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오장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보자. 오장의 의미는 2가지가 있었다. 육군의 오장과 해군에서 속칭으로서 사용된 오장이었다.
해군의 오장은 계급명이 아닌, 언젠가 상세하게 기재 하겠지만, 병과 하사관의 최상급자중에서 선발된 자가 위병오장이 된다. 위병오장의 최상급자가 선임위병오장이 된다.
게다가 해군병학교/해군기관학교에서는 오장과 오장보라고 하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오장이라 함은 각 분대에서 성적최우수자 1호 생도가 임명되었다. 그 직무는 분대에서 규율유지 하급생의 지도감독 같은 것 이었다. 오장보라고 함은 각 분대에서 차석의 성적우수자가 임명되어 오장의 직무를 보좌했다.
여담이지만 해군정도로 성적서열에 까다로운 학교도 없었다. 육군사관학교가 시험성적이나 서열을 일절 공표하지 않았다는 것과는 분명히 대조적이었다.
분대가 10개 있다고 할 경우 1위부터 10위까지 성적우수자가 제1 분대에서 제10분대까지의 오장을 맡았다. 그리고 11위의 사람이 제1분대 오장보가 되고 20위의 사람은 제10분대오장보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생도에게는 서열이 붙여져 그 자리가 정해졌다.
오장의 어원
육군에서 사용된 오장이라고 하는 계급명은 실로 오래되었다. 오장이라는 용어는 율령제의 시대의 군단에서 최저 클래스의 지휘관의 직명이었다.
발음되는 말 그대로, 5명의 병졸의 장이 오장이었다. 비슷한 직명으로 십장(什長)이라고 하는 직이 있었던 모양이다. 즉, 10명의 병졸의 장이었다.
게다가 장교 클래스의 무관직명으로서 군조(軍曹)와 군감(軍監)이라고 하는 명칭도 율령에 보인다.
그러나 고대율령제의 군단 같은 게 정말로 존재했던 것인가?
나는 역사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농민을 징병하여 일본전국에 군단을 조직하기 위해서 국가의 힘으로 나라시대(奈良時代)에 존재 했던 것인가?
닌토쿠 텐노 릉(仁徳天皇陵)을 보면, 고대국가권력의 상징을 뜻하는 거대함/무자비함/가렴주구도 실감된다. 나라(奈良)의 오사라기(大仏)를 보면 조작도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민초의 동원 같은 것은, 군단이 존재했다고 하는 고고학적인 증거는 있는 것일까?
만엽집의 동가에서는 방인(防人 : 도시에서 떨어진 변경의 땅을 지키는 사람)의 비극이 생겨난다. 관동의 인간을 규슈(九州)까지 데려올 정도였으니 어느 시대에도 국가권력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서운 힘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할 만하지 않는가?
横山光輝(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삼국지에는, ‘백인의 병졸을 지휘하는 오장’ 이라는 대사가 있다. 나는 고대 중국의 군사제도에는 무지하지만, 이 대사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고대 중국의 오장은 근대육군의 중대장에 필적하는 직인 것이다.
막부 말기, 각 한(藩/번)의 서양식 육군에서도 오장이라고 하는 직은 존재했던 모양이다. 난 자세히는 모른다.
故橋本昌樹氏의 명저 [‘田原坂(전원판)’ 中公文庫(중공문고) 폐간]에 따르면, 서남전쟁 때 西郷軍(서향군)은 10명으로 한 조의 반을 반들어, 押伍(おうご 압오 오-고)라는 하사관급의 자가 지휘했다고 한다. 이것도 오장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해상자위대에도, 오장이라고 하는 명칭은 남아있다. 부대나 함선에서, 최선임 해조 중에서 ‘선임경위오장’ ‘경위오장’ 이 선발되어 부대 안의 규율을 감독한다.
그리고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교육대 중의 연습원 중에서 최연령자를 ‘오장’이라는 속칭으로 부른다. 뭐, 단지 이름이 비슷한 친근한 호칭이다.
교육대・연습원의 오장은 이미 사바의 생활도 경험하고, 세간의 풍파도 경험한 후에, 자위대에 입대한 인생의 선배였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연습원 중에서 리더 격으로서 모두의 상담을 해주고 교관과의 절충역을 하는 기댈 수 있는 아저씨인 경우가 많다.
일본육군의 오장의 시작
메이지 육군에서는, 하사관의 최저 클래스로서 오장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메이지 6년 5월 15일 육군성 포고 제 156호가, 일본육군에서 최초로 계급명을 나타내는 무관표였다.
