속 깊이에서 이 병을 앓고 있으며, 당신 면전에 너무도 가련하여 당신의 자비로 피난하는 영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인의 기도를 제 기도로 바치고 싶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늘 새롭게 주님을 만나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주님 말씀이 새롭게 들립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지납니다. 늘 주님과 함께 한다면 슬픔이나 기쁨에 일희일비함이 없이 묵묵히, 한결같이 하루하루의 여정에 충실할 것입니다. 마음속 깊이에서는 샘물이 솟듯 맑은 기쁨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의 꽃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담쟁이가 한창입니다. 26년 전 담쟁이란 시가 여전히 좋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 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 1998.6.3.
읽을 때마다 영적전의가 새로워집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이들이야말로 평생 주님의 학인이자 평생 주님의 전사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 주님을 사랑하여 공부하는, 영원한 현역의 학인이요, 죽어야 제대인 평생 싸워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영적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어야 끝이라는 자각이 늘 깨어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결코 영적전의를 상실하거나 열정이 시드는 일이 있어선 안될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의 선교 여정중인 바오로야 말로 주님의 전사의 모범입니다.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열정이나 영적전의가 시드는 일이 없습니다. 천막을 만드는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합니다. 바오로의 굽이굽이 곡선인생여정중에도 하느님은 똑바로 당신 글자를 써내려 가십니다. 우리 매일 삶의 체험중에도 이런 하느님의 분명한 손길을 보도록 합시다.
바로 매일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일희일비함이 없이, 각자 삶의 꽃자리에서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많이 기뻐하며 주님 앞에서 노래하며 춤추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멋지게 노래하며 춤추다 세상을 떠난 성인도 있다 합니다.
“온 세상아,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추어라. 즐기어라, 기뻐하라, 고에 맞춰 노래하라.”(98,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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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
오늘 사도행전은 복음 선포가 반대를 받자 바오로 사도가 아주 미련 없이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발의 먼지는 왜 터는 겁니까?
그저 집착이든 미련이든 분노든 그런 것들이 내게 있으면 그 감정들을 털어버리면 되는데 왜 굳이 발의 먼지를 터는 동작을 하는 겁니까? 동작이 감정 정리에도 도움이 되기에 그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정의 정리를 감정에다만 맡기면, 그 감정이 옅다면 모를까, 그 감정을 털어버리기 쉽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감정에 다른 감정까지 덧씌우기 십상이지요.
그러므로 감정을 해소하고자 한다면 감정 해소를 위해 의지와 이성까지 협력해야 할 것이며 발의 먼지를 터는 동작은 그런 의지의 표시일 것입니다.
그런데 동작보다 더 유효한 것이 행동 또는 행위입니다. 이는 수도자들이 세속을 단호하게 끊겠다는 표시로 삭발의 행위를 하거나 더 나아가서 삭발을 예절로 하는 것처럼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가장 강력하게 떨쳐버리게 하는 것은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남으로써 감정들을 털어버림은 물론 사람들까지 확실하게 지워버립니다.
몇 년 전부터 저는 월 피정을 걷는 피정으로 하였습니다. 같은 자리와 같은 환경에서 피정할 경우 생각이나 감정을 떨쳐버리기 힘들고 그래서 환경을 바꾸기 위해 다른 장소로 가는데 그럴지라도 자리만 옮겨 똑같은 고민을 계속 이어서 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걷기 시작하면 걸으면서 새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것이 눈을 통해 제 안으로 들어오면 제 안에 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빠져나가면서 감정의 정화가 이뤄지고 생각이 새로워집니다.
그렇습니다. 심기일전하거나 우리 안에서 안 좋은 것을 빼내는 가장 좋고도 적극적인 방법은 밀어내기 방식 곧 외부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안에 있던 옛것을 밀어내는 방식인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미래지향적인 정신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정신이 우리에게 있으면 바오로처럼 과감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로운 곳으로 갈 것이고, 거기서 새로운 열정으로 새로운 일에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런 미래지향적인 정신이 없을 경우, 이 과감성이 부족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 자리에서 미적댈 것이며 악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같은 사람들과 계속 씨름할 것입니다.
이 미래지향적인 정신의 다른 이름, 신앙적인 이름이 바로 주님의 영이요 성령입니다.
주님께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부는데 성령께서 바로 그러시다고 하셨습니다.
