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는 탄자니아 국가대표 태권도 코치인 (박상현 선교사)의 <삶이 말한다 : 복음을 들려주는 가장 큰 소리> 중 (4. 선교를 보는 새로운 관점 : 19. 선교지의 자림을 막는 장애물)(p216-229)을 정리해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 상열 목사 드림.
- (무분별한 원조의 함정) : 아프리카에 살면서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을 보게 된다. 이들은 정말 가난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가난하게 산다. 특히 탄자니아라는 너무나도 많은 축복을 받은 나라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안타깝다. 결국 세계관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 나는 10년 동안 기도하며 준비했던 중동을 포기하고 탄자니아로 왔다.
- 탄자니아는 심기만 하면 싹을 틔우는 비옥한 땅과 유럽의 50배가 넘는 지하자원이 있다.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의 배경인 나라다. 천혜의 자연, 타고난 운동신경,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 있다. 그럼에도 선교사가 이 땅에 온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잘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패배주의와 숙명론, 그리고 무분별하게 주기만 했던 수많은 원조와 NGO 때문일 것이다.
- 하루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 선교사라고 온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NGO가 과감히 철수하면 어떻게 될까? NGO는 오로지 긴급구호만 하고 공적 개발 원조를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이들이 더 빨리 자립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더 빨리 부흥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충분히 원조하지 않았는가?’
-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한 부족 여성들이 매일 무거운 물통을 짊어지고, 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으며 물을 떠다 나르는 광경을 목격한 한 NGO가 여성의 인권과 그 마을의 현실을 자국과 전 세계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많은 모금을 거두어 마침내 그 마을에 우물을 파주었다. NGO와 후원한 사람들은 매우 만족하고 기뻐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NGO가 다시 방문하니, 그 마을의 우물은 망가지고 방치돼 있었다. 가장 기뻐하고 좋아할 줄 알았던 마을의 여성들이 우물을 망가뜨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
- 사실 그녀들에게는 10킬로미터를 걸어가 물을 퍼다 나르는 시간이 유일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몸이 힘든 것보다 잠시라도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휴식이자 여자들끼리 소통하는 시간이었다. 일부다처제 문화와 남성의 권위적인 행동에 억눌린 그들이 집과 마을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서구권의 개발 NGO가 우물을 파주면서 그 유일한 낙이 사라진 것이었다.
- 이런 걸 보면, 우리가 돕는다고 하는 것이 돕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그들을 오해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선한 행위가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의 독특한 생활과 문화와 생각을 잠깐의 방문과 조사로 모두 아는 듯 보고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헛된 노동과 소비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삶을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 선한 마음으로 우물을 파는 수많은 NGO와 선교사들의 기를 꺾고 싶지 않다. 필요하다면 우물을 파주자. 그들은 그것을 요청하고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요청하는 이들은 아마도 대부분 남성일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도 듣자. 우물을 파도 잘 알고 파주자는 것이다.
- 그런데 제3세계에서 프로젝트 사역을 하다 보니 성격 급한 한국 사람과 한국교회의 발 빠른 요구에, 천천히 진행되어야 할 중요한 일들이 그냥 생각 없이 서둘러 진행되기도 한다. 당장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역만 가득하고, 그런 결과가 어느새 가장 중요한 것처럼 되어버리는 모습이다.
-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현지인이 직접 익혀야 할 대안기술이나 적정기술은 기다리는 과정이 없으면 절대로 빛을 볼 수 없다. 보기에만 좋은, 말만 근사한 단기 계획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야 뿌리내릴 수 있는 적정기술이 실제로 적용될 수 있도록 기다려주어야 한다.
- (지속하고 자립하게 만드는 선교) : 내가 탄자리아로 향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여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지속 가능한가’, 두 번째는 ‘자발적인 배가가 이루어지는가’, 세 번째는 ‘토착화(현지화)되었는가’다. 세 가지 다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일은 돈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선교사로서 내가 삶으로 무엇이든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영향력이 있다는 생각이 나를 늘 지배하고 있었다.
- 공사장에서 일당 받으며 벽돌을 나르는 친구, 감자를 사다가 값싼 기름에 튀겨 팔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친구, 그런 일거리도 없어 하루 종일 가만히 집 앞에 앉아 있는 친구…. 그런 친구들이 내 탄자니아 제자였고 할렐루야 태권도단 단원이었다.
- 그런데 단원의 리더 마잘리와가 어느 날 시내의 국제학교에서 ‘방과 후 교실’에서 태권도를 개설하는 일을 해냈다. 마잘리와가 그 학교에서 벌어드리는 수입이 그 학교의 정교사의 월급보다 많았으니 엄청난 일이었다. 마잘리와는 시내 8개가 넘는 국제학교에서 똑같이 ‘방과 후 태권도 교실’을 개설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마잘리와가 모든 학교를 독점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없는 단원들을 ‘방과 후 교실’에 한 명씩 배치한 것이었다. 소름 돋는 리더십이었다.