여기에 따르면 하사관(쇼와시대에 처음으로, 하사(下士)라고 부른다. 나중에 하사관이란 명칭으로 바뀐다.)의 계급은, 조장・군조・오장(曹長・軍曹・伍長 そうちょう・ぐんそう・ごちょう 소쵸・군소・고쵸)의 3가지로, 각각이 1등과 2등으로 나뉜다. 결국 하사(下士)의 계급은 6등급이었다. 현재에는 일등 이등의 구별은 급여상의 것으로서 구분인 단순한 서류상의 것으로서, 굳이 ヤマダ(야마다)二等曹長(이등병조) 혹은 ハシモト(하시모토)一等伍長(일등오장)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메이지 7년(1874년) 4월 14일, 太政官達(태정관달) 제 44호에 따르면, 군조는 일등군조로, 오장은 이등군조로, 계급명이 변경된다. 이유는 조사해보긴 했어도 잘 알 수 없었다.
메이지 32년(1899년) 10월 15일 칙령 제411호에 따르면, 일등군조는 군조로, 이등군조는 오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다.
판임관(判任官)이란? 전쟁 전의 관료조직
그럼, 오장은 무관으로서는 최저 클래스지만 판임관의 4등이다.
대일본제국(당시 헌법상의 정식국가명칭)의 관리는 위로는 친임관(親任官)에 이어서 고등관/주임관(判任官/奏任官), 판임관(判任官)으로 나뉘었다. 그 아래로는, 고원과 용인이었다.
여기서, 전쟁 전의 관료 제도를 개략적으로 보면.
어디까지나 개략적으로본다면, 대체로 위계와 훈장과 관직은 아래에 나온 것처럼 연동되어 있다. 즉, 여기에서의 교수는 제국대학의 교수이고, 고교라 함은 구제도의 국립고등학교를 뜻한다. 사립대학교수는 전쟁전의 사회에서의 지위는 사실상 낮아서 서훈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그 福沢諭吉(후쿠자와 유키치)조차도 무위무훈으로 생애를 마칠 정도였다.
지금의 고등학교는 수도 많고 수준도 낮지만, 옛날에는 고등소학교에도 매우 수준이 높았다. 전쟁 전에는 成城・武蔵・成蹊・甲南・学習院같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국립공립으로 1학년은 200정도로 작은 엘리트 집단이었다. 아직도 고등학교나 고등전문학교의 교관은 교수로 불리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의 대의사[代議士 : 국민의 선거로 선출되는 중의원(하원 의원)의 통칭]지만, 전쟁전의 그 지위는 ‘텐노(天皇)의 관리’와는 비교 할 수 없능 정도로 낮아, 어디까지나 ‘야(野)’였다. ‘야(野)’의 대의사에는 서훈(叙勲)이나 서위(叙位)의 은전(恩典)은 없이, 관(공무원)과 비교하면 지위가 낮았던 것이다.
서생절[書生節 : 메이지 6년(1873년)경에 시작된 유행가]에, ‘관(공무원)이라면 내각 총리대신, 야(野)라면 중의원 의장’ 이라고 하는 기우장대(気宇壮大)한 입신출세의 가사가 있지만, 전쟁 전의 사회에서의 3권의 장인 중의원 의장은 필부야인(匹夫野人)의 야(野)였던 것이다.
친임관 정4위・대훈위 대신・대장・제국대학총장등의 관직
親任官 正4位・大勲位 大臣・大将・帝国大学総長などの官職
고등관일등(칙임관일등)종4위・훈1등 차관・중장・대학교수・고교교장・부지사
高等官一等(勅任官一等)従4位・勲1等 次官・中将・大学教授・高校校長・府知事
고등관이등(칙임관이등)정5위・훈2등 국장・소장・대학교수・전문학교교장・지사
高等官二等(勅任官二等)正5位・勲2等 局長・少将・大学教授・専門学校校長・知事
고등관3등(주임관3등)종5위・훈3등 중앙관청과장・대좌・교수・현지사・
高等官3等(奏任官3等)従5位・勲3等 中央官庁課長・大佐・教授・県知事・
고등관4등(주임관4등)정6위・훈4등 과장보좌・중좌・조교수・현경찰부장
高等官4等(奏任官4等)正6位・勲4等 課長補佐・中佐・助教授・県警察部長
고등관5등(주임관5등)종6위・훈5등 소좌・강사・일본의사회회장・중학교장
高等官5等(奏任官5等)従6位・勲5等 少佐・講師・日本医師会会長・中学校長
고등관6등(주임관6등)정7위・훈6등 대위・조수・경찰서장・중학교장・중학교두
高等官6等(奏任官6等)正7位・勲6等 大尉・助手・警察署長・中学校長・中学教頭
고등관7등(주임관7등)종7위・ 중위・조수・경찰서장・소학교교장・역장
高等官7等(奏任官7等)従7位・ 中尉・助手・警察署長・小学校校長・駅長
고등관8등(주임관8등)정8위・ 소위・경찰분서장・소학교교장・지방역장
高等官8等(奏任官8等)正8位・ 少尉・警察分署長・小学校校長・地方駅長
고등관에서 제일 낮은 서훈은 훈 6등이다. 그러므로 전시가 아닌 한, 중위나 소위는 서훈이 없다. 단, 판임관에서부터 진급해서 올라온 경에는 당연히 훈 7등이나 훈 8등을 갖고있는 경우가 많았다.
