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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떠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린 성인 여성이 됩니다. 화장을 하면서 눈치 볼 필요가 없고, 애인을 만들거나, 아르바이트, 투표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행동반경이 더 넓어질 것이고,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인터넷과 잡지를 통해 무수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보게 됩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링'에 대한 조언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여성을 설득하리라 생각합니다. 밤길은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주의도 마찬가지겠지요. 행동 반경이 넓어질수록, 여러분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다르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눈치챌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저는 언젠가 여자인 지인에게 낯선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실 때는 조심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 딴에는 현실적인 조언이었어요. 술에 취한 여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성적 폭력을 당하기 쉬우니까요. 그때 그 지인이 되물었습니다. 왜 남자들은 해도 되는 것을 여자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느냐고요. 낯선 사람과 어울릴 때 남자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을 여자는 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요. 그 말이 맞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폭행했을 때, 사회는 여성에게 조심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폭력 사건에서 비난받아야 하는 쪽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입니다. 그 사실은 터무니없이 쉽게 잊혀집니다. 조심하라는 말을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잠재적) 피해자에게 강조하는 일은,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의 행동반경을 좁힙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무엇이든 경험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주의 사항들에 대해 의문을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나 책, TV 드라마를 볼 때도 해당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접했던 일상의 풍경과 대중문화는 (앞으로 접할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남성의 시선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새 스마트폰 개통을 위해 통신사 대리점에 들어갈 때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으신가요? 가게 유리문에는 실물 크기의 여자 모델(대체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여자 아이돌)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그녀들은 때로 엉덩이를 옆으로 빼고 뒤를 돌아보거나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언제나 핫팬츠 차림입니다. 친구나 동료들과 맥주 한잔하러 술집에 가보면, 술집 앞에는 또 사람 크기의 여자 모델(역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여자 아이돌이나 배우) 입간판이 줄지어 있습니다. 제가 가는 은행에도 그녀들이 서 있습니다. 혹독할 정도의 포토샵으로 완벽하게 보정된 그녀들은 여기, 저기, 거기에 서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광고일까요? 핸드폰도, 술도, 은행도 특정 성별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타기팅하여 광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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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영화나 TV 드라마, 예능, 뉴스에서 남성과 여성이 나올 때 한번 의문을 던져보기를 바랍니다. 늘 남자가 앉는 자리에 왜 여성이 앉으면 안 될까 궁금해하길 바랍니다. 왜 안경 낀 여성 앵커는 없을까? 왜 환갑이 된 여성은 뉴스 진행을 하지 않을까? 왜 정치적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은 남자인데, (그건 그렇다 쳐도) 그 팀의 하나뿐인 여성 캐릭터는 성실하고 싹싹하게 주인공을 '보필'하는 역할일까? 왜 이십 대 초반 여자 배우나 가수는 삼십 대 후반이나 사십 대인 남자 코미디언들 중 누가 이상형인지, 그중 한 명하고 사귀어야 한다면 누구와 사귈지 선택해야 하는 걸까? 여기에 하나 더 있습니다. 저는 지금 '여'배우, '여'기자 같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배우가 남자 배우를 뜻하고 기자가 남자 기자를 뜻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지는 것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신 적 없나요? TV에 나온 정치인들 중 남자와 여자의 비율을 따져보세요. 세계 정상회담도 뉴스에 자주 나오죠? 여자는 어떤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나요? 성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나 더 보기 좋은 일을 나눠놓은 건 아닐까요? 앞 세대가 그어놓고 견고하게 만든 선 안에서 여러분의 진로와 삶을 결정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저를 비롯한 동시대의 여성들이 바꾸고자 하는 것들을 여러분도 함께하길 바랍니다. 원하는 직업, 원하는 삶을 성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상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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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때,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불편한 딱지나 낙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비난으로 사용할 때, 그 자리에서 대응하는 게 어렵다면 그냥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분위기를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고 싶다는, 비록 그것이 나의 존엄을 해치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나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저는 그런 당신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비난에 저항하고,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비난을 무시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여성으로서 살아가게 될 수많은 나날에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 됩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그 사실을 어떤 순간에라도 기억하세요.
여성으로서 살아갈 여러분이 나날이 도전과 성취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 이다혜 기자가 고등학생에게 한 강연을 토대로 작성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 더하는 말 Ⅰ'에서 발췌
여기서부터는 옮긴 이의 사족입니다‼️
1. 고등학생인 우동이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글이라 가져왔습니다.
2. 저작권을 이유로 전문을 발췌하지 않았습니다.
3. 여기서 필자, 혹은 발화자는 청자, 혹은 독자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 주세요.
4. 해당 전문은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다혜, 현암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5.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성인들은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비난으로 사용할 때 침묵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비난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데 함께 힘을 합칩시다.
첫댓글 글 좋다. 학생은 아니지만 읽어봐야겠네
나 이책삿엇는데 아짓 못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