- 사실 마잘리와는 다른 선교사와 있을 때 사고를 많이 친 문제아이자 골칫거리였다. 마잘리와가 나를 찾아왔을 때, 그를 고용했던 선교사님이 그는 절대 받아서는 안 된다는 당부까지 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든지, 선교사인 우리마저 선입견을 갖고 품지 못하면 대체 누가 품겠는가.
- 나는 그 선교사님에게 정중하게, 내가 잘 가르치고 훈련시켜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마잘리와를 받아들였고, 열심히 하는 그를 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의 리더로 세웠다. 리더로 세우자 그의 내면에 잠재된 리더십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단원들이 자립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되었고, 덕분에 단원들이 자립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각 지역과 마을에서 태권도 교실을 열어 가르치고 있다. 나는 15명을 양성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들이 학교와 각 지역에서 가르치는 제자들은 그 뒤 2년 사이에 1,800명이 넘었다. 현지인은 현지인이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르다는 건 이론이 아닌 실제다.
- 이들이 어느 정도 자립을 이루고, 내가 자리를 비워도 태권도단이 알아서 잘 굴러가게 될 때쯤 단원들이 나를 찾아와 물었다. “왜 체육관을 건축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체육관 건축은 사실 흙바닥에서 수업할 때부터 꾸준히 주문해 왔던 것이다. “다른 선교사와 기관은 땅도 금방 사고, 교회, 유치원, 보건소, 학교까지 짓는데, 왜 사범님은 체육관 하나 짓지 못하느냐?”고 했다. 그 요청에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너희들이 필요하면 너희들이 지어” 나는 2년 넘게 같은 요청을 받았고,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나라고 왜 체육관을 짓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처음부터 내 기도 제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답한 것이다.
- 마잘리와에게 모든 리더십을 이양하고, 한국에서 1년간 쉬기 위해 그간의 사역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마잘리와가 따로 나를 찾아왔다. 휴대폰을 꺼내더니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그냥 허름한 벌판 풍경이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동안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번 돈으로 이 땅을 샀어요. 제가 이곳에 체육관 지을게요. 그래서 이제는 태권도를 가르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들이 배우러 오게 할게요.”
- 그날 밤, 한참을 울었다. “너희들이 필요하면 너희들이 지어”라고 말할 때마다 내 속마음이 힘들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어줄 수 있지만, 돈 있는 사람이나 돈 있는 국가가 뚝딱 지을 수도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 자금을 풀지 않고 이들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참 힘들다. 보이는 결과에 치중하고 평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개발의 첫 단계다.
- (누구를 위한 봉사와 선교인가?) : 우리가 그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군림하듯 하면서 쏟아붓는 자금이 당장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보일지 모른다. 그리고 가시적인 성과로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그런 지원이 오히려 그들의 자립을 막고 있다는 생각도 같이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마냥 주는 것에 익숙하지는 않은가? 마찬가지로, 받는 것에 길들여진 그들은 받는 것에 익숙해지다 못해 선수가 되고 있다.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 <거대한 역설>에서 맥 마이클은 개발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변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세상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개발 분야도 어떤 것이 좋은지 평가와 진단이 다 다르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개발, 선의를 품고 실천만 하면 달성되는 개발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 어떤 성격의 개발인지 반드시 짚어봐야 한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위한 선교인지, 어떤 성격의 선교인지를 짚어봐야 한다.
- (무분별한 원조의 폐해) :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다 보니 아프리카 생활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이 제3세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되리라 생각되면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 부유한 국가들에서 대규모 자금이 아프리카 대륙 각 정부로 체계적으로 이동하는데, 양허성 차관이나 증여 형태로 전달된다. 그와는 또 다르게 수많은 NGO를 통하거나 선교 자금 형태로도 돈이 흘러 들어간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에게 막대한 원조 자금을 풀고 있는 수원국(受援國)이 차관과 증여의 차이점을 얼마나 제대로 인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 더불어 수많은 NGO와 ‘그들을 위한 개발’(선교)이란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헌금을 쏟아붓고 있는 기독교는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역을 진행하고 있는가? 단순히, 일단 그들이 가난하니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렇게 단순한 원조를 진행하기에 바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도 빨리빨리.
- 최근 몇 십 년간 아프리카 원조 형태는 국제 사회의 이러한 시각, 즉 차관과 증여가 뚜렷하게 다르지 않다는 시각이 굳혀지는 것처럼 보인다. 잠비아 출신 여성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는 <죽은 원조>(알마)에서 차관과 증여를 합친 것이 원조의 형태라고 밝혔다. 그는 아프리카 발전을 가로막고 억제하거나 지체하게 한 것이 수십억 달러의 원조라고 주장했다.
- 선교도 마찬가지다. ‘개발’을 두고 나뉘는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떠나, 현장에서 살아가는 선교사로서 이 같은 원조의 형태를 볼 때, 나는 모요의 생각에 동의한다. 선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선교 헌금도 원조금과 다르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춘 개발과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 개발은 시간이 지나면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눈에 보이는 무분별한 개발로 발생하는 후유증과 부작용은 우리와 그들의 후손을 더욱 힘들게 할 것이다. 그들을 위한다는 개발이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개발이 그들의 미래를 파괴하고, 자립을 막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잘 포장된 껍데기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