판임관1등 종8위・훈7・8등 준사관・경부・소학교훈도・정촌역장조역등
判任官1等 従8位・勲7・8等 准士官・警部・小学校訓導・町村役場助役など
판임관2등 조장・ 경부・소학교훈도・정촌역장출납역등
判任官2等 曹長・ 警部・小学校訓導・町村役場出納役など
판임관3등 군조・경부보・소학교훈도・역조역등
判任官3等 軍曹・警部補・小学校訓導・駅助役など
판임관4등 오장・경부보・소학교훈도・역조역등
判任官4等 伍長・警部補・小学校訓導・駅助役など
당시의 관료조직은 완전한 피라미드형으로 말하자면 역인(役人) 중에서 판임관이상의 직에 있는 자는 일할정도였다. 즉, 역인의 구 할은 고원과 용인(雇員과 傭人)이었다.
경찰관에서는 순사와 순사부장은 판임관 대우이긴 했지만 고원이었다.
경부보는 판임관 4등에 해당했다. 경시는 고등관 팔등, 군대로 환산하면 소위에 상당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오장이라고 하는 직은 당당한 관리직으로서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벼웠다.
왜냐하면 비상식으로 급료가 낮고 관외거주가 인정되지 않은 채로 결혼도 할 수 없는 새장속의 새였던 것이다.
세계일평등(世界一平等)한 일본육군
일본육군은 징병식의 군대였다. 징병식군대는 국민개병을 대원칙으로 한다. 비록 화족(華族)의 사제(師弟)라고 하더라도, 거리의 불량배라고 하더라도, 이름도 쓸 수 없는 부랑자출신이라고 해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폐하의 군이 되면, 똑같이 황은(皇恩)을 받는 것이다.
사실 병대야쿠자(兵隊やくざ)의 저자인 有馬頼義氏(아리마 xxxx씨)는, 구 쿠루메(旧 久留米) 한(藩 번)의 주[ 旧 久留米藩主 ]의 친척으로서 농상무대신을 지낸 有馬頼寧(아리마 xxxx)백작의 아들이었다. 모친은 北白川宮家(북백천궁가) 출신이었다.
자신도 구제학습원고교(旧制学習院高校)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을 졸업했다.
말하자면, 금지옥엽의 몸인 신분으로서 전쟁전의 일본사회 최상급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군대에 들어가니 그딴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이, 有馬頼義氏는 소련/만주 국경 근처의 극한영하 30도의 최전방에서 8년간 근무하고 오장이 되지는 못한 채로 관동군 최고참의 만년상등병으로 끝났다고 한다. 정말이지,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동년병의 다수는 이미 군조에서 조장에 진급했다고 한다.
有馬(아리마) 상등병은 초년병때 여랑옥(女郎屋 : 사창가)을 출입하는 전우님(戦友殿)의 명령으로, 등루(登楼)자금(화대?) 을 마련하기 위해서 취사장에 심야진입해서 설탕 절도를 강요당했다고 한다. 소학교졸의 병졸을 위해서 백작가의 도련님(若殿様)이 설탕까지 동원해서 봉사했다고 한다. 아마도, 일본육군 이외에 그렇게까지 계급차를 초월한 사회는 있는 걸까?
일본육군 정도로 평등한 세계는 없을 것이다.
거기는, 학력도 집안도 재산도 지력과 체력도 일절 무가치하고, 단지 짬밥만이 지배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럼, 평등한 일본육군에는, 어떻게 하면 오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 방법은 2가지였다.