미래지향적인 정신과 성령은 미적대지 않습니다. 자리에 연연하거나 안주하지 않습니다. 자리뿐 아니라 악감정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지 감정에 이끌리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지 욕심에 이끌리지 않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기에 오늘 주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그 근심에도 머물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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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근심과 기쁨 그리고 신앙적인 근심>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기쁨은 우리 인간이 모두 가장 원하는 감정 상태입니다. 즐거움보다도 더 원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은 즐거움이 금세 사라지는 데 비해 기쁨은 여운이 길기 때문이고, 쾌락이라는 말이 그리 좋은 뜻이 아닌 것처럼 즐거움은 퇴폐적으로 흘러 인생을 망치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이 없고 그래서 심지어는 허무감만 남기기 일수입니다.
그에 비해서 기쁨은 남는 것이 있지요. 감정에 여운이 있는 것은 물론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이란 얻음의 만족감, 성취의 만족감, 성공의 만족감, 만남의 만족감입니다. 집을 얻거나 자식을 얻었을 때 기쁘고, 원하던 목표를 성취했을 때 기쁘며, 사업이 성공하고 번창할 때 기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기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의 대가가 즐거움 뒤의 허무감이나 피폐함이라면 기쁨의 대가는 기쁨을 얻기 전에 치러야 하는 것으로서 고통이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심 걱정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즐거움의 후 대가이고 기쁨은 전 대가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에서 삶의 지혜, 기쁨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기쁨을 위한 근심과 걱정으로 바꾸고, 기쁨을 위해서 근심과 걱정을 마다하지 않는 지혜 말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과 비생산적인 근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쓸데없고 비생산적인 것입니까?
예를 들어, 주님께서 예를 드신 바 있지만, 아기를 낳기 전의 근심, 아기를 낳기 위한 근심은 생산적인 근심이요 기쁨을 낳는 근심이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우杞憂 같은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근심입니다.
기우란 하늘이 꺼질까 근심했다는 옛날 기나라 사람의 근심에서 비롯된 말인데 그의 근심대로 하늘이 꺼졌다면 근심했는데도 꺼졌으니 쓸데없이 근심한 것이요. 꺼지지 않았다면 꺼지지 않을 것을 근심했으니 이 또한 쓸데없이 근심한 거지요. 근심하여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음의 병만 얻고 건강은 잃은 셈입니다.
이제 우환憂患의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우환이란 근심스러운 일을 말하고 그중에서도 병으로 인한 근심을 말하는데 우환이 생기면 누구나 처음에는 근심하기 마련이지만 어떤 사람은 생산적인 근심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저 쓸데없이 근심만 합니다.
우연히 생로병사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파킨슨씨 병을 앓는 사람들 얘기를 봤는데 거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다가 이내 극복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운동을 시작하고 특히 춤을 추면서 마음을 밝게 가지려고 했더니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기쁨과 행복을 되찾았답니다.
우리 신앙인의 경우는 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요. 하느님을 만나서 병이 치유되는 기쁨을 얻을 수도 있지만 설혹 병이 치유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만난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근심이 있다면 이런 생산적인 근심으로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근심을 바꾸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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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16,16)
'<죽음과 부활의 사랑!>
오늘 복음(요한16,16-20)은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별과 재회의 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20)
'예수님의 죽음'으로 제자들이 근심에 쌓이겠지만, 그 죽음 너머에 있는 '예수님의 부활'로 제자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과 부활의 사랑이 본질'입니다.
우리를 향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본질'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이며,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야 할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이 본질에 대한 약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나를 살리시고자, 나를 다시 부활하게 하시고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믿음의 약함'입니다.
지금 나에게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먼저 시련과 고통을 받으셨고, 십자가 죽음이라는 가장 큰 시련과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해 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위한 이 죽음과 부활의 사랑을 잊지 말고 잘 기억하라고, 우리는 이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았고, 이 사랑을 상징하는 것들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이 매 순간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고 있어야 할 믿음의 본질이요 사랑의 본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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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k3OiW86Hd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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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가장 먼저
우리 자신을
아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근심도 기쁨도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들어앉은 근심을
봉헌합니다.
우리의 근심또한
주님께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근심을 기쁨으로
다스려주시는 우리의
주님을 믿게됩니다.
우리의 근심을
아시는 주님께서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근심보다 더 큰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기쁨은 주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믿음에 있습니다.
고여있는
믿음이 아니라
끝없이 정화되는
믿음입니다.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들어오시는 기쁨을
믿습니다.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시작할
모든 기쁨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뜻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믿음에서 벗어나길
기도드립니다.
근심을 녹여줄
기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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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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