현역 오장에의 길
하나는 육군의 지원병이 되는 것이었다. 징병은 20세지만 지원병은 17세부터 채용되었다. 해군의 지원병은 엄청나게 좁은 문이 있어 보통 7~10배정도의 경쟁률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육군의 지원병에 관해서는 항공병정도의 꽃병과를 빼고는 보통 무경쟁에 가까워, 지원만 하면 거의 채용되었다고 한다. (거품경제시대의 자위대가 생각납니다.)
그럼 지원병의 경우 2년의 만기가 끝난 뒤 대부분이 예외 없이 재역(복무연장)을 지원하게 되었다. 재역의사가 인정되면 보병의 경우 육군보병학교에 입교를 명 받아, 그곳을 졸업하면 정식으로 육군보병오장으로 임관 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겨우 2x세 였다. 젊은 반장님(班長殿)의 탄생이었다. (육군의 경우 하사관은 모두가 반장님으로 불렸다. 단 군조가 되면 반장님으로 불리지 않는다. 군조님(曹長殿)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징병의 경우 예외 없이 일일천추(一日千秋)의 생각으로 만기제대를 희망했지만 그중에는 불행한 사람도 있어서 제대 후에 생활할 장소가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하사지원을 한다.
오장근무상등병은 무엇인가? 병장과는 다르다.
먼저, 오장근무 상등병은 평시에만 존재했던 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오장근무상등병이 전장으로 가게 된다면, 그 때는 왼팔의 금속 휘장을 떼고 그냥 상등병으로서 출정하게 되었다.
전시 편제 중에, 오장근무상등병의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장이 생길 때까지, 병의 등급구분은 3계급 이였다. 병장이 생기고 나서, 병의 등급구별은 4계급이 된다. 병장이 신설된 것은, 쇼와 15년(1940년) 9월 13일의 칙령 제 581호에 따라서다.
쇼와 12년부터 시작된 지나사변은 상황이 악화되어 고참병의 소집해제도 꿈 중의 꿈이 되었다. 원인을 끝까지 따져보자면 일본육군은 정말로 가난한 군대였기 때문에, 고참병이라고 해서 모두를 하사관에 임관시킨다면 파산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7년병 8년병이 되어도 상등병인 채로 병의 사기는 침체되었다. 말하자면 오장근무상등병으로 현역을 만기제대한 병이, 여비역이나 후비역 때 소집되었다고 한다. 전쟁터에 보내져도, 단순히 하사관 적임증서를 갖고 있는 상등병에 지나지 않는다.
군 당국에서는 그들을 동정하여, 병장이라는 계급을 신설하여 오장근무상등병과 같은 급료를 지급하게 되었다.(물론 새 발의 피 정도 승급되긴 했지만)
고참병 우대 제도라면 이걸로 좋았다. 그러나 군당국자는 설립목적의 비전을 다음에 두었다. 뭐랄까, 2년 재영 중에 이등병에서 병장으로 진급 가능도록 해 버렸다. (즉, 2년병이라도 병장이 된다.)
게다가 하사관 적임증서를 소유하고 있는 재향의 상등병은, 비록 소집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전원이 병장이 되고, 실제 오장근무를 맡고 있는 상등병도 입영에서 1년 반이 지나지 않아도 전원 병장으로 진급해 버렸다.
동시에 종래 사관후보생은 상등병에서 시작했던 것이 병장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병장은 신설된 채로 하사관의 부족은 해결되지 않았다.(급료를 짜게 주기위해 임관시키지 않았으니 당연한 거지만.)
여기서, 병장에게 하사관직무를 명하는 경우가 증가했다. 육군에서는 이것에 곤란해 해서 하사관근무병장이라는 직을 만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오장근무의 부활이었다.
허나 이전의 오장근무처럼 급료에 상승은 없이 어디까지나 급료는 병장의 지급액으로 했다. 그리고 하사관이 충분해지면 하사관근무에서 빠져 일반병장이 되는 유동적인 인사운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사관근무병장은 편제상의 규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평시에도 전시에도 이것을 명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장근무상등병을 일영사전으로 찾아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허나, 우연히도 Lance Corporal을 영일사전으로 찾아봤더니
1. 영국군의 오장근무상등병
2. 미 해병대의 병장
이 나오더군요. 오장근무 상등병 제도 또한 영국에서 건너온 것인 모양입니다.
추측해 보건데 보건대, 영국에서는 엄격한 신분제로 병/하사관/사관 의 신분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미숙련 하사나 소위에 휘둘려 부대가 위험해지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하위 신분의 최상급자가 상위 신분의 권한을 대행하는 제도가 아예 계급이름까지 정착된 경우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영국군이 타국군대와 아주 상이한 점으로는 공군의 계급이 이름이 그러합니다. 미국/독일 등에서는 공군 장교의 계급이름이 육군의 그것과 대동소이한데 반해서 영국의 공군의 장교 계급이름은 해군과 거의 흡사합니다. 이것도 언젠가 함 다뤄봐야 겠군요. 아마도 섬나라기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정리해보면, 일본육군의 오장근무상등병은 평시 편제로서 계급장은 상등병과 같고 팔에 금속 휘장을 착용합니다.
병장은 쇼와 15년(1940년) 9월 13일에 신설된 계급입니다. 오장근무병장은 계급이름이 아니라 단순히 보직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 또 다르군요.
구 일본의 병역제도는 현역에서 제대하면 여비역이되고 그 후에 후비역이 되고 후비역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퇴역했다고 나와있네요.
福沢諭吉(후쿠자와 유키치)는 1만엔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메이지 새대의 문인으로서 정한론을 주장한 사람이지요. 김옥균(김좌진 장군의 아버지이자 김두한의 할아버지)이 갑신정변(1884)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의 식객이 됩니다.
김옥균이 김좌진 장군의 아버지 라구요? 무슨 이런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김장군은 안동의 명문가출신인 김형규의 둘째 아들 입니다. 김옥균과 본관은 같지만,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인데요. --;; 김옥균이 죽기 전까지 10여년을 떠도는데, 후쿠자와 유키치와도 인연을 맺었었군요.
과거의 일본군이 그렇게 평등했단 말입니까...백작가의 도련님이 야밤에 좀도둑질을 강요당할 정도로? 자세한 정보가 없으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도련님...몰락한 화족 출신 아닌가요? 메이지 유신 때의 그 폐번치현에 격렬히 저항하다가 - 화족들의 반란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단 몇번의 전투만으로 간단히 진압된 -
역도로 낙인찍혀 거리로 내몰린 귀족가문 후예가 아닌가 싶네요. 사실 저 즈음에 몰락한 귀족가의 딸들이 돈에 팔려 평민 신분의 졸부들에게 시집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뭐 남자들이라고 크게 달랐을것 같지 않습니다. 거기다 유신정부에 반기를 들은 화족가문이라면....재산 몰수 당하고 취직할 데도 없고...
첫댓글 가입인사 대신에 일본 페이지 번역해두었던 글을 올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한국 해병대는 오장이라는말을 사용합니다. 병계급의 대표를 오장이라고 하죠 일병오장,상병오장 하는식으로예전에 해병대에 업무차 갔다가 그쪽 애들 말듣고 여기가 일본군인가하는 야릇한 생각이 들었던기억이나는군요
김옥균이 김좌진 장군의 아버지 라구요? 무슨 이런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김장군은 안동의 명문가출신인 김형규의 둘째 아들 입니다. 김옥균과 본관은 같지만,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인데요. --;; 김옥균이 죽기 전까지 10여년을 떠도는데, 후쿠자와 유키치와도 인연을 맺었었군요.
과거의 일본군이 그렇게 평등했단 말입니까...백작가의 도련님이 야밤에 좀도둑질을 강요당할 정도로? 자세한 정보가 없으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도련님...몰락한 화족 출신 아닌가요? 메이지 유신 때의 그 폐번치현에 격렬히 저항하다가 - 화족들의 반란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단 몇번의 전투만으로 간단히 진압된 -
역도로 낙인찍혀 거리로 내몰린 귀족가문 후예가 아닌가 싶네요. 사실 저 즈음에 몰락한 귀족가의 딸들이 돈에 팔려 평민 신분의 졸부들에게 시집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뭐 남자들이라고 크게 달랐을것 같지 않습니다. 거기다 유신정부에 반기를 들은 화족가문이라면....재산 몰수 당하고 취직할 데도 없고...
정부에서는 사민평등의 사례로 대대적으로 마구 굴렸을테니, 군대생활 하면서 참 암담했을 것 같군요. --;;
움움, 야인시대에서 김좌진 장군의 아버지가 김옥균이라고 나오던데요. 야인시대에서 고증을 잘못한 걸려나요?
움움, 야인시대라는 드라마 자체가 이미 고증과는 거리가 멀군요. 역시 정치가는 믿을 게 못 되는거 같습니다.